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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거제공연을 보고>
내가 쇠받으러 한양으로 갔던 해가 1968년 초이다. 전쟁과 해방이후에 새로운 대중가요가 태동하던 시기다.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1966년 문주란의 동숙의노래, 1967년 남진의 가슴아프게, 1968년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역시 보컬그룹 펄시스터즈의 커피한 등이 모두 1960년대 말이다. 그 뒤를 이어 한명숙, 최희준, 현미, 차중락, 남일해, 배호, 최양숙 등의 가수가 등장했으며, 포크가수는 세시봉이란 음악감상실 주변에서 발동을 걸었다. 그 당시 남진, 나훈아, 이미자, 문주란, 패트김 등이 대세를 이루었으며 포크계열은 라나에스포의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조영남, 양희은, 이장희 등이며 보컬그룹으로는 펄시스터즈가 대세를 이루었다.
12월14일 어제 거제문화예술회관에서 세시봉 공연이 있었다. 세시봉이라고 하면 역시 송창식인데 불참하였다. 조영남도 없고, 양희은도 없다. 좀 젊은 가수 남궁옥분씨가 나와 흥을 돋우기는 했으나 여엉 기대 이하이었다. 그러나 그런대로 옛날을 회상 할 수 있어 좋았다.
~~~ 기억에 남는 윤형주의 나의 이야기~~~
*이 자료는 2013.11.4(월) 10:00시 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열린 문화예술대학 7080가을 음악여행에서 윤형주의 특강내용입니다. 강사는 1947년 서울생으로 연세대 의대를 중퇴하고 경희대 의대 2년 본과수료, 세시봉, 트윈폴리오 멤버로 7080의 대표 가수이다. 가수, 작곡가, 싱어송라이터, CM송 제작자, 사업가, 목회자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
(조개껍질 묶어)는 최초로 작사, 작곡한 나의 노래이다. 43년전 대천해수욕장에 놀러 가서 만난 여학생의 환심(歡心)을 사려고 30분 만에 만든 노래이다. 지금도 보령시 해수욕장 머드광장 복판에 노래비가 있다.리더는 외롭다, 힘 들고, 나누어 주는 존재이다. 나는 많은 리더 역할을 하였다. 가수는 오후 2시 이전에는 절대 노래를 안 하는데 나를 이리 불러 세웠으니 말이다. 이성 구청장의 역할이 많았다고 본다. 윤동주 시인은 27세로 요절(夭折)을 하였는데 나와 6촌지간이다.
최인호 형은 암(癌)으로 타계하였는데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 하였다. 항암치료를 하며 면회를 받지 않았는데 예전의 그 모습으로 기억되라고 말 하면서 말이다. 최인호 사 이장희 곡 윤형주 노래의 (어제내린 비)이다. 아름다운 시귀의 노래이다. 2년반 전 세시봉 바람이 불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같은 시대에 살아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넨다. 동시대를 살았음은 소통(疏通)을 이어주니 고마운 일이다. 놀러와 패널들이 꺼진불도 다시 보자고 놀림을 한다. 지금 중년이상 여인도 긴머리 소녀이었다. 노래는 모처럼 그때로 돌아가 그 시절을 꺼내 보는 수단이 된다.
세시봉에서 만난 김세환은 1948년생 경희대 신방과를 나왔는데 지금도 자전거 타고 다닌다. 강원도에도 13시간 걸려 간다고 한다. 조영남은 1945년 서울대 성악과 수료하고 신학대학 나왔는데 지금 화투를 소재로 그림 그리고 다재다능(多才多能)한데 여자관계가 아직도 정리가 덜 되었다. 이장희는 1947년 동갑네인데 연세대를 나와 미국 LA 한인방송국장을 하다 지금은 울릉도에서 산다. 더덕을 7년이나 키웠는데 아직도 소출(所出)이 없다. 연못에서 민물고기 낚시를 하고 지내니 섬에서 웃긴다. 송창식은 1947년 동갑네 인데 서울예고 출신이다. 기인이라 할 만하다. 3시에 기상하고 9시에 아침, 1시에 저녁, 6시에 취침한다. 낮에는 만날 수가 없고 전화도 없다. 나는 공연을 계속하고 싶은데 이 사람들 면면을 보니 같이 모여 공연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저녁 모두 모이는데 참으로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선구자(先驅者)들이다.
