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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 탐방과 유래
서울을 보려면 탄생 배경을 보아야 한다. 처음 나라 이름을 결정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화평하고 안녕을 기본으로 하는 화녕이라는 이름이 지배적이었으나 조선과 화녕 중 고대에 조선이라는 선대의 의미가 적합하다고 중국측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이란 나라가 탄생하게된다. (태조2년3.9.) 2년이 흐르도록 나라이름도 정하지 못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나라 이름은 일단락이 된다. 그리고 나서 천도 계획을 세워 이연을 보내 한양의 궁실자리를 검토하게 한다. 옮기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개성의 호수 조사를 한다.(3년8.1.) 8월 8일 에는 자신이 본격적으로 한양땅에 유숙하며 무악을 들러본다.(이때까지도 한양이라는 지명이 없었는지 무악으로 적고 있다.) 또한 고려초기에도 천도하려다 실패한 지점과 노전대통령이 북쪽으로 가면서 밟았던 도라산 지점을 둘러본다. 처음에는 계룡산으로 정하려고 당시 무학대사와 함께 둘러보고 그곳에다 중심을 두었었다. 태조3년 8월11일 최융 윤신달 유한우등이 한양보다 부소(계룡산부근)가 천도지로는 첫째라 하므로, 오늘날 세종시 이야기처럼 시끄러웠나보다. 8월13일 무학대사와 여러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여 무악으로 결정된다.
마침내 1394년(태조 3년 10월 25일)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서울이 탄생하게되는 계기가된다. 이때에 등장하는 한양과 관련된 큰 인물들의 면목을 들여다보자. 나이 순으로 보기로하자.권중화(1322-1408)고려에 이은 조선에서도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것은 꽤나 실리주의 엿던 것 같다. 지리 복서 의서 특히 지금의 수의과에 정통했던 이학계통의 거두 였던것 같다. 정도전과 협력 종묘 사직 궁궐 도로 시장과 같은 도시 기반계회을 세웠다.
박자초(무학대사 1327-1405) 도성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조선 개국후 왕사로 있으면서 조언을하였다. 이성계(1335-1408) 정도전(1342-1398)
위에서 본 바와같이 이들의 나이 차이로 볼때 열살 미만의 사이로 서로 이해하며 한양이 탄생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손자병법의 기본이 도천지장법중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첫 번째가 지형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주산(왕 백악산 북악산)이 중심이되어 좌 청룡(좌의정 타락산 락산)과 우 백호(우의정 인왕산)을 시립 시켜놓고 안채(탁자 남산 목멱산)를 가운데 두고 중신인 영의정(주작 관악산)과 대좌하고 있는 형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뜻이 있었다. 배산임수의 지형이 조선 성곽을 이해하는 기본이다. 외산으로는 북한산(현무) 아차산(좌청룡 악계산 애깨산 아저산 ) 덕양산(우백호) 관악산(주작)으로 겹겹이 사방신이 왕을 호위 보호하는 형상이니 천하의 명당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면 오덕만 선생님따라 답사 코스로 들어가 보자.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오후 1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늦게까지 몇분이 못오시는 것을 볼때 이번 답사는 힘든 코스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면서 숙정문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청와대 뒷산 정상길은 굽이굽이 아름다움으로 가을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와룡공원까지 오르막길로 몸은 풀었으나 앞으로 여정이 부담되어 숙정문 답사를 망설이는 눈친데 가자고 제안한 것이 두분 솔비님과 악처님 그리고 두 선생님께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이 글을 올려야 그분들 노고에 보답하는 길 일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태조4년 신 도읍을 완성하고 일년후 도성 축조에 돌입하게된다. 바로 우리가 그들의 피와 눈물이 고인 장소로 가는 것이다. 태조5년(1396) 정월부터 팔도에서 약12만 명을 동원하여 평지성은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축조하면서 희생된 분들이 872명이나 된다는 것은 석성이 아니라 돌무덤을 보는듯한 감회를 감출 수 없다. 