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생각한다 5
박 현 기
형님은 올해도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다. 내년부터는 나도 모르겠다는 협박 아니 협박에도 가타부타 대답 없이 막걸리만 들이켠다. 벌컥벌컥 마신 잔을 내려놓으며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것은 몹시 곤혹스럽다는 표현이리라. 벌초를 끝내 말끔해진 봉분들을 바라보며 나는 또 형님에게 부모와 조부모 이외의 산소는 모두 없애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몇 년째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실을 인정하고 뭔가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쉽사리 결단하지 못하는 형님이 답답하다. 나와 뜻이 같은 동생들도 형님의 입만 본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고향을 지키고 있기에 형님의 의견이 우리에겐 법이다.
집에서 마주 보이는 머잖은 선산에 조상님들이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맨 위의 분문위 어른부터 차례로 대를 이어 내려오니 관리하기도 쉽고 후손들에게 누구 산소인지 설명해 주기도 쉽다. 오가기 그렇게 힘든 곳이 아니어서 묘사(지역이나 집안에 따라 시사 또는 시제)나 벌초 때는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후손은 누구든지 소풍처럼 다닌다. 가족 공원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우리 산소에만 가면 옛날 조상님들 못 먹고 못 살기 천만다행이란 싱거운 생각을 곧잘 한다. 잘 먹고 잘살아 명당 찾아 매장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우거진 나무 수풀 헤치고 산소 찾느라 고생깨나 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시대는 오가기 쉽고 관리하기 쉬운 곳이 복 받은 명당이다.
이 복 받은 명당의 산소 때문에 형제간 고민도 많고 토론도 많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 모두 젊었고 그 자식들도 품 안에 있었기에 벌초나 묘사는 거의 축제처럼 치렀다. 자식들 다 데리고 와서 몇은 예초기를 돌리고, 몇은 낫질을 하고 갈퀴로 풀을 끌어 내렸다. 목마르면 술 한 잔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모처럼의 풀밭이 신나서 겅중겅중 뛰어놀기도 하니 소풍이요 축제였으며 말이 필요 없는 뿌리 교육의 현장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절부터 아이들의 참석이 줄다가 아예 없어졌다. 대학입시나 군대, 취업 등의 이유로 모두 제 살길 찾아가니 참석하라고 강권하기도 어려웠다.
젊은 사람이 없어도 벌초는 몇십 년을 하다 보니 어렵잖게 할 수 있다. 문제는 묘사 때인데, 십여 년 전부터 제물을 산소까지 들고 올라갈 일손이 없다. 옛날에는 누구네 산소 묘사 지낸다면 동네 아이들 모두 달려가서 떡과 과일을 기다렸다. 색다른 음식을 맛볼 절호의 기회였기에 자진해서 제물을 메고 올라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지금 농촌에 아이들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이 먹을 거 흔한 세상에 그까짓 떡 얻어먹자고 남의 산소에 따라올 아이는 없다. 산소가 많으니 제물을 싼 보따리가 열둘이다. 늙은 형제들 모두 양손에 들어도 보따리가 남는다. 산 아래까지는 자동차로 가니 문제없는데 비록 얼마 안 되는 오르막이지만, 거기서부터 산소까지가 고행이다. 지게에 지고 가자, 사륜구동 자동차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포클레인에 싣고 가자. 별별 궁리가 농담을 빙자한 진담으로 터진다.
그뿐이랴. 기제사 때는 제관을 빌려오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도 내가 먼저 기제사를 줄이자는 물꼬를 열었다. 아무리 좋은 풍습과 전통이라도 시대의 형편에 맞춰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해외에 취업해 있는 조카는 몇 년째 고향에 오지 못했고 기제사에 참석할 만한 집안 어른들은 너무 연로하다. 나라도 가지 않으면 축 읽을 사람도 없이 형님 혼자 지낸다. 그때마다 장거리를 달려가야 하는 나도 나지만, 꼬부라진 허리로 제물을 준비하는 형수 보기가 참으로 민망하다. 형제간 언쟁에 논쟁을 더한 끝에 5대 봉제사를 4대로 줄이고 내외분을 합사해서 모신다. 열 번의 제사가 네 번으로 줄어든 것은 혁명에 가까웠다. 아버지 계실 때는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금방 제사나 산소를 없애버릴 것처럼 하더니 정작 돌아가시고 나니 요지부동이다. 장남의 책임감인 모양이다.
