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잠실역에 6시반까지 가려면 고양이 세수만 하고 가더라도 최소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우리 동네에서 잠실까지 가는 버스는 주야장창 많다. 내가 생활 영역을 잠실권으로 만든 것이 아닌, 남양주라는 환경적 요소가 나를 잠심생활권으로 만든 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한 단면이다.
새벽 버스안에서, 어둠속에서 붉으스래 동이 트는 것을 낯설게 본 아들녀석이 창세기적 숭고함을 느끼는 것을 그의 얼굴에서 스치듯 본다. 벌써부터 체험 하나를 겪는다.
간단하게라도 아침을 챙겨먹이려고 지하실을 헤메다 올라오니, 잠실역 1번 출구에는 이미 여러 가족들이 도착해 있었다.
아쉽게도 이상붕선배님과 임진모선배님이 불참한 가운데, 민인기이사장과 잠실운동장에서 실컷 헷갈리다 온 이한구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싣고 버스는 영주행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일찍 일어난 영향으로 버스안은 잠에 떨어져 이내 조용해졌다.
중간에 들른 여주휴게소까지는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광까지도 매일 보아온 풍경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함이 잠으로 더 몰았는 지도 모른다.
팜파티는 11시부터이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영주까지 가는 길은 생각외로 잘 뚤려 있었다. 남는 듯한 시간을 61회 선배님이 살고 계시다는 백년 고택이나 소수서원을 잠시 구경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오며가며 하는 시간이 의외로 많이 들겠단 생각에 운전대를 다시 영주로 내쳐 달려서 도착했다.
10시가 채 안되었다.
은퇴를 앞둔 이들의 로망은 귀농,귀촌인 경우가 많다.
수십년간 들볶인 도시의 복잡함을 떠나는 것, 자체를 귀농귀촌으로 생각해 준비없이 무작정 떠나보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보따리를 싸들고 올라오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장사나 귀농이나 3년을 넘겨야 성공여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차에서부터 내리면서 느낀 것은 여느 농가와는 사뭇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없다.
흔히 농가에서 그 집의 재산 목록 1위로 키우다가 장남 대학등록금으로, 시집 장가 밑천으로 쓰려고 한두마리씩 키우던 소가 안보이고 누렁이가 안보인다.
주변엔 왠 야생화들만 빼곡하다.
김CEO에 이어 풀잎, 야생화쪽으로 사업 방향을 잡으신 형수님CEO의 사업부지 한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유기농 요거트 사업까지 손을 대었다하니, 천일농장그룹이 경북지방이 좁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날도 멀지 않았음을 곧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보통 귀농귀촌은 남자들만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도시 친화적인 부인들의 호응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온 가족이 내려와, 각자의 삶을 추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김선배님은 분명 3대이상의 덕을 쌓았던지, 조상묘자리를 잘 쓴 덕이 아닐까? ㅋㅋ
개회선언에 이어 1부 체험이 이어졌다.
체험은 야생화 화분만들기, 나락으로 쌀 만들기, 왕대추따기, 미꾸라지 잡기 체험이 있다.
이 중 2가지를 선택해 1,2부에 한가지씩 체험해 보는 것이다. 내가 시골에 살아도 당장이라도 해야할 일들이다.
그러나 수십년을 도시손으로 살아온 나의 손은, 미꾸라지를 잡을 때도, 쌀 나무 열매를 가공하는 기계앞에서도 덜덜 떨고 있었다.
백미보다 더 깎인 것이 현미쯤 된다고 달달 외우고만 다녔지, 오늘 와보니 현미와 백미는 그 기계1,2층에 사는 이웃 사촌이였다. (이런이런~)
이 모든 것이 있는 자산을 예쁘게 포장해서 내놓고 자원봉사자와 재능기부인을 동원하여 꾸며지는 팜파티의 모든 것이 첫째 딸의 기획이라니, 대견하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주기가 있다.
아홉수나 삼재가 들었다는 것을 미아리 고개에서 가끔 들었는 데, 그들까지도 주기가 있기 때문이다.(기묘하죠?)
인간도 기다 걷고, 걷다가 이내 지팡이 신세를 지다가 결국 간다.
주기적으로만 얘기하면, '인생 뭐 있어!'가 된다.
