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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넝숴 不能設 김연수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비 이야기라면 어떨까? 가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빗줄기 말이지. 전사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걸게 만드는 빗줄기. 그러니까 1950년 10월 19일, 변경의 하늘로 하루 종일 구름이 몰려들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네. 행군을 앞두고 군장 검사를 모두 끝마친 병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긴장된 침묵이 어느새 고자누룩해지고 차가운 가을비가 병사들의 배낭과 털모자로 늘쩡늘쩡 스며들었네. 빗방울이 아니었더라도 병사들의 눈빛이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졌을 그런 날이었네. 겁이 나서 그랬느냐고? 쥔뿌? 君不見.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전사가 겁을 내다니.
“전쟁에서 지고이기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 / 수치스러운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남자다.“
출전을 앞둔 전사의 심장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그런 시가 흘러나온단 말이지. 노전사 老戰士들은 알지. 인간의 마음이란 계집과 같은 것이란 걸. 호두알처럼 내 손아귀에 꽉 잡혔는가 싶으면 어느새 수리가 되어 푸른 하늘의 자유를 만끽하지. 평생 몸에서 화약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던 노전사에게도 매번 전쟁은 새로운 것, 무서울 정도로 요염해서 온 마음과 온몸이 떨려오는 것. 우리는 국민당 놈들을 쫓아 해남도 海南島까지 밀고 내려갔던 40군이었다네. 해남도를 완전히 해방시키고 난 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지. 들판을 침상 삼아 눕고 천궁을 이불 삼아 덮고 자본 남자라면 그 아쉬움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잘 알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온몸과 온 마음이 떨리는 일은 없어질 테니까. 배포는 배포, 눈물은 눈물, 진짜 사내는 그 두 가지를 알지. 그런 우리가 겁이 나서 떨어지는 한줄기 빗방울에 떨어댔다고 말한다면 그건 모독이 아닐 수 없어. 무서울 정도로 요영하기 때문에, 거부하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소년처럼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야. 알겠는가? 몸은 그럴 때 떨리는 거야. 그렇게 병사들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빗줄기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아슴푸레해질 무렵, 마침내 출정의 명령은 떨어졌고 우리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기 시작했어. 그날 밤 같은 시각, 중국 인민지원군 38, 39, 40, 42군과 3개 포병사단은 안동, 장전 하구, 집안 등 세 나루터에서 일제히 강을 건넜지. 한국인이니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가히 역사를 바꿀만한 도하 渡河가 아니었겠는가? 40군에 속했으니까 나는 안동, 그러니까 지금은 단동을 거쳐 조선 땅으로 들어갔다네. 그날 물 흐르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비는 내리고 강은 보이지 않으니 그건 비가 쏟아지는 소리라고 해도. 강물이 흐르는 소리라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소리는 번갈아 하늘에서, 강에서 들려오다가는 결국 내 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어. 드디어 출정 이다,라는 생각에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지.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하려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그 소리 참으로 요란하다네.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단순에 역사가 바뀌는 소리, 그런 소리가 자네 몸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해보게. 당장이라도 계집들에게 그 몸을 보여주고 싶지. 그런 게 바로 사내의 몸이지. 여기에 앉아 내가 읽고 싶은 얼굴은, 또 손은 바로 그런 것이지.
재미없는 일이지만,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자구. 자네는 이런 이야기를 잘 모를 거야. 한국인들은 그 전쟁에 대해서 누구도 기억하려 들지 않으니까, 어쨌든, 노르망디의 경험이 있으니까 미군은 인천에 상륙해 조선전쟁의 전세를 일시에 역전시켰어. 그건 정말이지, 멋진 작전이 아닐 수 없었어. 진짜 전사 戰士라면 여자들이 보석함에 장신구를 모아두듯 그런 작전을 추억 속에 담아두는 거야.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잘라버린 미군은 승승장구하며 1950년 10월 7일 2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네. 중국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모택동 주석이 팽덕회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으로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낸 것은 그다음날인 10월 8일이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런 내용이었지. 조선 인민의 해방전쟁을 지원하고 미 제국주의와 그 졸개들의 진공을 반대하며 조선 인민과 동방 각국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 인민지원군이 속히 조선 경내로 진출해 조선 동지들과 함께 협동작전함으로써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할 것을 명령한다. 인민지원군이라니, 무슨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짐작하겠는가? 표면적으로 중국 정부에서 직접 나서서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원한 인민들로 군대를 조직해 출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지. 그건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이 중조 中朝 변경을 초토화시켜 대량의 지원군을 파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오기 전에 비밀리에 조선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어. 따라서 우리는 해방군의 모표도, 가슴의 휘장도 달지 않은 채 조선인민군의 군복을 착용했지. 그저 붉은 별 다섯 개 찍힌 단추만이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해줬다네. 우리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날인 10월 18일 하달된 모주석의 명령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네. 먼저 비밀을 비키기 위해 도강부대들은 매일 황혼부터 다음날 새벽 네 시까지 건너고 다섯 시 전에 은폐를 끝마치고 반드시 검사까지 진행할 것 또는 경험을 얻기 위해 첫날 밤 에는 2, 3개 사단만 남기고 이튿날 밤에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정황에 따라 적당히 처리할 것, 우리에게 이름이 없었다네. 어둠처럼, 검은 강처럼 우리는 조선 땅에 스며들었다네. 말도 할 수 없었다네. 누구에게도 우리는 말할 수 없었다네. 그래서 심지어는 퇴각하는 조선인민군들도 우리가 어떤 군대인지 모를 지경이었지. 그다음날인 10월 19일, 미군 제1군단 3개 사단은 평양을 점령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넜지. 10월 20일, 미군 제 187공수여단은 평양에서 퇴각하는 조선인민군의 퇴로를 끊고자 숙천과 순천에 낙하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은 소나무와 잡목들이 빼곡하게 수림을 이루고 있는 조선 평안북도 동창과 북진 사이의 구릉지대까지 파고 들었어. 미군 사령부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중국군이 조선전쟁에 참전할 수 없으리라고 속단했어. 그렇지, 몇 가지지. 그 정도면 충분해. 모든 게 바뀌기에는 말이야. 그게 옳은 이유였든 그릇된 이유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모든 게 바뀌고 나면 말이야. 자네는 몇 번이나 전쟁을 겪어 봤는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고?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들어봐, 전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닮았어. 몇 가지 이유만 있으면 완전히 딴판이 되어버리거든. 하하하, 재미있나? 조심하게. 사실 전쟁은 재미있지만, 전쟁 이야기는 재미없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내가 전쟁이란 삶을 닮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누가 자네에게 삶을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먼저 하품을 하게나. 지금 내 꼴이 그렇긴 하지,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까지 도합 세 번의 전쟁을 겪은 내 몸은 전사 戰史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지. 하지만 하품이 나오더라도 참게나. 내게 왜 손가락이 잘려나갔느냐고 먼저 물어본 사람은 자네니까.
