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사람들 가슴에 큰 멍을 들였으니 카피 캣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67년 6월2일 새벽 마산경찰서 관내인 경남 창원군 동면 국도변 보리밭에서 머리가 잘려나가고 팔다리와 동체도 분리된 소년의 시체가 발견돼 사람들은 다시 토막살인 악몽에 빠져 들었다. 17세가량인 소년의 시체는 미제 비옷과 비닐 백에 둘둘 말려 버려져 있었는데 경찰은 끝내 피해자 신원을 밝혀내지도 못하고 범인도 잡지 못했다.
토막 살인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도 번졌다. 67년 11월 도쿄 경찰은 아카사카 나이트클럽 여급(호스티스)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 내 개천에 내다버린 재일 한국인청년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범인은 돈 문제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여급이 자신을 “죠센징!”이라며 멸시하는 투로 불러 화가 나 죽이고 시체도 훼손해T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이 사건을 사회면 톱으로 다루며 춘천호반 사건을 모방한 것이라는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해 12월에는 인천에서 또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술집 접대부와 동거하던 30대 남자가 돈 문제로 다투다 여인을 죽여 시체를 훼손했다. 그는 시체를 종이상자에 넣어 몰래 옮기려고 마루에 내놓았다 수상하게 여긴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살해는 순간적 격정에 의한 것이었지만 사체 훼손 등 증거인멸을 노린 것은 역시 춘천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토막사건이 나면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하고 법원도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법에 정해진 대로 당연한 구형이고 선고였지만 카피 캣이 두려워 예비살인자에게 경고를 보낸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카피 캣은 그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극성을 부렸다. 서울 부산 대구에서 춘천사건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 속속 터졌다. 특히 부산에서는 몇 달 사이 대여섯 건의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나 시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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