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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의 보학(譜學)
족보는 한국이나 동양의 일부 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사실상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가 있다. 세계 각국의 많은 나라에는 이미 족보학회(族譜學會)가 있고, 또한 족보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의 족보 전문도서관에는 마이크로 열람기만 해도 300대가 있어 하루에 수백 명의 열람자가 도서관에 모이고 있다.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족보가 마이크로 필름화 되어 있으며, 족보학회가 창립된지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여러가지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족보학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는 일본가계도 학회(日本家系圖學會)가 있어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성씨와 가문(家紋)'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씨가문 연구회(姓氏家紋硏究會)가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우리나라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족보들을 마이크로 필름화하여 보관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학과에 편성해 놓고 연구발표회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외에도 일본의 동경대학과 경도대학, 중국의 남경도서관과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극동학원, 베트남의 국립도서관 등에 동양의 족보들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족보가 없는 민족 가운데는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유럽의 민족주의 국가에서는 지난날의 잡혼(雜婚)에 의한 질(質)의 저하를 막기위해 혈통을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같이 오늘날에 있어서 족보는 세계 각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가장 잘 발달된 족보라는 정평이 나있지만, 오히려 우리 나라보다도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외국 성씨의 유래와 족보에 대한 연구가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구 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현재 족보가 보존되고 있는 외국의 도서관이나 학술단체는 다음과 같다. 미국: 컬럼비아 도서관, 하버드대학 도서관, 유타세계 계보협회 계보도서관.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동양문고, 동도대학 도서관, 내각문고, 동경교대 도서관. 중국: 남경도서관,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 극동학원, 아세아협회. 베트남: 국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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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성씨(姓氏) 외국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미국,영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여자는 결혼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의 성을 사용 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나, 법률로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의 성을 사용하거나 각자의 성을 사용 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 자기의 성명(姓名)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아내는 자기의 본성(本性)위에 남편의 성(姓)을 덧얹어(합관……合冠) 사용하 또한 지구상에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국가도 많다. 또한 정치 지도층만 성(姓)을 갖고 있는 나라도 많다. 동남아시아의 버마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통령이건 일반 국민이건 모두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인 필요나 취미로 이름 위에 이것저것 덧붙여 사용한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전 UN사무총장 「우 탄트」처럼, 이름 위에 '우'나 '몽'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 와 "몽"이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 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 이다. 그러나 '우'자(字)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 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한다. 일본의 성씨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숫자로도 13만 2천여 성씨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민족중의 하나다. 일본의 성씨는 두 글자, 즉 복수(復數)로 되어 있는 것이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는 한 글자(單數)나 세 글자로 되어 있는 성씨도 많다. 일본에서는 각 가문(家門)마다 "가문(家紋)"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가문은 각 가문(家門)마다 자기 가문(家門)을 표시하는 도안(圖案)으로된 약도(略圖)이다. 특별한 예식, 명절에는 예복이나 모자에 남녀 모두 이 가문(家紋)을 착복(着服)하여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일본가계도 학회(日本家系圖學會)가 있어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성씨와 가문(家紋)'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씨가문 연구회(姓氏家紋硏究會)가 있어 각 지방별(地方別)로 이에 대한 연구(硏究)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
⑨사람마다 성을 가진 것은 고려시대 목록가기
