|
교토 14 - 도요쿠니 진자와 호코지, 이총을 보고 밤길 걸으며 돈카쓰 유래를 생각하다!
2019년 4월 9일 우지(宇治) 에서 뵤도인 절과 윤동주 시비 및 겐지모노가타리 를 보고
후시미에 사케의 명가 겟게이칸 (月桂冠 월계관) 과 사카모토 료마의 데라다야 를
보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후시미 모모야마성 伏見桃山城 을 거쳐 후시미
이나리역에 내려서 붉은 도리이 후시미 이나리진자 (稲荷神社 도하신사) 를 구경합니다.
후시미 이나리역 에서 전철을 타고는 3정거장째인 교토 케이한 전철
시치조역 에 내려 임진왜란 때 전사한 12만 조선과
명군 영령 들의 코와 귀 를 묻은 귀무덤耳塚 (이총) 에 참배 합니다.
그러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를 모시는 도요쿠니 진자 豊國神社(풍국신사) 를 보고는
히데요시 집안의 절인 호코지 万廣寺(만광사) 를 구경하는데 종에 적힌 명문에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 이란 부분이 있으니 큰 화가 닥치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 센히메 를 시집보냈던 오사카성에 웅거한 사위 히데요리
를 죽여서 "도요토미 가를 멸문" 시키기 위해 트집을 잡았던 이른바 '국가안강의
종' 이니.... 1614년 호코지(方廣寺) 종명(鐘銘)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전국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해 낭인들까지 10만이 지키는 오사카성을 공격 하게 됩니다.
사나다 노부시게 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패하니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자결한 후에
측실과 사이에서 태어난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 는 도주했으나 도쿠가와군에 발각
되어 살해되었고, 딸 나아히메 역시 처형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본처 이자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의 양녀가 되어 불문에 귀의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진뒤 1645년에 병사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쪽에 가담한 장군과 무사들은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대부분 영지나
주인을 잃고 낭인이된 자 들이니 살기 위해서 모였는데, 도쿠가와 쪽에도 이런
낭인들이 있었으니 히데요시의 처 네네의 조카 중에 차남 기노시타 도시후사 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은후 형과 영지를 다투다가 몰수 당하고 료닌(낭인) 이 되었습니다.
오사카 전투가 벌어지자 료닌(낭인) 상태이던 차남 도시후사 는 도쿠가와군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고는 아버지의 옛 영지로 아사노 나가아키라에게 주어졌던 빗추
아시모리번 2만 5천석 영지를 다시 받고 다이묘 로 복귀했으니 전쟁에서 이기면
다이묘가 되고 패하면 본인은 죽고 가문은 몰락 하니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 입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 호텔로 돌아 가는데 어느 여행기에 보니 여기 도요쿠니 신사 맞은편에
간순도 히가시(甘春堂東) 점이 있으니 이곳에서는 예약만 하면 화과자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는데 한 사람당 2000엔 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지라 포기 합니다.
걸어서 교토 박물관을 지나 교토 케이한 전철 시치조역 京阪電鉄 七条駅 에
도착 해서는 교토를 동서로 나누는 가모강에 놓인 다리 를 건너
돌아오다가 이런??? 아직 저녁은 커녕 점심 조차 먹지 못햇음을 깨닫습니다!
해서 사람들이 줄을 선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문 앞에 기계에서 주문을 해야 하는가
본데 어찌어찌 해서 주문을 하고 돈을 넣으니 종업원이 도와주러 오다가 우리가
기계에서 출력한 종이를 회수해 가기로... 우린 식당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그런데 7분이 넘도록 우리 음식이 안나오기로 이상해서 살펴 보니.... 손님이 길게 줄을
선지라 주문을 하고는 계속 줄 뒤에 서 있으면 먼저 주문한 사람 부터 음식이
나오니 7~8분은 기다려 음식을 받은 다음 비로소 실내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 것 이네요?
그럼 우린 본의 아니게 새치기를 한 셈인데.... 그래도 우리가 주문한 불고기와
돈가스 음식은 순서에 맞는 시간에 나온지라 점심겸 저녁으로 한그릇을
비우다 보니 문득 요나구니 스스무 씨가 D 일보 ‘오 나의 키친’ 이라는
칼럼에 올린..... “커틀릿의 바삭한 변주곡 ‘돈가스’” 라는 글이 생각 납니다.
"내가 서울 중심에 사는 이유이기도 한데, 계절을 느끼기 위해 남산 을 자주 오른다.
