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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장 주석
군대 귀신을 쫓아내심 (마가복음 5:1-20)
우리는 여기에서 무장한 힘센 자를 그리스도께서 추방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강한 악마보다 더욱 강하심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이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그 광풍을 진압하고 바다 "건너편에"건너오시어서 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곳에 오셔서 하실 일은 이 불쌍한 사람을 사탄의 손에서 구원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을 마치신 뒤에 다시 건너편으로 돌아가시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의 수중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저 건너편 하늘 나라에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광풍과 풍랑을 당하신 후에 구속의 임무를 수행하시고 저편으로 돌아가시었다.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이 귀신들려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만일 거기에 두 사람이 있었다면 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마가는 특히 한 사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차이점이 우리에게 어떤 걸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그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사람에 관해서 여기에서 언급한 것 같다. 그러면 아래에서 이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 이 가련한 사람이 처해있던 비참한 상태. 그 사람은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 눌리어 있었다. 마귀가 그를 사로잡았고, 그 결과는 다른 많은 사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침울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섭게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광란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의 상태는 다른 어떤 귀신들린 사람들보다 더 비참하였다. 바로 그러한 병자들을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시는 것이다.
1.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그는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사이에 있었는데, 그 무덤들은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거친 터"에 자리잡고 있었다(욥 3:14). 도시에서 그렇게 격리되어 있는 점이 마귀에게는 더욱 유익을 주는 것이다.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10). 아마 마귀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그와 같은 귀신이 되어 그렇게 불행스런 일을 행하게 되므로, 거기에서 면제되도록 하라는 공상에 빠지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을 무덤 사이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무덤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고 민수기 19장 16절에 언급되어 있기도 한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들을 더러운 집단에 보내어 그 더러운 세력에 계속 포로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사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것이다.
2. 그 사람은 대단히 힘이 세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미친 사람에게 그렇게 붙들어 매여 놓는 일은 그 사람 자신을 이해서나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나 다 필요한 일이다. 밧줄로 그를 매놓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도 그를 매여 놓을 수 없었다(3,4절). 대단히 한탄스러운 것은 그렇게 묶여야만 할 그런 경우이며,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비참한 사람들 중에 그들이 가장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쇠사슬로도 묶어 놓을 수 없는 그의 경우는 모든 비참한 사람들 중에도 최악의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비참한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는 것이다. 평판이 안 좋은 어떤 불량한 죄인들은 이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자들은 "매와 채찍"을 필요로 하는 "말과 나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들 나귀"는 채찍을 가지고도 데어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의 명령과 책망은 죄인들을 그들의 악한 길에서 제어해 주는 "쇠사슬"과 "고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는" 것이다(시 2:3). 그리고 그 일은 그들 안에 마귀의 세력이 주장함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된다.
3. 그는 자기 자신에게나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 되었다(5절). 마귀는 자기에게 포로가 된 자들에게 잔인한 주인의 행세를 하는 것이며 완전히 폭군이 되는 것이다. 이 비참한 사람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비참한 경우를 한탄하여 울거나, 노하고 분 내어 하늘을 향하여 소리내어 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격분하게 되면 흔히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고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성을 잃고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될 때에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광란하여, 여기에 이 미친 사람과 같이 "피가 흐르기까지……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왕상 18:28). 하나님의 소리는 "네 몸을 상하지 말라"는 것이고, 사탄의 소리는 "네 몸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상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리는 무시를 당하고 사탄의 소리는 청종된다. 아마도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한 것은 맨 발로 달려가다 돌에 상한 것일 것이다.
Ⅱ. 그리스도에게 향한 그 사람의 호소(6절).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상륙하시는 예수에게 "달려와 절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노해서 많은 사람을 흔히 넘어뜨리며 달려간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경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달려온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쇠사슬"과 "고랑"으로도 제어할 수 없었던 그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손이 그렇게 하시었던 것이다. 그의 맹렬한 분노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이 가련한 사람의 안에 들어 있는 마귀도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는 그보다도 오히려, 이 불쌍한 사람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사탄의 세력이 그리스도 앞에서 위축되어 있는 순간에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분에게 나와 머리를 숙여 절하였는지도 모른다.