그후 세종때 토성은 석성으로 성문을 완성하는 수축공사를 진행했고 숙종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을 동원하여 수축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랬다 숙정문까지 오르면서 여기 저기서 태조때 쌓은 성벽과 세종때와 숙종때 쌓은 부분들이 확연히 다르게 보이므로 석성 쌓는 변천사를 보는듯하다. 왕의 엄숙한 의지가 담긴 귀한 신분의 문을 뵈옵고자 숙정문으로 향하는 것이다. 태조 5년 성곽을 쌓을 때에는 약간 서쪽으로 내려와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 성곽을 보수 하면서 방어적인 측면을 고려해 옮겨 졌으리라 짐작된다.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자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지 않았다. 가뭄이 심할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두어 음양이 교차하여 비가온다는 음양사상과 기우제를 지냄으로 비가 온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그 당시도 항상 물부족으로 고통이 컷나보다. 그래서 소의문과 창의문이 탄생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숙정문을 열어두면 성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고 정월 대보름전에 이곳에서 여인들이 세 번을 오르내리면 그해 재액을 면할수 있다하여 당시 삼재가 들은 여인들의 행차가 잦았으리라. 그래서 원래는 숙청문이었으나 숙정문으로 바뀐 사연도 알듯하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소격서와 기우제를 지내는 숙정문이 가까이 있는 내력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처럼 숙정문은 귀하게 태어난 왕의 신분답게 홍예의 석축이 다른 성문과 달리 돌로만 이루어진 신성한 뜻을 내포하고 위엄이 돋보이는 문루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지 지금도 군부대가 자리잡고 통제 하므로 신분증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귀하신 신분 대접을 받고 있다. 말 바위에서 숨을 고르고 와룡공원으로 되집어 내려왔다. 다른성은 옥개석이 기와나 전돌로 이었으나 이곳 서울 성곽은 옥개석으로 돌로만 덮여있다. 서울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 모두8개의 문이있다. 유교의 덕목을 교훈으로하는 인의 예지사상을 현판에 넣어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대문은 북을 의미하는 숙청문 성문은 홍예 위에 문루를 얹은 모습이다. 4소문으로는 광희문(남소문) 혜화문(동소문) 창의문(북소문) 소의문(서소문)이 있으며 물림쌓기 공법으로 기울기는77도정도 높이는 4.5-5m. 태조때는 메주만 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음 세종때는 장방형을 기본으로 사이사이 잔돌을 충진하여 돌의 안정감을 주었다. 숙종때는 2자크기로 규격화하여 장정 네명이 들 수 있는 크기로 튼튼하게 쌓았다. 성벽의 상단 여장(성가퀴)은 보호를 위해 옥개석(눈섭 돌)을 올렸다. 혜화문 쪽으로 내려 오면서 성벽이 학교 담장이나 건물담 밑에 깔려 숨죽이고 있는 곳도 있어 역사인식과 문화척도를 보여주고있어 안타깝다. 이런 모습을 뒤로한채 혜화문으로 내려왔다.
혜화문
4소문 중 동소문에 해당하는 혜화문은 지금의 혜화동 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금 복원된 문은 서북쪽으로 30m 옮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이라고 하였다가 1483년(성종4년)에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6년)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10년) 문루를 새로 만든 후 한말까지 전해 내려왔다. 함경도등 북방과 직결된 관문 이었으며 여진의 사신은 반드시 혜화문을 통해서만 서울로 들어올수 있었다. 당시 북문은 통행이 통제되었으므로 양주 포천으로 통하는 출입구 구실을 함.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있으며 이것은 성문 밖 돈암동 일대에 새때의 피해를 막기위해 조류의 왕격인 봉황을 그려 넣은것이라 한다. 1928년 문루가 퇴락 하였으므로 헐어버리고 홍예만 남았었는데 일제는 전차길을 만들면서 이 마저도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수 없도록 만들었다. 1975년에서 1980년까지 완공된 성곽의 일부로서 1992년에 복원 하였다. 내려오다가 로타리에서 낙산을 향해 오르는 길은 거의 상가 건물과 아파트와 건물들이 자리잡고 막아서있다. 건물 사이를 따라 낙산공원 나무계단을통해 오를수 있었다.
