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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전북순창 답사자료 * 일 시 : 2016.05.31 (다섯째 화요일) 07:30~19:30 * 답사인원 : 4 5 명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마산박물관(07:30) - 귀래정 - 순창향교대성전 - 순창객사 - - 남계리석장승 - 순평사금동여래좌상 - 순화리3층석탑 - --- 점 심 ( 대 궁 식 당 ) --- - 장류박물관 - 전통고추장마을 - 메타스퀘어길 - 강천사 ( 병풍폭포/5층석탑/삼인대/300년생 모과나무) - 마산박물관(19:30) * 인 솔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섭외이사 : 김 인 국 010-3863-7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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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은 장수(長壽)의 고장이며, 고추장을 비롯한 장류(醬類)의 고장으로서 이름이 높으며,
순창군은 마한 시대에는 '옥천'과 '오산'이라 했다.
그리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순화', 고려시대에는 '순창현'으로 불렸고, 1314년 충숙왕 1년에 본 군 출신 승려 정오가 국통 국일대선사라는 국가 영직에 취임하고 부터 현이 군(郡)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르렀다.
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16-5차 답사자료 (05.31) 전북 순창
** 귀래정(歸來亭)
전라북도지정 문화재자료 제67호
순창군 순창읍 기남리 538-1
귀래정은 1457년(세조2년)에 신말주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4년 다시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물의 관리는 고령신씨중종(高靈申氏宗中)에서 하고 있다.
신말주는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고 학문을 즐겨 145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54년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전을 거듭했는데 그 무렵 세조가 그의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분개하여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순창 남산대로 내려와 귀래정(歸來亭)을 지어 놓고 시문을 벗삼아 지냈다고 한다.
현재 귀래정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귀래정기(歸來亭記)와 강희맹(姜 希孟)의 시문 등이 액판으로 보존되고 있다.
0- 서거정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으며 《향약집성방》을 국역(國譯)했다.
0- 강희맹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진주(晋州). 자 경순(景醇). 호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국오(菊塢) ·만송강(萬松岡).
세종의 이질(姨姪)이고, 화가 희안(希顔)의 동생이다.
0- 설씨 부인·신경준 선생 유지[귀래정 신말주 후손 세거지]
[薛氏 夫人·申景濬 先生 遺址[歸來亭 申末舟 後孫 世居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조선 중기의 문신 신말주(申末周)와 부인 설씨부인(薛氏夫人)을 비롯하여 신말주의 10세손 신경준 등 후손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일명 이곳은 귀래정(歸來亭) 신말주 후손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 순창 향교대성전(鄕校大聖殿)
전라북도지정 문화재자료 제68호
순창군 순창읍 교성1길 13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순창향교를 처음 지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재위 1469~1494)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대성전을 비롯하여 정면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동무와 서무, 명륜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 (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 순창 객사(客舍)
전라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8호
순창군 순창읍 순창7길 40
객사의 창건(創建) 연대는 1759년 7월 (조선영조 35년)에 건축된 걸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곳에는 정당(正堂), 동대청(東大廳) 서대청(西大廳)이 있었으며, 전면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그리고 옆에 무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 남아 있을 뿐이다.
건물은 원래 정면 13칸, 측면 2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지붕은 팔작솟을 지붕이었으나, 서대청이 없어진 뒤 동대청만이 팔작지붕으로 남아 있고 정당 3칸 서쪽은 맞배지붕 형태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초석(柱礎石)은 장대석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건물의 특이한 것은 포작(包作)의 형태로 보아 익공(翼工)집이면서도 외목도리를 하여 처마를 길게 밖으로 빼냈다는 것이다.
건물의 내부는 한때 순창초등학교에서 교실로 사용하기 위해 천장에 판자를 넣어 우물천정을 만들었다. 원래는 정당 안에 전석을 깔고「전하만만세(殿下萬萬歲)」라 쓴 관패를 봉안하였다고 하는 데 지금은 전석도 관패도 없으며, 한때 교실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외부와 실내가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변경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객사는 현재 비어 있는데, 지난 1981년 2월에 전면을 해체하여 기와를 깔고, 뒷면 북쪽 지붕의 서까래 일부를 완전 보수한 바 있으며 그후 단청공사(1983. 11), 객사벽체 보수와 주변 철책 설치(1988. 9)를 하였고, 1991년에는 객사 후면의 기와를 깔고 동대청의 일부 연목을 교체하였고, 재단청공사(1996. 11)를 하여 관리하고 있다.
