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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89
요한계시록 22:16-19
교회들을 위하여
‘성도의 삶’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흔히들 정의한다. 그러면 말씀이 선포하는 기준, 말씀이 이끄는 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말씀의 배경이나 바탕으로 살고 있느냐 아니면 말씀에 이끌려가는 삶이냐 하는 것이다. 말씀을 바탕으로 산다는 것은 이기적인 차원에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말씀에 이끌려 간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는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비밀을 밝혀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이제까지 요한 사도에게 환상으로 보여주고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주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확실함과 단호함을 보여준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16절). “교회들”이라고 복수로 썼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을 때 교회는 여성 단수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 복수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지상의 여러 교회를 의미한다(행 15:41, 고전 16:19, 갈 1:2). 그래서 요한계시록 초두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요한 사도를 통해 보이셨는데 그 대상은 일곱 교회였고 그 일곱 교회는 언약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상의 일곱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말씀을 다시 확증하시는 것이다.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들”이란 한마디로 언약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일들이다. 이제까지 요한 사도를 통해 보여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임을 다시 선포하신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이 모든 사실이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뜻이다.
요한을 통해 보여주신 모든 것은 하늘의 비밀을 밝히심으로 드러난 세상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통해 세상의 실체를 알게 된 자는 “귀 있는 자”, 즉 말씀이 들려져 지상의 교회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가 된 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교회에게 선포된 것이 사실이지만 선포되었다고 하여 다 듣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입어 들을 귀가 있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하셨다. 뿌리이면 뿌리이고 자손이면 자손이지 뿌리이면서 자손이라는 표현은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5:5에서도 이미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라고 밝히셨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5, 9-10)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실은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여 이루어지고 의롭고 온전한 심판을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라고 말씀한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성취하셨다고 선언한다.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 22:42-45)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6-58)
자손이면서도 뿌리가 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사실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면서 또한 뿌리가 되신다. 한마디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이다.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셨는데 언약의 상징으로 이 표현 역시 이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 별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다(2:28).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는 이 말씀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 주신다는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아브라함에게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언약의 후손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갈 3:16)를 통해 이루실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어둠을 걷어내고 아침이 오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두움의 상징인 로마의 지배 아래서 광명한 새벽 별로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당대의 성도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생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다.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6-18)
결국 하나님께서 별이 땅을 비추어 낮과 밤을 주관하신다는 창조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밤에 속한 땅적 존재들을 낮에 속하도록 하심으로 빛과 어둠을 나누시는 일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이미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22:5)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17절). “성령과 신부”란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였을 때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고 진리의 말씀이 된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었기에 진리 안에서 성령과 같은 말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역시 단순한 의미의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창조 언약을 통해 보여주셨던 쌍수의 표현 ‘엘로힘 하나님’(창 1:1) 안에 하나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라”라는 선언 역시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였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1-5)
목마른 자가 물을 먹는다는 것은 물이 상징하는 말씀을 먹는 것이고, 먹는다는 것은 말씀과 하나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왕국을 혼인 잔치 비유로 말씀하셨다(마 22:1-10, 눅 14:16-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자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반대로 거부할 자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오라고 하였다고 해서 누구든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였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십자가의 피에 의해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생명수를 마신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값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의 값을 지불하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란 진리의 말씀이 들려지는 귀가 있는 자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8-19절).
요한 사도의 서신이 당시에는 성경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필사하여 돌려 읽는 과정에서 필사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에 의해 더하고 빼는 행위들이 있었다. 결국 더하고 제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 사도를 통해 보여주신 말씀을 언약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말씀에 더하면 재앙을 더하고, 말씀에서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신다는 언어유희로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로 성취하신 언약을 알지 못하기에 요한 사도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다른 무엇을 더하거나 제거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저주 아래에서 재앙을 더하는 것이 되고, 말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된 자는 자기 행위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말씀에 이끌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이다(2024090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