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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인데 7, 8월 한참 더위를 능가할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찜통더위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며칠간 30°c를 넘어서서 한 여름이나 진배없고 일부 지역은 열대야다. 간편한 복장은, 피서를 위한 최상의 방법 중 하나로 늘 권장된다. 짧은 셔츠, 반바지 차림에 샌들 착화는 빼놓을 수 없는 여름철 아이템이다. 두툼한 운동화나 구두 대신 샌들은 가벼운 것만큼이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중저가제품을 판매하는 백화점 1층 로비에는 남녀캐주얼화를 바겐세일 중에 있다. 아내는 매장을 여러 바퀴 돌았다. 만져보고, 두들겨 보고, 신어본다. 마침내 아내의 손에 들린 것은 쪼리샌들이다. 1센티미터 두께의 탄력 있는 베이지 색 고무재질이다. 고무바닥 상부에 5밀리미터 두께의 구멍이 송송 뚫린 발판매트 형태의 분홍색 플라스틱 제재가 덧대어 있고, 그 위에 다섯 개의 영문 이니셜이 각각 다른 색깔로 크게 인쇄되어 있다.
발등을 고정시키는 날렵한 삼각의 밴드와 그 삼각의 고리에 발가락을 끼워서 신는 쪼리샌들은, 가로밴드가 한 줄이 샌들에 비해 신으면 잘 벗겨지지 않는 밀착성이 있어 좋다. 무더운 여름에 최적화된 신발이다. 쪼리샌들은 그 장점에 매료된 아내의 여름 성수기, 구매순위의 앞줄에 놓이는 물품이다. 한 켤레도 구매하지 않고는 여름을 지낸 적이 없다. 그런 습관은 대략 아내의 목소리 톤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때 시작되었다. 우리 집의 신발장에는 지난해 분까지 서너 개는 항상 진열되어 있다. 더운 여름 한철 유행하는 특성상, 쪼리는 매년 새로운 디자인으로 시장에 진출한다. 공급자는 새로운 디자인에 혁신적인 제품이라 과대 선전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다. 그래도 새로운 것, 예쁜 것이 있나 눈에 불을 켜고 살피던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그 예의 샌들이다.
그것을 들고 아내는 흡족해 한다. 브랜드 뉴이다. 다른 쪼리에 비해 비교적 높은 가격표가 붙어있다. 화장품과 의류 등에 많은 돈을 쓰지 않으나, 여름 한철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나이 먹었어도 예쁜 자신의 발을 위한 투자는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선택한 그 샌들은 깜찍하고 발바닥에 와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세트로 보이는 바닥이 연초록인 것을 들어서 아내에게 보였다. 아내가 고른 주홍색바닥과 잘 어울릴 것이라 확신하여 커플화로 제안했다. 아내의 대답은 명쾌, 단호했다. 안 돼!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왜?
그녀의 해명은 서술어가 길었다. 요약하면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그녀의 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젊어서는 내게 사용하지 않던 표현이다. 그녀가 바뀐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자신의 본심을 드러낼 기회가 이제야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내의 말대로 그녀가 선택한 쪼리샌들은 여성적이었다. ‘여성적인 신발을 남성이 신으면 격에 안 맞는다고 말한다. 나는 그건 고지식한 생각이라 속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반박은 못한다. 그 말은 그녀가 젊었을 때,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남자로서 권위를 잃지 않았던 동안은 꾹꾹 속에 감추어 두었던 개념일 것이다.
젊은이들처럼 우리도 커플티, 커플신발은 신을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음을 나는 안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거리에서 커플룩은 많이 보인다. 남녀 연인사이에서 뿐 아니라, 부부, 모녀, 부자간의, 때로는 가족 간의 커플룩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드물지만 노부부의 커플룩에는 낭만이 서려 있다. 동일한 형태로 몸을 치장하는 방법은 상호간의 연대감과 우애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나의 생각이다. 살아오면서 아내와 또는 아이들과 커플룩을 해본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로서는, 아내에게 커플화를 신자는 제안은 신선하면서도 아내와 나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럴 용의가 없는 듯 했다. 자신이 받은 설움을 다 갚기 전까지는.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데, 나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권위는 추락하고, 위상은 점점 약해져 간다. 비단 이건 내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남자들에게 공통된 현상일 것이다. 몸에 에너지가 넘치고 태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단단했던 사지의 근육이 줄어주는 것보다 더 빨리 수축한다.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한 아내가, 어느 순간 자신 앞에 크게 클로즈업된다. 남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된다. 그간에 그는 여자를 자신에게 순종하는, 조금 과하게 표현한다면 말 잘 듣는 어린 양이라 생각해 왔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NO’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자기 귀를 의심한다.
‘이게 어디 서방에게 대들어!’