Ⅲ.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귀신을 추방하기 위해서 귀신에게 하신 명령의 말씀(8절).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넣어 주셨으므로 그가 그리스도에게 달려나와 엎드려 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할 때에 그를 구원하기 위해 능력을 나타내시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진정으로 간구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 그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역사 해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마가복음 1장 17절의 말씀, "이는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 한 그 실례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도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추방하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그러하므로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들어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Ⅳ. 마귀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가진 두려움. 그 사람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였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한 그 소리는 그 불쌍한 사람의 혀를 이용한 마귀가 한 것이다.(7절). 이와 같은 소리는 앞에서도 "더러운 귀신"이 표현한 일이 있었다(막 1:24).
1. 마귀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높으신 신이라는 의미이다. 엘리온(Elion)에 의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당시에 페니키아 사람들이나 이스라엘의 인접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귀는 바로 그 호칭에 의하여 예수를 불렀던 것이다.
2. 마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였다. 가장 악한 입으로부터 나오는 가장 선한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고(고전 12:3)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류에 따라서는 "더러운 귀신"에 의해 그렇게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능숙한 말에 의하여 그를 판단할 것이 아니고, 그 열매를 보아서 그들을 알게 된다. 입에 붙은 경건은 쉬운 것이다. 가장 말을 잘하는 외식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밖에는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마귀는 그 이상도 부를 수 있다.
3. 마귀는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어떠한 관계를 갖는 것을 부인한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무엇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아무 일도 같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 앞에 설 수 없고 넘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4. 마귀는 예수의 노여움을 면하기를 바랐다. "원컨대" 이 말은 "최대의 존경을 표하며 간청하오니 제발 비오니, 내가 본인의 허락을 얻어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지만, 비록 당신이나를 여기에서 내보내려 한다면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내가 여기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가서 불행한 일을 행하는 것을 막지 말아 주기 바라오. 나는 이미 선고를 받은 줄 알고 있으나, 나를 어두운 감옥에 보내지 말고, 삼킬 자를 찾아 이리 저리 다니는 것을 막지 말아 주기 바라오"라는 의미로 확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Ⅴ. 그리스도께서 이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그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이러한 기사는 마태복음에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의 이름을 알아내어 "아침의 계명성"과 같이 그 이름을 부르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요구하신 것은 "내 이름이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을 들을 때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추측한대로 그 흉악한 귀신의 엄청난 수와 세력에 대해서 듣고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에서 군대(일 군단)의 병력은 6천 명으로 구성했었다는 설도 있고, 만 이천 오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 로마군의 한 군단의 구성 병력 수는, 지금 한 연대의 병력 수가 항상 일정하지 않은 것처럼,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군대 귀신의 세력에 대해서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1. 군 병력. 일 군단은 완전히 무장을 갖출 수 있는 병력이다. 마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 인간들과 인간의 성결과 행복에 대해서 싸우려고 무장을 하였다. 마귀의 세력이 그러하므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들에게 대한 것이다(엡 6:12).
2. 그 군대 마귀는 많은 수였다. 그 마귀는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수가 많음을 시인하였다. 아니 오히려 자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수가 많으므로 다루기 힘들 것을 바라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불쌍하고 비참한 한 인간을 수비하기 위하여 일 군단의 마귀의 병력이 배치되었으니 이 얼마나 흉악한 귀신들의 엄청난 수이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 원수들의 집단이랴!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선 원수들이 많은 것이다.