도심을 지나 언덕에는 돈가스 전문 식당 들이 즐비하다. 식당 주인들은 택시
운전사, 데이트 중인 커플, 아이가 딸린 가족들을 서로 모셔가려 주차 안내에 바쁘다."
"돼지고기를 저민 뒤 튀김옷 을 입혀 튀겨낸 요리인 ‘돈카쓰’는 프랑스어 ‘코틀레트
(cotelette)’에서 이름을 따 왔다. 원래는 송아지, 양, 돼지의 갈비 와 함께
붙은 고기에 빵가루를 입히고 버터에 바삭하게 지져낸 다음 오븐에 익혀 완성 한다."
"프랑스의 코르동블뢰 는 고기 안에 치즈를 넣어 지져낸 것이며 이탈리아의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세, 오스트리아의 송아지 슈니첼 도 비슷한 요리다. 영어 커틀릿
의 발음이 힘든 일본인들은‘가쓰레쓰(katsuretsu)’로 부르다가.... 좀 더
쉽게‘가쓰’로 짧아졌다. 돼지고기를 사용하면서 ‘돈(豚)’과 함께 돈카쓰 가 됐다."
"처음 일본에서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커틀릿 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손님은 기름진 버터에 구운 뻑뻑한 고기 가 익숙지 않았고
요리사는 조리 시간이 오래 걸려 바쁜 손님들의 불평 을 들어야만 했다."
"‘렝가테이-벽돌집’이라는 양식당을 운영하던 기다 모토지로 는 1895년 일본들이 좋아
하는 튀김 방식으로 조리 방식을 바꾸며 문제를 해결했다. 곁들여지는 채소도 볶음
채소에서 채 썬 양배추 샐러드로 바꿨다. 기름기도 줄이고 소화에 도움이 되는 간편한
방식으로 바꾸자 손님이 몰렸다. 긴자에 있는 그의 식당은 유명해졌고 지금도 운영 중이다"
"1868년 일본이 개항한 뒤에 가장 놀랐던 것은 서양인의 큰 체구 였다. 서양인과
일본인이 마치 어른과 아이 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일본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서양인 처럼 큰 체구를 갖기 위해서는 채식만으로는
아무래도 힘들다는 결론 을 내렸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문명 개화 가 시작됐다."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문명개화' 를 의미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
시작되자 영양 공급의 주재료인 소고기는 군대로 보내졌고
일반인들은 고가(高價)의 소고기 대신 값싼 돼지고기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1929년 궁중 요리사였던 시마다 신지로 는 ‘폰치켄’이라는 식당을 열고는 돈카쓰 를
선보였다. 3cm 정도의 두꺼운 고기를 빵가루를 입혀 튀겨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완성했다. 또 이를 먹기 좋게 조각낸 뒤 젓가락을 사용하게 하고
밥과 된장국 도 곁들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오늘날의 돈카쓰 가 그렇게 탄생했다."
" 내 기억속의 돈카쓰는 ‘가미카쓰’ 라 불리는 종이 돈카쓰 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비싸고
두꺼운 고기도 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얇은 종잇장 같은 돼지고기 가 두껍게 입힌
빵가루와 튀겨져 나오면 소스와 함께 접시 바닥까지 청소하듯 해치웠던 기억이 있다.
오래된 저 기억이 떠오를때면 남산의 산책로에서 얼굴만큼 큰 돈카쓰를 마주하곤 한다 "
돈카쓰 말고도 일본인이 외국 음식을 모방해 만든건 "프랑스의 크로케트 (croquette) 라
불리는 요리를 1927년 도쿄 긴자‘조시야(Choushiya)’정육점 아베 세이로쿠
는... 팔고 남은 고기나 변색된 자투리 고기 를 다져 감자와 섞고 기름덩이를
끓여 만든게 고로케 인데....... 그외에 카레라이스, 단팥빵 , 라멘, 짬뽕 등 입니다?
계속해서 고조 거리 五条通 를 걸어서 네거리에서 길을 건너 가라스마 거리 烏丸通
를 올라 가는데.... 이윽고 우리 호텔인 도요코인 호텔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는 티비를 켜니 텔레비전 에서 마침 한국 연속극 이 나오기로 잘 봅니다.
한국 드라마 를 보다 보니.... 문득 D 일보에‘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라는 칼럼에 나오는 “최덕신의 민간인 학살과 평양의 환대”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지난 주말 1박 2일 일정으로 경남 함양 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안내원과 1951년에 일어난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2월 8∼11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는 지리산 인근 20여개
산골 마을에서 1,400여 명을 학살 했다. 군인들은 부락들을 돌며
총과 수류탄, 박격포 등을 이용해서는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죽였다."
