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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관내 6개 읍면별 이름 유래
1. 영양읍의 행정명인 영양의 유래
영양읍의 행정명인 영양은 통일신라시대 군현명인 영양현에서 차용한 것이다.
태백산맥과 일월산맥으로 둘러싸여 숨겨진 곳이자,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에 속하여 ‘예로부터 숨겨진 곳’이었기 때문에 고은(古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더 이상 국경에 숨겨진 곳이 아니었기에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으면서 ‘숨겨진 곳인 음지’에서 ‘찾아낸 곳인 양지’이라는 의미로 연양(延陽)과 영양(英陽)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2. 입암면의 행정명인 立岩의 유래
입암면의 행정명인 입암은 조선시대 중기 이곳에 은거한 석문선생의 문집에서 차용한 것이다.
자연물(현재 선바위)의 이름에서 차용한 입암의 지명은 『석문선생문집
(石門先生文集)』인 <골입암(骨立巖)>에 “紫錦屛西角, 高孤骨立巖”과 <입암음, 기만취당(立巖吟, 寄?翠堂)>에 “柴門反關。江干一石截然獨立兮”라는 기록으로 보아 ‘뿔과 같이 곧게 서 있는 바위’라는 의미로서 붙여졌음을 알 수 있다. 석문선생은 입암을 “全身淸若此, 應復?人?”이라고 하여 탐심이 없이 맑고 고매한 인격에 비유했다.
3. 청기면의 행정명인 靑杞의 유래
청기면의 행정명인 청기는 고려시대인 충렬왕때 대청부곡(大靑部曲)과
소청부곡(小靑部曲)을 합해서 설치한 청기현에서 차용한 것이다.
청기의 지명은 『석문선생문집(石門先生文集)』인 <청기계(靑杞溪)>에 “溪上千章木, 非無杞梓材” 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대청부곡과
소청부곡에서 첫 자인 ‘청’과 ‘개울 주변에 수많은 버드나무와 가래나무’를 의미하는 둘째 자인 ‘기’를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4. 일월면의 행정명인 日月의 유래
일월면의 행정명인 일월은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일월산의 지명에서 차용한 것이다.
행정명을 지명을 차용한 일월산의 지명은 『송서선생문집(松西先生文集)』인 <유일월산기(遊日月山記)>에 “英爲鎭, 竝海而高, 受日月, 最先名以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영양의 진산이자 동해에 접한 높은 곳으로서 해와 달을 맞는 곳’이었기에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5. 수비면의 행정명인 首比의 유래
수비면의 행정명인 수비는 고려시대 지방관제의 하나인 수비부곡(首比部曲)에서 차용한 것이다.
수비의 지명은 『석계선생문집(石溪先生文集)』인 <봉천증조현령공조고사직공신주시고사(奉遷曾祖縣令公祖考司直公神主時?辭)>에
“首比, 山水之鄕”, 『역암선생문집(?庵先生文集)』에 “山之自首比” 등으로 보아 영양군의 ‘산과 물이 시작되는 곳’인 머리부분에 해당하는(비교되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지이자 숨겨진 곳이기에 석계선생은 『석계선생문집 (石溪先生文集)』인 <首山遺墟碑銘(首山遺墟碑銘)>에 “其首陽之比乎”라고 하여 수비를 일러 ‘백이(伯夷)가 은거한 수양산(首陽山)에 견줄만 하다’고 평을 하였다.
6. 석보면의 행정명인 石保의 유래
석보면의 행정명인 석보는 신라시대 이곳에 설치한 석보부곡(石保部曲)에서 차용한 것이다.
『석계선생문집 (石溪先生文集)』인 <석계기(石溪記)>에
“此亦安知爲無限福地, 保全生人, 如石之固也, 余以所聞”라고 하여 석보는 ‘끝없는 복된 땅으로서 돌의 굳건함처럼 사람을 보존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당시에 통용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석보는 ‘돌의 굳건하고 영구함처럼 이곳에 사람들이 지켜지기를 간구하는 의미’로서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료정리 : 영양산촌생활박물관 학예사 이영재]
[꽃빛고을 지방말에 의한 지명 이름 유래]
1.영양읍(英陽邑) 유래
영양읍(英陽邑)의 중심은
본대 현리에 관아(군청)가 있었기 땜에
현리(현1리)가 소재지고 중심이었니더.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 왜군 침략으로
현동(현리)에 있떤 관아가 마카 불타고
주칫돌캉 구디 자죽만 남가져 있었니더.