** 순창 남계리석장승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 102호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303
순창읍 남계리의 석장승은 순창 중앙초등학교 뒤편 양지내의 둑 아래 논가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순창군민종합복지회관 동북편에 위치하고 았다.
그 크기는 높이 190cm, 넓이 35cm, 두께 30cm이며 화강암에 순화리의 석장승과 같은 형태로 사람의 얼굴을 음각하였다.
이곳 석장승도 충신리 석장승과 같이 당산제(堂山祭) 및 장승제(長승祭)를 지냈다고 한다.
** 순창 충신리석장승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 101호
전북 순창군 순창읍 장류로 407-11
순창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새로 조성된 화단에 순화리 석장승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순창군민종합복지회관 동북편에 위치하고 았다.
그 크기는 높이 170cm, 넓이 55cm, 두께 24c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돌의 윗부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음각하였다.
다른 석장승과 달리 특이한 점으로 이마 부분에 백호를 음각하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 석장승도 남계리 석장승과 같이 당산제(堂山祭) 및 장승제(長승祭)를 지냈다고 한다.
** 순평사 금동여래좌상(淳平寺金銅如來座像)
전라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65호
순창군 순창읍 금산로 66
순평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의 전체 높이는 104㎝, 상호높이는 30㎝이며, 어깨너비 42㎝인데, 불상이 지닌 여러 특징으로 보아 14∼1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우아하고 귀족적인 모습을 보인다.
** 순화리삼층석탑
전라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6호
순창군 순창읍 장유로 295-11
순화리 3층 석탑(石塔)은 고려시대의 전 옥천사(玉川寺) 경내에 건립되었던 것이라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석탑 가까이에서 지금도 기와 파편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어 옛날 이 부근에 큰 사찰(寺刹)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탑(塔)은 화강암(花崗岩)으로 조성한 3층인데 탑의 기단(基壇)은 하부가 땅 속에 묻혀있고 기단부(基壇部)의 지대석(址臺石)은 서북쪽의 일부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다른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 순창장유박물관
순창군 순창읍 장유로 43
2007년도에 개관된 국내 최초 순창장류박물관은 전국 최초로 장류를 테마로 조성한 박물관으로 전통장류의 본 고장인 순창을 홍보하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이다. 사라져 가는 향토 민속자료 및 장류관련 유물 906점을 전시하여 전통장류의 맥을 이어 가고 있으며 다양한 기획 전시를 통하여 전통문화 보존 및 계승에 핵심 축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장류의 역사, 장 담그는 법, 모형을 통한 순창고추장 소개, 대형 고추 속 어린이 애니메이션 상영, 순창 초가, 장류관련 민속유품 등 7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개 관 일 : 2007. 11. 1
규 모 : 부지면적-8,139㎡, 건축면적-1,513㎡
주요시설 : 전시실, 수장고, 관리실, 학예실, 회의실, 자료실 등
부대시설 : 조경시설(연못, 산책로), 주차장(장애인용 포함), 대장간
소장유물 및 자료
총 1,254점(전적류 183점, 고문서류 179점, 서화류 14점, 토기·석기·도자기류 92점, 민속자료 786점)
지정문화재 : 1점(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83호 「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0- 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38호
순창군 순창읍 장유로 43
고려말의 첩문 자료를 기초로 조선 명종18년(1563)에 처음 제작했으나 이것이 낡아 인조11년(1633) 개각했으나 유물이 남아있지 않고 영조19년(1743)에 성황사를 크게 중수하면서 2차로 개각한 것이 이 현판이다. 개각된 이후 영조30년(1754)과 순조23년(1823)에 이 현판 하단에 다른 필체로 추기(追記) 되었다.