인간의 운명은 육체를 닮았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지. 손금을 읽고 관상을 본다는 건 그렇게 바뀌는 몸을 본다는 거야.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의 운명일 뿐이지. 지금 자네가 누군가에 따라 자네의 운명은 미친 듯이 요동치게 마련이야. 그게 바로 삶의 신진대사야. 전선이 끊임없이 오르내리듯, 사람의 육신이 쉼 없이 변해가듯 인간의 운명 역시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여. 한결같은 운명은 죽은 자의 것. 그러므로 운명은 절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말하는 순간, 그 운명은 바뀔 테니까. 뿌넝숴 不能設 뿌넝숴.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빗을 여기서 한번 해볼까? 지금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인민로 중국은행 앞이 전쟁터라고 상상해보게나. 그런데 저기 서시장 西市場 쪽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리는 거야. 그럴 때, 자네는 어떤 것을 보거나 읽을 수 있겠는가? 자네 두 눈에 맺히는 그 그림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겠나? 그래, 말해봐, 어서 말해봐. 하하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전쟁터에서 세 발의 총성을 들을 때,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이란 하나도 없어. 그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울부짖거나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뿐이지. 한 번 만이라도 온몸으로 다른 인간을 사랑해봤다면, 마음에 그림 따위가 그려질 겨를은 없는 거야. 그저 움직일 뿐이지. 뿌넝숴. 운명이 드러나는 순간에 언어 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지는 거야. 혹시 임진강이라고 아는가? 임진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3차 전역 戰域이 시작된 것은 1950년 때문이라도 말하는 게 옳지. 그건 곤충들이 제집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일이야. 전쟁터에서는 가장 본능적인 자들만이 살아남는 거지. 전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 미군에게 제공권을 빼앗긴 인민지원군으로서는 밤에만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어. 그러자면 달빛을 한줌이라도 더 모아야 할 형편이었다. 우리의 전역은 보통 칠 일이 소요되는데, 그 칠 일 동안 달빛의 도움을 받으려면 보름을 얼마 앞두지 않은 12월 31일이 최적의 공격개시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 우리는 본능적으로 총을 잡고 진격한 거야. 그게 1월 31일 이었던 것이지. 그때쯤에는 인민지원군이 벌써 38도선까지 밀고 내려간 상태였지. 우리 40군단은 31일 18시 30분에 임진강을 건넜다네.
“십 리엔 해질녘 구름, 태양도 빛을 잃었는데, 북풍은 기러기를 몰아가고 눈발이 어지러이 날린다.
가는 길에 알아주는 이 없을까 걱정하지는 말라! 천하에 그대를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해가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 개의 강물을 건넜다네. 그게 얼마나 긴 노정이던지. 날이 밝자, 강변에 사체들이 즐비 했어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백전노장이란 건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증명해.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더군. 전쟁이란 그런 것이더군. 어제 나는 죽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살아 있지. 전쟁터에서 나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거지. 그런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져. 하늘을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거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는 죽은 전우의 사체를 땅에 묻고 허공을 향해 세 발의 총성을 올려 애도를 표할 때뿐이야. 전쟁터에서 들리는 세 발의 총성이란 한편으로 그런 의미야. 그건 원망도, 분노도 아닌, 그저 인간이라는 것, 그러고 나서도 또 인간이란 건. 그걸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세 발의 총성으로 대신하는 거야. 그렇게 묻힌 전우의 청춘은 너덜너덜해진 지도상의 좌표로만 남게 되지. 그런 상황에 이르면 인간의 몸은 참으로 표현력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 고작 울부짖거나 마른 눈물만 흘릴 뿐이라니 심장을 꺼내 전우의 시신과 함께 묻어줄 수도 없고 두 눈을 감긴 그 눈을 뜨게 할 수도 없다니. 그러므로 하늘을 향해 쏘는 세 발의 총성, 거기에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알겠는가? 세 발의 총성. 그건 그런 의미야.