낙산공원
오랜시간 방치되어 오다가 2002년 공원으로 복원되면서 역사성이 회복된다. 낙산공원이 있는 동숭동과 근처 충신동 일대는 온통 배추밭 이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효종(당시 봉림대군)은 고국에서 데리고 온 나인 홍덕이 담가주는 김치로 타국 생활의 고난을 이겨냈는데, 훗날 임금으로 등극한 효종은 청나라 심양에서 맛 보았던 김치 맛을 잊지못해 홍덕에게 낙산중턱에다 채소밭을 주어 김치를 담가 궁으로 보내게 했고, 훗날 사람들이 이 밭을 “홍덕이 밭”이라 불렀으며, 김치 역사가 400년을 넘고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김치에 길들여져 오므로 우리는 김치민족이 되었나보다. 언덕길따라 도성과 건물이 헝클어진 길을따라 이화여대 부속병원 자리로 내려오니 건물은 헐려있고 역사성이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 온다니 믿기지 않음은 우리들의 현실인 것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병원자리옆 성벽에는 성벽 축조 당시를 말하듯 축조관할지역을 기록한 내용이 세월의 아품을 대변하고 있다. 앞쪽에는 멀리 이성계가 묻혀있는 동구릉을 그리워하며 흥인지문이 동구릉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흥인지문
보물1호(1963.1.21지정) 종로구 종로6-69
흔히 동대문이라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태조7년(1398)에 완성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었고 지금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이름은 흥인문 이었으나 인은 동에 해당하므로 흥인은 동쪽을 이른다는 말로 동쪽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일대는 도성 안에서 가장 지대가 낮고 약하며 물기가 많은 지역 이어서 땅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서 고종때 다시 지으면서 “지”자를 넣어주었다 한다. 당시 태조때 가장 축조에 어려움이 많아서 축조기간에 맞추지 못하는 어려움을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유일하게도 성문 밖 옹성이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져 방어력을 높였으나 임진왜란때 왜적이 제일 먼저 입성하는 수모를 격었다. 우리는 많은 인파속에 묻혀 청계천을 건너 동대문 운동장 자리로 향했다.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
우선 2009.10.27. 개장을 보여 시민들에게 얼굴을 내 밀었다.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으로 명명되었으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함께 미래를 펼쳐갈 양 축으로서 역사와 함께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것 같다. 이곳은 서울 성곽과 이간수 문 동대문 유구 전시장 동대문 역사관 동대문 운동장 기념관 디자인 갤러리 이벤트 홀등으로 진해중인 진행형의 공간이다.
이간수 문
서울 성곽과 물길이 만나는 장소로 청계천에 오간수 문이 있다면 그 남쪽 100여m지점 운동장 축구장에 이 간수문이 우렁찬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날 줄이야 마치 거대한 피라밑의 일부가 노출된 느낌은 나만의 환희였을까? 운동장에서 이렇게 소중한 보물이 선 뵐 날만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처음 발견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경이 스럽고 감탄 스럽다. 어째든 이 수문을 통해서 청계천과 만나는 물길 이었으리라. 265m 정도 발굴 결과가 성 안쪽에서 성 밖으로 물을 빼기위한 홍예의 이 간수문과 성벽 유구등과 유물이 공개 되었다.
동대문 유구 전시장
축구장 부분의 건물지 6기 집수지 2기 우물지 3기등 유구와 야구장 부분의 건물지 4기 우물지 1기 아궁이 시설과 정교하게 멋을 부린 기와 보도등 당시의 멋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으며 성곽과 치를 복원하였으며 이곳은 군 시설로 당시 성문밖을 지키던 관가였던 것으로 추측되다.
동대문 역사관
조선 전 후기 및 일제시대 까지 다양한 유물을 볼수 있으며 3D로 제작 과학과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동대문 운동장 기념관
체육 근 현대사 80년 동안의 스포츠 공간을 이해 할수 있는 추억의 장소다.
앞으로 주위의 건물이 완성 되었을 때 이 모습들이 초라해 보일까 걱정하며 공워이란 문구가 걸리긴 한다. 미쳐 못다본 공간이 있으리라 여기며 이만큼이라도 볼수있게 배려하신 오덕만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2009.10.28.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선생님의 글에 많은 공부가 됩니다 ^^ 감사합니다.
쓰느라고 쓰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 정이 넘치는 글 항상 고맙습니다. 그리고 유니폼은 유비님의 의견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곰마리 샘의 일필휘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바쁘신 중에도 보셨다니 고맙습니다. 우리들 중에 가장 바쁘신 선생님 아니십니까? 유비님의 노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