그뒤, 약 300년이 지난 1676년에 와가꼬
현재 군청 자리(서부리 3리)에
동헌(東軒/수령이 집무보는 곳)이
맹글어 지게 된니더.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바낄때는
진보군 남면(입암면)의 하풍(감천2리)캉
북초면(일월면)의 상원3리 일부(무드리캉,
논두들 등)을 엄체가꼬
영양면(英陽面)이라 카게 된니더.
1979년에는 면에서 읍(邑)으로 승격됬꼬
1987년 1월 1일에는
석보면 양구캉, 수비면 기산이
읍(邑)으로 편입되어 들어 오게 된니더.
그케가 법정리 15개, 행정리 29개인
지금의 영양읍(英陽邑)이 맹글어 졌니더.
2. 입암면(立岩面) 유래
1914년 이전 입암면(立岩面)은
다섯지역으로 노놔져 있었니더.
지역을 구분해서 보면
영양군 남면(입암면) 땅이었떤
신구, 신사, 양항, 금학. 대천, 산해(1리, 2리)캉.
진보군(북면) 땅이었떤
흥구, 노달, 방전, 삼산, 교리, 병옥,
산해(3리), 연당 캉.
영양군 석보면 땅이었떤
지경(아랫지경)캉.
안동군(임동면)의 땅이었떤
산해(4리) 일부캉.
영양군 청기면 땅이었떤
저리 일부캉.
이렇케 노놔져 있었니더.
이걸,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
마카 엄체 지금의 입암면을 맹글게되어
지금 현재는
법정리 13개, 행정리 19개로 되어 있니더.
입암면이라는 면의 이름또
이때 처음 사용하게 되었는데.
입암 전체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인
남이포캉 같이 비쭉이 서 있는
선방구(선바위)라꼬
입암면(立岩面)이라 카게 된니더.
그케서
동쪼구로는 석보면, 서쪼구로는 안동시(임동면),
남쪼구로는 청송군(진보면)캉 이까지고
북쪼구로는 영양읍캉 군청이 있는
영양군의 관문지역이 되었니더.
그리고 일월산(日月山)에서 발원해가꼬
흘러 내리는 물은
큰 그랑(반변천)이 되가꼬
근바는 디게 비옥한 농경지를 맹글었니더.
3.청기면(靑杞面) 유래
신라시대때의 청기면(靑杞面)은
당리가 중심지 마실이었꼬.
청둥오리가 쌔밴는 지역이라꼬 케서
청부(靑鳧)라꼬 켔니더.
고려시대 초(初)에 와 가꼬는
영해신씨(寧海辛氏)의 한 선비가
지금의 소재지(청기1리)에 정착한 뒤에
근바에, 푸른 구기자인 청기(靑杞)가
게락나 지명을 청기(靑杞)라꼬 카기도 했꼬
석문(石門)선생 문집에 보면
대청부곡캉 소청부곡의 "청(靑)"짜캉
버드나무가 쌔배따꼬
버드나무 "기(杞)"짜를 쓰가
청기(靑杞)라꼬 켔다 카기도 하니더.
그후, 청기면(靑杞面)는
대청부곡(大靑部曲 / 지금의 당리 중심)캉
소청부곡(小靑部曲 / 지금의 상청리 중심)으로
또갈래(따개) 지게 됬니더
이때, 대청부곡(大靑部曲)의
중심지(소재지)는 당동(당리)였꼬
당리, 행화, 기포, 사리, 토구,
정족, 청기1리 등을 관할 했니더.
글코, 소청부곡(小靑部曲)의
중심지(소재지)는 상청이었꼬
관할 지역은 상청, 구매, 저리, 토곡,
장평(청기2리)등 이었니더.