산소를 없애면 자연스레 벌초도 없어지고 묘사 때 제물 보따리 멜 일도 한결 가벼워진다. 이리저리 산소 없애는 절차를 알아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상석만 정리하고 그냥 그대로 두란다. 정 섭섭하면 선산 초입에 표석 하나 세우고 한꺼번에 예를 올리면 된단다. 이미 그렇게 하는 가문이 많다는 것을 나도 듣고 본 적이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했더니, ‘동네 사람 욕할까 조심스러워서, 조상님들 노해서 벌 내릴까 두려워서, 평생 하던 일 그만두자니 섭섭해서’라며 내년에 생각해 보잔다. 매년 하는 소리다. 그러다 해 바뀌면 어김없이 하던 대로 하려 한다. 형수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하겠다며 형님과 똑같이 말한다. 조상 모시는 일을 평생의 책무로 생각하는 그 마음 이해는 하지만, 나는 그런 형수가 형님보다 더 애틋해서 속상하고 답답하다.
잔을 내려놓고 입맛을 쩝쩝 다시던 형님이 또 똑같은 소리를 한다. 답답한 마음을 형님에게 쏟아놓는다. “형님, 동네 사람들 모두 제 형편이나 내 형편이나 똑같아서 누구네 벌초했느니 안 했느니 입방아 찧을 사람도 없고, 벌초나 묘사 안 지낸다고 조상님이 노여워 벌 내린다면 그 벌 차라리 우리가 받읍시다. 지금도 오는 젊은이가 없는데 누가 앞장서 관리하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자식 대에 가면 사라질 일입니다. 형님 논리라면 벌초나 묘사 안 지내는 자식들이 벌 받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정리하고 벌 받는 게 낫지 왜 자식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십니까. 또 형님 섭섭하건 이해하겠는데 나이도 생각해야지요. 꼬부라진 형수님 허리도 보세요. 더 늦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이어받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조카에게서 받는다면 몰라도 만에 하나 저는 절대로 믿지 마세요. 솔직히 저도 이젠 버거워요.”
나와 동생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르자고 아무리 지청구를 해도 형님은 쉽게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십 종남매의 맏이로서 집안을 이끌어 온 지 이십여 년이 흘렀다. 형님의 결정에 따라서 집안의 전통과 역사가 바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고향을 지키는 형님이 있으니 찾아갈 추억이 있고 안식처가 있다. 애써 지은 농작물 몇 톨이라도 나눠 주는 정이 고맙고, 제사나 벌초에 앞장서니 그나마 여러 남매가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음도 안다. 아니면 길 가다 부딪혀 싸움이 나도 서로 모를 남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나도 마구 밀어붙이지는 못한다. 산소 정리는 올해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내년부터 벌초 전문업체에 맡기기로 한 것이 더 큰 변화의 시작이기를 바라며 산을 내려왔다. (17매)
첫댓글 이 시대에, 뿌리를 이어 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갈등을 잘 표현하셨습니다.
전통을 지키는 문제가 이제는 많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시대의 문제를 잘 표현하셔셔 공감합니다..
저희는 발언권을 주부들에게 막내부터 의견을 말하니 너무 쉽게 현대화로 진입이 되었는데 그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묘사는 주문해서 하고,
형제들 모임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괜찮은데 맏이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아도 가족회의에 통과되면 수용해서 지금은 좋습니다.^^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서 누구나 고개를 끄떡이면서 읽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