무교동 세시봉을 조영남 형이 소개해 주었다. 김세환은 내가 소개해 주었다. 나도 그도 성가대 출신인데 그 형은 기타를 일찍 쳤다. 내가 배우고 싶다고 해도 안 가르쳐 줘서 학원 다녔는데 트로트 만 가르쳐 주어 그만두고 독학으로 마스터 했다. 경기고를 나와 연세의대에 3등, 전체 5등으로 들어갔으나 나는 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적성이 안 맞아 경희대로 재 입학했다. 부친은 일본 명치학원, 미국대학, 5개국어, 중국 한시에도 정통한 분인데 풍각쟁이, 딴따라 절대 된다고 기타도 안 사 주었다. 그때 벌써 대학생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1년 동아방송 생방송 영시의 다이얼 DJ도 했다.
조영남 형은 표정이 하나 뿐인 사람이다. 기쁘나 슬프나 다 같다. 47년전 트윈폴리오의 등장으로 통기타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얀손수건)은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것인데 송창식 작사이다. 노래내용이 떠나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산다. 순수하고 우리만의 낭만이 있다. 생맥주, 청바지, 통기타는 7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아이콘이 되었다. (웨딩케익)은 윤형주 시인데 축하곡으로 혼동한다. 내용이 슬퍼서 결혼식장에서 멋 모르고 부르는 사람 있는데 잘 사나 모르겠다. 의대를 그만 둔 것이 돌아다니는 습성 때문이었는데 나는 86개국을 다녔다.
외국에 나가보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얼마나 대단한 민족이라는 것을 안다. 민들레같은 민족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열심이다. 스핑크스 사이 조그만 골목길에서 식당을 하여 대박난 사람이 한국인이다. 호텔에서 지갑을 분실한 외국인이 인천공항에 찿아다가 준 것을 보고 놀라 자빠진다. 퀵서비스가 우리는 있다. 우리가 누군가 배달민족 아니냐 그래서 퀵이 발달한 연유(緣由)로다. 100만명이 모인 해운대해수욕장 어디라도 찾아가 배달을 시키는 국민이다. 우리나라 사람 평균 8초를 못 참는다고 한다. 젓가락 사용민족이 전 세계 20여개 되는데 쇠젖가락으로 콩을 집는 유일한 민족이다. 급한 성격 때문에 IT산업이 발달하였고 성형수술이 탁월하다. 작년에 지공카드, 실버카드가 나왔는데 평생 경노석에는 안 앉는다. 김세환은 올해 나온다.
아이돌은 자기들 기리 라이벌이다. 우정(友情)이 없다. 티비를 잘 안 보아서 요즘 아이돌 잘 모른다. 카라, 씨스타, 소녀시대가 인사를 하나 얼굴이 비슷비슷하다. 같은 선생님 출신이라 그런가 보다. 어머님 날 나으시고 청담동 선생님 날 기르셨다는 말 나온다. 중국인 한국에 와서 주름 당기고 하도 성형을 해서 성형전후 사진 잘 가지고 있어여 입국이 된다는 우스개 말도 있다.
우리나라 코키리 비스켓 같은 나라인데 대단하다. 나는 년간 5개월은 해외에 체류하는데 삼성, 엘지, 현대차가 전 세계 어디에도 구석구석 있다.