그뒤, 고려시대 충렬왕때 와가꼬는
상청(상청은 영양현에 속함) 근바를
뺀 청기면(靑杞面) 전첼보고
청기현(靑杞縣) 혹은 청계(靑溪)라 카게 된니더.
조선시대(숙종 1675년) 와가꼬는
대청부곡(大靑部曲)이
지금의 당리 중심인 서초면(西初面)캉
지금의 정족2리 중심인 서이면(西二面)으로
또갈래 지게 된니더.
이때 솥발이(지금의 정족2리)가
서이면(西二面) 중심지가 된니더.
그 뒤 고종 1895년에
서초는 청초(靑初), 서이는 청이(靑二)로
이름을 바까 부르게 됬따가
1914년에 와가꼬 청초와 청이,
그리고 상청 근바(저리, 상청, 구매 등)를
엄체가 오늘날의 청기면(靑杞面)이
맹글어 지게 된니더.
이 때(1914년) 청기면(靑杞面) 중심지가
청기1리 현재 소재지로 옮가지게 됬니더.
글코, 상청은 신라때 부터 고려때까지
영양현(英陽縣)에 속한
소청부곡(小靑部曲) 중심지였니더.
소청(小靑)은 신라때부터
소청현(小靑縣)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고려 충열왕 이후부턴 청초면(靑初面)
관할에 들어가게 된니더.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는
소청, 소상, 장평(청기2리) 일부를 엄치고
소상(지금의 상청2리 신당)캉
소청(지금의 상청1리)의 이름을 따가꼬,
상청이라 카면서 청기면에 속하게 됬니더.
그리고 소청(小靑)은
지금의 상청(上靑)캉 그 아랫마실(저리)을
엄체서 부르는 지역 이름이시더.
그케가 현재의 청기면(靑杞面)은
법정리 13개, 행정리 18개로
맹글어져 있니더.
4. 일월면(日月面) 유래 일월면(日月面)은 1914년 북초면(北初面)캉 북이면(北二面)이 엄체지면서 일월면이라 카게 됬니더. 일월면(日月面)이라는 지명은 일월산(日月山) 일자봉의 "일(해)"캉 월자봉의 "월(달)"을 따가 일월면(日月面)이라 카게 된니더.. 일월산(日月山) 주봉인 일자봉(日字峰) 줄기(동쪼구 줄기)에는 용화. 문암, 오리, 칠성, 가천, 섬촌이 있꼬 월자봉(月字峰) 줄기(서쪼구 줄기)에는 도곡, 가곡, 주곡, 도계, 곡강이 있니더. 조선시대때 일월면(日月面)은 북초면(北初面)캉 북이면(北二面)으로 쪼갈래져 있었니더. 북초면(北初面)은 용화, 문암, 오리, 칠성, 가천, 섬촌 등 반변천 상류, 즉 대부분 지금의 일월면 동쪼구 땅이었고, 북이면(北二面)은 도곡, 가곡, 주곡, 도계, 곡강 등 장군천 유역, 즉 대부분이 지금의 일월면 서쪼구 땅이였니더. 2015년에는 주곡리가 1, 2리로 농갈래져가 지금 현재의 일월면은 법정리 11개, 행정리 14개로 맹글져 있니더. 참고로 옛날 북초면(北初面) 관할지역은 지금 일월면 동쪽지역캉 (용화. 문암, 오리, 칠성, 가천, 섬촌) 수비면 송하, 죽파, 오기, 기산. 그리고 영덕군 병곡면 지역의 휘리(덕천), 사천, 용암, 항리캉 영덕군 영해면 지역의 이천, 각리, 월의, 신평, 대포, 송상 등이 포함되 있었니더. 그리고 과거있따가 지금은 없어진 덕봉면(德峯面)은 조선초에는 일월면 동쪽 대부분이 영해부 영양현 덕봉면 속해있었니더. 그뒤 숙종 4년(1678) 영양현이 분할될때 읍내면, 동면, 남면, 수비면 등캉 함께 진보현에 속하게 되었니더. 숙종 9년(1683)에 와가꼬 영양현이 복현될때 영양현에 다시 속해 있따가 숙종 25년(1699)에와가 덕봉면은 서초면(7리), 서이면(3리), 북초면(7리), 북이면(4리)으로 쪼갈라지게 되었니더. [日月面일월면 개요] 일월면의 동쪽은 수비면(首比面), 남쪽은 영양읍(英陽邑), 서쪽은 청기면(靑杞面)에 접한다. 