3. 그 마귀들은 뜻이 일치하였다. 그 군대 마귀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그 군대 마귀는 동일한 악한 뜻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을 추방하고 그들끼리 분쟁 한다고 한 바리새인들의 트집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 군대 중의 어느 하나도 그 나머지에 대해서 배반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마치 하나와 같이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4. 그 군대 마귀는 대단히 강하였다. 누가 일 군단의 병력 앞에 맞서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영적인 원수들 앞에 한 걸음의 행진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엡 6:10). 제아무리 일 군단의 마귀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이들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5. 한 군대 안에 지휘관이 있는 것처럼, 그 군대 마귀들에게도 지휘관이 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이 말은 또한 그 밑에 낮은 계급이 있음을 맗 주는 것이다. 마귀와 그 하졸들, "용"과 그 하졸들, 마귀들의 왕과 그 신하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에 그 원수들의 세력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Ⅵ. 이 군대 마귀는 그리스도에게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이는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11,12절). 그 산은 마귀 들린 사람이 헤매고 다니던 그 산이다(5절). 그 군대 마귀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10절). 그 군대 마귀는 예수에게 그들을 지옥에 인도하거나 지옥에 가두어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을 뿐만 아니라(마 8:29), 예수께서 자기들을 추방하실 것 같으므로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구 하였다". 그 이유는 이 불쌍한 사람을 통해서 자기들이 이 지방을 공포에 떨게 하였던 것이고 많은 불행한 짓을 저질러 왔으므로 유리한 활동무대를 확보해 논 셈이기 때문이다.
그 군대 마귀들은 그 지방에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 듯 보인다. 아니 그 보다도 악을 저질러 왔다고 본다. 그것들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으나" 자기들을 섬기지 않았으나(욥 1:7), "초장이 된 산"이 그들에게 목장으로 허락하였던 것이다(욥 39:8). 그러면 왜 그 군대 마귀들은 그 지방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 그로티우스(Grotius)는 "이 지방에"는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렸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쉽사리 그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그 군대 마귀들이 경험을 통해서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성질이나 풍습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것들은 자기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보다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불행한 일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허락하실 것임으로, 어느 특별한 사람의 몸에 들어감으로써 불행하게 하는 것보다, 그 돼지 떼에 들어가 그것들을 죽여버림으로써 이 지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예수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와 다른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그것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Ⅶ. 그리스도께서 그 마귀들에게 돼지 속으로 들어갈 것을 허락하셨고 그렇게 하여 결국 돼지들은 갑자기 몰사 당하게 되었다. "허락 하신대"(13절) 그리스도께서 금하시거나 제지시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마음먹은 대로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다라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귀들이 얼마나 강하고 약한 원수들인가를 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홀로 그것들을 지배하실 수 있고 정복할 수 있는 당신을 그들의 친구로 삼아 주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곧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이는 "한 속담에 이르기를……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었다 하는 말"과 같이 (벧후 2:22) 더러운 것들은 가장 그들에게 알맞은 "더러운 구덩이에" 뒹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돼지와 같이 정욕의 "더러운 구덩이"를 좋아하는 자들은 사탄에게 알맞은 거주지가 되는 것이며, 바벨론과 같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는 것이다(계 18:2). 그러나 순결한 심령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이다. 마귀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간 결과는 곧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g id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만일에 사탄이 그와 같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면 그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 물 속에 빠져 익사하였을 것이다. 악한 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천사들의 보살핌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Ⅷ. 곧 이 모든 소식이 그 지방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주인에게 고용되어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들어가 자기들이 당한 사건을 고하게 되었다(14절).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나오게 되었다.
1. 그들이 나와서 그 불쌍한 사람이 그와 같이 놀라웁게 치유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15절). 그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그 사람을 보고 그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았을 때에 그들이 이제까지 그의 모습을 보고 여러번 놀라운 표정을 지었던 것과 같은 표정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더욱 놀라운 표정을 지은 것이다. 사탄이 그에게서 쫓겨 나가자 그는 곧 제 정신이 돌아오고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된 것이다. 근엄하고 진지하며, 규정대로 침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심령 안에서 마귀의 세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하여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정신이 들어서 새롭게 된 것을 보고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였다. 이 변화된 모습이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시인하게 하였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시 96:4).