| 성(姓)을 쓰기 시작한 시기를 사실(史實)로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삼국 시대의 성(姓)으로는 ,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으며, 일반민중의 성은 고려 초기에 일반화되기 시잣하여 고려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노비 등 천민층을 제외한 모든 양인층(良人層)이 성과 본(本)을 가졌음을 고려말 호적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저서 "택리지" 총론에서 <신라말부터 중국과 통하여 비로서 성씨를 갖게 되었으나 벼슬한 사족(士族)만이 성(姓)이 있었고, 일반 백성(百姓)은 모두 성이 없었는데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면서 비로서 팔로(八路)에 성을 내려 주어서 모두 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비교적 정확한 기술(記述)이라고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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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왕건은 새 왕조의 수립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나 창업에 협력한 중앙세력에게 성(姓)을 내려 주었고, 또 중앙과 연결된 지방세력들(豪族)이 그들나름대로 창성(創姓)하여 성(姓)을 칭하게 됨으로서 새로운 신성(新姓)이 등장하게 되었다. 예컨데 혁명공신인 삼능산(三能산)이 신숭겸(申崇謙)으로, 복사귀(卜沙貴)가 복지겸(卜智謙)으로, 백옥삼(白玉衫)이 배현경(裵玄慶)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성을 내린 것은 사성(賜姓)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들은 각각 평산신씨. 면천복씨. 경주배씨의 시조가 된다. 고려의 개국공신들이 새로운 성씨의 시조로 되어 있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시조 이름] | |||||||
| 평산신(申)씨 [崇謙] | 경주배(裵)씨 [玄慶] | 면천복(卜)씨 [智謙] | 의성홍(洪)씨 [儒] | ||||
| 평산유(庾)씨 [黔弼] | 안동권(權)씨 [幸] | 청주한(韓)씨 [蘭] | 문화류(柳)씨 [車達] | ||||
| 남양홍(洪)씨 [殷悅] | 안동권(金)씨 [宣平] | 청주이(李)씨 [能希] | 파평윤(尹)씨 [莘達] | ||||
| 홍주홍(洪)씨 [規] | 안동권(張)씨 [吉] | 금천강(姜)씨 [弓珍] | 전의이(李)씨 [棹] | ||||
| 남양방(房)씨 [季洪] | 인동장(張)씨 [金用] | 양천허(許)씨 [宣文] | 용인이(李)씨 [吉卷] | ||||
| 면천박(朴)씨 [述希] | 수안이(李)씨 [堅雄] | 아산이(李)씨 [舒] | 철원최(崔)씨 [俊邕] | ||||
| 이천서(徐)씨 [弼] | 원주원(元)씨 [克猷] | 풍양조(趙)씨 [孟] | 영광전(田)씨 [宗會] | ||||
| 선산김(金)씨 [宣弓] | 해평김(金)씨 [萱述] | 봉화금(琴)씨 [容式] | 울산박(朴)씨 [允雄] | ||||
| 중화김(金)씨 [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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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후에도 호장(戶長)계열이 새로운 성씨(姓氏)의 시조가 된다. 성종대(成宗代: 981~997) 이후에는 행정편제가 틀이 잡히면서 지방관제도 정비되어, 그때까지는 호족들의 지배영역이었던 지방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 중앙관리가 수령으로 파견되어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되는데, 이에 따라 과거의 호족들은 더러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귀족(貴族)이 되고, 더러는 지방에 그대로 처져서 그 지위가 격하되어 향리(鄕吏:戶長)가 되는 길을 밟았다. 호장(戶長)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관리를 보좌하여 실제적인 행정사무를 맡아 보았는데, 이들에겐 직전(職田)이란 전지(田地)가 주어졌으며 호장직의 세습과 동시에 직전(職田)도 세습되었다. 고려시대의 호장이었던 인물이 오늘날 많은 성씨의 시조가 된 점은 성(姓)의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호장계열이 새로운 성씨의 시조(혹은 중시조)로 되어 있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
| 기계(兪)씨 | 천녕(兪)씨 | 광주(李)씨 | 한산(李)씨 | 여주(李)씨 | 성주(李)씨 | 진성(李)씨 | 합천(李)씨 |
| 원주(李)씨 | 가평(李)씨 | 한산(李)씨 | 하양(許)씨 | 풍산(柳)씨 | 고흥(柳)씨 | 단양(禹)씨 | 의성(諸)씨 |
| 해주(최)씨 | 수원(崔)씨 | 고령(申)씨 | 아주(申)씨 | 초계(卞)씨 | 순창(趙)씨 | 목청(尙)씨 | 동래(鄭)씨 |
| 창원(鄭)씨 | 봉화(鄭)씨 | 창녕(成)씨 | 부안(金)씨 | 예안(金)씨 | 영덕(金)씨 | 광주(卓)씨 | 반남(朴)씨 |
| 고령(朴)씨 | 압해(朴)씨 | 양주(趙)씨 | 여산(宋)씨 | 무송(尹)씨 | 목청(尙)씨 | ||
| 창원(黃)씨 亮沖派 | 경주(金)씨 魏英派 | 연일(鄭)씨 宜卿派 | 안성(李)씨 仲宣派 | ||||
| 고려시대에 성씨가 일반화하는 한 요인으로, 광종 9년(958)부터 실시한 과거제도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제도의 시작은 , 원래 중국 후주(後周)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여 한림학사가 괸 쌍기(雙冀)의 제안으로 실시되었는데, 왕권의 강화를 위해 지방 호족 출신을 중앙관료기구 속에 흡수하려는 방편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 과거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를테면 문종(文宗) 때에는 "호명취사법(糊名取士法)" 이라고 해서 응시자의 성명. 본관. 4대조의 이름 등을 써서 풀로 봉하여 미리 시원(試院)에 제출토록 했다. 처음부터 그랬을 터이지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필수요건으로 성(姓)을 가져야 하고, 본관(本貫:출신지)을 밝혀야만 했던 것이니, 이 과거제도가 성(姓)을 널리 보급하는데 큰 구실을 했음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오늘날 성씨들의 대부분의 시조가 고려 중기 내지 후기의 인물인 점은 이 시기에 성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
| 그러나 천민층까지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임진왜란(1592) 이후 한말(韓末)에 이르러서였다.
이들 천민층이 전쟁터에서 특별한 공훈을 세우는 경우에는 노비(奴妃)신분에서 풀어주어 평민(平民)신분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전란후 사회체제의 변동에 따라 하급관리(胥吏:서리 등)로 등용되기고 했다. 노비들이 양인(良人)으로 신분상승을 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양인층(良人層) 이상만 가질 수 있었던 성(姓)을 그들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을 타파한 것은 성의 대중화를 확대하는데 촉진역할을 하였다. 갑오개혁(甲午改革:甲午更張) 안(案) 중 신분제도와 관련된 것은 1. 문벌(門閥)과 양반(兩班). 상민(常民)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2. 역인(驛人). 창우(唱優). 피공(皮工) 등의 천민(賤民)대우를 폐지한다는 것 등이다. 한편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다 성(姓)을 갖게끔 되었으며, 따라서 그때까지 성(姓)이 없던 사람들도 모두 성을 만들어 갖게 되었으며,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하면서 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본인의희망에 좇아서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전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씨, 경주 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각기 출신지의 대성(大姓)이나 문벌(門閥)을 본따서 성을 지어주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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