믿을 수 있겠는가? 나도 그 세 발 총성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었다면? 도대체 누슨 소리냐는 듯한 눈길이구먼. 믿기지 않는다면 믿지 않아도 좋아. 듣는 자리에서 당장 믿을 만한 얘기만을 골라서 내뱉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자네만은 결국 믿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네. 왜냐하면 자네는 작가니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히니까 놀라운가?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한 인간의 운명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히는 건 대단히 쉬운 일이라고. 자기의 온몸인 양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인간의 생김새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모든 게 투명하게 보이는 거야. 보다시피 오른손 손가락이 이렇게 잘려나갔으니 나야 글을 쓸 수는 없으되, 지금 내 앞에 앉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아맞히는 재주 정도는 남아 있다네. 물론 내일 자네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 때로는 본인도 자기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걸 안다면 매일 아침 이다지도 심하게 가슴이 뛸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인생이란 사냥꾼에 쫓기는 노루 같은 것이라 끊임없이 움직이지. 그런 점에서 전쟁이란 삶의 다른 이름이야. 계속 얘기해볼까? 1951년 1월 초까지 인민지원군은 동이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밀고 내려갔어. 미국과 괴뢰군들은 37도선까지 퇴각해야만 했지. 거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였더라면 아마도 조선은 완전히 해방됐을 거야. 그런 전황이었는데도 인민지원군은 38도선 남방, 서울을 장악한 지점에서 3차 전역을 매듭지어야만 했다네. 정치적인 문제나 외교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어. 한없이 길어진 보급선 탓이었네. 그래서 37도선이 아니라 38도선에서 진공을 멈춰야만 했어. 그게 지금 자네 조국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그 선의 본래 뜻이 아니겠는가? 중국 인민지원군의 보급선이 최대한 가 닿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거기였던 셈이니까. 전략적으로 37도선까지 후퇴한 미군 지휘부는 금방 이 사실을 감지해 1월 15일부터 소부대를 이용해 조금씩 수원과 이천 등지에서 탐색적인 반격을 시도하다가 25일부터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지. 우리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반격이었어. 팽 총사령관을 비롯한 인민지원군 지휘부는 비밀리에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 횡성과 원주를 확보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걸친 적 병력의 허리를 자른 뒤 서부전선에 있던 미8군 주력의 측방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 2월 11일, 인민지원군의 4차 전역은 그렇게 시작됐지. 이틀 뒤, 인민지원군은 횡성을 수비하던 괴뢰군 제8사단을 격파했으며 같은 날 밤, 22시부터 미 제23연대가 방어하던 지평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네. 지평리를 확보하게 되면 여주와 이천을 통해 곧장 서부전선에 집결한 미8군 주력을 에워쌀 수 있었다네. 그런 까닭에 지평리는 피아간에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전략지였지. 여기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자하니 중국 돈 팔만 위안만 있으면 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군. 이렇게 하루 종일 길바닥에 앉아서는 다른 사람의 운명을 점친답시고 믿지 못할 얘기만을 늘어놓는 주제에는 호사스러운 소망이겠으나 만약 내게 팔만 위안의 돈이 있다면 꼭 한국으로 들어가 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 농담이 아니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나는 그래야만 하는 거야.
“묻노라, 매화꽃이 어디에 떨어졌기에. 하룻밤 사이에 바람에 불려 관산에 가득히 퍼졌단 말인가.”
추운 변경에 어디 매화가 떨어지겠느냔 말이야? 하룻밤 사이에 들판으로 수없이 떨어져 내린 것은 다만 젊은 병사들이었을 뿐. 거기에 바로 내가 죽어야만 할 곳이지. 하지만 너무 멀어. 이제 다시는 가보지 못할 것 같아.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한국에 돌아가 기회가 있다면 꼭 지평리에 가보게나. 적어도 자네가 작가라면 거기 서서 져버린 매화 꽃잎이 들판을 가득 메운 관경을 상상해보게나. 그걸 상상하지 못한다면 손에 잡히는 대로 붓이란 붓은 당장에 꺾어 버리는 게 좋아. 그렇게 속절없이 떨어져 내린 매화 꽃잎처럼 즐비한 병사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2월 16일 임민지원군 병력은 결국 지평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네. 이로써 네 번에 걸친 우리의 성공적인 전역은 반격을 당하기 시작했지. 전날 밤, 우리는 밤새도록 횃불을 밝혀 들고 전사병가 부상병을 담가에 실어 옮겼다네. 밤새도록 미국의 포 사격은 계속됐다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들판으로는 꽃잎이 흩날렸다네. 붉은색 꽃잎들이 산산이 찢겨나갔다네. 분노라거나 슬픔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마저도 살아남은 자의 사치처럼 보였다네. 그리고 한순간, 나도 한 점 꽃잎이 되어 날아갔다네. 피리 소리에 우리는 모두 한 점 꽃잎이 되어 온 산을 가득 메웠다네. 이튿날 아침. 왼쪽 다리와 하복부의 살점이 떨어져나간 채, 죽은 전우들 사이에 누워있던 나는 죽음을 예감하고 옆에 떨어진 총을 잡아 요염하도록 텅 비어 보이는 창공의 향해 세 발의 총알을 발사했지. 첫 발은 나 자신을 위해서, 다른 한 발은 죽은 전우들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우리 모두의 운명을 위해서. 그 세 발의 총성이 모든 것을 다 바꿔놓았다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었어.
영변은 비가 흔치 않은 고장이야. 봄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대여섯 번 정도 봄비를 볼 수 있다는 자네는 행운아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비를 즐기는 게 습관이 됐어. 깊이 잠들었다가도 새벽에 봄비가 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라치면 잠에서 깨어나. 걱정이 있다거나 슬픔이 밀려와서 그런 게 아니야. 봄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한에는 잠들 겨를이란 없는 거야. 나이가 들수록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해. 정도는 덜하지만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아주 오래된 습관이야, 왕청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나는 그랬단 말이야. 비가 내리고 나면 이 세상이 또 어떻게 변해 가는지 궁금해서 온몸이 간지러울 지경이었으니까. 그때, 사람이 참 건실하고 매사에 열정적이라고 해서 연락원 일을 맡게 됐지. 존경하는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귀여워해주니까 신이 나서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지하당원들 사이에 오가는 서신이었던 거야. 그렇게 나는 길을 오가며 혁명의 도리를 깨쳤어. 그런 급박한 시절에는 나는 봄비가 내리면 가만히 서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단 말이야. 때로는 나 몰래 꽃이 필까봐. 때로는 나 몰래 꽃이 질까봐. 제아무리 긴급한 편지였다고 하더라도 봄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내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지. 또 그렇게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선배들이 나를 두고 ‘샤오멍 小孟’ 그러니까 꼬마 맹호연이라고 놀려댔지.
