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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혁명은 선물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1920년 8월 14일, 총선을 한달 반 가량 앞두고 발생한 군부 극우파의 쿠데타는 정국을 극심한 혼란 속에 빠뜨렸습니다. 이승만 암살, 친위쿠데타 음모사건, 그리고 ‘실제로 발생한’ 쿠데타까지, 이 모든 것은 기존 집권세력들에게도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죠. 민회 및 추밀원 의원 대부분이 의사당에 억류된 상태에서 그들의 소재를 일일이 파악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쿠데타 이틀째일 15일, 군부 급진파의 수장이라 알려진 이희두 장군은 이완용을 의정상서, 본인을 보위총관으로 임명해 “국가보위위원회(국보위)”를 선포했습니다. 당연히 황제의 재가 따위는 없었죠. 국보위가 긴급보안제령 제1호를 발동해 반국가-반체제주의자들에 대한 무제한 체포령을 내리자, 북만주의 민혁 본부와 한성의 신민당사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대책을 급히 논하던 이들에게 군 방첩대장인 장작림 장군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현 상황을 ‘기회주의자 간적(姦敵)들의 난동’으로 규정했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기회주의자들의 폭거와 난행을 멈추기 위해 공화정으로의 평화로운 전환을 주장했습니다. 즉 황제와 그의 생부 의왕, 황실의 최고 어른이자 수렴첨정자 황태후 김씨를 확보해 정식으로 양위를 받아내자는 아이디어였죠. 또한 각 지방이 쿠데타 세력의 계획에 동조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잠재적으로 쿠데타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은’ 남만주총독 이재각(의양공)을 암살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일행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러한 계획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모두는 일제히 행동에 나섰습니다. 군 방첩대가 공화사회주의자들과 힘을 합치자 중앙정보부 역시 재빠르게 편을 갈아탔고, 민혁에서는 특작대를 파견해 만주총독을 사살하고 쿠데타의 전파를 막아냈습니다. 또한 방첩대에서 육군항공대의 항공기를 지원해 운현궁에 대한 폭격까지 감행하면서 황태후 역시 확보할 수 있었죠. 작전은 완전한 성공이었습니다.
그렇게 확보된 황실의 대표자로 나선 의왕 이강은 선선히 전주 이씨 황실의 퇴장을 인정했습니다. 제위 포기, 황실 특권 포기, 황실의 해외 이주 및 신변보장, 혁명위원회의 선거관리, 황실의 공화혁명 협조, (필요한 경우) 황실 일원에 대한 연금 지급이라는 조건 하에 황실은 총선거 이후 최소한의 명예를 지키며 퇴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총선거는 “누가 봐도 좌익 사회주의의 세가 강한” 혁명위원회의 관리 하에 예정대로 치러지게 되었죠. 쿠데타 세력은 최후까지 저항하다 공화혁명에 협조한 황실의 지시 하에 토벌되었습니다.
물론 혁명위원회가 정말로 공정한 선거를 기획하지는 않았습니다. 기껏 잡은 주도권 탈취의 기회를 날린다면 우익 자유주의자들에게나 좋은 일이었겠죠. 중앙정보부의 적극적인 공작으로 민혁 일원들은 혁명위원회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했고, 군부의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거리에서 적기 행진이 펼쳐져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다고 ‘강하게 추정되는’ 인원에 대한 적색테러 역시 “의분”을 명분으로 실시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선민족혁명당은 전체 의석의 2/3 이상을 차지하며 확고한 지배정당으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26. 혁명의 과실은 양보할 수 없으며, 빼앗길 수도 없다
선거 며칠 뒤인 1921년 10월 3일, 황태후 김씨는 “대한민국을 공식 승인한다”는 짤막한 선언만을 남기고 의왕, 황제, 기타 황실 일원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시영을 대통령으로, 자유지상적 사회주의자인 김만겸을 총리로 한 임시거국내각이 성립되었죠. 그러나 이것을 혁명의 완전한 승리라고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의 우익 군부, 재벌,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위시한)황실이 하라 내각을 충동질하며 조선 출병을 부추기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기틀을 이제 막 잡아나가야 하는 형국에서 외부의 침략이 가시화된다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따라서 거국내각은 엄청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작부터 대내외적 압박에 시달리게 된 대한민국 정부는 모든 사안을 결정함에 있어 일본의 반혁명 침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유민주당과 손잡은 조혁 온건파의 주도로 노사협조체제가 통과되었지만, 이들은 ‘구체제 청산’ 의제에서 가장 급진적인 안을 허용하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본과의 타협을 거세게 비난한 이진하가 신생 ‘반혁명행위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나서야 이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죠. 혁명 이전의 국가는 무산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도구이지만, 혁명국가는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인민의 도구였습니다.