아내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과거가 있다면,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여생은 평탄치 않을 확률이 높다. 아내들은 평생을 이를 갈며 반역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왔을 수도 있다. 이제 당신의 말은 먹혀들지 않는다. 당신이 논리적으로 설득하려해도 소용없다. 뿌리 깊은 원한이 맺힌 상대는, 당신의 논리를 듣고 싶지 않다. 당신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한다. 당신이 아내를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동안, 필시 그녀는 자신이 남편이 당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인격체임을 인식하고, 동등한 조건에서 대화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그걸 당신은 캐치하지 못했다. 당신의 뜻을 고분고분 잘 따르며, 당신의 의견을 무조건 적으로 옳다고 동의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어왔을 지도 모른다. 남편의 권위가 옳아서가 아니다. 반발은 가정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혹시 당신은 ‘이게 어디 감히 서방에게!’ 이런 말을 했거나, 발설하지 않았다 해도 마음속으로 생각한 적은 없는가? 내 예로 본다면 아내가 나의 커플화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근본적 이유는 나의 과거행실에 대한 반발 심리일 것이다. 남자가 여성스런 샌들을 신어서는 안 된다 것은 반항심의 단순한 초보적 단계이다. 오래도록 그녀는 여자답기를 강요받았던 것이다. 이제 내가 남자답기를 강요받을 차례다.
그녀의 입장에서 남자다운 신발은 검정색의 투박한 것이다. 신발장을 열어보면 아내의 변하고 있는 남성관을 엿볼 수 있다. 편하게 서거나 약간 허리를 구부리고 꺼낼 수 있는 높이의 칸에는, 평상시 신는 신발들이 들어 있는데, 내 것은 모두 칙칙한 검은 색, 또는 회색이 주를 이루고, 아내의 것은 흰색이나 때로는 노란색, 주황색 등 밝은 색 계열의 구두와 운동화로 채워져 있다. 아내가 까치발을 들고 손을 한껏 위로 뻗어도 닫지 않는 맨 위 두 칸에는, 오래된 것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아내의 것은 단정한 모습의 단화나, 검정색 계열의 수수한 것들이다. 나의 것은 반대로 연한 갈색이거나 흰색의 운동화나 구두, 검정색이어도 날렵한 것들이 보관되어 있다. 진작 없앴어야 하는데, 아까워서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이다. 신발 패션의 역전이다. 내 것은 날렵하고 밝은 디자인에서 그 반대가 되었고, 아내 것은 단정하고 어두운 색깔의 것에서 다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고 있다.
“내가 옛날에 왜 마음에도 없는 이런 것들을 신어야 했는지 모르겠네?”
아내가 어느 날 신발장 꼭대기, 맨 위 칸을 정리하다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그녀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정숙해야 해!”
이게 그간의 나의 여자에 대한 철학이었다. 젊은 아내는 나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적합한 복장을 갖추느라 고심했었다. 위배되는 복장은 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가정의 평화가 침해될 것이다. 칙칙하고 단정한 신발은, 아내의,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아내가 신경 써야 했던 정숙한 여자란, 이른바 나로부터 강요된 ‘여자다움’ 이었다. 몸가짐은 조신해야해. 순종해야해. 청결해야해, 아이들을 정성으로 돌봐야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자다움’이었다. 나는 스스로 자유분방한 사람이고, 아내를 억압하지 않고, 아내를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평등주의자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아내가 내게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목소리 톤을 끌어 올릴 때, ‘세상이 변해구나’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과거의 영화는 지나간 것이다. 젊었을 때는 그런 말을 내게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남자답게 노력해왔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처자를 잘 먹고 잘 입게 하는 것이 남자의 책무라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으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내는 그러한 나를 남편으로서는 훌륭한 남자라고 생각하며 존경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 혼자만의 추정인지도 모르지만. 존경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라도 존경의 표지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60이 넘고 70을 바라보게 되자 눈에 씌었던 콩깍지가 벗겨지며 세상 속에 외로이 서 있은 아내를 인격체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때, 불행하게도 아내는 역습을 개시하고 있다. 그런 첫 단계로서 내게 ‘남자다움’을 요구한다. 남자는 남자답게 칙칙한 색의 투박한 샌들을 고르라는 것은 역공의 소박한 한 형태이다. 커플화는 물 건너 간 환상이 되었다는 의미다. 여자에게 어울리는 스타일, 남자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은 존재한다. 그 스타일에 맞춰 커플티, 커플팬츠와 같이 커플화도 가능하다, 커플룩이 여성을 남성화, 남성을 여성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의 복장방식일 뿐이다. 커플룩은 양성평등과는 무관하다. 다만 여자의 성, 남자의 성에 대한 구별을 완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어 양성평등달성에 도움이 되는 복장 스타일일 것이다.