“밤사이 비바람 소리 드리더니,/꽃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라는 시를 쓴 맹호연 말이네. 온 세상이 전사들로, 시인들로, 영웅들로 가득했던 시절의 일들이야. 세상 가장 작은 소리에도 쫑긋 귀를 세우는 사람들로. 세상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가는 또 저버리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 봄이 왔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오르겠는가 말이야. 내가 쏜 세 발의 총성을 들은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 전쟁터에서 울리는 연속 세 번의 총소리를 전사자를 애도하는 것인 동시에 부상병들의 긴급 구호신호이기도 하니까. 나를 찾아온 그 여성 구호원은 군복을 찢어 상처 부위를 지혈한 뒤, 자신의 피를 뽑아 내게 삼백 그램의 피를 수혈했어. 그 피를 받아들이고 내 몸은 다시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지 정신을 차렸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여성의 눈이 보이더군. 도토리처럼 짙은 두 개의 눈동자였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눈동자였지. 그 눈동자를 바라보자마자 나는 살았다는 생각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 내 엉엉 울었어. 아마도 그건 배설이었지, 울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몸 안에 가득 쌓였던 공포가 체액의 형태로 분비돼 나오는 거지. 사선을 넘었다가 돌아오는 부상병들은 대개 그렇게 운다는 것인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녀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더군. 눈물이 조금씩 줄어들 무렵, 그녀는 허공을 향해 권총을 발사해 구호대 동료들에게 부상병이 있음을 알렸어. 구호대원들이 나를 들것에 실어 큰길가로 옮겼지. 그동안에도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어. 마치 그 손을 놓으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잡고 있었지 그렇게 간절하게 잡은 손을 뿌리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는 법이니까 그녀도 손을 잡은 채로 나를 따라왔어. 감사하다는 내 말에 괜찮다고 말하는 대답을 듣고서야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 신작로에는 철수하는 아군들로 가득했어. 구호대 역시 철수해야만 하는데, 내가 있으니까, 구호대장은 지나가는 자동차에 나를 태워 병원으로 보낸 뒤 부대를 따라오라고 그녀에게 명령했지. 그리고 신작로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됐어. 널린 게 시체였으니까 부상병이 있다고 해서 목숨을 담보로 자동차를 멈출 바보는 없지. 몇 대의 자동차를 보내고 난 뒤였지. 추위가 느껴지면서 온몸이 덜덜덜 떨려왔어. 다시 죽음의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어. 왈칵 겁이 치밀어 오른 나는 소리 내어 시를 암송했어.
“포도로 빚은 좋은 술 야광배에 부어 / 마시려니 비파 소리 말 위에서 자지러진다”
내 목소리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가 뒤를 받아 노래하더군.
“취해서 모래밭에 누웠다고 그대는 웃지 말라 / 예로부터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 그런 상황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시를 다 읊조린 그녀는 마침내 권총을 꺼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자동차에 발사했지. 바퀴에 총알을 맞은 자동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섰고 그녀는 운전사에게 사정을 설명했어. 그녀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나를 병원으로 옮겨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투덜대던 운전사도 별 수 없이 바퀴를 갈았어. 운전사와 함께 나를 차에 옮겨놓은 뒤, 그녀는 내 심장에 손을 올려놓으며 당신은 지금 살아 있다,고 중국어로 말했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맙다며, 이 심장은 이제부터 당신의 것이라고 대답했어. 나는 잡은 손을 오랫동안 놓지 못했지. 운전사가 이제 그만 가야한다고 말할 때까지도.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지친 운전사가 우리 둘을 모두 실은 채 차를 몰고 갈 때까지도. 나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그녀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그리고 이윽고 내 옆에 쓰러져 잠 들었기 때문에. 후에야 나는 그녀가 지평리전투에서 도합 팔백 그램에 달하는 피를 뽑아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 한국에 있을 때, 조선전쟁과 관련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가? 지평리전투에서 죽은 인민지원군의 숫자는 오천 명에 발했다네. 그 처참한 광경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생각해보게나. 조선전쟁이 일어난 지 채 이백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나라로는 한때 우리가 괴뢰군이라고 부르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지 않는가? 지평리에서 죽은 병사들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린 셈이지 고작 일백 년도 지나지 않아 망각할 그런 따위의 사실을 기록한 책과 기념비라니. 그게 바로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아닌가? 그런 책 따위는 다 던져 버리게나. 내 손보다도 못한 그따위 책일랑은. 나는 죽고 나서도 이 손가락의 사연은 잊지 못할 거야. 바로 이런 게 역사란 말이야. 이 손은 언제라도 이런 얘기를 들려주지. 그날 우리가 타고 올라가던 트럭은 채 한 시간도 달리지 않아 미군 전투기의 피습을 받았다네. 운전사는 즉사했고 트럭은 길 옆 골짜기로 굴러 떨어졌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신작로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골짜기의 한 농가에 누워 있었어. 도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옮겨지게 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그 농가에는 그녀와 나, 둘뿐이었으니까. 내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혼자서 나를 둘러메고 옮겨놓았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 집에서 이틀간 잠만 잤다네. 매우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서로 부둥켜안고 잤다네. 죽음보다도 깊은 잠이었어. 자다가 깨면 미숫가루를 얼마간 먹은 뒤 다시 잠들었다네. 나는 그녀의 깡마른 가슴을, 그녀는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내 성기를 움켜잡았지. 몹시도 성욕이 일었으나 잠을 이기지는 못하더군.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우리는 서로 몸을 섞었지.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으니. 우리는 져버린 매화로 가득한 들판을 봤으니까.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위에서 몸을 흔들었는데, 그때마다 상처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계속하라고 채근했고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 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 그녀는 지평리에서 본 것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네. 그건 아마도 내가 본 것과 다르지 않겠지. 그러니까 흩날려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 꽃잎을 봤겠지. 내가 물었어. 지평리에서 너는 무엇을 봤느냐? 그녀는 대답했어. 뿌넝숴. 뿌넝숴. 여태 그 말이 잊히지 않아.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어요. 우리는 그 농가의 안팎을 샅샅이 뒤져 먹을 것을 긁어모은 뒤 일주일 동안이나 그 집에서 숨어 지냈지. 나는 다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에 환멸을 느낀 그녀는 원대 복귀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 일주일 동안 전투기의 굉음과 포성과 총성은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아군도 적군도 그 어느 쪽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어. 낮 동안에는 적기의 공습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숲속에 들어가 그저 하염없이 앉아 있었고 밤에는 다시 농가로 기어들어가 아프다고 소리치며, 또 미안하다고 말하며 서로의 몸을 탐했지. 공포도, 불안도, 절망도 없었던 나날이었지. 낮에 숲속 덤불에 앉아 있을 때는 서로 기억하는 시를 들려주면서 시간을 보냈지.