공화혁명이 점점 좌경화될 기미를 보이자, 일본의 한국 침략은 점점 더 가시화되었습니다. 전쟁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하라 내각은 외무성 차관 시데하라 기주로와 해군제독 가토 도모사부로를 특사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들이 내세운 4대 조건(공련과의 연합 금지, 중국 국민정부 지원 금지, 대일 미곡수출제한 해제, 일본인 피해보상)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로 결심한 혁명가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미국의 로든 행정부가 전세계적 금본위제 복귀를 요구하며 이를 반대하는 일본과 대립각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행들은 일본의 조선출병이 현실화되었다는 정보를 미국에 흘려 반전을 노렸습니다. 중국 적화의 방지와 세계금융 안정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필리핀에 전진배치하는 한편 함대를 일본 근해로 파견해 암묵적인 무력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죠.
그러자 일본 대표단은 전쟁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시도조차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점을 깨닫고 철수해버렸습니다. 1921년 1월 3일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이 백주대낮에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일본 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은 더 이상의 행동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새로이 총리로 임명된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강경파의 강권을 받아들여 조선출병안을 최종 승인했습니다. 3월 17일, 사세보항에서 출항한 일본제국 해국 연합함대는 진해 군항에 웅크려있던 대한민국 혁명해군을 박살냈습니다. 18일에는 제주도가, 19일에는 울릉도가 점령되었죠. 지난 시대의 전쟁영웅 박태양이 긴급히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고, 조국방위전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27. 조국방위전쟁
일본의 전방위적 침공을 받게 된 공화국은 우선 공련과의 동맹조약을 체결해 원조를 받기로 했습니다. 공련 측에서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라는 야심찬 구상을 제시하며 사회주의 진영의 유기적 분업화를 주장했지만, 당장 외적의 침입에 당면한 한국 대표단은 이 구상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코메콘 구상을 강력히 내세우고 있었던 레닌 이하 우파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좌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북만주 영토 분할, 동맹조약 체결, 통화연동제 및 공동연구교류 실시, 무기지원, 자원수급 등을 약속하며 한공상호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동맹조약 체결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은 해상봉쇄만으로는 답이 없다는 점을 강력히 실감하고 전방위적 상륙에 나섰습니다. 상륙작전에 직접 나서는 병력만 총 11만명, 이후 최대 78만명을 동원해 한국을 굴복시키는 전대미문의 초대형 작전이 계획되었죠. 그러나 한국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민혁의 말초기관들은 북만주 시절부터 일본과 중국에 미약하게나마 첩보망을 구축해두고 있었고, 일본의 작전계획이 일부 유출되면서 한국군은 핵심 공세지역인 여순과 원산 일대를 철저히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1921년 4월 21일부터 5월 18일까지, 여순과 원산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진행되었습니다. 여순 상륙전에만 52,000명을 동원한 일본군은 연합함대의 대대적 함포사격으로 여순 요새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대련과 여순 일대에서 시가전을 벌이며 출혈을 강요하는 한국군의 처절한 방어를 뚫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습니다. 물론 여순 수비대가 거의 전멸하는 등 한국군 역시 엄청난 피해를 봤습니다.
남포에서는 일본군이 큰 저항을 받지 않으며 상륙할 수 있었고, 부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기만작전으로 부산에 상륙한 병력은 소수병력에 불과합니다만, 원산에서는 일본군 상륙병력 24,000명이 한국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퇴각도 하지 못하고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일명 “목 조르기 작전”이라고 불리던 일본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남포와 부산에 교두보를 확보하긴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려면 몇 년이 걸릴 지도 모릅니다. 여순을 장악해 요동 공업지대를 반신불수로 만들고 남포와 원산 양쪽으로 치고 들어와 경의선과 경원선을 잘라먹는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미국 또한 일본의 행동을 전력으로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로버트 에드워드 쿤츠 제독이 이끄는 미 함대가 대한해협에 당도했습니다. 테네시급 전함 테네시, 뉴멕시코급 전함 미시시피와 아이다호, 네바다급 전함 오클라호마, 뉴욕급 전함 뉴욕 및 텍사스 등등 정규전함만 10척으로 구성된 대선단이 일본 근해에 나타나자 동경은 대패닉에 빠졌습니다. 서해에 있던 일본 연합함대 주력은 부랴부랴 달려와 이들과 대치했지만, 한국에서 발목이 제대로 잡혀있는 일본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단기결전으로 한국을 항복시킨다는 구상도 엎어졌으니, 대본영은 철군을 선택했습니다.
