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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장
"악! 아-악!"
생명 창조가 주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무명천을 입에 깨물고 있었으나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비명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는지 조천영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힘을 내야 해, 새댁! 엄마가 되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엄마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선명하게 들려오는 한마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온몸에 있는 모든 힘을 전부 짜냈다.
'해낼 수 있어. 백랑과 나의 분신이야, 나의 행복이라고.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조천영이 이를 악문 채 다시 힘을 써댔고 그녀의 옆에 있는 갈태독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순간 조천영의 몸 상태를 살펴야 했기에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녀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혼자서 낳는 아이가 아니었다. 구소운과 냉추렴이 같이 힘을 쓰고 있었고, 밖에서는 석두와 광견조 일행이 용을 쓰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마음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건강한 아가의 출산과 조천영의 안전이었다. 두 사람을 걱정하는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대고 소원을 빌듯이 석숭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수십 개의 별똥별들이 마을로 쏟아지는 게 목격되었다. 붉은 불길이 넘실대고 있는 별똥별.
"헉! 적이닷!"
그것이 별똥별이 아니고 불화살이었다는 알아차린 석숭이 기겁을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나무와 풀로 지어진 집들은 금방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이들의 비명소리. 광견조 일행이 있는 집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른 것이었다.
"빨리 사람들을 구해라!"
"멈춰!"
석두의 명령에 따라서 광견조원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수백 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한 놈이라도 움직이면 여기 있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는다."
"설검후?"
석숭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설마 이곳에서 설검후와 조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벌써 오 개월이 흘렀고 황실에서 지목한 죄인이었기에, 다시는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가 복수의 칼을 갈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거였다.
"석 대인! 광천뢰로 날려버립시다."
소살우가 가지고 있던 광천뢰를 꺼내들며 석숭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 되네. 저들의 앞에 있는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최고의 무기였던 광천뢰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설검후의 일행 맨 앞쪽에 서 있는 사람들, 바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환대해주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맨 앞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진영 중간 중간에 마을 사람들을 세워둠으로 광천뢰를 던질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해버렸다.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하나씩 하나씩 전부 씹어주겠다."
설검후의 몸에서 광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죽이고 또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더욱 화가 나 있었다.
저 별것도 아닌 놈들에게 자신의 모든 기반이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릴 정도로 분노가 일었다.
"닥쳐라, 이놈! 감히 황실에 대항하려 했더냐? 네놈이 저지른 죄과는 생각지도 않고 가문이 몰락한 것만 억울하였단 말이냐? 잘 듣거라.
금의위 영반으로 명하노니 지금부터 설검후를 돕는 자들은 대역죄인으로 간주함은 물론이고 구족이 몰살당하는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석숭이 추상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설검후를 제외하더라도 그의 부하들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구족, 자신이 알고 있는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두를 다 색출하여 참수하겠다는 협박이었다.
"호! 그랬군. 네놈이 금의위 영반이었단 말이냐?"
저들에 의해서 설가장이 멸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숭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아들의 비밀이 들통 났던 거였다. 중원 최대 부호인 석숭의 또 다른 신분은 금의위 영반이었다.
그러나.
이미 목숨 같은 것은 버린 지 오래다. 부하들도 전부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설가장에 남아 있던 무사들은 대부분이 형제고 가족이었다.
또한 자식인 설태만의 사건을 모두 알고 있기에 투항하더라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복수밖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놈이 죽어도 구족을 멸할 수 있을까? 전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그럼 이들을 살려주마. 너희들에게 쉴 곳을 주었던 불쌍한 마을 사람들을 말이다."
백산 일행에게 쉴 곳을 주었다는 설검후의 말, 만일 마을 사람들이 죽게 되면 그것은 전부 백산 일행의 책임이란 소리였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석숭의 시선을 접한 설검후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살려주세요! 엄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집이 타 들어가며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어른들은 인질로 잡혀서 일행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었다.
"너의 가문을 멸망시킨 사람은 금의위 수장인 나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은 관련이 없다.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나?"
"큭! 역모는 구족이 참수당하는 중죄가 아니었나? 너희는 나에게 역모를 저지른 것이야.
따라서 너를 포함한 전부를 말함이야. 새로 태어나는 애도 제외가 안 돼, 셋을 셀 동안의 기회를 주겠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석숭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백산 일행 전원이었다.