산지가 많은 면으로 북쪽에는 일월산(日月山:1,219m)이 있고, 남쪽은 흥림산(興霖山:767m)이, 동쪽에는 600여m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수비면과는 가천동(佳川洞)에서 수비면 오기동(五基洞)으로 통하는 추령(가랫재)이라는 고갯길이 4km나 되어 계곡이 아름답다. 지형의 영향을 받아 하천은 일월산 동쪽에서 시작하는 반변천(半邊川)의 상류에서 문상천(門上川)과 동쪽 사면에서 흘러드는 장파천(長坡川)이 합류하여 일월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장군천(將軍川)이 서사면으로 흘러 면의 남쪽에서 합류한다. 따라서 평야도 남부에 주로 발달하고 특용작물이 활발하다. 고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품질도 우수하다. 교통은 계곡을 따라 서부와 동부가 발달되었다. 문화재로는 용화동 삼층석탑(龍化洞三層石塔:경북유형문화재 8), 월록서당(月麓書堂:경북유형문화재 172), 영양향교(문화재자료 75), 영양 주곡동사지(注谷洞寺址), 오리동(梧里洞)사지, 정담유적(鄭湛遺蹟), 도곡동 석조여래좌상(道谷洞石造如來坐像), 도곡사지, 명고서원 등이 있다. 용화동 삼층석탑은 용화동 밭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제조연대 불명의 석탑이다. 2단으로 된 기단에 삼층석탑을 올려놓은 양식이며 기단석은 4개의 판석으로 되고 초층 이상의 각 부재는 단석(單石)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없고 높이 3.41m이다. [행정구역] 가곡리, 가천리, 곡강리, 도계리, 도곡리, 문암리, 섬촌리, 오리리, 용화리, 주곡리, 칠성리 [네이버 지식백과] 일월면 [Irwol-myeon, 日月面]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5.수비면(首比面) 유래
수비면(首比面)은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수비부곡(首比部曲)이 있었떤 데로
옛 영양군 지명인 고은현(古隱縣)에
속해 있었니더.
하지만 고려시대캉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잠깐씩 영해부(寧海府)에 속하기도 했꼬
울진현(蔚珍縣)에 속하기도 했었니더.
수비면 발리리에 있는 수양산(首陽山)은
중국 은나라 왕족 백이 숙제가 은거한
중국의 수양산(首陽山)캉 견줄 만한
인재(人才)가 많고 디게 아름다운데라꼬
수비(首比)라 카게 된니더.
신라시대때 수비부곡(首比部曲)이라 할때
수비(首比)라는 지명을 맹첨 사용한 것도
수양산(首陽山)에서 비롯됬니더.
1914년에는 북초면(北初面)의 송하캉
기산을 엄체가 수비면이라 카게 됬꼬.
1962년에는 울진군 온정면(溫井面)의
본신리가 마카다 수비면으로 들어왔니더.
1987년에는 기산리가 수비면서
영양읍(英陽邑)으로 관할이 바끼면서.
지금 현재의 수비면(首比面)은
법정리 9개, 행정리 15개의 면(面)이 됬니더.
6.석보면(石保面) 유래
석보면(石保面)는
이미 신라시대때 석보부곡(石保部曲)이
설치되어 있었떤 데시더.
행복하게 잘 사는게 계속 이까지고
돌매이 가꺼러 굳건해가
영원무궁 하라꼬 석보(石保)라 켔니더.
그후 고려(高麗) 현종9년(1018년)에는
지금 영해(寧海)인 예주(禮州)에 속했었꼬.
명종9년(1179)에 와가꼬
영양현(英陽縣)이 복현(復縣) 될때
다시 영양에 속하게 됬찌만.