“아미산에 걸친 반 조각 가을달 / 그림자는 평강강 강물에 비쳐 흐른다 /
밤에 청계를 떠난 삼협으로 향하며/그대를 생각하면서도 보지 못한 채 유주를 내려간다” 나
“가을비 내리는 강을 따라 밤새 오나라로 들어가고 / 그대를 보내는 새벽 초나라 산들이 외롭다 /
낙양의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간직했다고 하게”
같은 시들. 미처 입으로 말할 겨를이 없어 심장으로 말하는 시들. 미처 귀로 들을 틈이 없어 심장으로 듣게 되는 시들. 어느 새벽이었을 거야. 전투기 소리에 우리는 잠에서 깼지. 전투기는 몇 번이고 상공을 선회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을 폭격하는 줄 알고 얼른 집에서 뛰쳐나갔다네. 동쪽 하늘에 깃털처럼 가는 하현달이 걸려 있었지. 매우 아름다웠지. 그렇게 아름다운 달을 보게 돼, 절로 손이 그녀의 어깨 쪽으로 움직였지. 내가 말했어. 정의는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는 분명히 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너를 찾아갈 것이다. 저 하현달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녀가 내 손을 뿌리쳤어. 전쟁터에서 올려다보는 하현달 따위는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더군. 그러고 나서 그녀가 뭐라고 말했던가?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는가? 죽을 만큼 사랑한다. 당장 그녀를 안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애원하듯이 대답했어.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 죽음이 도처에 널린 이런 곳에서 인간의 목숨 따위는 필요 없다. 목숨 따위는 정의에나 바쳐라. 아무리 피를 뽑아서 수혈해도 되살릴 수 없었던 병사들로 가득한 지평리에나 던져버려라. 숨이 턱 막히더군. 목숨으로도 증명할 수없는 게 세상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으니까. 국가는 내게 목숨 정도만 원했지. 그러나 그녀는 그 이상의 것을 원했어. 벌떡 일어서서 뒤로 물러서는 그녀를 향해 나는 엎드려 빌었어. 제발. 한 번만 나를 안아주게나. 제발.
내 나이 또래 중에서 이렇게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네. 나 역시 한평생 조롱과 멸시 속에서 보냈어. 이 손가락을 알아본 사람들이 내게 사연을 불어오면 지금 자네에게 하듯이 이야기를 들려줬지. 그런 내 얼굴에다 대고 침을 뱉는 자들이 수두룩했지. 거짓말하지 말. 이 벌레 같은 녀석아. 전쟁에 나가기 싫어서 손가락을 자른 겁쟁이야. 내가 아무리 , 해남도 전역을, 항일전쟁을., 조선전쟁을 얘기해도 소용이 없었다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전쟁에 나가기 싫어서 스스로 이 손가락을 잘랐다고 생각하나? 좋을 대로 생각하겐. 이런 얘기는 소설에나 서먹을 수 있겠지. 역사책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겠지. 고작 일백 년도 가지 못할 역사책 따위, 어쨌든 하던 얘기는 마저 끝내도록 하지. 그리고 그녀는 한 번도 나와 몸을 섞지 않았다네. 포성은 점점 더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네. 낮에는 숲속에 앉아 북쪽으로 날아가는 미군 전투기들을 바라봤고 밤이면 농가로 기어들어가 한 번만 나를 안아달라고 애원했다네. 그러는 동안 먹을 것은 다 떨어졌다네. 당장이라도 몸을 추슬러 퇴각하는 부대를 쫓아가지 않으면 낙오되리라는 게 분명했지만, 우리는 둘 다 움직일 힘이라고는 한도 없었다네. 낙오됐다는 게 분명해질수록 나는 더욱더 그녀에게 애원했다네. 비명을 지르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게 해달라고. 아프게 해달라고. 그녀는 그런 내 손을 잡고 말했어. 자신이 지평리에서 본 것에 대해서는 정말 말할 수 없다고. 뿌넝숴. 뿌넝숴. 그날 밤, 도합 팔백 그램의 피를 병사들에게 수혈하면서 세상의 모든 남자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은 그 마음을, 핏기라고는 한도 없는 멍한 눈동자로 나는 그녀 앞에 엎드려 말했어. 제발, 제발, 제발, 한 번만 나를 안아달라고. 간절하게, 온 마음과 온몸으로 빌었다네. 그녀는 내 얼굴을 들어 두 눈을 바라봤다네. 아무리 나의 피를 수혈해도 죽은 병사들을 되살릴 수 없었어요. 당신만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할 수 있겠어?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네. 나를 살려달라고. 한 번만 안아달라고. 그녀는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네. 그제야 나는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지. 그 집에서 우리가 보낸 시간은 얼마 정도였을까? 2월 말까지 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주력을 38도선까지 퇴각시켰다네. 3월 7일, 미군과 괴뢰군은 5개 군단의 도합 14개 사단, 3개 여단, 2개 연대의 병력을 집중시켜 모든 전선에서 전반적인 공세에 나섰다네. 3월 14일, 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서울에서 철수했으며 이튿날 미군 제3사단과 괴뢰군 제1사단이 서울을 점령했다네. 3월 23일, 적들은 고양, 의정부, 가평, 춘천 일선을 점령하고 미군 187공수여단을 문산에 투입해 인민군 제1군단의 퇴로를 막았다네. 4월 10일, 전선은 한강 입구에서 임진강을 따라 38선 이북 부근 지구를 거쳐 양양 일선까지 올라왔다네. 그리고 4월 12일, 적들은 진공의 주력을 철원, 평강, 금화지구, 즉 철의 삼각지대에 집중시켰다네. 언제까지 우리가 그 집에 누워 있었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어쨌든 그 집에서 우리는 수없이 몸을 섞었지. 아프다고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 먼저 그녀,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었어.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 나는 모른다네. 괴뢰군 수색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반듯하게 누운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코를 감싸 쥐고 그냥 돌아나간 적도 있었다네. 내가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 바닥에는 내가 흘린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그 피 위에 우리 두 사람이 누워 있었어.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지. 두 번째 수색대가 들이닥친 뒤에야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수색대에 끌려가며 나는 그녀를 위해 시를 읊었지.