"야비하구나, 설검후! 그래도 한때는 천무맹의 부맹주까지 하지 않았더냐."
"그랬지. 또다시 천무맹의 부맹주가 된다면 정의의 수호자로서 살 거야, 얼마든지 그리 살 수 있단 말이다. 하나!"
인간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인간의 양면성.
정도라는 것도 마도라는 것도, 심지어는 선악의 판단마저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석대인!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애들이 죽습니다.'
남궁지우의 전음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대소를 구분하려면 아이들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빨라도 적의 손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죽여달라고 목을 내밀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둘!"
둘이라는 설검후의 목소리가 악마의 호곡성처럼 들려왔다. 그 순간 석두를 비롯한 광견조원들의 행동이 약간 변했다.
석두와 소살우는 가만히 자신의 품속에 있는 광천뢰를 꺼내 들었고 나머지는 서로 움직여야 할 집을 눈빛으로 교환하고 있었다.
'석 대인, 광천뢰를 쓰겠습니다.'
'자네?'
석두를 향해 놀란 듯한 전음을 보내곤 있으나 그 방법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이 항복한다 해서 마을 사람을 살려줄 자들도 결코 아니다.
금의위 영반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자들이 아닌가. 자신들의 생사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 전부가 죽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설검후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힘없는 양민들이다. 이 깊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사는, 어쩌면 마을 사람들 또한 인생의 실패자들인 것이다.
'살우야, 앞으로만 던져라.'
소살우에게 전음을 날린 석두가 광천뢰를 만지작거리며 전면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으나 그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한결같이 불타고 있는 자신들의 집 쪽이었다.
이미 처참하게 죽어 있던 촌장의 모습을 보았기에 자신들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들을……. 컥!"
석두와 눈이 마주친 한 명이 소리를 지르다 이내 칼에 찔려 쓰러졌다. 자신들은 죽어도 좋으니 아이들만은 구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석두의 눈에 뿌연 물막이 어렸다.
저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죄라면 이곳에서 자신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것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 저들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죽음을 택하고 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소외되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기에 이곳까지 밀려왔고, 작지만 소박한 행복을 일구어놓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방문이 저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말았다.
전부 자신들 때문인 게다. 자신들만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던들 저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운명으로 치부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잘 키워드리겠습니다! 훌륭한 인물로 키우겠습니다!"
석두와 소살우의 손에서 광천뢰가 날았다.
전부 네 개의 광천뢰가 마을 사람들과 설가장 인물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빗살 같은 속도로 날았고 나머지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 던지고 싶어도 덜질 수 없었다. 불에 타고 있는 집까지 영향을 받기에 네 개밖에 던지질 못했다.
"헉!"
설검후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설마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광천뢰를 던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석두와 광견조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까닭이었다.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항복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몰랐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질 않은가. 조천영과 새로 태어날 아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항복할 수가 없었다.
콰앙! 콰앙!
수양산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화광과 함께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사방에 마을 사람들과 설가장 인물들의 찢겨진 혈육이 난무하였다.
"으악! 살려……."
순식간에 백여 명의 인물들이 어육으로 변하며 십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죽인다!"
온몸이 붉은 혈광에 휩싸인 석두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나오며 곧 설가장 인물들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광천뢰가 터지기 직전에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던 눈빛,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타지인들을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다만 자식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의 눈빛이었다. 석두가 더욱 분노한 이유였다.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서 화탄을 던지고 있는데도 왜 저들은 화를 낼 줄도 모르는가.
왜 체념이라는 굴레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것인가. 힘이 없어서인 게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기에,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그 참혹함을 저들이 겪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자신이 지었던 눈빛과 똑같은 눈빛을 가지고.
"창궁혈해천(蒼穹血海天)!"
"광풍신권(狂風神拳)!"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갛게 달아 있는 붉은 검이 허공을 날고, 두 정권에서는 사방에서 타고 있는 불빛 같은 분노가 전방을 향해 죽음의 살기를 뿌렸다.
장강에서부터 시작된 혈전에서부터, 그의 두 손과 검에 무수히 많은 피를 적셔왔지만 진정으로 화를 내본 적은 없었다.
오직 살기 위해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했기에 적을 향해 살수를 뿌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분노했고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생성된 죽음의 살기가 전신을 통해서 무섭게 분출되었다.