28. 모두 다 찬성투표하자!
물론 일본의 철군이 전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혁특위의 위원 대부분(심지어 온건파로 분류되었던 박영화까지)이 강경파의 안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최신우, 박영효 등 구체제 인사들이 일본에서 한국 침략에 기여하고 있다는 소식은 혁명의 급진화만을 앞당길 뿐이었죠. 단숨에 모든 자본가 부르주아 계층이 “소위 ‘시장질서’를 명목으로 그간 무산계급 대중의 마땅한 이익을 탈취해온 파렴치한”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혁명의 수호는 곧 ‘인민의 적’에 대한 단호하고도 가혹한 응징과 동의어가 되었고, 따라서 대내외적 위협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순수한 혁명무력”을 수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게 구 근위대, 사법경찰(국가헌병대) 등 준군사조직을 모두 규합한 내무임무군이 창설되고 중앙정보부가 반혁특위와 합병되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풍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각종 반일 선전이 전국을 뒤엎고 거리의 인민들이 “반동에게 죽음을!”을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이에 호응하듯 조선민족혁명당 인민공공소위원회는 6월 10일 “매국적 우파에 대항한 총력투쟁”을 주장했고, 이 급진적인 여론을 그대로 활용한 반혁특위는 자유민주당 우파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동시에 “인민의 적”에 대한 자발적 고발을 유도해 반혁명세력을 끝장내버렸습니다. 군부, 관료조직, 일터 등 모든 공간에서 반우파투쟁이 전개된 결과, 한국 혁명의 진로는 비가역적인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용감한)이들은 이것이 일본과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7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제국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Napa)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한때 일본은 사실상 패전국 대우에 가까운 가혹한 요구안을 제시해댔으나, 중국 문제를 훨씬 중시하던 미국은 일본에게 고강도 압박을 가하면서까지 ‘무조건 평화’를 강요했습니다. 물론, 조건은 한국이 워싱턴 8국공약을 준수하여 국민정부 승인을 철회하고 북양정부를 재승인하는 것이었죠.
전쟁이 끝나면서 ‘전시공산주의’ 역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반동 제국주의 세력이 혁명 그 자체를 뒤엎으려 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은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전반을 지배했습니다. 세계 민중혁명 지원이라는 길이 나파 조약의 결과로 가로막힌 상황과 결부되어 이는 ”혁명의 요새(bastion of the revolution)”라는 노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혁명의 요새” 노선은 대한민국 체제를 “그 어떤 대내외적 위협으로부터도 지켜낼 수 있게” 만듦을 그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남녀 모두(이전과 달리, 대학생 등 면제사유도 대폭 삭제)에게 평등하게 부여된 2년 6개월의 병역 의무, 이론상 수백만의 병력을 동원 가능하게 할 예비군 제도, 그리고 전략산업(전기, 수도, 광산, 유통, 통신, 군수 등)의 완전국유화 등이 그 수단이 되었습니다.
공련의 사회혁명당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가 된 것처럼, 조선민족혁명당 역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내의 모든 정치단체가 국가의 통제 아래로 들어왔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자유민주당, 그 전에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썼던 정당 역시 ‘인민공회(구 민회)’에 등록된 “혁명정당“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노동자와 자본가의 협조 및 이익균점”은 “당국의 방침에 협조하지 않는 반동 부르주아지를 배제한다”는 의미로 뒤바뀌었습니다. 애초에 구 자본가 계층이 반우파투쟁으로 사실상 뿌리뽑힌 상황에서, 경영인 역할을 맡는 이들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 사회주의 혁명조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 엘리트계층이었습니다. 반혁특위의 소위 ‘문화대혁명’ 정책 하에서 한국의 혁명은 강력하게, 그리고 영구적으로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Epilogue: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조국방위전쟁은 대한 혁명의 길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이분법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고, 혁명에 충실한 것 이외의 사항은 모두 반동적(또는 ‘매국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반동분자에게는 파멸적 몰락만이 보장되었습니다. “창홍타흑”을 통해 사회의 모든 반동적 요소들을 제거하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던 기관은 다름아닌 반혁특위였죠.