“이 때에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소식 전하지 못하니.
달빛 따라 님의 곁에 흘러 비추기를 원 한다. 거리기 멀리 날지만 달빛을 넘지 못하고
물고기 잠겼다 솟았다 하지만 물에 파문만 일으킬 뿐
어젯밤 쓸쓸한 강가에서 꽃 지는 꿈을 꾸었는데
불쌍하게도 봄이 다 가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네.”
내가 중국어로 시를 읊조리자, 무슨 말인지 모르던 남조선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쳤다네. 그 집에서 나는 그녀에게서 천 그램이 넘는 피를 수혈 받았다네. 나는 지평리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네.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네.
어라, 저기 나비가 날아오르는군. 이제 슬슬 봄이 찾아오는 모양이야. 나는 벌써 십 년째 여기 앉아서 점을 봐왔다네. 점이라는 건 간단해. 눈으로 나비를 보고 입으로 봄이 온다고 말하는 일이야. 온몸과 온 마음을 열고 뜨겁게 세상을 바라보거나 귀를 기울이는 일이야. 왜 사람들은 책에 씌어진 것이라면 온갖 거짓말을 다 늘어놓아도 믿으면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면 때로 믿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의 운명과 역사란 결국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온몸과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만 빠져 있는 것일까?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뿌넝숴 라고 말해도, 역사를 말하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대충 짜 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람들은 기념관에 가서 구경하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지평리전투에서 인민지원군은 공세적으로 퇴각했다고, 서울에서 주도적으로 철군했다고 말하지. 그건 자네가 읽는 역사책도 마찬가지일 것일세. 서로는 서로를 괴뢰군이라고 부르고 서로가 서로를 격멸했다고 말하고. 그런 역사책은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거짓말이라고 내 얼굴에 침을 뱉지. 고작 일백 년도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으로 버려진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내게 마구 발길질을 하지. 그게 바로 자신이 사내라고 믿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하는 일이지. 왜냐하면 내 손이 바로 진실을 말해주니까. 역사책에 나와 있지 않은 진실을 말해주니까. 이제 알겠는가? 봄에는 왜 나비가 날아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꿈을 꿔야만 하는지? 나비가 날아오지 않고 찾아오는 봄은 없는 거야. 책에 씌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얘기하게나. 두 눈으로 보이는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몸으로 말해보게나. 뿌넝숴. 뿌넝숴. 그런 말이 터져 나올 때까지 들려주게나.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자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얘기들을 내게 말해보게나. 그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내가 말해줄 테니까. 책에 씌어진 얘기 말고. 자네가 몸으로 겪은 얘기. 뿌넝숴. 뿌넝숴. 그 말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는 얘기. 말해보게나. 어서. 어서.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다 황석영
1951년 2월 3일 유엔군의 제일차 반격이 개시되었다. 중공군은 횡성과 원주 방면에 있는 2개 주력부대를 공격했다. 미 2사단은 예하의 제 23보병연대는 지평리 서북방의 계곡과 얕은 고지로 통하는 전초선을 마련했다. 프랑스군 대대를 포함한 보병연대는 포병대대와 중포중대의 지원을 받았고 유격중대와 공병대도 중공군이 퇴각한 진지에 포진했다. 2월 13일 밤부터 전투가 개시되었다. 자정을 두 시간쯤 지난 뒤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를 불며 프랑스군 대대가 있는 전초선으로 몰려왔다. 밤새껏 여덟 차례나 공격이 계속되었다. 다음날인 2월 14일 어둠이 내린 후 지평리의 남쪽에서 불꽃이 높이 오르면서 찢어질 듯한 나팔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중공군은 따발총을 메고 전차의 깃대를 운반하면서 얕은 고지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대 방어진지로 몰려와 개인호 속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고지는 수류탄이 터져 대낮같이 불빛이 밝았으며 총 쏘는 소리가 콩 볶는 소리 같았다. (...) 어둠이 내린 뒤부터 솜털 같은 눈이 지평리 근처에 쓰러져 있는 수천 명의 중공군 시체 위에 살포시 내렸다. 몇백 구의 시체는 G중대의 고지 앞에도 널려 있었고 다른 것들은 미군 시체와 함께 뒤범벅이 되어 고지에 흩어져 있었다. 1951년 2월 15일 중공군의 일대 공세가 지평리에서 좌절됐다.(페렌바흐 <한국전쟁>)
13일 저녁 아군은 지평리에서 적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적은 일부 병력이 이미 도망하여 4개 대대가 안 되는 병력뿐이라고 생각했었으니 실제로는 미 제2사단의 23연대 전부와 프랑스군 대대와 포병대대 전차중대 총 육천 명이었고 또한 이미 견고하게 방어공사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아군은 야전공격 방법으로 급하게 전투를 개시했다. 더욱이 아군 공격부대 간의 통신 연락과 협조가 매우 좋지 않아 그날 저녁 적 부대의 일부만을 겨우 섬멸했을 뿐 전투를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14일 서부전선의 적군의 동쪽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아군은 부대 배치를 조종하여 계속해서 6개 연대의 병력으로 공격했고 아울러 적을 2평방킬로미터가 못 되는 협소한 지역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적은 이미 거점식 방어를 편성하여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였는데 아군의 화력은 약하고 또한 탄약도 부족하여 전투를 마무리짓지 못하였다. 15일 미 제1기병사단의 제5연대는 후포리에서 곡수리까지 진격하였으며 전차 삼십 대, 비행기 백여 대의 엄호하에ㅐ 적을 지원을 저지키 위하여 배치되었던 아군 116사단과 126사단을 공격했다. 만약 계속해서 역량을 조직하여 지평리의 적을 공격하면 능히 함락시킬 수 있었으나 전반적인 상황을 검토해보건대, 다시금 적군을 각개격파하여 유리한 전역 형세를 조성하는 것은 한 발짝 늦었다. 지원군 사령원은 15일 17시 30분에 지평리 지역의 공격을 정지하기로 결심하였다. 16일 새벽, 지평리에 대한 아군 공격부대는 북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원주 부근까지 진격했던 각 군도 동시에 북으로 철수하였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역, <중공군의 한국전쟁사 : 항미원조전사>)