남보다 힘이 있으면, 남보다 많이 가졌으면 그들이 전부 옳은 것인가. 자신보다 힘이 없고 가지지 못했으면 인간도 아니란 말인가.
그들도 인간이란 사실을 왜 한 번도 생각해주지 않는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익힌 무공이 아니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고자 익힌 무공도 아니었다.
"으아악! 커-억!"
분노한 석두의 검은 무자비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떨어진 팔다리가 허공에 난무했다. 순식간에 온몸에선 적의 피가 쏟아져 내리며 혈인이 되어갔다.
시작.
석두의 광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석두의 뒤를 이어 설가장의 인물들을 향해 몸을 날린 이들은 석숭과 금령이었다.
"구룡신공(九龍神功)!"
모든 내공을 뽑아내며 자신의 최고 절기를 쏟아냈다. 자신이 관리가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넘치도록 많은 돈을 가진 자신에게 굳이 재산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권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재산 중 조금만 빼내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이 권력이었다. 하늘이 자신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친구가 성군이 되는 것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황실의 관리로서 보호해야 할 양민의 죽음을 방치하고 말았다.
저들이 복수하러 나타날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옥새를 찾을 욕심에 금의위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들의 보호를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황실의 안위만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금령 두 사람이 옆에서 적을 베어내고 있는지 사방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상대의 수도 엄청났고, 무공 또한 고강했다.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그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행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육 척에 달하는 초상의 사풍도가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은 채 허공을 가르며 서문천의 양손에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사방으로 뿌려졌다.
혈우가 내리고 있었다. 이십여 호밖에 살지 않던 조그마한 화전민 마을이 피에 젖어가며 울어댔다.
"활! 불화살을 쏘아라!"
부하들이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설검후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었다. 검강 도강의 고수들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목숨도 도외시한 채 달려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 정도의 고수들이고 또 신분이라면 몸을 사릴 만도 한데,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심정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악마의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수십 수백의 화살이 조천영이 누워 있는 집을 목표로 날아들었다.
화살 하나하나에 내공이 실려 있는지 그 빠르기 또한 엄청났다. 설가장 인물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던 일행이 화살을 쳐내기 위해서 뒤로 물러났다.
"어르신, 이곳을 피해야겠습니다."
다급한 표정으로 석두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 안도 밖의 상황처럼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조천영의 상태가 위급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진통은 계속되고 있는데 몸속에 있는 아이가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온 힘을 쓴 조천영 또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거였다.
밖에서 피비린내가 흘러 들어오고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나가보지 못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조천영의 온몸을 주무르고 있는 노파, 송일의 부인인 그녀의 눈에 가득 고여 있는 것은 눈물이었다.
평생을 같이 살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 했던 남편이 죽었고, 옆집 처자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산모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출산이라 했다.
죽어간 남편과 동네 사람들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가 되어버렸다.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같았지만 이 황량한 외지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아악!"
거의 실신 지경에 있으면서도 진통은 느끼는 것인지 조천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어르신!"
이미 집에 불이 붙었는지 천장 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광견조 일행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지만 내공마저 실려 있는 수백의 불화살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가자! 천영아, 조금만 참아라."
갈태독이 두 손으로 조천영을 안았다. 안타까웠다. 조산하는 것만 해도 위험한 일이거늘 장소까지 옮겨야 하다니…….
"모두 백야평으로 이동한다!"
계속 머물기에는 마을이 너무 비좁았다. 어린애들과 조천영이 있는데 사방이 불구덩이가 아닌가. 이런 곳에서는 아이들이 견디지를 못한다.
"아악!"
"이런!"
조천영이 지르는 비명소리에 갈태독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하체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거였다.
"피가 너무 많아요, 영감님!"
"무슨 소린가?"
"하혈도 같이 일어나고 있어요."
"빌어먹을."
태아는 움직일 생각도 없는데 양수(羊水)가 터진 거였다. 또한 산파의 말을 들어보면 하혈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이다.
지금 최대한 힘을 써야 할 산모는 입술이 검게 변한 채 거의 실신한 상태이고 앞에는 적들이 새카맣게 일행을 가로막고 있다.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까봐 지금껏 자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내공을 이용해서 조천영의 정신이 돌아오게 해야 했다.
"할…아…버지……."
"그래, 정신이 좀 드느냐."
"백랑은……."
