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의 피서 풍류
엊그제가 처서. 이쯤되면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하지만 여전히 한낮은 덥다.
그래서 예년 같으면 인근 광안리 바닷물이 차가위져 찾는 피서객들이 확연히 줄어들지만 올해는 지금도 각지에서 온 피서객들로 여전히 붐비고 있다.
이상기온의 영향으로 이 더위는 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날씨를 두고 사람들은 '덥다 덥다' '더워서 못견디겠다' 등으로
짜증스러워 하지만 우리네 조상들은 한여름에는 더운 것이 당연한 이치로 여겼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했던 것같다.
더위를 지긋지긋한 대상으로 보지않고 자연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고 하겠다.
과거 조상들이 사용했던, 가장 대표적인 '더위 피하기용 기구'는 아마도 부채가 아니었던가 한다.
요즘도 부채가 한 여름에 일부에서는 사용되고는 있지만 엣날에 부채의 존재는 신화와 같았다.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선물은 달력이다"라 했듯이 부채는 과히 모두에게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채는 따가운 여름햇볕을 막아주고 흔들어서 바람을 일게 하며 또 파리나 모기를 쫒기도하고 못개풀을 피우고 살필 때에도 그만이었다.
간혹 연로하신 분들이 지금도 소지하고 다니고 있지만 이 가장 한국적인 여름 상징물인 부채는 지금 에어컨과 선풍기에 밀려 점차 사라지는 운명에 있다. 길을 걷다보면 소지용 소형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행인들을 자주 볼수 있을 정도이니까.
부채에서 느낄수 있는 여유와 넉넉한 정취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또 한편으론 남녀노소 구분없이 한 여름에는 삼배옷과 모시옷을 즐겨입었다.
폭폭찌는 더위가 계속될 때 생모시로 된 고의, 적삼 또는 치마가 제격이었고 멋을 부리기 위해 모시옷에다 치자물을 들여 입기도 했다.
비록 모시옷은 촉감이 거칠지만 습기 흡수와 통풍이 잘 되고 입을수록 윤이나 오래 입어도 새옷과 같았다.
그러나 투명성이 너무 좋아 잠뱅이를 껴입어도 남정네들이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남성의 상징물이 은근히 보여지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도 남정네들은 아랑곳없이 팔자걸음으로 활보하고 다녔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시가 남성우위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멋과 특유의 촉감을 느끼게 해 주던 모시도 어느새 나이론과 합성섬유에 밀려 자리를 내주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손질에 잔손이 많이 가고 세탁하기도 힘들며 풀을 먹여 잘 다려야 제멋이 나므로 편의성을 찾는 요즘 아내들이 기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낙네들의 섬세한 손길이 머물고 숯불 다리미의 정성스런 뜨거움이 생명력이었던 이 모시옷을 아직 나는 입어보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아내를 잘 설득해서 까칠까칠한 삼배옷을 멋있게 차려입고 한 번 나들이를 하고 싶다.
여름하면 빠뜨릴 수 없었는 또 다른 하나는 통풍과 햇볕가림용인 발이다. 방문을 열고 여름을 지내기에 방안 내부를 가릴려고 발을 쳤다.
그러면 발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락거렸고 발에 새겨진 글자와 무늬,
매듭이 이루는 조화는 아름다움을 넘어 한 폭의 그림으로 승화되었다.
바람이 좀 세어 발이 앞뒤로 흔들리면 산수화가 그려졌다 사라지고하는, 마치 마술과 같은 신비로 보여주곤 했다.
이 발과 함께 돗자리도 빠질 수없다.
그러기에 발과 돗자리는 바늘과 실인 셈이다. 발이 쳐진 대청마루에 화문석 문양의 돗자리를 깔고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면서 목침을 베고 자리에 누우면 소르르 잠이 들면서 더위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엤다.
이처럼 조상들의 피서풍류는 조금함없이 멋졌고 자연적이었다고 회고된다.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더위를 즐긴, 선인들의 슬기는 느긋하고 한층 여유로웠다.
아쉽지만 지금은 찾기 어려운, 그러나 다시 즐기고 싶은 조상들의 피서풍류가 참으로 이 한 더위에 더욱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