가로 180cm, 세로 54cm의 목판에 총 73행, 1600여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국가에서 순창 성황신에게 '금자광록대부 삼한공신 문하시 장군(金紫光祿大夫 三韓公臣 門下侍(字破)將軍)'이라는 작호(爵號)를 부여한 이후 조선 순조 23년(1823년) 성황당을 개건한 때까지의 내용을 추가로 기록하여 순창 성황제의 변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 현판의 내용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성황신앙의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기록이 부족한 조선시대의 성황신앙의 변화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지정 현판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작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지방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으며, 민간에도 이런 신앙이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성황신앙은 일제의 한국민속문화 말살정책과 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크게 쇠퇴하였지만, 지금도 전국 각지에는 성황당이 있어 정초에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남아 있다.
이 현판은 1992년에 옥천향토문화연구소가 순창 설씨(淳昌 薛氏)의 집성촌이던 전북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마을의 민속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0- 월인석보제15
국가지정 보물제745-10호
순창군복흥면봉덕길 131-144 구암사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엽까지 양대에 걸쳐 약 13년 동안 이룩된 사업으로 석가일대기의 결정판일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이며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국어사상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석가의 일생을 서사시로 찬미한 월인천강지곡 전3권과 수양대군 자신이 1446년에 지은 석보상절 전24권을 합하여 1459년(세조 5)에 편집한 것으로, 두 책 제목의 앞 글자 2자씩을 따서 '월인석보(月印釋譜)'라 이름한 것이다.
순창(淳昌) 구암사(龜巖寺)에서 발견된 월인석보 권15(月印釋譜 卷十五)는 그 동안 완전한 상태로 전존(傳存)되는 판본이 없었다는 점에서, 초간본(初刊本)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1998년에 소개된 바 있는 성암본(誠庵本)이 모두 30장에 불과한 점으로 보아, 구암사본(龜巖寺本)은 비록 앞뒤의 표지(表紙)가 결락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낙장(落張)이 전혀 없는 완전한 상태여서 학술 및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더욱이 월인석보 권15(月印釋譜 卷十五)는 완전한 초간초쇄본(‘初刊初刷本’)이라는 점에서 그 진가가 높다.
** 강천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 말사
지정(등록)일 1988.7.28(제 27호)
최초창건 887년 신라진성여왕 원년 도선국사 창건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末寺)로,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인 1316년(충숙왕 3) 덕현이 오층 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寺勢)를 확장하였고, 조선시대 1482년(성종 13)에는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薛)씨의 시주를 얻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때 절과 12개의 부속암자가 전소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태능이 중창하여 강천사만은 이전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뒤 1855년 금용당이 중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보광전(普光殿)·첨성각(瞻星閣)·칠성각의 당우들이 불타버렸다.
그 뒤 주지 김장엽이 1959년에 첨성각을, 1977년 관음전을, 그리고 이듬해 보광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근래에는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었고, 1997년 첨서악을 헐고 복원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절에는 비구승보다 비구니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창건자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을 따라 절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높이 8m, 너비 4m의 자연암석으로 된 사각문인 금강문은 1316년 덕현스님이 절 주위의 경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0- 강천사5층석탑
순창군 팔덕면 강천산길 270
전라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92호
강천사(剛泉寺) 다보탑(多寶塔)은 현재 강천사(剛泉寺) 대웅전(大雄殿) 바로 앞 뜰에 위치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5층 탑(塔)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에 덕현선사(德玄禪師) 가 강천사(剛泉寺)를 중창(重倉)할 때 세운 것이라 한다. 그런데 1950년에 이르러 6.25동란 때 강천사의 전체 건물이 소실(燒失)되는 화를 입었는데 그때 이 탑도 화를 입어 도괴된 바 있었다. 그후 1959년 당시의 주지(住持) 김장엽(金奬燁) 스님이 강천사(剛泉寺)를 다시 세울 때 탑 (塔)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다.
이 다보탑(多寶塔)의 높이는 2.5m이고 5층탑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2,3,4층의 옥개석(屋蓋 石)이 6.25당시의 총탄(銃彈)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파손된 석등(石燈)의 중대석과 보주(寶柱)가 일부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幢 竿支柱) 4기(基)와 가공된 석재(石材)들이 몇 개 흩어져 있다.
** 강천사모과나무
전라북도지정 기념물 제 97호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324
강천산은 전국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순창군에서 관리하고 있는 순창의 자랑이다.
