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88)
고로쇠 축제
내 몸이 천 개라면
네 허기가 채워질까
꽃과 잎, 단풍 같은 눈요기론 모자라서
등골에 빨대를 꽂고
휘파람을 부는 이여
네 봄이 축제라면
내 봄은 천형인가
포식과 피식 사이 빈혈증이 도지는 숲
서둘러 흡혈을 끝낸
봄이 성큼 저문다
- 임채성(1967- ), 계간 ≪리토피아≫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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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리다 말다가를 반복하더니 오후 늦게 이곳에서도 꽤 오래 거센 눈발이 흩날렸습니다. 오후 늦게 내리는 눈은 사선을 그으며 빠르게 동쪽을 향해 쏟아져 내렸는데 아마도 편서풍이 불었겠지요. 눈이 내려서 당겨진 밤을 못 이겨 이른 잠에 들었다가 한밤중에 일어나니 달도 없는 거실 밖이 환했습니다. 이건 보지 않아도 눈이 쌓였다는 신호라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여니 흰 눈이 소복소복 정도는 아니어도 여기저기 희끗희끗 쌓였습니다. 겨울 가뭄을 해소하여 농사에 이로운 눈이라 봄눈을 서설瑞雪이라고도 하지요. 관점이란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상황을 사뭇 다르게 진단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살던 시골을 떠나 도시에 살면서 교통 마비를 불러오는 눈을 보다가 한때 저는 이 눈을 “호들갑스러우나 시방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춘 피로한 식물이”라 시에 쓰기도 했습니다. 일 없으면 종일 집에 있어도 되는 지금의 저야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긴 한데도 저 눈이 얼면 어쩌나, 설마 얼기까지 하랴, 낮 되면 금방 녹겠지, 혼자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습니다. 기우는 오랜 습관이 입혀준 평생의 옷이지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복구되리라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쩌면 기우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이 봄눈은 긴 가뭄을 함께 겪는 산천의 나무와 풀에게도 서설이겠지요. 혹 아닐 수도 있다고요. “빈혈증이 도지는 숲”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은 환경 문제에도 자주 이슈로 등장하는 빨대는 다들 아시는 대로 물이나 음료를 빨아올려 마시는 데 쓰는 길고 가는 대롱입니다. 이롭게만 생각되는 이 빨대가 환경 문제의 이슈로 등장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써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일 겁니다. 여하튼 물건의 용도로만 보면 이로운 이 빨대가 본래의 뜻을 떠나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다양한 의미 중에 빨대가 “약한 상대에게서 지속, 고정적으로 이익을 취하거나, 반대로 강한 상대에게 빌붙어 이익을 취하는 행동을 비꼬는 용어”로 쓰이면 비속어가 됩니다. ‘빨대를 꽂다’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 어떤 기관, 집단이 가진 이권이나 이익, 심할 경우 재산을 빨대로 쪽쪽 빨아먹듯 뽑아가는 것을 말”하지요(이상 온라인 ‘나무위키’ 참조). 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꽃과 잎, 단풍 같은 눈요기론 모자라서//등골에 빨대를 꽂고/휘파람을 부는 이”는 약한 상대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이에 속하겠습니다. 음식이나 재물 따위를 먹거나 가지려고 무척 욕심을 부리는 데가 있다는 뜻을 가진 말로 게걸스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시를 읽다가 다가온 말입니다. “내 몸이 천 개라면/네 허기가 채워질까” 이 허기를 과연 허기라고 부를 수는 있는지도 곰곰 생각하면 의문입니다. 허기라고 할 수 없는 것까지 허기로 만들어서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자본의 생리라면 우리는 너무나 자본에 충실한 하수인이 되는 셈이지요.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오늘의 시를 불러낸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볼 거리는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프랑스에 다녀온 이가 그 나라에서는 물도 사 먹어야 한다고 했던 말을 처음 들었던 1980년대에 우스갯소리 정도로 들었던 사실이 현실이 된 지 오래된 요즘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링거줄이 애써 목숨을 연장해서 자본가의 주머니를 채우는 줄로 바뀌기도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마냥 씁쓸합니다. 새벽에 달이 휘영청 떴더니 아침이 맑습니다. 혹시나 하고 내다보니 산 아래에만 눈이 보일 뿐 눈은 다 녹아 길이 촉촉합니다. 도시에서도 봄눈이 말 그대로 서설이기만 하고 피로로는 다가오지 않을 날이겠습니다. 동쪽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고 편서풍을, 달도 없는 한밤중에 환한 밖을 보고 쌓인 눈을 떠올리듯 오늘 하루가 평탄하고 상식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0250319)
첫댓글 시인은 고로쇠나무가 되어 시를 썼네요! 신령한 나무에 빨대를 꼽는 우리가 되지 말고, 어제 포항의 함박눈과 같이 서설이 되어 나무에도 인간에도 사회에도 달빛을 선사하면서 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