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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2 강(마가복음 1:16~45) 아산 UBF 메시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16~45
요절 / 마가복음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리 하시고”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선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셨고,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았습니다. 여러 마을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고치기 어려운 나병까지 고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후부터 갈등과 대립으로 들어가시고 죽기까지 고난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일, 선한 사역을 하셨는데, 오히려 갈등을 겪으시고 대립의 당사자가 되시고 결국 고난 받아 죽으시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알려줍니다. 인간적으로 살면 갈등할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요구와 타협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면 대립할 일도 없습니다. 오늘 기록된 예수님의 행하신 선한 일을 보면서 우리도 선한 일을 하고도 고난 받는다는 한 가지 사실을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16~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몬과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 잡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일 하고 벌이가 괜찮았습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성장하여 예수님의 사도로 파송 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우선 사역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제자를 부르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말씀은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 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제자들은 물고기 잡아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돈을 잘 벌어서 품꾼을 고용하며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고기 잘 잡히는 날은 웃고 물고기 안 잡히는 날은 피곤하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영생의 열매 맺는 삶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영원히 빛나는 별처럼 상도 받습니다.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배우는 영광과 은혜를 누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그들을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되게 하고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되게 하였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은 큰 감동력이 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회당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이와 같이 감동한 적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세 있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반면, 서기관들은 어찌하다가 그 시대 양들로부터 은혜가 없는 비교 대상이 되었을까요?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해주고 말씀을 풀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말씀 전하며 ‘내가 말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다’ ‘내가 말씀의 종이다’ 자부심만 있었을 뿐, 전하는 말씀이 양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자기 영광 위한 도구, 자기 존재감 확인하는 대상으로 보았고, 그들에게 존경받기만을 원하였으므로 백성들에 대한 이해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23~28절을 보십시오. 귀신들리는 것은 영혼과 마음과 육체를 가진 한 사람 속에 다른 악한 영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귀신은 강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합니다. 악한 영이 그 몸과 마음을 조종하기 때문에 당사자는 무척 괴롭습니다. 귀신들린 것과 정신질환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지만 정신질환은 뇌신경계의 이상이 원인이기에 약물치료와 같은 정신과 처방으로 치료되지만 귀신 들린 것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쫓아내야 온전해 집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쫓겨 나갑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의 괴로움을 없애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셨고, 권세 있는 메시지를 전하셨으며, 인생들의 괴로움도 돌아보셨습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시몬의 집에는 시몬의 장모가 아파서 누워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셨습니다. 열병이 금방 나았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겨드렸습니다.
시몬이 고기 잡지 않고 돌아다녀서 병이 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아픈 것은 시몬에게 큰 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낫게 하실 때, 깊은 사랑도 함께 보여주셨습니다.
32, 33절을 보십시오. 해가 졌습니다. 그날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온 동네가 그 집 문 앞에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고대에 등불이 귀하던 시기에는 해지면 모든 일은 종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문제가 절박합니다. 이 사람들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였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가난한 시대에는 아픈 사람도 많습니다. 아픈 사람이 가난하면 낙심과 절망이 더 큽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악한 귀신이 잘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워졌으니 내일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악한 귀신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명해지셨습니다. 목자 없는 시대에 능력있는 참 목자가 오셨으니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때를 위기로 보셨습니다. 사람 중심, 일 중심, 성과 중심인 사람은 위기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사명 중심이기 때문에 위기를 인지하셨습니다. 평소 아무리 성과 중심이 아니라고 해도 성과가 나타나면 그 인격과 중심의 열매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유명해 졌을 때, 사람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돈 벌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떠난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때, 하나님의 천국 복음 역사가 지장 받을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만의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 해결 만 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지금 당장 나의 병, 하나님의 나라보다 지금 내 자식의 취직문제가 가장 시급 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위기가 되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 없는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 다니는 낮에 기도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 중에는 시장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장 통 네거리 길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까지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듣지 않는 곳 아무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골방에 가서 기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보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시대 문제에 대한 해답 얻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 인 것은 맞습니다.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나라의 독립을 지원해주기를 원하였습니다. 도와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과 나라의 독립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시대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된 후에 죽었습니다. 백성들의 절실한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3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마을에서 예수님은 유명해졌습니다. 이 마을에서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다.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천국 복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견고하게 감당해 나가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세상이 바라는 구원을 원합니다. 구원자가 나타나면 세상은 자기 요구사항을 먼저 해결해 줄 것을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전파가 최우선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요구가 아무리 거세지만 최우선 사명을 흐트리지 않으십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고자 오셨고 말씀 전파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사람들에게 영광받으며 다니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하여 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전파 사명을 분명하게 하셨다고 해서 양들의 실제 어려움을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시급 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근본 문제이며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관되고 중심있는 방향 아래에서 병든 자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만큼 인간을 무너지게 하는 병은 없습니다. 전염병이어서 가정과 사회를 떠나야 합니다. 