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울릉도는 보물섬
−오쿠무라(奥村)집안: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보존되고 있던 6권의『울릉도우회보(鬱陵島友会報)』를 흔쾌히 저희(시마네현 다케시마자료실)에게 보여주셨던 오쿠무라 헤이지(奥村平治)씨로부터「아버님(오쿠무라 아츠시(奥村亮))이 제게 남긴 편지형식의 문서를 발견했습니다」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헤이지 씨는 문서를) 읽은 후에는 개인정보가 많으니 소각해달라는 조건으로 (편지형식의)문서에 대한 복사본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편지형식의 문서는)1976년 2월에 쓰인 것으로, 생년월일로 따지면 부친인 아츠시(亮)씨가 67살이던 때, (당시) 41살이던 장남인 헤이지(平治)씨 앞으로 쓴 문서입니다. 「네게 자세히 얘기한 적 없는 일을(お前に詳しく話したことがないことを)」이라며, 오쿠무라 집안의 역사, 선조의 계명(戒名), 명일(命日), 오쿠무라 헤이타로(奥村平太郎)씨와 오쿠무라 아츠시(奥村亮)씨가 울릉도에서 고군분투한 추억 등이 쓰여 있었으며, 자손들에게 거는 기대와 불사(仏事)를 게을리 하지 말 것 등의 교훈도 담겨 있어, 어떤 면에서는 유언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헤이지(平治) 씨는 (이 편지형식의 문서를) 직접 건네받은 기억이 없어 부친의 은근한 애정을 되새기는 듯 했습니다. 이 문서를 토대로 울릉도, 다케시마(독도)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발췌해 보고하고자 합니다.
오쿠무라 아츠시(奥村亮)씨는 현재의 시마네현 이즈모시(出雲市)에 위치한 G집안에서 5살 무렵, 오쿠무라 집안에 양자 형식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양부(養父)인 헤이타로(平太郎)씨는 G집안의 차녀와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어 G집안의 8번째 아이였던 아츠시(亮)씨를 장남으로 삼았던 겁니다.
(헤이타로씨가)아츠시 씨를 울릉도로 데려가게 되는데, 헤이타로 씨와 누나이기도 한 어머니의 귀여움을 받고 행복한 소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울릉도에서 유소년기를 보내고 지금의 시마네현립 오키수산고등학교(隠岐水産高校)의 전신인 오키상선수산학교(隠岐商船水産学校) 수산과(水産科)에 입학, 1928년 3월에 졸업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헤이타로씨는 통조림공장을 경영, 1905년에는 첫 출하도 했지만 이후에도 사업은 순조로워 울릉도에 3곳이나 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배운 전문지식을 살려, 부친의 오른 팔이 되어 일하면서 실력을 쌓아 고등어통조림 생산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해도 있었고, 일본본토나 동남아시아로 수출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헤이지 씨의 부인도 당찬 여인으로 울릉도에서 300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훌륭히 통솔했기 때문에 헤이타로 씨는 (안심하고)조선본토로도 진출, 강원도 주문진(강릉시)에 공장을 건설했으며, 아츠시 씨는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사업을 펼쳤습니다. 헤이타로 씨는 「울릉도로 건너갔을 무렵은 섬에 수목이 많고, 어류는 바닷가까지 몰려들었고, 조개류, 특히 전복, 소라와 같은 건 바위에 가득 달라붙어 있어 정말 보물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鬱陵島へ渡った頃は、島は樹木が多く、魚類は岸辺まで寄り集まり、貝類特にアワビ、サザエの如きは岩場にギッシリと付いていて、本当に宝の島と思えた)」고 자주 얘기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업 확대와 더불어 원료확보도 시급해져 1925년 3월부터는 오키(隠岐)지역 쿠미(久見)지구의 유력자인 야와타(八幡長四郎) 씨로부터 현재의 다케시마(독도)에서 강치 이외의 전복, 소라 등을 어획하는 어업권을 3년간의 계약으로 사들여, 출어했습니다. (당시에는)아직 돛단배를 통해 섬(독도)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바다가 거칠었을 때는 다케시마(독도)의 암초에 배가 충돌하는 사고도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1933년, 강원도에서 폭넓게 상업을 펼쳤던 T집안의 장녀와 아츠시 씨가 결혼, 이후 헤이지 씨와 여동생인 S씨도 태어났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지만, 다음 해인 1934년에 누나이자 어머니였던 양모(養母)가 사망합니다. 그리고 1938년 3월 9일 아침에는 부인이 스물여덟이란 젊은 나이로, 같은 날 저녁에는 양부(養父)인 헤이타로 씨가 57세의 나이로, 같이 입원했던 규슈대학부속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아츠시 씨는 같은 날, 동시에 2명의 가족을 잃어버린 괴로움을 통곡하는 듯한 문장으로 담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츠시 씨가 오쿠무라 집안을 짊어질 때가 왔습니다. 당시 29살일 때입니다. 1938년부터 2년 동안, 괴롭지만 필사적으로 실적을 올렸다는 자부심을 문서를 통해 돌아보고 있습니다. 1938년에는 직접 오키(隠岐)의 야와타(八幡長四郎) 씨와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어업권을 계약하고, 기동선(機動船)을 사용해 다케시마(독도)로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아츠시 씨는 1953, 1954년에 실시했던 시마네현 직원의 청취조사에도 응했으며, 다케시마(독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얘기해주셨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서도 마지막 1장에는 「메모 다케시마(독도)에 관해(メモ 竹島に関して)」라고 쓴 부분이 있습니다. 1976년에 아츠시 씨의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마음을 듣고 싶었는데 애석할 따름입니다.
1940년에 아츠시 씨는 마쓰에(松江)지역 여성과 재혼합니다. 헤이지 씨와 여동생인 S씨가 새엄마와 금세 친해지고 새 반려자도 2명(헤이지 씨와 S씨)의 자녀를 무척 귀여워해줘 기뻤다는 것,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며 헤이지 씨에게 미안해하는 내용도 담겨져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오쿠무라 집안의 통조림공장도 군수공장으로 변해, 통조림도 어패류만이 아니라 소고기 등도 추가됐습니다.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조선에서 귀국할 때의 고생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음번 스기하라통신 제25회 [태평양전쟁과 다케시마(太平洋戦争と竹島)]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친인 오쿠무라 아츠시(奥村亮) 씨가 헤이지(平治) 씨에게 보내는 아홉 장에 달하는 편지는 울릉도, 다케시마(독도)를 아는데도, 또한 당시 일본인의 생활상을 알게 해주는 데도 귀중한 자료라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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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무라 아츠시(奥村亮)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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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무라 헤이지(奥村平治) 씨 (2009년 2월 22일 촬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