조선시대(1413년/태종 13년)에 와가는
도로 영해부(寧海府)에 속하게 된니더.
1676년(숙종 2년)에 와가꼬는
영양(英陽)이 다시 현(縣)으로 복구 되면서
영양현(英陽縣)에 속하게 되었찌만.
1년 뒤인 1677년에 영양현이 없에져가꼬
또 다시 영해(禮州 예주부)에 속하디.
곧 바로(1678년) 진보현(眞寶縣)에
속하게 된니더.
1683년에 와가꼬는
영양이 현(縣)으로 또다시 복현 되가꼬.
영양에 현감이 처음으로 부임 했찌만
여전히 석보는 영해캉 진보 두곳에
속하면서 각각 나눠져 있었니더.
지방 관제(官制)가 바끼던
1895(고종 32년)년 와가꼬
비로소 석보면 대부분이 영해에서
영양현으로 편입되어 들어오게 된니더.
1906년에는 편입되지 않코 남가져 있떤
영해군 석보면 일부(양구, 삼의 등)가
영양군 석보면으로 마져 들어오게 됬꼬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
진보군 동면의
창상(영양읍 무창 윗쪽) 일부캉,
택전, 화매, 포산, 삼의를 엄체가
석보면(石保面)이 맹글어 지게 된니더.
그후, 1987년에는 양구리(羊邱里)가
영양읍(英陽邑)으로 넘어 가뿌레가.
지금 현재의 석보면(石保面)은
법정리 13개, 행정리 20개로 맹글어져
있니더.
글코, 과거의 석보면(石保面)은
거리나 교통으로 봐가꼬 생활권은
영해였니더.
그케가꼬 영양(英陽) 보다는 영해(寧海)가
더 가깝게 느껴져가꼬
영해를 보고는 영내(嶺內)라 켔꼬
석보 보고는 영외(嶺外)라 카고 있니더.
7.영양군(英陽郡)의 유래 신라시대 초(初)의 영양군(英陽郡)은 자연의 경치가 댁낄 이래가꼬 선비들이 유유자적하며 은둔하기에는 오케로 좋은곳이자 육지속의 섬이라꼬 "고은"(古隱)이라꼬 켔니더. 신라시대 말(末)에 와가꼬는 영양지역이 "영상양명" (英爽陽明=시원스럽지만 볕이 댁낄로 잘듬) 하다케가, 요걸 쭐가가 "영양"(英陽)이라꼬 카기시작 했니더. 고려시대때(1018년/현종 9년)의 영양은 영해(寧海)인 예주부(寧海府)에 속해 있었니더. 그후, 1179년(명종 9년)에 군 단위인 영양현(英陽縣)이 처음으로 맹글어졌꼬 "익양(益陽)"이라꼬도 켔니더. 조선시대(1413년/태종13년) 와가꼬는 행정구역 바낄때 영양현(英陽縣)은 달부 없어 졌뿌고 영해부(寧海府)에 속하게 된니더. 1676년(숙종 2년)에 와가는 영양현(英陽縣)이 도로 복구는 됬지만 바로 1년 뒤에(1677年) 또 없어졌뿌고 영해(寧海)에 속해 있따가, 바로(1678년) 진보현(眞寶縣)에 속하게 된니더. 이가꺼러 여어저어 붙었따, 띨가졌따 카다. 1683년에 영양현으로 다시 복현되면서 처음으로 현감(縣監/군수)을 두게 된니더. 그뒤 1895년 전국의 행정구역 바낄때 현에서 군(郡)으로 명칭이 바끼면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속하게 된니더. 1906년에는 영해군 석보면 대부분을 영양군 석보면으로 편입했꼬.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는 진보군에 속해 있떤 북면(지금의 입암면)캉 동면(지금의 석보면) 일부까지 영양군 관할이 되었니더. 1963년에는 울진군 온정면 본신리가 영양군 수비면으로 편입되었꼬 1979년 5월 1일에는 영양면이 읍(邑)으로 승격해가꼬 지금의 행정구역 형태인 1읍 5개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니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