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산종주의 추억
1월 31일(금)10:30 사당역 10번 출구 동영관광버스 - 2.1(토) 22:00
장소: 여수 돌산종주
03:22 분 출발- 14:06 주차장 도착(10시간 44분)
그린산악회 용마산, 석수, 후라시 대장님팀 43여명
코스: 돌산대교-와우산-114봉-소미산-과학관-무슬목-대미산-138봉-본산-작곡재(아침)-수죽산328봉-갈미봉-봉황산-394봉-274봉-울림치-금오산-향일암-향일암휴게소(32km(평속:3.4))
1. 여수란 이름.
경자년의 첫달 끝날의 늦은 밤, 한반도 남쪽 끝단의 도시 여수, 그중에서도 남쪽 섬 돌산에서 이월의 첫새벽을 여는 산행을 간다고 했다. 여수는 서울에서 먼 곳이라 좀체 가기 힘든 곳이며 남도여행 일번지로 유명한 곳이라 이름만 들어도 설레고, 산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기대감이 점층적으로 높아만 갔다. 게다 여수란 지명은 정말 겁나게 아름답다.
여수(麗水,고울 麗(려), 물 水(수))란 지명은 고전에서 먼저 나온다.
“金 生 麗 水 玉 出 崑 岡 (금생여수옥출곤강):
金은 여수(중국 운남성의 지역-이 지방 사람들은 물 속에서 모래를 건져내어, 백번을 씻어 걸러 내면 금이 나온다고 한다.)에서 나고,옥은 곤강에서 난다.”
구룡소 대장님이 준비하시는 옥룡설산 트레킹을 하는 중국 내륙 오지인 윈난(雲南, 운남)성에 가면 진사장(金沙江, 금사강)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곳을 여수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도 아래 시조에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을 말하기 위해 ‘금생여수’란 말을 인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며,
곤강에서 옥이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들 임마다 (아무 임이나 다) 따르겠는가?(박팽년)
남해 아름다운 다도해 쪽빛 물빛을 보고 이곳을 금이 나올 만한 아름다운 물, 여수라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하긴 요즘 여수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오동도, 우리나라 삼대 관음도량의 하나인 일출의 명소인 향일암, 버스커 버스커가 부른 불멸의 여수 찬가인 “여수 밤바다”로 화수분처럼 사시사철 사람들을 부르는 명소가 되었다. 실제 못지 않게 이름을 잘 짓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여수를 보고 다시 한번 깨닫는다. 名實相符(명실상부), 여수!
2. 여수(麗水)와 여수(旅愁)
이번 종주 산행이 문학기행은 아니지만, 여수하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맨부커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 한강의 데뷔작품인 “여수의 사랑”이 잉태된 공간이다. 한강의 소설을 읽은 사람은 자연히 여수의 사랑을 떠올리리라.
“여수의 사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정선은 일곱 살 때 고아가 되어 고향을 등진 여자고 자흔은 여수발 서울행 통일호 열차에 버려졌던 사생아다. '정선'은 집세를 나누어 낼 파트너를 구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과는 정반대 성격인 자흔을 들이고 그녀의 낙천성과 나태함을 마지못해 견뎌낸다. 정작 '정선'은 5살 때 어머니가 죽고 그 2년 후 술주정꾼인 아버지가 그녀와 동생을 함께 껴안고 자살을 기도하며 여수의 바다에 뛰어들었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자신의 삶을 죽여가고 있다. 음식을 게워내며 세상과 자신에 대해 혐오를 표출하던 정선의 손은 자흔의 손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게 되고, 단호히 세상을 거부하던 정선의 마음 역시 자흔을 향해 서서히 열리게 된다. 그러나 '정선'의 결벽증은 자신의 영역에서 '자흔'조차 밀어내고 있었고 마침내 자흔은 떠난다. 자흔이 떠난 후 부인하고 싶었던 상처를 직시하게 된 정선은 자신이 버림받았기에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공간 '여수'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소설을 끝을 맺는다.[네이버 지식백과]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정선에게는 여수가 상처의 근원이라면, 자흔에겐 상상의 고향이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선이 우연히 동거하게 된 자흔으로부터 상처의 근원인 여수의 냄새를 맡으면서 다시 상처가 심해지게 되고, 결국 자흔은 고향처럼 여겨졌던 여수에서 가까이 살을 맞대었던 기쁜 경험을 되살리며 여수의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자신이 섞이면 천애고아라는 자신의 외로운 숙명에서 벗어날 거라는 생각에 정선을 떠난다.