그러나 인생을 그렇게 주기적으로만 얘기할 순 없다.
욕망과 목적을 이루려고 치열한 젊은 시기를 다 보내고, 아들딸에게 바톤을 넘겨준 다음, 늙어서까지도 그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을 다 내려놓기에는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한다.
어떻게 일찌감치 내려와 만오천여평(맞나?)의 장수면 농장주로 거듭 날 수 있었던 얘기를, OK목장에 나오는 크린트이스트우드의 얘기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듣고 싶었지만, 정작 오늘 그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동네 유지나 이웃집 친지, 친구들, 시의원과 공무원, 심지어 수십명의병아리 유치원생들까지 오늘 그가 대접해야할 손님들이다.
그들과 함께 쌀 나무도 쪄야하고, 연못에 사는 비단 잉어들 밥먹이도 병아리들에게 챙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그의 모습이 차려입은 계량 한복과도 잘 어울려서 마치 도사같다.
30년이 넘었다고하니 도사가 다 되었을 것이다.
1부 체험이 끝나면, 연못위 공터에 차려진 점심식사 시간이다.
뷔폐식으로 꾸며진 식단은 영업집처럼 반찬뿐아니라, 밥과 국도 취향따라 먹을 수 있게끔 2,3가지로 준비해 놓았다.
맛있는 냄새따라 왔을까? 의자도 부족하고 접시도 떨어졌다.
인사동이나 송파쪽에서 대기업이 하는 집밥 컨셉의 식당들이 발 디딜틈 없을 정도로 성업중인데, 아마도 선배님의 큰딸 머리에서 베껴간 건 아닐까? 히히
맑은 농촌 공기와 식탁에 놓여진 반찬들. 딱! 막걸리 안주다. 그러나 막걸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한구후배가 아마도 매형께 드리려고 울트라 이상의 거리를 찾아 헤멨어도 막걸리는 없었다.
소박함과 막걸리의 질퍽한 만남을 우려한 기획인지도 모르겠다.
점심식사에 이어 1부와 똑같은 2부가 진행되었고, 주로 스릴넘치는 미꾸라지잡기 체험으로 몰렸다.
이어진 음악회에서도 다양함과 배려가 묻어났다.
20대들의 거친, 다듬어지지 않은 대학생 동아리 밴드와 40대들로 이뤄진 음역대가 똑같은 4인조 기타 동호회의 연주에 맞쳐 연못의 분수도 춤췄고, 물레방아도 흔들 흔들거렸다.
내년엔 저들의 음악도 한층 성숙될 것이다.
가을과 농촌의 청명한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
모든 긴장을 풀어놓은 탓인지,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잠을 뿌리치지 못하겠다.
1등에 가까울수록 천일표 농작물이 더해지는 경품 잔치에서는 공교롭게도 '휘문'에서 3,4,5등이 나란히 나왔다. 주최측의 농간이다. ㅋㅋ
교통체증을 우려해 서둘러 나오는 버스간 안에다가, 마치 시집간 딸에게 챙겨주듯 바리바리 앵겨준다.(정회장님의 선물도 더해져 더 풍성하다)
이러고도 거덜나지 않을까? 내일부터 굶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추석을 코앞에 남겨두서인지, 팜파티를 다녀온 느낌은 처갓집을 다녀온 느낌이다.
면장님! 내년에는 혹시 시의원 뺏지를 달고 마이크를 잡는 건 아닐런지요? ^^*
(어제는 한쪽 가슴에 심어, 2년동안 잘 써온 (chemo)port를 제거했다. 부분 마취를 하고 떼어내는 간단한 시술이지만, 가슴 한켠이 뻐근하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지만, 굳어진 얼굴 표정과 자주 날리던 헛소리도 자연히 줄어 들었다. 분위기를 망친 폭탄은 아니였을까? 이제와 걱정된다. 같이 간 선후배께 죄송하다. 내년에는 올해 가지고 가지 못했던 행복한 얼굴을 가져갈 것을 다짐하며 사과드린다. 그럭저럭 민총무의 슥제를 끝냈다.ㅎ ㅎ)
첫댓글 종현이형 잘봤어여~역시 맛깔나는글솜씨는 그대로입니다..
글로는 이미 서브3네요. 종현 아우님, 잘 봤습니다.
후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