"아직 안 왔다. 힘을 내라. 그 녀석에게 예쁜 아기를 안겨주어야 할 것 아니냐."
"힘이 없어요."
백산이 아직 안 왔다는 갈태독의 말에 조천영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결코 와서는 안 될 사람이기도 했다.
'백랑!'
그러나 보고 싶었다. 단 한 번만 얼굴을 보면 새로운 힘이 날 것 같았다.
"언니, 힘을 내요. 오라버니는 곧 돌아올 거예요."
"추렴아, 소운아.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지? 꼭 그대로 해야 돼!"
백산이 떠나고 나서 그녀들에게도 유언이란 것을 했다. 자신을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사랑해주라고.
"안 돼요, 언니. 언니가 힘을 내지 못하면 오라버니도 살지 못해요."
"그래, 추렴이 말이 맞다. 네가 살아야 모두가 산다. 산이가 살고 소운이가 살고 추렴이가 산다. 그러니 제발 힘을 내라."
바로 옆에서 죽음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오직 조천영을 구하고 태아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밖에 없었다.
광견조 일행이 구축하고 있는 진은 과거 용지에서 구축했던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꾸준히 연습을 했기에 이제는 거의 완전하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궁지우와 남궁미령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완전한 검진의 위력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청풍검진의 최대 약점을 안고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장 앞에는 석두가 자리를 잡고 주변으로 혈광을 뿌려대고 있었으며 좌측에는 소살우가, 우측에는 석숭이, 그리고 맨 뒤에는 광사 초상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여덟 개의 삼재진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십여 명의 아이들과 조천영 일행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검후가 이미 청풍검진의 약점을 간파하고 지금의 상황을 유도해왔다는 것을 남궁지우와 남궁미령은 알지 못했다.
제갈수연이 그에 준 정보가 바로 이것이었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부하들과 백여 명의 궁수들, 그리고 청풍검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내부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검진이 속도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청풍검진은 이미 절대의 검진이 아니다. 다만 좀 강한 무인들이 구축한 평범한 검진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사경을 헤매는 임산부와 아이들까지 보호해야 하는 광풍대원들로서는 설가장 무인들이 날린 화살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설검후가 승리를 장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아이들만 살려둔 이유였다.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네놈들의 죽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나의 자식처럼 실성하며 떠돌게 해주겠다. 킥킥킥!"
백산이 없는 것도 송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식이 받았던 대로 돌려주어 백산마저 미쳐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이미 미쳐가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널름대는 화마 속에서 번들거리는 설검후의 눈은 적들의 죽음을 즐기고자 하는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윽!"
이제는 도영천이라 불리는 칼날이 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앞에서 몸을 날리며 달려드는 적을 베어내는 순간, 자신의 옆으로 빨려 들어가는 화살을 발견하고 다리를 내밀어 막아냈던 거였다.
내공이 가득 실린 화살이 향한 곳은 내부에 있는 아이들이었던 까닭이었다.
허벅지로부터 섬뜩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화살을 뽑아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계속해서 달려드는 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순간의 멈칫거림은 청풍검진이 무너짐을 의미하고 진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남궁지우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적들은 청풍검진의 약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였던가…….'
남궁세가의 진에 대해서 이 정도로 알고 있는 곳은 과거의 동지였던 제갈세가밖에 없다. 애들만 살려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남궁지우도 설검후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기동력을 중시하는 청풍검진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동귀어진에 이은 화살공격,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면 진에 구멍이 생기고 애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이미 약점을 간파당한 청풍검진은 더 이상 강호최강의 절대검진이 될 수 없었다.
검진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혈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화살을 막을 시간이 없을 때는 전부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피가 아닌 자신들의 피로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진영을 유지해라!"
피를 많이 흘린 칼날과 송곳이 비틀거리며 주춤하자 남궁세우의 내공 실린 일갈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버텨야 한다. 백야평으로 가야만 자신들에게 여유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일행의 피해가 너무 컸다.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씩 몸에 박히는 화살의 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갈 노인이라도 나서준다면 조금 여유가 생길 수 있겠지만 그의 상태도 자신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자신의 내공과 온 심력을 다해서 조천영의 상태를 돌보느라 다른 곳에는 눈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궁미령을 비롯한 여자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무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각이면 도착할 수 있는 백야평인데 한 시진을 이동했음에도 절반밖에 오지 못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적도 칠십 명 이상이 죽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수가 너무 많았다.