(아마 여수로 가지 않았을까? 가기 직전에 분실한 그녀의 지갑에는 여수행 기차표 한 장이 있었다.) 결국 혼자 남아 토악질하던 정선 역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묵은 상처의 근원인 여수를 향해 기차를 타고 여수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립적이면서도 묘하게 공통점을 공유하기도 한 두 주인공이 드러내는 여수에 대한 사랑은 결국 여수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나 역시 여수에서 트레커로서 느낀 여수(旅愁)가 있다. 오래 전 막내 동서의 투병으로 함께 산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결국 동서는 저 세상으로 가고 내겐 산에 다니는 습성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안내 산악회를 통해 산행을 가는 일이 생겼고, 그 중 “자연속 우리들”이란 안내 산악회(안내 산악회지만 영리보다는 친목을 중시하던 곳이라, 자주 이용하다 보니 카페지기를 비롯하여 단골들과는 참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를 통해 여기 저기 짧은 원정 종주를 하다 멀리 돌산지맥 종주를 하게 되었다. 그때는 종주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30km가 넘는 돌산종주가 꽤 힘들게 느껴졌었다. 왜 그리도 오르내림이 많은지 섬산행이 얕봐서는 안된다는 남들의 교훈이 실감이 났었다.
그때도 인적 없는 적요한 곳에서 하늘도 땅도 바다도 모두 어둠으로 분간 안 되던 시간에, 여수 대교동에서 돌산대교를 건너서 우측으로 돌산읍과 향일암 방향으로 들어가는 돌산로를 거쳐 돌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진입로를 찾아 여수 구항 쪽 불빛을 등지고 야산 같은 산을 올라갔다가 아래쪽 마을 불빛을 향해 내려갔다가를 반복하다 평지의 도로를 만나기도 하고 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서 쉬기도 하면서 갔던 거 같은데 도무지 그때 기억은 안 나고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그때 그때 기억만 파편처럼 왔다 사라진다. 그때 함산했었던 분 중에 한분이신 다빈치님을 추억을 되새기면서 가면서 우연히 만났다. 곁을 누가 스쳐가는데 왠지 낯이 익은데,누군지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이분은 원래 강렬한 개성파 인물이시다. 경남 고성인 고향을 떠난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말은 한국말인데 외국어 억양으로 말씀하시니 언뜻 들으면 뭔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소리가 워낙 크기에 그 주인공은 잘 잊히지 않는다. “다빈치!” 닉이 다빈치다. 르네상스 맨, 레오나르도 다빈치. 요즘은 대간과 지맥 산행을 주로 하시는데 ‘봉 산악회’ 거제지맥이 마감되어 여기를 오게 됐다고 한다. 물론 그때 돌산지맥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산행을 여러 번 함께 하면서 얘기를 많이 해서 잘 알기에 너무도 반가웠다. 한 달만에 산행이라 자꾸 뒤쳐졌지만 몇 년만에 재회라 이산가족이 되어서는 안되겟다 싶어 다빈치님과 봉황산까지는 같이 오면서 옛날 얘기도 하고, 서로 히말라야 갔다 왔던 얘기, 히말라야에서 죽을 뻔했던 얘기, 똑똑한 따님(피부과 의사) 얘기 등 청산유수로 흐르는 얘기꽃을 피우며, 그때 그 산악회의 해체로 잘 알던 분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서로 공감, 연민하면서 같이 왔다.
이번 종주에서 빠질 수 없는 추억은 와리가리했던 일과 먹방이나 다름없던 아침 식사와 저녁 회식이 아닐까 한다. 들머리 찾을 때부터 작곡재에서 아침 먹을 때까지 다들 알바를 많이 했다. 여러 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두 패로 나눠졌다 다시 합쳐지기도 하고 앞에 가던 이가 길이 없다고 빠구, 따라가던 이가 졸지에 선두가 되다 다시 빠구! 근데 힘들기보다 헛웃음이 나온다. 아침을 먹는데 김성경 선배님이 이끄는 도봉팀은 엉뚱한 곳에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오신다. 작곡재에서 아침 식사는 바람이 제법 부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분위기만은 최고였다.