2. 그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돼지를 손실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에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떠나 주기를 원하였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 하더라"(17절).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많은 살찐 돼지 떼의 손실에 대해서 흡족히 보상해 줄 만한 어떤 선을 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마귀들은 그들이 바랬던 일을 이룬 셈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보다 악령들로 하여금 죄 많은 영혼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하게 하는 운전대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더 많은 형벌을 당하게 될까봐 그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만일 그들이 그들의 죄를 멀리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생명과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돼지를 멀리하기가 싫어서, 결국 그들은 그들의 구주를 버리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무한한 욕망을 따라 가기보다는 마땅히 그들의 욕망을 그리스도 안에서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기대를 걸었어야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귀들과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 이렇게 지배하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다면 그분을 우리의 친구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 만일 마귀들이 이 지방에 더 머물게 된다면(10절), 홀로 그 마귀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분도 우리와 같이 머무르시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의논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에 오히려 예수께서 멀리 떠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이상한 잘못된 육 적인 판단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이 마땅히 예수에게 나아와야 할 대신에 그들은 예수를 아주 멀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렘 25:6, 7)
Ⅳ. 그 불쌍한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 행한 이야기.
1.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 하였으나"(18절) 아마 그가 다시 귀신에게 사로잡힐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보다도 오히려 자기에게 착한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에게 그곳에서 떠나달라고 요구하는 그런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싶지 않고, 예수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해서 따라나서려고 하였을 것이다. 악령으로부터 자유 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사귀고 교제를 갖고 싶어하지 않을 수 없다.
2.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 같이 갈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었다".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외식의 냄새를 풍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비록 예수께서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그를 보호해 주실 수도 있고 가르쳐 주실 수도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도 그에게는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는 마땅히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시고"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함으로써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고, 그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예수께 나와서 예수를 믿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능력보다는 그리스도의 동정심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에게 그의 처해있던 비참한 상태에서 "주께서 어떻게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시었다.
3. 그 사람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지방 일대에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전파하였다."(20절). 이 점은 바로 우리들 자신도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로 감화를 받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와 우리의 형제들에게 빚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였나 보라.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에게 더 나아간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사 하심에 대하여 놀라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임에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이히 여기"고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사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 (마가복음 5:21-34)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그 지방을 떠나 주시기를 바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오래 머물러 그들의 마음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곧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어 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었다"(2절). 그리스도를 영접해 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그리스도를 크게 환영하면서 영접하는 다른 사람들이 잇다. 멸시를 받은 복음은 "다시 저편으로 건너"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그리스도에게 간청한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Ⅰ. 자기 병든 아이를 고쳐 주시기를 바라서 예수께 나와 간구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위가 당당한 "회당장"이었다. 회당장은 회당 안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며, 또한 종교 법원의 재판관 중의 하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종교 법원은 각 성마다 있었고 스물 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에게 나온 이 회당장의 이름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야이로라고 나와 있다. 비록 그가 회당의 어른이었지만 아주 겸손한 태도로 예수에게 나와 예수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외관상으로는 예수에게 지나칠 만큼, 최대의 존귀를 예수에게 드리면서, 대단히 끈기 있게 그가 원하는 자비를 그리스도에게서 받을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그런 자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아주 열심히 "많이 간구하였던" 것이다. 그 회당장이 나와서 간구 하는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그에게 "어린 딸이"있는데, 나이는 열두 살이며 그 가정의 귀염둥이다. 그런데 불행하게 "그 어린 딸"이 지금 병상에 누워 "죽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면" 그 아이가 무덤 문 앞에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되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될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회당장이 처음에 예수께 나와서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뒤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처음부터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 마 9:1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간청을 수행하시기를 계속하시었다. 누가복음 8장 42절-49절도 참고하여 보라. 그리스도께서 그 회당장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여 "그와 함께 가시었다".(24절).
