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향 , 아니 김영한은 바위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성북동 골짜기에 한식당 대원각을 열었다 . 수많은 정 · 재계 인사가 이곳들 드나들며 우리나라 3 대 고급 요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대원각은 그녀의 나머지 반평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을 그리며 살아갔으니 , 이 얼마나 애절한 순애보인가 . 20 대 초반의 강렬했던 사랑은 평생 그녀의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것이다 .
무소유 , 그리고 길상화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이 갑자기 문을 닫은 것은 1980 년대 초의 일이다 .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기생 진향으로서 살아가던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간 김영한의 삶을 되찾고자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에세이 , 『무소유』를 읽고 스님을 찾아간다 .
그녀는 ' 욕심내지 않고 ,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 자유로운 삶 ' 을 강조한 법정 스님의 글에 깊은 감명을 받아 대원각의 모든 것을 시주하겠노라 말한다 .
시가 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통째로 시주하겠다는 고집과 이를 한사코 마다하려는 스님 사이의 줄다리기는 10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결국 , 그 고집을 꺾지 못한 법정 스님은 대원각을 조계종 송광사의 서울분원 , ' 맑고 향기롭게 ' 운동의 근본 도량으로 창건하게 된다 .
대원각이 ' 삼각산 길상사 ' 가 되던 날 , 법정 스님은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에게 염주 한 벌과 함께 ' 길상화 ' 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 그녀의 인생 전부와도 다름없을 대원각을 시주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길상화 보살은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 " 그 큰 재산도 , 그 사람의 시 한 줄만은 못하다 ." 라고 . 그녀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꽃다웠을 이십대 초반의 사랑을 잊지 못했다 .
길상사 일주문
길상사 경내 풍경
맑고 향기롭게 , 길상사
북악산과 한양도성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북동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야 길상사를 만나게 된다 . 서울시 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된 이곳은 여타 사찰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 대원각이던 시절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
일주문을 지나면 곧장 아미타불을 모시는 길상사의 본당 , 극락전이 나타난다 . 극락전을 바라보고 우측으로는 범종각 , 그리고 설법이 이루어지는 설법전이 자리한다 .
극락전
설법전 앞 , 눈에 띄는 조각상이 하나 있다 .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 이 관음보살상을 조각한 이는 독특하게도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 . 한국가톨릭미술협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천주교 내에서 명망이 깊은 조각가로 , 명동성당의 예수성상이나 성모마리아상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
그래서일까 .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성모마리아를 보는 듯하다 . 종교 간 화합의 염원을 담은 법정 스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
관음보살상
관음보살상 옆에 세워진 길상보탑 역시 종교 간 의기투합의 상징물이다 .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석탑이 없었던 길상사에 길상화 보살과 법정 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 길상사와 성북성당 , 덕수교회 등이 함께한 종교 간 교류의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
경기도 가평의 한 호텔에 있던 것을 가지고 온 것으로 ,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뿐인 국내 유일의 4 사자 7 층 석탑이다 .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사자가 탑을 받치고 있으며 , 그 중심에는 석가모니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고상하고 기품이 흐르는 모습이다 .
길상 7 층보탑
다시 극락전 뒤로 오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 도심 속 길상사의 고즈넉한 풍경이 살며시 다가온다 . 법정 스님이 생전에 남긴 글귀가 사찰 곳곳에 남아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
북악산 자락을 따라 흐르는 계곡 한쪽에 길상화 보살이 생애 마지막 밤을 보냈던 전각 , 길상헌이 있다 . 그 뒤편으로 자리한 ' 침묵의 집 ' 은 누구나 방문해 침묵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며 , 계곡 건너에는 과거 대원각 시절 기생들의 숙소였던 건물이 여전히 남아 승려들의 거처로 활용되고 있다 .
길상사 경내
침묵의 집
이제는 의자 하나만 남아
법정 스님은 자신이 직접 길상사를 창건하고도 자신의 유명세 탓에 사찰이 북적거릴 것을 염려 , 주지를 다른 스님에게 맡기고는 강원도 평창 두메산골의 어느 암자에 거처를 두고 생활했다 . 이따금 길상사에서 머무를 일이 있을 때면 , 사찰 가장 안쪽에 자리한 행지실을 이용했단다 .
지난 2000 년 , 폐암으로 고생하던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들어간 곳이다 .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는 ' 진영각 ' 이라는 이름으로 스님의 진영과 저서 , 그리고 유품 등을 모시고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졌다 .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것은 왜일까 . 법정 스님 생전에 자주 앉아 사색을 즐겼다던 나무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법정 스님이 생전에 애용하던 나무의자
길상사 진영각 , 법정 스님의 진영과 유품을 전시해 놓은 곳
쉼터에 걸린 글귀
길상사 곳곳에 남아있는 법정 스님의 글
70 년대 밀실 정치의 현장이었던 대원각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 나뭇가지가 드리워 시원한 그늘을 만든 곳에도 , 흐르는 계곡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소리가 있는 곳에도 의자와 테이블이 놓였다 . 여타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
정겹다 . 길상화 보살이 대원각을 시주하며 바랐던 모습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 깊은 구석에 자리한 길상사는 시인 백석과 대원각 주인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 , 그리고 입적하는 그 순간까지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자 했던 법정 스님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서 우리 곁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
첫댓글 길상사의 내면의 깊이있는 이야기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이처럼 무소유로 승화시킨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이야기와 법정스님의 숭고한 사상이 접목되어
모두의 정신세계를 교화시키는 도량의 장이 미래유산으로 남아 기리게됨에 깊은 공감을 느낌니다
좋은자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애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사진과 글을 올려서 풀어주듯 스토리텔링 해 주시니 더욱 감동적입니다 선생님의 글에 감동을 받습니다
길상사에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셔서 아주 진지하게 잘 보았읍니다 감사 드림니다...
오늘은 제 머리가 쥐날라고 합니다. 열공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글에 감동되어 꼭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