야전에서의 조리에 일가견이 있는 후대장님, 설악님의 셰프 역할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라면을 비롯하여 갖가지 맛깔스런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다들 하산 시간을 잘 지켜 예정보다 한 시간 이상 시간을 번 우리는 후대장님이 발품을 팔아 찾아낸 저렴한 음식점에서
맛있게 먹고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특히 그때도 기억에 남는 건 산행하면서 그리고 하산해서 서로 즐겁게 먹었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함께 하는 음식, 함께 부른 노래, 함께 즐긴 놀이가 추억의 근간이 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했다는 것은 그 사람과 무엇을 함께 맛있게 먹었는가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산행이었다. 그때 돌산종주 산행은 돌산갓김치 맛을 빼고 기억에 남는 게 몇 개나 있을까?
바다가 아름다운 여수는 산 역시 아름다웠고, 대나무, 소나무, 서어나무, 메타세콰이어로 이루어진 숲은 포근하고 운치 있었고,오래 살고 푸르른 점 때문에 신성과 번영을 상징하는 길상(吉祥)의 나무로 여겨진 동백꽃들, 여기 저기 남은 산성의 흔적들, 새벽을 붉은 빛으로 휘덮은 동녘의 먼동, 먼동 위를 훌쩍 뛰어넘듯 올라선 늠름한 태양은 우리 등을 따숩게 했고, 거북등모습의 기묘한 바위들, 금오산 가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처음엔 비닐을 깔아 놓은 듯 너무 잔잔하더니, 산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바다로 이어져, 우리를 바다로 인도하고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빌게 한다. 여수는 이제 두 번쯤 오니 언젠가 잊지 않고 다시 오게 할 미련을 갖게 하는구나. 지난 날 함께 했던 산악회 사람들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기게 했고, 이번 종주 산행을 통해 함께 한 이들은 먼 미래에 되돌아가고픈 추억의 한 장이 되리라.
3. 여수 / 김명인
여수, 이 말이 떨려올 때 생애 전체가
한 울림 속으로 이은 줄 잊은 때가 있나
만곡진 연안들이 마음의 구봉을 세워
그 능선에 엎어놓은 집들과 부두의 가건물 사이
바다가 밀물어와 눈부시던 물의 아름다움이여, 나 잠시
그 쪽빛에 짐 부려놓고서 어떤 충만보다도
돌산 건너의 여백으로 가슴 미어지게
출렁거렸다, 밥상에 얹힌
꼬막 하나가 품고 있던 鳴梁(명랑)은
어느 바다에 가까운 물목인지
밤새도록 해류는 그리로 빠져 나갔을까, 세찬
젊음만으로도 몸이 꽁꽁 굳어지던
그런 시절에는 써늘한 질문에 갇히고, 우리가
누구인 줄 자꾸만 캐물어 마침내 땅 끝
에 가닿는 절망조차 함께 나누었던
그 여정으로 나도 한때 아름다운 진주를 품었다
칠색 자개 얹어 동여매던 저녁 나절의 무지개여, 麗水(여수)가
旅愁(여수)여도 좋았던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적시자 녹아 흐르는 눈이
녹슨 철선이 발하는 고동으로 어느새 푸석푸석한
노을에 칠갑되기도 했느니
마음이 헐어가고 시절이 더욱 쓸쓸해지면 누군들
그걸 잊을까, 휠체어에 실려 C병동 쪽으로
옮겨지던 맥박은 희미하게
되살아나 그곳이 마지막 희망임을
어렴풋이 알았을 그때에도 아득한 낭하 같던 시간들
여수, 거기 누가 있어 골목 끝 빈 집을 두드리랴
두드려 여직 우리의 이름을 나눠 부르랴
그때에도 우리는 기억하는지
담 너머로 번져오르는 동백꽃, 그 붉음에 취해
단 한 번 내다 건 紅燈(홍등) 가까이 얼굴을 비춰
눈 가장이에 덧낀 주름으로 세월을 헤아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