Ⅱ.여기에는 은밀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병 고침을 받으려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가 의도하고 예수께 나온 "구원"을 얻었다. 이 신유의 은혜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당신의 시간을 선용하시며, 그 귀중한 시간의 한 순간도 결코 무의미하게 보내시지 않으신 것을 보라. 그리스도의 많은 설교 말씀과 기적들이 "길가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신 6:7). 그럼 아래에서 이 병 나음을 받은 여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이 불쌍한 여인의 비참한 상태. 이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것이다. 그 결과는 의심 없이 그 여인을 대단히 허약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여인의 생애에서 위안을 빼앗아갔을 것이며, 그 여인의 날을 단축시키려고 위협하였을 것이다. 그 여인은 자기가 곧 나아지리라는 위안과 충고를 의사로부터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이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사들이 처방해 준 많은 약과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을 것이다. 그 여인이 의사들에게 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동안은 그들은 그 여인을 고치 수 있다는 소망을 주어 계속 치료를 받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이 그 의사들에게 치료비를 대느라고 모든 가산을 다 탕진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 병은 불치의 병이라고 그 여인을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1)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생명을 위해 그 모든 소유물을 내어놓는다"(욥 2:4). 그 여인은 자기의 건강과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의사들에게 다 허비한 것이다.
(2) 그들의 의사들이 그들에게 가장 나쁜 병이 되는 그런 화자들은 불행한 것이다. 그 환자들은 의사들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대신에 그들에 의해서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3) 약으로 "아무 효험이 없는" 그런 병자는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병이 더 많은 근거를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보려고 헛된 노력을 많이 하고 나서 그리고 그 의사들에게서 "아무 효험이 없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확실한 피난처"로 발견케 될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그들이 "최후의 피난처"로 삼은 자들에게는 "확실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2. 그 여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기가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강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비록 그 여인에게 용기를 줄 만한 어떤 실례가 그 이전에 없었지만,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속으로 말하였던 것이다(28절). 그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 병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상속된 힘으로 병을 고치심을 믿었던 것이다. 그 여인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슬픔을 이야기하듯이 그리스도 앞에 정숙하게 이야기 드릴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은밀하게 병 고침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의 신앙은 그 여인의 경우에 적합하였다.
3. 그 여인의 그런 신앙은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되었다.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에 그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7,29절). 순간적으로 "혈루 근원이 마르매" 병들기 이전의 건강한 때와 마찬가지로 그 여인의 전신이 완전히 나은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병 고침이 전적으로 hrl적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었다. 자연적인 치료 방법에 의해서 병 고침을 받는 환자들의 경우는 그들의 원기 회복이 느리고 점차적으로 되어가나 순간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덕이 완전하다"(신 32:4).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는 죄의 병을 고쳐 준 분들은 그들 자신 안에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나 새로워지는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숨은 환자가 누구인가를 물으셨으며, 그 여인이 당신에게서 능력을 나가게 한 그 환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여인을 격려하시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30절). 예수께서 이 능력이 소모되므로 인해서 어떤 능력의 결핍에 의하여 이 사실을 아신 것이 아니고, 그 사실이 이루어질 때에 예수께서 선을 행하실 때 느끼시는 본래 타고난 분리할 수 없는 기쁨과 능력의 기민한 역사에 의해서 아시었다. 그리고 그 환자에게 모욕을 주시려고 불쾌한 낯빛으로가 아니고, 그 환자에 관심을 갖고자 친절하게 물으시면서 그 장본인이 누구인가 보고싶어 하신 것이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라." 제자들은 건방지거나 버릇없음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의 질문에 거의 비웃는 태조를 보였던 것이다(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마치 이 질문은 합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비웃는 듯한 물음을 못들은 것처럼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었다." 그 여인의 무례한 행위를 책망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그러한 신앙을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의 그와 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그 여인의 병 나음을 보증하고 확증하며, 그 여인에게 은밀히 받은 신유의 은혜를 재가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서 알아내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시선이 곧 그 여인에게서 머물었기 때문이다. 남 몰래 범하는 죄의 행위가 그러하듯이 남 몰래 행하는 신앙의 행위는 주 예수에게 다 드러나는 것이며 그분의 시선 아래에서 다 탄로 나는 것이다. 만일에 그리스도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밀착하여 그분으로부터 능력을 취해 낸다하여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실을 아시며 그 사실로 인해 기뻐하시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자, 그 여인은 "두려워하며 떨며" 주 예수에게 나와 엎드려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33절). 그리스도에게 병 나은 환자들은 당연히 그들이 승리하여 기뻐해야 할 때에 자주 두려워하여 떠는 것이다. 그 여인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담대하게 기쁨으로 예수에게 나올 만도 한데,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떨며" 나온 것이다. 이 사실은 놀랄 일이다. 