"산청 함양의 사망자 705명 중 600여 명이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 였다. 거창에선 719명
중 15세 미만 어린이만 359명 에 달했다. 6·25전쟁 당시 저지른 국군의 가장 끔찍한
범죄 가운데 하나였다. 만행을 주도한 11사단장이 바로 1986년 4월 월북한 최덕신 이다."
"1,400여명을 학살하고도 11사단 지휘관들은 잘나갔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자 최덕신은
보직 해임됐지만 곧 복직돼 1군단장과 외무부 장관, 주서독 대사 등을 지냈다. 나중엔
‘사람 대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를 교리로 내세우는 천도교 교령 자리에 까지 올랐다."
"천도교 교령 최덕신 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1976년 아내
류미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월북 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오익경
9연대장은 1년 뒤 복직해 대령으로 예편 했고, 10년형을 선고 받은 한동석
3대대장은 1년 뒤 바로 특사로 풀려나 군에 복귀 했다가 강릉, 원주시장 까지 지냈다."
"6·25전쟁 이후에 월북한 남한 인사 중에서 최고위급으로 꼽히는 최덕신 은 북한에서
김일성 훈장 등 각종 훈장을 받으며 애국열사로 추앙 받았다. 또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조선종교인협회 회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북한 최고의 영화‘민족과 운명’1∼4부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덕신 사후
3년뒤 만들어진 영화에서 학살 장면은 큰 비중 을 차지하니 영화속에서 최덕신은 학살
장소를 찾아가“빨갱이를 죽이라고 했지 누가 양민을 죽이라고 했느냐”며 분노하거나
평양에 가기 전“단테의 기름 가마면 내 죄가 세척될수 있을까” 번민하는 장면도 나온다."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 조사를 보면 최덕신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만행을 저지른 최덕신 마저 김일성이 용서해 준다는 설정을 하다 보니 북한은
잔인한 범죄자에 대한 성토 기회마저 포기한 것이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학살
사건의 주범 최덕신이 북한에 가서 미화되고 애국열사로 추앙받는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최근 최덕신의 둘째 아들 최인국 씨가 몰래 월북한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인국 씨는 6일 평양에 도착 했으며, 앞으로 북한에서 영주할 계획이다. 또 어머니
류미영 에 이어 노동당의 관변 야당인 천도교 청우당의 위원장 을 맡을 것으로 관측 된다."
"일부 한국 언론은 최인국 씨가 남한에서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1,400여명의 민간인 과
후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삶은 업보 였을수 있다. 이제 평양에서 부친과 모친의
뒤를 이어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직을 이어 받아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남쪽에서 72년을 살았던 최인국 씨가 북한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부인과 자식들은 서울에 두고 갔을 것이다. 가족은 서울에서 자유를 맛보며 살게 하고,
자신은 자식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평양에서 부모가 남긴‘적금’을 타먹으며 여생
을 보내겠다는 계산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계산이 들어맞을지는 지켜봐야 안다"
"한편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최고위급 인물인 황장엽의 집안이 8촌까지 멸족된 것을
다 아는 북한 사람들에게 북으로 망명한 남쪽 최고위급 인물 최덕신의
아들 이... 아버지의 월북 이후에도 서울에서 풍채 좋은 모습으로 70년
넘게 살다가 평양으로 옮겨와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큰 충격 이 될 것 같다."
내일은 교토를 떠나 비와 호숫가 동쪽 히가시 오우미시 의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 百濟寺町)
에 있는 유서깊은 사찰 “햐쿠사이지 (百濟寺 백제사)” 와 사케 양조장 오카무라 혼케
(岡村本家) 를 보고 기차를 타고 시즈오카현의 가케가와 掛川(쾌천) 까지 갈 예정 입니다!
첫댓글 원래 돈가쓰는 1929년 궁중 요리사였던 시마다 신지로가 ‘폰치켄’이라는 식당을 열고는 돈카쓰 를 선보엿군요.
3cm 정도의 두꺼운 고기를 빵가루를 입혀 튀겨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완성되어서 밥과 곁들어서 먹엇죠
예전에는 돼지고기가 귀할때는 튀김가루만 두꼅고 고기는 얇앗는데
지금은 반대가 되엇더군요. 고기가 두겨워서 먹기가 힘들정도입니다.
일본인들이 만든 음식이 참 많지요?
중국과 서양등 남의나라 음식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새로 만드는 재주는 참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