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 정책
1. 민족 말살 정책 (1) 을사조약 후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또 총독부를 두고 관리를 일본인으로 하여 우리에게 불리한 법을 만들어 우리 민족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에는 결국 우리 나라를 완전히 빼앗고 말았다. (2)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한국의 토지를 약탈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농민 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제때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빼앗았다. 또한 국가나 관공서 소유의 땅도 약탈하였으며 이렇게 총독부가 약탈한 토지는 전국 농토의 40%나 되었다. (3)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에 우리 나라를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폈다. 이른바 ‘산미 증식 계획‘이라는 것을 실시하여, 증산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 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다. 우리 민족은 만주에서 들여온 잡 곡이나 나무 껍질, 풀뿌리 따위로 끼니를 이어가야만 하였으며 일부 농민들은 굶주리다 가 걸인이 되기도 하였다. (4) 일제는 우리 민족이 세우려는 회사를 탄압하고 원료를 싸게 사갔으며, 일본의 상품을 사 도록 강요하였고 우리의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일본의 산업을 발 전시켰다. (5) 우리 국민에게 일본을 우러러보고 섬기게 하는 식민지 교육을 하였으며 우리 민족을 그 들의 침략 정책에 이용하고, 그들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기 위해 우리말, 우리 글의 사용 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우리 역사의 교육을 금지하는가 하면 우리 글로 된 모든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키고, 이른바 ‘내선 일체’를 내세워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 치게 하였다. (6) 일본이 대륙 침략 전쟁 및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우리 민족은 더욱 가혹한 인적 물적 수탈을 당하였다.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각종 물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원병이라는 명목 으로 청년들을 끌고 가다가 마침내는 강제 징병제와 징용제를 동원하였다. 이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일본, 중국, 사할린, 인도차이나 등지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3.1운동
1. 3·1 운동의 배경 (1)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쟁 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 회의 에서 각 민족의 운영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결의 원칙을 제안하였다. 이는 항일 투쟁을 계속해 오던 독립 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2) 일본의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이 모여 한국 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사상을 길렀으며 1919년 2월 8일 한국인 유학생 남녀 500 여 명이 모여 독립 선언 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고 시위를 하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2·8 독립 선언)
2. 3·1운동의 경과 (1) 일제의 포악한 무력 정치에 대항한 항일 투쟁이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을 무렵인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러자 사회에서는 일본인들이 황제를 독 살하였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고 우리 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커졌다. 마침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이 있은 후 국내의 지도자들이 자주 독립의 결 의를 굳게 하였다. (2) 독립 선언서의 작성은 최남선이 맡았고, 손병희 선생은 독립 선언서에 나설 대표자들을 물색하여 기독교계에서 16명, 불교계에서 2명, 천도교에서 15명을 선정하고 대표는 손병희 선생이 맡았다. (3) 고종 황제의 인산일(국장)을 맞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33인은 최종 모임을 가진 후 거사일을 3월 1일로 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일본 경찰에게 잡혀갔다. (4) 탑골 공원에서는 약 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33인이 나타나지 않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니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들이 독립 선언을 하고 공원을 나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참여하여 대한문(덕수궁 정문)까지 시위 행진을 하였다.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이를 막기 위해 총칼을 휘두르고, 많은 사람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대되어 곳곳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켰으며 간도와 연해주 등지 로 확산되었다. (5) 3·1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켜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희망 을 주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1. 임시 정부의 수립 (1)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운동을 보다 효과 적로 펴 나가기 위해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본의 감시와 무자비한 탄압이 심했으므로 국외에 근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다. (2) 중국 상하이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나라의 이름을 ‘대한 민국’이라 하였으며 이승만을 대 통령으로 하였다. 임시 정부는 나라 안팎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독립 운동의 기 반을 마련하고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2. 정부의 활동 (1) 외교 활동 : 임시 정부는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하는 한편,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2) 홍보 활동 : 임시 정부는 국내외의 동포에게 독립 운동의 소식을 알리고 독립정신을 북돋 우기 위해 ‘독립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고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 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여러 나라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기도 하였다. (3) 군사 활동 : 임시 정부는 만주·연해주의 독립군을 광복군으로 통합해서 중국 정부와 협력 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여 연합군과 함께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4) 임시 정부는 8·15 해방까지 27년 간 상하이를 비롯하여 중국 각지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과 자유를 위해 줄기차게 투쟁했다. 여덟 번이나 옮겨 다니면서도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1948년의 대한 민국으로 연결되었다.