"남궁 대협, 제가 심검을 전개하면 안 되겠습니까?"
보다 못한 석두가 남궁세우를 향해 말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심검을 펼치면, 그 다음에는?"
심검을 펼친다 하더라도 적들도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 처치 가능한 인원은 오십 명 내외일 것이다.
그럼 석두는 당분간 재기불능이 된다. 짐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말이다.
"백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남궁세가에서 남궁무와 비무 중에 백산이 했던 말, 최악의 상황일수록 가장 자신 있는 무공으로 상대하라 했던 가르침을 두고 한 말이었다.
혈로(血路)가 이어지고 있었다.
청풍검진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따라서 피로 물든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죽이고자 달려드는 설가장 인물들의 피와, 광견조와 무욕인,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메마른 땅을 적시며 길게 이어졌다.
몸이 정상적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너덧 대의 화살을 팔다리에 박아둔 채 백야평을 향해 힘든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공자! 빨리 오게, 자네만이 희망이네.'
백산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없었기에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자신들에게도 조천영에게도 백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조금만 힘을 내라, 백야평에 다 왔다."
여섯 개의 화살을 몸에 단 채 일행을 독려하고 있었으나 남궁지우의 얼굴은 암담했다.
청풍검진의 약점이 간파당했기에 백야평도 크게 유리하다 할 수 없음이다.
남궁지우가 가려고 하는 곳, 광활한 평지에 유일하게 서 있는 거대한 바위 쪽이었다. 그곳으로 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공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궁지우의 지휘에 따라 백야평으로 가기 위해 광견조 일행이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일진광풍을 일으키며 하늘을 나는 검은 점이 있었다.
백산이었다.
한낮에 출발하여 약을 살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강호무림의 최고 고수인 그가 온몸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일반 무인의 걸음으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를 거의 한나절 만에 왕복한다는 것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내더라도 자신의 품에서 보내고 싶었다. 혼자 가는 길은 너무 힘들고 외로울 것이다.
부인들 셋이서 밤을 새워가며 만들어준 옷이고 비만 와도 옷 버린다며 빗물조차 퉁겨내면서까지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옷이 뜯어지고 있는데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양산이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수양산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백산의 몸이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마음은 벌써 화전민 마을로 달려가 있었지만 남아 있는 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구룡신공!"
"혈극폭!"
혈인들이었다. 모두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듯 온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옷 사이로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오며 바닥에 뿌려졌고 이내 흔적이 지워졌다.
석두와 광견조 일행은 결국 이곳까지 왔다.
온몸에 화살을 꽂은 고슴도치가 되어서 도착했고, 절반씩 나누어 전방을 보호하는 한편 나머지는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버틴 시간이 또 한 시진이다. 지혈도 소용없었다. 몸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혈하기 위해 눌렀던 혈도를 다시 풀어야 했다. 그럼 또다시 피가 흘러나온다.
"천영아! 힘을 내라, 힘을……. 산이가 오고 있다, 백산이 온단 말이다."
갈태독이 울고 있었다. 이미 죽었어야 했는데 자신의 내공과 죽을 수 없다는 조천영의 의지가 혼백(魂魄)을 붙들어두고 있는 것이다.
"백랑이 왔어요?"
순간 조천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고 염주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돌아온다. 백산이란 한마디에 정신을 추스르고 있는 거였다.
"설마……. 아닐 거야."
갈태독이 그럴 수 없다는 듯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죽기 전에 나타나는 회광반조(廻光反照)의 현상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 돼!"
"나온다! 좀더 힘을 내! 조금만 더!"
갈태독과 산파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갈태독의 외침은 떠나려는 혼을 막기 위한 고함소리였고, 노파의 외침은 드디어 아이가 나오는 것에 대한 희열의 외침소리였다.
'백랑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해, 백랑이 오기 전에…….'
어디서 힘이 생겨나는지 알 수가 없다. 조천영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온몸에서 힘이 쏟아져나왔다.
황량한 벌판, 거대한 바위의 아래쪽.
앞에서는 수백의 인물들이 공격을 해오고 뒤에서는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피 흘리는 광견조와 석두, 그리고 죽어 있는 적들.
오직 죽음만이 존재하고 있는 이곳에서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랑!"
"나왔다!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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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갑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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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ㅎ
즐독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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