1921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까지 지속된 반우파투쟁은 자본가, 우파 자본주의자, 구시대적 관료, 군부 내 반혁명분자 등 위협요소를 거칠게 도려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일본과 같은 반동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 혁명을 범하려 할 지 몰랐기 때문에 반혁특위는 ‘도서정리사업’ 등을 통해 철저히 봉건-부르주아적 문화를 파괴해나갔습니다. 반혁특위 위원장 이진하와 그녀의 심복인 부위원장 김정파는 사법, 문화, 교육, 종교의 모든 면에서 구시대적 요소를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의문의 죽음 또는 추방조치를 당했지만, 이 모든 것은 혁명의 수호를 위해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문화대혁명’이라 불린) 이 조치들은 공화국의 기초적인 틀은 범하지 못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구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정치세력들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한 개인‘을 창출하지 못했고, 혁명의 주역들은 동지를 공격하기보다는 사회문화적 헤게모니와 군사안보적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죠. 특히 1922년부터 1930년까지 대통령(이후 ‘주석’)을 지낸 박태양의 딸 박영화는 가장 이질적인 당파이자 원내 중도좌파정당인 근로인민당을 - 대중주의 노선으로 - 훌륭하게 지켜내며 혁명이 극단적으로 타락하지는 않도록 보호했습니다.
1920년대 말이 되자 반혁특위의 왕성한 활동도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동휘를 이어 중도우파(마르크스주의) 사회당의 총재가 된 영윤이 더 이상 연속투쟁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점, 투쟁을 주도하던 이진하 위원장이 ‘동지 사법살해‘ 스캔들로 정치적 곤경에 빠졌다는 점, 반혁특위의 2인자 김정파가 홀연히 망명했다는 점, 근로인민당과 까에세르 등 좌파에서 거센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점도 원인이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구시대 문화를 파괴할래야 파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묘를 발파해체하고 창경궁을 인민 복지를 위한 유원지로 만들고 수많은 고전문학을 검열해버린 상태에서 더 극단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선택지였죠. 혁명 수호의 핵심요소이던 공련의 지원 역시 그들이 지난 날의 약속을 들먹이는 탓에 중단될 위기에 놓였고 말입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의 시기는 종언을 맞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시대였죠. 실용주의, 성장우선주의, 개발독재주의가 공화국의 새로운 테제로 발돋움했습니다. 안보상 이유를 위한 산업 분산, 잠수함 전력의 최대충원, 축출되었던 동지들의 대거 복권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죠. 김만겸, 이동휘의 뒤를 이어 1934년 제3대 수상으로 임명된 영윤은 미국 롱 행정부의 ‘콘코디즘(협동주의 노선)‘ 방법론마저 적극 받아들여 공업집산주의, 인민 요새화 전략 등 특단의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년대의 문화대혁명과 30년대의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은 내부의 적대세력을 일소하고 국가역량의 결집력을 다짐으로서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전세계를 불태운 제2차 대전쟁에서 공화국이 최종적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어쩌면 문혁 기간동안 환멸을 느끼고 떠난 윤야리와 공유남의 선택이 현명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권력을 포기했지만 적어도 혁명이라는 거대한 들불에 자신들의 내면을 잠식당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윤야리가 종신 관리자로 재직하는 대경 제4목장의 양떼들이 자신들의 앞날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듯, 공화국의 인민대중 역시 자신들의 권리, 자유, 인권의 존재를 빠르게 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Who watches the watchman?)”
- 안창호, 1938년 모스크바에서.
프랑스가 항복하는 데 걸린 시간보다 진행기간이 더 길었던, 두 개의 시즌과 장장 40년의 작중 시간에 걸친 롤플레잉이 그 끝을 맞았습니다. 참여해주시고 관람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약간의 휴식기를 가진 뒤 차기작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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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두 수고많으셨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오늘 출국..
몸 성히 돌아오세요.
무탈하게 다녀오시길... ㄷㄷ
조심히 다녀오세요...
