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따스한 손길이 남긴 체온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꽃을 가꾸듯 정성스레 물 뿌리고 보살펴간 자리마다 내일의 꿈이 익어간다. 육영수 여사가 가신지 어느새 1년. 그의 자애로운 어루만짐을 받은 자리엔 새 움이 트고 그를 기리는 남은 사람들은 그 훈훈한 정을 되살리며 오늘도 산다.
어느 곳 하나 손질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불꽃을 튕기는 실습장에도 그의 숨결이 담겼다.
육영수 여사가 불우한 청소년들을 내일의 산업역군으로 키우기 위해 지난 73년에 개원한 정수직업훈련원은 그동안 한국 최대의 기능공 양성소로 성장했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238의 7천7백70평 대지에 자리잡은 훈련원은 오늘도 훈련생 4백8명이 더위도 잊은 채 선반을 돌리고 용접 불꽃을 튕기고 있다.
생활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 채 각종 기술을 익히며 내일의 꿈을 키우고 있는 이들 훈련생은 모두가 자신들의 오늘이 그분의 높은 뜻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명심하고 훈련과 생활을 착실히 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훈련원이 문을 연 것은 지난 73년 9월 1일. 한해 전인 72년 당시 미국 하원 오토. E. 패스먼 의원이 육 여사에게 보내온 25만달러를 기금으로 불우청소년들을 공업입국의 기수로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실습장 기숙사 등 2천3백50평의 훈련원 건물은 구석구석까지 육 여사의 자상스러운 손길이 닿아 있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73년 6월 어느날 비가 많이 와 온통 진창이던 공사장에 육 여사가 예고없이 나타나 공사현장을 모두 둘러보고 인부들에게 “이 집은 앞으로 불우청소년들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될 곳이니 내 집을 짓듯 튼튼히 지어달라”고 금일봉을 주며 당부했다.
그해 10월 17일에 있었던 개원식에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육 여사는 훈련생들에게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시련을 극복하여 용기와 슬기를 갖고 유능한 기술인이 되어달라”며 친자식처럼 타일렀다.
식이 끝난 뒤에는 훈련생 한명 한명을 불러 옷차림 등을 살펴보고 식당 영양사들에게는 “불쌍한 아이들이니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밥을 잘해 먹이라”고 몇번이나 부탁했다.
그해 겨울 에너지파동으로 모든 국민이 심한 추위를 겪고 있을 때 하루는 느닷없이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실습장 온도가 몇도냐”고 물어와 섭씨 10도라고 대답하자 훈련생들이 몹시 춥겠다며 곧 겨울 내의 한벌씩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인 74년 7월 6일 훈련생들이 기능경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자 선수들과 교직원을 청와대로 초청,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모습을 훈련생들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설, 추석 때에는 잊지 않고 훈련생들을 위해 떡과 고기 등을 보내는 등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왔다.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던 지난해 8월 15일 부음이 전해지자 훈련원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여사를 잃은 슬픔이 누구보다도 컸기 때문이다. 교직원과 훈련생들은 이날부터 강당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날까지 밤낮을 지키며 울었었다.
여사는 가셨지만 그 높은 뜻은 그동안 이 훈련원에서 훌륭히 결실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 9월 2일과 올해 2월 28일 배출된 1기생 3백 52명이 이미 각 기업체에 배치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남달리 근면하고 착실한 이들을 써본 기업체들은 훈련원에 더 많은 채용신청을 하고 있어 오는 29일에 나갈 2기생 2백 58명도 이미 직장 선택을 끝낼 정도이다.
훈련원도 패스먼 위원이 추가지원한 25만달러로 밀링 등 실습기계 31종 1백62개를 더 들여오고 실습장과 기숙사도 6백평을 늘릴 계획이다.
이 원장은 “훈련생 모두가 열심히 배워 훌륭한 산업역군이 되는 것만이 고인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온 정열을 쏟고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