눈썹이 빠지고 코뼈가 녹아 내리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서 혐오감이 들게 합니다. 자기 육체가 썩어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절망 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돌을 던지니 설움과 아픔이 얼마나 큽니까? 그보다 더 큰 절망은 이 병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에게 임하는 저주라는 정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와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도와 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하였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간구하였습니다. 참 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병 고치는 것은 다른 질병 고치는 것과 다른 크고 무거운 문제가 따를 수 있습니다. 나병 고치는 것은 다른 병을 고쳐주는 것과 다른 부담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 고침 받는 것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보다 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나병을 고치는 분은 메시야라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병을 고쳐주고 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주목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에게 원하는 일, 자기들 왕의 할 일을 해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나병을 고쳐주면 유대인들은 로마제국과 전쟁하는 왕이 되어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을 때, 그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은 드디어 왕이 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왕이 왔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길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와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유대인들은 길에 자기 겉옷을 깔고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열광적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은 맞지만, 세상 왕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와 사망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왕,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주님이 되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이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그와 함께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큰 일, 위대한 일 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의 아픔과 고민은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흔히 하는 말에 ‘애들은 가라’ 하지 않습니까? 큰 일 하시는 분이 연설하시는데 구호 외치면 들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류 구속역사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의 고통에 깊은 사랑과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한 사람의 몸부림치는 고독과 영혼의 깊은 아픔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으로 인하여 피와 고름이 흘러내리는 그의 썪은 냄새나는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세상에 어느 누가 냄새나는 나환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습니까? 그의 영혼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주시는 사랑을 그는 깊이 느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이 그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하였습니다. 나병이 떠나고 그는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도 낫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때 그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절대로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다는 확인받고 가정과 사회로 복귀하기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담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하였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복음 전파 역사는 지장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네에 공개적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셔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 사역의 내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셨으며,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의 질병, 연약함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여러 동네로 다니시며 전도하였으며, 한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나 우리들의 눈에나 선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은 갈등과 대립입니다. 착한 일을 행하여주신 예수님께 갈등과 대립과 죽이려는 위협, 고난이 옵니다. 세상은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만족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세계, 자기들의 권위, 자기들의 영광, 자기들의 이익을 손상 받는다고 여기면 곧바로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이름을 사랑하는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자기의 왕위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요나단은 다윗을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세상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원 풀기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아를 필요없다고 미워하며 버립니다. 이로 인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하신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선한 일에 힘쓰시고도 갈등과 대립과 고난 아래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일을 하시고도 오히려 대적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고난 받으셨습니다. 나중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왜 왕이 되시지 않으시는지 항변합니다. 메시아 이신 분이 왜 고난 받으시는지 예수님과 갈등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선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 돌아온 것은 갈등과 대립과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도 영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였다고 해서 당장 상이 주저지 않습니다. 사람이 잘한 일이 있다고 해서 즉시 인정받고 칭찬받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도 고난 받는 일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을 겪으셨습니다.
갈등을 겪고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은 여러 양상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말하고 자기이익, 자기명예 자존심을 위해서 행하면 당연히 갈등이 일어나고 사람들과 대립합니다. 이런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면 속히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양보하라는 사인으로 알고 시정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우는 것은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하는데도 갈등이 벌어지고 대립과 반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이 성경을 공부하고 제일 먼저 생각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내 가까운 사람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시고 갈등과 대립과 고난을 겪으시는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이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을 수도 있고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큼은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만큼은 예수님처럼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나만큼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하고도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과 고난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분별력을 가지며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이와 같이 선을 행하고 믿음으로 고난 받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앞서서 보여주신 승리와 영광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이런 승리와 영광은 장차 하나님나라에서 받을 영광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잘 배워서 예수님이 하신 선한 일들을 하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처럼 갈등과 비방과 고난도 잘 영접하고 참는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어서 생각하지 못한 감동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은혜와 성령의 동행하심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조금 선한 일을 해보고는 당장 만사형통하며 승승장구하지 않는다고 쉽게 낙심하는 사람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제자를 양성하고 말씀을 잘 전하는 말씀의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캠퍼스 양들의 실제문제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겠습니다. 호서대와 나사렛대와 남서울대와 공주대와 단국대와 백석대와 코리아텍과 순천향대, 그리고 극동대에서 그렇게 하여야 겠습니다. 그러고도 욕먹고 비방당하고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길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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