그러나 기뻐하여 놀랄 일인데 그러지를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그 앞에 엎드렸던 것이다. "두려워하여 떠는" 자들에게는 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일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음을 잊지 말라.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일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음을 잊지 말라. 예수 앞에 자기를 낮추고 자기 자신들을 그분 앞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모든 사실을 여쭈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은밀한 교통을 갖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과, 병 고치는 능력이 그분에게서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 하신 사실을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아무 일도 그리스도에게 숨겨져서는 안 되며, 그분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말을 그 여인에게 하셨나 주의해 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34절). 신앙이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신앙 위에 영광을 허락하시는 일을 주의하라. 지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는 모든 것이" 이 하늘에서 재가를 받게 됨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만일에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해서 "아멘"으로 시인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우리의 신앙의 기도와 소망에 대해서 "아멘"으로 인 처 주시면서 "그렇게 될지어다. 너희에게 그렇게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평안히 가라"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네가 네 병 고침에 대해서 솔직히 고백하였고, 효과적으로 병 나음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니 안심하도록 하라. 그리고 병 나음을 받은 것으로 위로를 받으라"는 의도로 하시었을 것이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심령의 병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들도 "평안히 가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마가복음 5:35-43)
질병과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첫째 아담의 죄와 불순종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둘째 아담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두 가지는 정복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불치의 병을 고치시고 나서, 지금 여기에서 죽음을 정복하려고 당당히 행군하고 계시는 것이다. 마치 본 장의 서두에서 포악한 마귀를 그리스도께서 정복하고 승리하신 것처럼 말이다.
Ⅰ.회당장 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도다. 그리스도께서도 너무 늦었으니,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소용없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져 왔다. 생명이 존속하는 동안에는 소망도 잇고 치료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이미 종식되었을 때에는 과거의 회상만 남을 뿐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 보통 이 경우에 있어서 합당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사태는 이미 결정 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복종해야 한다. 나는 잠자코 따라야 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 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이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말씀으로 우리는 그러한 때를 당했을 때에 우리의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는 것이다(시 131:2). 그러나 여기의 경우는 비범한 것이다. 그 어린아이의 죽음이 다른 일반적인 경우와 같이 대화를 중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 슬퍼하는 아버지에게 그가 자기 아들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간구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해 주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도중에 그 여인을 고쳐 주시기 위해 머물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그 일로 말미암아 더욱 피해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기회를 잃지는 않을 것이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는 야이로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야 할는지 그렇지 말아야 할는지 주저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집에 누가 죽어 있을 때에 마치 누가 병들어 있을 때에 그러하듯이 사역자들이나 교우들의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실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곧 결정지으셨다. 내가 오고 있는 것이 소용없는 것처럼 "두려워 말고" 내가 이 일로 좋은 성과를 내게 될 것을 "믿기만 하라"고 하시었다.
1. 우리는 죽은 우리의 친족들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 된다. 또한 "소망이 없는 자처럼" 그들을 인해 슬퍼해서도 안 된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음으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렘 31:15) 한 말씀을 보라. 또한 그 뒤에 계속되는 말을 보자.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려,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렘 31:16, 17). 그러므로 약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2. 그러므로 그러한 침울한 때에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슬픔이나 두려움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요법은 신앙이다. 그들로 잠잠하게 하고 "오직 믿기만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확신을 가지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에게 최선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라. 그러면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죽은 아이가 누워 있는 집에 들어가시면서 몇 사람만 택해서 동행하게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던 무리들로 말미암아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신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얻게 하였으나, 지금은 그 무리들을 다 떼어놓고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제자들 중에 대표격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들어가시었다. 이 세 사람의 수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대해서 증인으로써 소임을 감당할 수 있는 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런 소임을 감당할 만한 인원만을 동행하게 허락하신 것은 헛된 영광을 보도록 한 것이 아니다.