또한 이곳은 신라 진성여왕 1년(881)에 당대의 고승, 도선국사가 터를 잡고 처음 절을 세웠다는 강천사가 있고, 경내에는 5층 석탑(참고, 본 책자 강천사 5층 다보탑)을 비롯하여 바로 앞냇물 건너편에 있는 삼인대(참고, 본책자 삼인대) 정상의 금성산성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또 항상 기암괴석으로 조화를 이룬 틈새로 옥수처럼 흐르는 맑고 시원한 물이 있어 해마다 30여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이 강천산의 앞쪽으로 가까운 곳 삼인대와의 사이에 한 그루 노거수가 서 있는데 나무의 높이는 20m, 둘레는 3.1m, 수령은 300년이 된 모과나무이다.
이 모과나무는 지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어 가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분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순창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모과나무를 지난 1981년 보호수로 지정하고 관리하다가 지난해 1998년 1월 9일에는 기념물 제 97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순창 삼인대(三印臺)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271
순창군수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류옥 등 세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기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 곳이라고 한다.
1506년(연산군 12)에 박원종(朴元宗)[1467~1510]·성희안(成希顔)[1461~1513] 등이 주동하여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진성 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박원종 등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이 반정에 반대하였다며 숙청하였고, 이어 신수근의 딸인 중종(中宗)의 비 신씨(愼氏)를 폐위시켰다. 중종(中宗)은 윤여필의 딸[장경 왕후]과 재혼하였으나 장경 왕후는 왕자를 낳고 사망하였다. 이에 순창 군수 김정(金淨)[1486~1521]과 담양 부사 박상(朴祥)[1474~1530],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은 강천산에 모여 관인(官印)을 나무에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김정과 박상, 유옥이 각자의 관인을 나무에 걸었다 하여 삼인대(三印臺)라고 부른다.
김정 등의 상소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후일 신씨를 복위하여 단경 왕후(端敬王后)에 추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경 왕후는 1699년(숙종 25)에 현감 신규(申奎)가 신씨의 지위와 명호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별묘(別廟)를 지어 받들기만 하였다. 이후 1740년(영조 16)에 다시 여러 신하가 모여 의논하고 임금이 결단하여 신씨의 호를 단경 왕후로 추상(追上)[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존호를 올리는 것]하고 태묘(太廟)에 올렸으며, 능을 온능(溫陵)이라 하였다. 순창 삼인대(淳昌三印臺)는 대의를 지키려는 이들의 선비 정신과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를 기리고자 1744년(영조 20)에 홍여통(洪汝通)·윤행겸(尹行謙)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삼인대비를 세웠다.
삼인대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있다. 높이는 164㎝, 폭은 80㎝, 두께는 24㎝로 화강암 좌대에 대리석 비신이다. 비각 안에는 영조(英祖)·정조(正祖)의 어제 현판과 기우만이 쓴 「삼인대 비각 중수기」가 걸려 있다. 비문은 도암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썼다. 비문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창 군수 충암(冲庵) 김정과 담양 부사 눌재(訥齋) 박상, 무안 현감 석헌(石軒) 유옥이 이곳에 모여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중종반정 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하여 삼인대라 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부인 신씨를 중전에 올렸으나 훈신 박원종 등이 중전의 아버지인 좌의정 신수근이 중종반정 과정에서 살해되었으므로 그 해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우려하여 신씨를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으니 이분이 장경 왕후였다. 그러나 10년 후에 장경 왕후가 승하하니 이때 많은 재이(災異)가 발생해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바른 말을 널리 구하니, 이때 충암 등이 유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한편 훈신들이 군부(君父)를 흔들며 국모를 폐위시켜 추방한 죄를 논열하였다.
상소가 접수되자 대간 이행(李荇) 등이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국(相國) 정광필(鄭光弼)이 힘껏 구명해 준 데 힘입어 도형(徒刑)[죄인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형벌]에 처해진 뒤 귀양 가는 것에 그쳤는데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참고자료]
힌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토문화대전. 한국어워커백과. 문화원형백과.
두산백과. 네이버지식백과. 순청군청자료.
[ 메 모 ]
칭원시립마산박물관 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