오늘은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차기작을 뭘로 할지는 아직 못 정했지만, 일단 동아시아(특히 한국)쪽은 당분간 손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전근대 조선이라던지 소재야 넘치지만, 어떤 전개를 가져다놔도 어디선가 본 전개가 되는 점도 있고 해서... ㅋㅋㅋ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건 남미(대공황기 아르헨티나, 아옌데 칠레, 에스코바르 콜롬비아(!))쪽과 예전에 기획했었던 1980 유고, ANC 남아공 정도입니다...만, 갑자기 삘받으면 엉뚱한 물건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늘 그랬듯이요(?)
예?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요? ㅋㅋㅋㅋㅋ
남아공 ㅋㅋ..
일단 현재 자료조사중인 건 아르헨티나/유고 두개입니다. ㅋㅋㅋ
흑흑 수고하셨습니다.. 재밌었습니다...
간단한 시장조사…
1. 1940년, 자유 프랑스.
2. 1980년, 유고슬라비아.
3. 1929년, 아르헨티나.
4. 1939년, 폴란드 망명정부.
5. 1814년, 백일천하. (New)
6.
이 중에서 좀 끌린다 싶은 선택지가 있으신가요?
넷 중에선 아르헨티나...? 기타 추천은, 힙스터 픽으로 엘바 탈출 나폴레옹(?)
@dear0904 오… 매 이벤트가 생존분기인 개꿀잼픽이네요…
메모…
제3제국.... 하고 싶읍니다...
후보 중에선 有故가 괜찮아 보이네요.
+ 근데 자유 프랑스 말고 비시 정부가 더 좋아보이는...
@돈이 곧 진리 제3제국 제n호 거절(…)
+ 저 자유프랑스가 과연 드골의 그 프랑스일까요?
@E.E.샤츠슈나이더 내중문없과 경쟁했던 라 로크?
원래는 약간 휴식을 취할까 했는데… 휴직기간이라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근질거리네요(…)
자료조사가 좀 용이한 걸로 골라서 빨리 시작할까 생각중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휴직 기간이셨군요. 딜레마와는 달리 그냥 빠르게 가면 되는 신기한 상황...?
+ 자료 조사가 용이하다... 는건 대신 동아시아를 배제한 이유... 와 겹치기 쉽긴 하죠 ㅋㅋ. 유명해서 누구든 해서 어디서 본 느낌이(...) 아니면, 이미 해본 시기거나...? 옛날일수록 조사가 좀 골치 아픈건 상수니까요 ㅋㅋㅋ
@dear0904 적어도 국내 메이저 웹소설 중에 대공황기 남미를 다룬 물건은 못 찾았네요 ㅋㅌ
엘바 섬 탈출부터 시작하는 물건은 잘 찾으면 나올 것 같긴 한데 그렇게 메이저는 아니고, 자유프랑스는 그… 프랑스 해군제독으로 시작하는 소설 하나 있던 걸로 기억하네요.
다만 참여요소가 없는 웹소설은 rpg에에 비해 몰입력이 약할 수밖에 없어서 조금만 마이너로 가도 찾기가 어려워지죠 ㅋㅋㅋ 괜히 국뽕물이 많은 게 아닙니다..
+ 자료조사가 쉽다는 건 그만큼 고증이 엄격해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라서 꼭 난이도와 비례하지는 않기도 하고요
@돈이 곧 진리 아님 뜨노 대아프리카 국가령 어떻습....(아프리카 독립세력에 잡혀간 작성잡니다)
공포! 공ㅍ....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사실 메이저 하다는건 인기를 끌기 쉽거나, 관심이 많아야 하는데, 남미...? 축구 소설 아닌 이상에야... 음... 그렇죠 뭐.
엘바섬 부터는 나오는데, 마이너고 (힙스터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 프랑스면... 이것도 있긴 하네요.
+ 네. 거기다 하나 더 있죠 ㅋㅋ. 그쪽은 완전 취미로 하는거라도 독자수가 나와야 의욕이 생기는데, 극 마이너 소재로 하면...?
+ 아. 하긴 그건 그러네요. 예컨데, 1950년대 한국으로 가는데, 지하철이 7호선까지 완공 되어 있다? 무지 깰듯(...)
@돈이 곧 진리 아무래도 2차창작 기반은 약간 리스크가 있죠. 실제로 은하영웅전설이나 스타크래프트 세계관 기반으로 하나 만들어볼까 진지하게 생각했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E.E.샤츠슈나이더 킹작권 때문에요?