태생적으로 여자와 남자는 신체구조가 다르다. 사춘기를 접어들면 남자와 여자의 몸은 보다 다른 방향으로 변한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으로 변하는데 이에는 성호르몬의 역할이 크다할 것이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성을, 에스트로겐은 여성성을 우세하게 한다. 생리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다름이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적인 차이의 존재는 남녀 간에, 성평등이란 양성에게 동등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지고, 같은 방식으로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남자직원과 여자직원이, 같은 보직에 같은 시간, 같은 정도의 부하가 주어지는 일에 근무한다면 보수나 복지수준이 같아야 한다. 그러나 같은 직무를 담당하는 양성 간에 근무의 성과도에 따라 보수 등급은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것이 달라지는 것은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이란 동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등이 있어야 할 곳에 차등이 있음을 의미한다. 불평등이 아니다. 불평등이란, 같은 조건에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그렇게 말한다. 다르게 대우 받는 것이 옳을 때, 다르게 대우받지 못하고 동등하게 대우 받았다면 그건 불평등이다.
‘~다움’이란 성이 가진 특성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다움’이라 말할 때, 그 성, 즉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다움’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여자이기 때문에 무엇이 안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면 그건 평등에 어긋난다. 여자이기 때문에 아니라, 그가 여자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본적인 조건을 넘어설 수 없이 여자로서 행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고 차분하게 얌전히 행동하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집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생식과 육아에 남자와 다른 특성을 갖는 것은 자연적인 조건이다. 남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 연약하고 성적 취약성을 가진 여자를 보호할 책무가 남자에게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조건을 제외하면, 여자가 치장하는 것만큼 남자도 치장할 수 있고 여자가 얌전하게 행동하는 것만큼 남자도 얌전하게 행동할 수 있다. 남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씩씩해야 하고, 용감해야 한다는 말은 맞지 않다. 여자도 용감해질 수 있다. 다만 여자는 여자의 신체적 특성상 남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 못할 뿐이다.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은 남자의 특권중의 하나이며, 그래서 남자는 용기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통념으로서 불문율이다. 그러나 반드시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만이 남자다움일까? 남자가 여성스런 샌들을 신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일까?
남자이기 때문에 딱딱하고 볼품없는 투박한 샌들을 신어야 한다는 생각은 낡은 사고방식이다. 남자가 예쁘장한 신발을 신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관념은, 장구한 세월동안 여자는 ‘아름다움’으로 인식되고, 이에 반해 남자는 ‘터프함’으로 인식된 사회적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터프함에 대비되는 ‘아름다음’이라는 미명아래 여자는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때, 그 배후에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남자들의 숨의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는, 한편에서는 예쁜 것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구가 있을 수 있다. 여자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개념이다.
시대변화에 따라 양성평등에 대한 관념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여자를 ‘미’의 개념이 아니라, 여자를 남성의 파트너로서 남자와 같은 정도로 인격체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여자는 ‘미’가 아니라, 여자를 신체구조상 성적취약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성은 단지 여자보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고 성적취약성이 여자에 비해 크지 않은 인격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내가 ‘남자’가 예쁘장하게 보이는 쪼리샌들을 신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이점을 아내에게 주장할 권리가 내게 있다. 하지만 권리에 관한한 내 권리는 아내의 권리가 신장되는 것과 반비례하며 줄어들고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많은 여자의 힘이 득세한다. 꼭 집어서 어는 때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 남성성의 특징을 주는 테스토스테론의 공급이 줄어들 때 시작한다. 여성은 생리 중단으로 에스트로겐의 공급이 줄면서 여성적 특징이 감소하게 되어, 양성의 성적 간극이 좁혀진다. 생리 호른몬의 공급에 변화가 생기면서 여자로서 또한 남자로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남녀관계가 정의된다. 양성은 보다 자연적으로 생리적 유사성에 접근한다는 의미이다. 나이 먹음이 의도하지 않은 양성평등의 달성에 도움 되는 것이다.
젊어서 먹혀들던 남자의 기백은 나이가 들면서, 보통 아내라는 장애를 넘기 힘들어 진다. 젊어서 양성평등 개념이 없던 나는 ‘감히 서방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여자가 서방에게 대들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성격이 고약하거나 난폭하지 않은 비교적 유하고 자타가 인정하듯 여자를 많이 배려했던 내게도, 가끔은 ‘감히 서방에게’이런 의식을 가졌었고, 그런 말을 실지로 밖으로 내뱉은 것이 술기운을 빌려, 또는 장난삼아 그리 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그건 사실상 내게도 남성적 우월의식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젊어서 난봉꾼을 둔 아내들이, ‘나이 먹어서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라고 속으로 벼르고 벼른다는 속설이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나의 아내는 젊어서 내게 받은 설움을, 이제 때가 되어 되갚기 시작했다. 아내의 공격이 효과를 보이며, 일찌감치 아내와 나 사이에 당연히 존재했어야 할 성적평등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장구한 시간 속에서 달성되고 있다.
“안 돼! 남자가 남자답게 시꺼먼 것을 신어야해! 알록달록한 것을 신겠다고 투정부지마세요. 남편님!”
강 준 건(24년 8월 부산양성평등콘텐츠공모 최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