Ⅳ. 그리스도께서 죽은 아이를 살려 주시었다. 여기에 나온 이 사건의 이야기는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살펴 본 이야기와 같은 점이 많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1. 그 어린아이는 대단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그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마치 꽃이 채 피기도 전에 곧 꺾이고 시드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다 자라기도 전에 죽음이 그에게 찾아온다면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불행한 일이 우리를 슬프게 할 때에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 5:29)하며 울게 된다.
2. 이 아이가 사실로 그리고 참으로 죽었다는 것은 논할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예수의 이 말씀에 비웃었던 것이다. 이 말씀이 비록 비난받을 만 했어도 이 사실을 증거 하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3. 그리스도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그 기적에 대하여 증인이 되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내 보내었다. 그들은 슬픔에 빠져 시끄럽게 울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너무 무지하여 예수께서 죽은 아이를 "잔다"고 말씀하시자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비웃고 흉보았던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이 아이의 부모를 여기에 일어날 기적의 증인으로 취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기적을 믿을 만한 신앙이 엿 보였고, 이 기적이 일어남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기쁘게 하고 위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으로 침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큰 슬픔을 당하였어도 속으로만 울었을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는 한 마디 능력의 말씀으로 이 아이를 살리시었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이 여기에 아람 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더 강한 표현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 언어를 사용하신 듯하다. "달리다굼(Talitha, Cumi)"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말하기를 유대인들에게는 환자에게 약을 주면서 "네 병에서 일어나라"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는 네가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에게 대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의미는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라"는 것일까? 그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죽은 자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일어나도록 효과를 내기 위해서 능력이 이 말씀과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격언에 "네가 명령하는 것을 주어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명령하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하시는 동안에 역사 하신다. 그리고 명령에 의하여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나도록 하는 것까지도 당신이 기뻐하시므로 명령하시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본래 죽은 자들이어서 여기에 죽은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자들을 부르는 그러한 것이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 하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하신 이 말씀에 의해서 무익하거나 헛되지 않은 것이다.
6. 그 소녀는 살아나자마자 곧 "일어나서 걸었다"(42절). 우리가 태만과 무관심의 침상에서 "일어나서," 신앙적 대화 가운데서 "걸으며,"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 안에서 여기 저기로 "걸을" 때에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살아날 것이다. "나이 열두 살이라." 이 소녀와 같이 "열두 살이"되는 모든 소녀들도 그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난 자들처럼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타고 난 허영심에서 일어나서 걸어야 되는 것이다.
7. 이 기적의 사실에 대해서 보거나 들은 모든 사람들은 그 기적에 대해서나, 그 기적을 나타내신 분에게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그들은 그 기적 안에 무엇인가 비범하고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이라 단정하거나 추론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놀람은 활기 있는 신앙에 이르도록 역사 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경탄과 감탄에 머무르고 말았다.
8. 그리스도께서 그 기적을 소문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시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 사건은 다만 수행했던 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더 알게 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이 사망을 이기시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 줄 좋은 실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건에 대한 실례는 당신자신의 부활의 기적이 증거 되기까지는 당분간 비밀로 간직하시려고 한 것이다. 기본적인 중점이 놓여 있는 증거의 다른 일부가 준비되기까지는 다른 일부의 증거는 보류되어야 했다.
9. 그리스도께서 그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 것은 그 소녀는 다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한 식욕을 가질 만큼 좋은 건강 상태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도 연한 젖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벧전 2:1, 2).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었을 때에, 곧 그에게 먹을 것을 즉 그가 바로 지음을 받은 그 흙에서 나온 식물을 주어서 먹게 하였던 것이다(창 1:29). 그와 같이, 지금 그리스도께서 새 생명을 주시고 나서 무엇을 먹게 하기 위해서 염려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생명을 주시게 되면, 그분은 생계 문제까지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마 6:25). 그리스도께서 영적 생명을 주시는 곳에는 영생에 이르도록 양육하기 위해 음식물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버리지 아니하며" 또한 "당신의 손으로 하는 일"에 결코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첫댓글 카페지기가 회원님께 드리는 간곡한 부탁의 글입니다
어느덧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연말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 겨울 난방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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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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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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