@돈이 곧 진리 그것도 있지만... 하나 더 있긴 합니다. 접근성이요(...) 저 두개가 유명한건 사실이긴 한데... 참가 조건이 조금 더 높아지니까요. 원래 연대기를 기준으로 하면, 최소한 들은적은 있을테니 (수업이건 뭐건) 재미도 어느정도 보장 되고, 터무니 없는 상황 (장제스 보고 저 사람 누구에요?(...) 같은...) 은 안 나올테죠. 그런데, 2차 창작은 접했을 가능성이 뚝 떨어지죠. 유로파 카페라 역사쪽은 높겠지만, 다른쪽은...?
+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는, 거기까지 손 대지 않고도 많은데(...) 에 가까울것 같네요.
@dear0904 외국 커뮤니티에서 소규모/비영리로 진행하는 2차창작에 고소까지 하겠냐마는, “굳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사족일수도 있지만 고소는 뜨노 팀이 당할 확률이 높을겁니다.
시도스 같이 "ㅇㅇ. 난 그럴만 함."(2020년까지 산지라 뜨노를 암)이라 한 사람은 몰라도 휘티히(뜨노에선 미치광이 학살범이지만 현실에선 대전 이후 변명도 자기합리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다감)나 야조프(현실에선 소련 보수파의 거두일 뿐이었지만 뜨노에선 세상이 망하든 말든 독일을 멸망시키겠다는 미친 복수귀), 맥밀런(잉글랜드를 1984의 오세아니아로 만듬), TT 패치 이전의 룽원(야조프와 동일한 수준의 복수귀), 스털링(미치광이 학살자), 고르바초프(이전에는 저항군이었지만 서러시아 전쟁 이후엔 독일의 힘에 무력감을 느끼고 독일에 협조함, 심지어 TT 패치 전에는 모스코비엔 외무장관이었음), 후스(2차대전 이전 장제스 정권에 '부역'(일본 기준)한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공영권에 협조함) 같은 경우는 후손들이 고소해도 할말 없긴 한...
참가가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기획에 있던 2번에 투표를..
@돈이 곧 진리 뭐 그건 방패 달고 다니니 걱정할게 아니죠. 다들 이건 현실과는 관련 없다고 쓰고 다니는거....
근데 다음 RP부터 언어 설정은 다시 관짝행인가요?
사실 언어 설정 자체가 가치 있는 상황이 아니면, 그냥 빼는게 더 낫다고 생각하긴 해요. 직전 1차 연대기처럼 서양말 조금 아는거로 득세하는 상황... 아니면 어차피 통역 붙인다. 로 넘어가면 되는데(...) 언어 설정이 있을때 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 없는건 아니지만...
@dear0904 중간에 통역으로 장난질 치는 것도 가능은 한데, 어차피 조사 한방에 무력화될 스킬이라 별 의미는 없죠 ㅋㅋㅋ
그와 별개로 특수언어 설정은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아르헨티나 연대기에서 마푸체어를 할 줄 아는 캐릭터(대신 메스티소 혈통이라 페널티 존재)라던지, 유고 연대기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 이외의 민족언어를 많이 알고 있다던지…
@E.E.샤츠슈나이더 아. 그렇죠. 갑분 라틴어 하게된 경우처럼, 학술 언어... 는 있어도 좋을것 같긴 하네요.
[백조의 물갈퀴]
1893년, 대조선국 내각은 역사를 바꿀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중신들이 일본의 편을 들어 청과 일전을 벌이자는 의견을 제시할 때, 오직 두 명, 이현과 김영천만은 중립국안을 내었죠. 엄정 중립을 선언한 뒤 “먼저 침공해오는 쪽에 맞서 싸우겠다”고 공표한다는 이 전략은 국태공 이하응에 의해 정론으로 채택되었고, 그렇게 조선은 중립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결과에 청일 양국은 당황했습니다. 청은 일본의 급격한 성장을 몹시 경계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세력전이를 우려했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청이 근대화에 성공하기 전 반드시 그들을 꿇어앉혀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죠. 전쟁은 필연적이었으나… 조선이 상대측에 붙는다는 것은 양쪽에게 매우 뼈아픈 페널티로 작용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동중국해 일대에서의 함대전으로 시작했습니다. 청 함대는 규모 면에서 강대했으나 실속이 부실했고, 일본 함대는 대형함의 부재로 상당한 난항을 겪었습니다. 결국 양측이 다대한 피해를 입으며 어느 하나도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청일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상륙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엄청난 전비가 소모되자 일본은 청에 평화협상을 제안했습니다. 마침 안정된 지위를 공고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영국이 조선을 끌어들여 중재자를 자처, 1894년 9월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청일 양국간 불가침, 조선의 상호 불간섭 및 중립지대화, 대러시아 공동전선 형성(전적으로 영국에 의해 삽입된 조항이었습니다) 등이 명시되었죠. 조선은 명목상 청의 속방이나 ‘모든 분야에서’ 자주자치를 누리는, 마치 현대의 영연방 국가와 같은 지위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평화기가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중립화가 딱히 손해는 아니었지만, 청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해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간도지역을 얻지 못한 조선의 산업화가 본래보다 지연되는 사이 서태후는 러시아와 접촉, 동청철도 이권 및 여순항 조차를 대가로 조선 종주권 확보에의 조력을 약속받았습니다.