기묘한 자세의 사람이 서 있었다. 약간 굽은 등, 벌어진 다리, 두 팔은 축 처져 있었고, 눈은 없었다. 그는 불에 타서 다 해진 낡은 헝겊 조각을 몸에 걸쳐 속살이 다 보였다. 그의 옆에 있던 한국인 부인이 말하자 통역이 말해 주했다. ‘그는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앉을 수도 옆으로 누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서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피부는 피부가 아니라 임시로 발라놓은 껍질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네이팜이 가져다주는 상처의 통증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얼굴을 태운 사람은 눈꺼풀이 닫히지 않기 때문에 눈을 뜬 채로 잠자는 것이 보통이다. 피부는 가렵고 바늘에 찔릴 것처럼 따갑다. 또 여름에는 더욱 고통스럽다. 불에 탄 어린이는 고통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며 달랠 수도 없다. 네이팜탄은 인간의 혼을 파괴하는 무법적인 도구이다.
(...)
스탠리스 상원의원 : 북한 전역이 실제로 거의 파괴되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오도넬 소장 : 예, 그렇습니다. 한반도 전체, 거의 전체가 모두 두려워할 정도로 무참히 파괴된 상태입니다. 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은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중국군이 오기 직전에 이미 우리들에게는 비행 임무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에는 이미 모든 목표물이 없어졌습니다. (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2권)
위 세 가지의 인용문 중 두 대목은 미국과 중국측의 전사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콩드가 인용한 BBC 특파원의 기록이다. 이어서 런던타임스는 지평리 전투가 벌어지던 무렵의 기사에서 ‘원주 지구에서 여납군은 초토화 전술을 채택하여 22개 마을을 전소시켰다’고 썼으며 동부전선의 전진 후퇴가 거듭되던 같은 시기에 뉴욕타임스는 ‘연합군이 엄청나게 파괴적인 무기를 사용하여 마을이 있던 장소를 완전히 석기시대로 되돌려버리고 퇴각한 반면에, 공산군은 퇴각중에도 집이나 학교를 그대로 둔 채로 후퇴해가는 것을 코리안들이 목격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퇴각하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승리하였노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적군, 아군 식의 고정관념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록은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한다 할지라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비교적 입장이 자유로운 특파원의 시선에서 인간의 개별적 비극이 드러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냉전이 고착화된 한국에서 한국전쟁의 ‘정사 正史’라 아직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의 전황은 유엔군의 틀을 갖춘 연합군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중공군이 지원군 형식으로 참전하는데, 미군과 중공군 양측 모두가 개전 이전의 경계였던 삼팔선 근방에서 소모적인 공방전을 되풀이하면서 휴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공군을 유엔 결의에 따라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보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점들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중공군은 삼팔선 어름을 경계로 안정적인 현상 유지를 도모하면서 휴전 협상에서의 군사적 도덕적 우위를 견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속된 만주 폭격과 원자탄 사용에 대한 위협이며 작전지역에서 벌어진 세균전에 관한 폭로가 이어진다. 제공권과 병참수송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었던 미군과 ‘인해 人海’로 표현된 중공군이 재래식 개인화기에 의존한 대병력의 전투는 이 무렵 미군사령부의 작전명이 ‘몰살 沒殺’이었던 데서도 그 전술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김연수는 단편소설 <뿌넝숴 不能設>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즉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사실 전쟁은 재미있지만, 전쟁 이야기는 재미없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내가 전쟁이란 삶을 닮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누가 자네에게 삶을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먼저 하품을 하게나. 지금 내 꼴이 그렇긴 하지,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까지 도합 세 번의 전쟁을 겪은 내 몸은 전사 戰史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지. 하지만 하품이 나오더라도 참게나. 내게 왜 손가락이 잘려나갔느냐고 먼저 물어본 사람은 자네니까.