무장 독립 운동과 광복군
1. 독립군의 활약 (1)삼둔자 전투 : 1920년 6월초, 30명 가량으로 구성된 독립군 소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온성 북쪽 지역으로 국내 진입전을 단행하여 일제의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일제는 남양 수비대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 추격군도 간도의 삼둔자에서 최진동이 이 끄는 군무 도독부에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2) 봉오동 전투 : 한국 독립군에게 크게 패한 일제는 월강 추격대를 편성하여 다시 간도로 침입하여 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감지한 홍범도, 안무, 최진동 등이 이끄는 독립 군 연합 부대는 일본군들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봉오동 지형은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유인하여 습격전을 벌이기에는 최적지였다. 따라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일본군을 골짜기 깊숙히 유인하여 일시에 총격을 퍼부어 대 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 결과 일본측은 전사자 160여 명, 부상자 300여 명이었으며, 독립군 측의 피 해는 전사 4명, 부상 2명뿐이었다. (3) 청산리 대첩 : 삼둔자·봉오동 전투 등을 비롯한 1920년을 전후한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 전과 간도 내에서의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약 20,000명의 일본군 대병력을 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들 일본군의 임무는 간도 내의 한국 독립군을 전멸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 대병력의 침입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백두산 서쪽의 울창한 산림 지대를 그들의 새로운 근거지로 하여 병력을 이동 중 10월 20일경 청산리에 약 10여 개 의 독립군단이 집결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이 지역으로 약 5,000명의 병력을 투입시켜 독립군과의 7일간에 걸친 전투가 전개되었다. 청산리 계곡 일대의 골짜기에서 전개된 이 대첩에서 김좌진·홍범도·안무 등 유능한 지휘관들의 작전 지시에 따른 독립군들은 신명을 다해 싸운 결과 대승리를 이루었다.
2. 광복군의 활동 광복군은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항일 군대로, 총사령관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 범석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정식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고, 분열 상태에 있던 공산 세력과 합류를 추진하였다. 광복군은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출정하였고, 미국의 특수 부대와 합동 작전을 펼쳤으며 중국에 파견된 일본군 중에서 한국인들을 광복군에 복귀시키는 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광복군은 국내 진입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인 애국단과 국내의 독립 운동
1. 한인 애국단 (1) 한인 애국단은 1930년대 초 김구 선생이 주도한 단체로 중국과 우의를 높이고 일본 요인 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하였으며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활동이다. (2) 이봉창 의사는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에 다녔다. 그러던 중 독립 운동을 결심 하고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의 임시 정부를 찾아가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1년 12월 2일 일본왕을 암살하겠다는 선서를 하고 수류탄 2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1월8일 도쿄 교외의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국왕의 마차에 수류탄 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3) 윤봉길 의사는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대장부가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 청도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지휘 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일본군은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점령한 후 4월 29 일 일왕 생일 및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 기념식을 훙커우 공원에서 열었다. 윤봉길 의사 는 혼자서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으로 가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를 비롯한 군 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5월 25일 현지 군법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2월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당시 중국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윤 의사의 활동에 대해 “중국의 백만 대병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한국 용사가 단행했다.”며 칭송했다. (4) 이 두 사건은 민족의 단결력을 다시 강화하여 민족 독립 운동의 전열을 다지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독립 의지를 드러내었다.
독립을 위한 노력들
1. 신간회 활동 조선 일보의 간부 신석우, 안재홍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각계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 합하여 1927년 2월 15일 신간회를 조직하였으며 각지에서 지회를 결성하고 항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하게 되었다. 신간회는 국가의 힘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었으며 친일 세력을 물리치고 일제의 간섭을 막아 조국의 독립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었으며 우 리말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2. 문맹 퇴치 운동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 민족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당시 2천 만 인구 중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80%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 문맹 퇴치가 필요함을 깨달은 독립 운동가들과 신문사가 중심이 되어 한글 보급 운동을 펼쳤으며 전국 각지에 야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3. 조선 물산 장려회
물산 장려 운동은 1920~30년대에 걸쳐 우리 물건의 생산과 사용을 장려하고 우리의 자본 과 기업을 성장시켜 민족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생각에서 전개된 전국적 규모의 경제 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 물건을 배척한다고 하여 여기에 참 여하는 사람들을 탄압하였다.
4. 조선어 학회의 활동 조선어 학회는 한글의 보급,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제정, 한글사전 편찬, 한글 잡지 발간 등 한글 보급과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926년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을 맞아 한글날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며 광복 이후 한글학회 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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