과연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라그나로크]
1897년, 러청밀약이 현실화되며 동아시아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완전히 실권을 뺏겨 회군과 상군에 대한 영향력조차 사실상 상실해버린 이홍장은 어떻게든 서태후의 농단을 저지해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죠. 서태후의 심지는 굳건했습니다. 서북과 강남에서 옛 백련교 잔당들이 멸청흥한의 기치 하에 정치세력화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청 황제 명의로 된 최후통첩문이 전달되고 나서도 조선 조정은 끈질기게 협상에 나섰습니다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몹시 진노한 영국은 조선과 일본을 적극 지원해 러청동맹을 막아보려 했지만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는 일본과 산업화를 마치지 못한 조선에게 도움을 주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죠. 그렇다고 동양의 일로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영국 역시 부담이 컸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중국 내의 반청운동을 증폭시켜 러청동맹의 와해를 노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와 청 북양함대가 조일 연합함대에 승기를 거두고 있던 1897년 말, 중국 관내에서 대규모 봉기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청의 작전역량을 감퇴시켜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오려고만 했던 런던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스케일에 경악했죠. 이홍장은 청일전쟁 이후 실각한 강유위 등과 손잡고 각지의 독군(도독)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연은후(延恩侯) 주성단을 옹립해 대명제국(후명)을 재건했습니다. 청 주력 대부분이 산해관 너머에 몰린 상황에서 직예군이 자금성을 점령하자, 서태후와 광서제 이하 애신각라 황실은 그대로 만주로 도주했습니다.
무려 250년만에 자신들의 업보를 돌려받은 애신각라조는 그대로 러시아에 종속되었습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던 러시아는 만주에 ‘대만주제국’을 세우고 장차 골칫거리가 될 서태후를 제거, 광서제를 “만주와 몽골 초원의 대칸”으로 선포하는 동시에 조선을 친러 독립국으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영국은 후명으로부터 위해위를 조차받고 동양함대 전력을 전진배치해 러시아의 추가 남진을 막는 선에서 물러났죠. 더 나서기에는 중국 관내의 상황이 무척이나 신경쓰였습니다.
마침 정국의 중심을 잡아주던 국태공이 서거한 상황에서, 조선의 내부정치에도 상당한 격변이 있었습니다. 한때 서희의 재림이라고도 불리며 “말 한 마디로 나라를 구했다“고 칭송받은 김영천은 친청 사대파로 몰려 실각했다가 친러파 이유하-이완용-최신우 등에 의해 복권되었고, 중과부적인 조선군을 이끌며 죽기살기로 러시아군과 맞서던 박태양과 김한립은 일본을 거쳐 독일로 망명했습니다. 정치색이 옅던 이현은 친러파 내각에 의해 얼굴마담 격인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죠.
이렇듯 집권세력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의외로 조선의 대내 정책노선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명목상 상국으로 모시던 애신각라가 로마노프로 바뀌었을 뿐, 다른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후명과 일본에게 족쇄를 채운 영국 역시 러시아와 일종의 공생을 추구해야 했고요.
역사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계속?)
@E.E.샤츠슈나이더 모로가든 몰락하는 김영천 ㄷㄷ 플레이어의 의지가 느껴지네요(?)
이 글만 알림설정을 안해뒀다가 오랜만에 읽어보니 이런 대체역사가 있었네요. 그 때 가지 않은 길이 배드엔딩의 시초였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