김연수는 <뿌넝숴>에서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어느 중국인의 입을 빌려 그가 겪은 개인적 체험을 중심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여기서 위와 같은 전사적 前史的 전쟁의 전체 상황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중국 2개 사단 예하의 병력 중 한 병사 개인의 초점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현재 ‘자네’라고 지칭된 상대가 작가이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가 화자인데, 연병의 인민로 중국은행 앞 모퉁이에서 손금이나 관상을 보아주는 점쟁이인 ‘나’는 ‘자네’와 마주앉아 있다. ‘나’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가던 10월부터 임진강을 건넌 섣달그믐과 이듬해 2월 중공군이 춘계 공세중이던 지평리 전투까지를 물 흐르듯이 이야기한다. 여기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중국 돈 팔만 위안만 있으면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더라. 만약 내게 팔만 위안만 있으면 꼭 한국으로 들어가 지펴ᅟᅧᆼ리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나’는 말한다
남한측의 공식적인 전사는 지평리 전투를 중공군이 참전하고 북한 중부 산악지역에서의 패퇴 이래 처음으로 유엔군이 승기를 잡게 된 전투로서 이차대전에서 아르덴 공방전이나 벌지 전투에 비길 정도의 결정적인 승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공군은 전사자 육천여 명, 부상자 이만 육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들판으로 수없이 떨어져 내린 것은 매화 꽃잎이 아니라 다만 젊은 병사들이었고, ‘나’는 거기가 바로 자신이 돌아가서 죽어야만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2월 16일 인민지원군 병력은 지평리에서 철수하며 밤새도록 전사병과 부상병을 담가에 실어나른다. 왼쪽 다리와 하복부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채로 ‘나’는 죽은 전우들 사이에 누워 있었다. 날이 밝자 ‘나’는 죽음을 예감하고 텅 빈 창공을 향하여 세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그런데 그 세 발의 총성이 모든 것을 다 바꿔놓는다. 전쟁터에서 울리는 연속 세 번의 총소리는 전사자를 애도하는 의식인 동시에 부상병들의 긴급 구조신호이기도 하다.
‘나’는 ‘자네’인 작가에게 이야기하다가 되묻는다. 지평리 전장의 그 처참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바로 그 대목에서 이 작품의 주제가 슬며시 드러난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여성 구호원이 군복을 찢고 상처 부위를 지혈한 뒤에 자신의 피를 뽑아 수형해주어 ‘나’는 의식을 회복한다. 그녀는 조선인 구호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구조되어 농가에서 숨어 지낸다. 이틀이 지난 뒤 그들은 져버린 배화로 가득한 들판을 보아버렸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몸을 섞는다. 죽음이 지척이었으므로 그들은 쉬지 않고 몸을 섞는다. 그녀는 지평리에서 본 것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평리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나’가 물으니 그녀는 대답한다. 뿌넝숴. 뿌넝숴.
전선은 차츰 북으로 올라갔고 두 사람은 농가에 고립된 채 낙오된다. 지평리에서 자신이 본 것을 정말 말할 수 없다고. 그녀는 뿌넝숴. 뿌넝숴. 팔백 그램의 피를 수혈해주면서 세상 모든 남자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었던 그 마음을.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다시는 총을 잡지 못하도록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마음을. 당신만은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내 온몸의 피를 다 뽑아서라도 당신만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말한다.
밀고 밀리던 전투가 벌어지던 2월 말에서 4월 중순 무렵까지 그들은 농가에 숨어 지내며 수없이 몸을 섞는다. 아프다고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며, 국군의 수색대가 왔을 때 죽어 있는 그녀를 발견한 ‘나’는 그녀에게서 천 그램이 넘는 피를 수혈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렇게 지평리에서 살아남고, 그녀는 죽었다.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뿌넝숴라고 말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짜 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학생들은 사람들은 기념관에 가서 구경하지” 라고 말하면서 화자는 매듭을 짓는다. “책에 씌어진 얘기 말고. 자네가 몸으로 겪은 얘기. 뿌넝숴. 뿌넝숴. 그 말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는 얘기. 말해보게나. 어서. 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역사주의는 근대 서양사의 철학적 가정과 가치와 세계관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인 셈이었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에서 출발한다. 역사가들의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말들은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거짓일 수 있으며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명된다. 그것은 또한 이성과 논리에 의한 계몽주의적 신념을 부정한다. 이성과 논리 역시 개념적 구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와 지식과 가치는 담론에 의하여 형성되며 그것들은 담론과 더불어 변할 수 있다. 계몽주의가 거대담론이라면, 문학은 어차피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한 미시담론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바로 저 두 남녀가 개인들의 밀폐된 중립지대를 고수했던 것처럼 이성과 반이성, 논리와 감성, 역사와 반역사의 중산지대에 서기를 희망한다. 한쪽의 극단에는 우리가 1990년대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속살이 드러나면서 지켜본 ‘전체주의’의 얼굴이 있으며, 다른 한쪽의 극단에서 식민지 근대의 신화와, 교고서 왜곡이며, 김구와 윤봉길과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로 전락하는 ‘역사적 허무주의’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 바로 이곳, 냉전과 근대적 억압의 실체가 너무도 뚜렷한 포스트모던적 사회의 얼굴은 누군가 자조적으로 말했듯이 삼겹살처럼 중첩된 사회의 진면목인 까닭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책을 읽은 까닭은 ‘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읽은 많은 책들이 이 소설집에는 숨어 있다. 일인칭. ‘나’. 내 눈으로 바라본 세계. 이제 안녕이다.(...) 더 많은 이야기, 이제 내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서 잠도 안 온다.(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작가의 말’)
김연수의 정직성과 따뜻함은 작가로서의 남다른 미덕이다. 어느 낯선 길을 걷더라도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온갖 풍상과 눈보라와 비바람을 거쳐온 한국문학의 알 수 없는 저력이기도 하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전하는 서사의 뒷심이기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