우리집안 문학하는 사람이 많다. 윤동주, 성주, 일주, 형주 인척이다. 27세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광복(光復)을 못 보고 소금주사를 맞고 죽었다. 북간도(용정)에 묘소가 있는데 나도 같이 헤메어 찿았다. 별의 시인이 그 형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의 부끄러움이 없다는 (별 헤는 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11월4일이 일본에서 이 노래를 쓴 역사적인 날이다. 요즘 정치인들이 검찰, 감방에 갈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생전에는 무명시인 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후세에 지인들이 만들어 준 시집이다.
~~~~ 세시봉이란~~~~
데뷔/결성 : 1967년11월 활동 시기 : 1960, 1970, 1980 멤 버 : 송창식(1947년 2월 20일), 윤형주(1947년 11월 19일), 이익근
세시봉이란(C est Si Bon)이란 1960~1970년대 젊은이들이 포크 음악을 접하던 한 음악 감상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원래의 의미는 프랑스어로「아주 좋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세대간의 경계선을 그은 음악 장르는 포크다. 포크 음악 부흥(Falk Revival)을 통해 포크록이란 장르를 탄생시킨 이 미국의 민요는 비록 그 뿌리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그 취지만은 살아남아 '70년대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뿌리 내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냈다. 그리하여 운동권이란 이름의 민주 투쟁과 더불어 음악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맥주와 청바지, 통기타로 상징되는 젊은 문화의 박제가 되었다.
포크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전, 우리의 대학생들은 음악 감상실을 통해 자웅을 겨루며 이미 폭넓은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세시봉>, <오빈스 캐빈> 등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조영남, 이이근, 강근식, 유종국 등의 캠퍼스 스타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이후 포크를 몇 단계 끌어올린 최초의 창작 음악인 한대수,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당대를 주름잡은 많은 스타들이 이 자리를 거쳐갔다. 이 중 남성 포크 듀오 트윈 폴리오는 그 감미로운 하모니를 주무기로 국내 최초의 포크 앨범을 발매해 장안에 충격타를 던졌으며 이 장르가 급속도로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나가도록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트윈 폴리오는 듀오가 아닌 트리오로 시작됐다. 무교동의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란 코너의 사회를 맡고 있던 이상벽의 소개로 청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된 송창식은 팝 음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연대 포크 트리오 라이너스의 멤버인 윤형주의 솜씨에 반해 이익근 과 더불어 트리오 조직을 제안한다. 이들은 가게 이름을 딴 세시봉이란 팀명으로 각종 라디오에 출연하며 '하얀 손수건'이란 곡을 히트시켰지만 몇 달 후 이익근의 군입대로 둘 만 남게 된 송창식과 윤형주는 팀 이름을 트윈 폴리오로 정하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부잣집 아들이자 명문대생인 윤형주와 성악을 전공했지만 방 한 칸 없어 떠돌이로 생활하던 송창식의 드라마틱한 만남은 이후 두고두고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전설처럼 내려져 오고 있다.
이미 대학가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절대적인 환대를 받고 있던 이들은 몇 차례의 성공적인 리사이틀(당시에는 콘서트를 이렇게 불렀다) 후 펄 시스터즈, 박연숙과 함께 한 <김인배 작곡편곡집>이란 앨범을 발표한다. 이미 인기곡이 되어버린 '하얀 손수건' 등 당시 음악 감상실에서 연주하고 부르던 6곡의 번안곡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한정돼있던 인기를 전국으로 퍼져나가게끔 도와주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반한 당시 경기여고 2학년생 양희은은 자신의 특활반에 이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이들의 첫 앨범은 역사적으로 포크음악을 완벽한 메인스트림으로 자리잡는데 공헌을 한 앨범이다. 전 곡을 번안곡으로 수록한 이 앨범은 초창기 포크의 외국 의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시의 젊은 정서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하얀 손수건'외에 '축제의 밤', '고별', '웨딩 케익' 등이 크게 히트했으며 각종 방송 출연과 리사이틀로 인기는 절정을 구가했다. 이 앨범은 당시의 주류이던 최희준, 이미자와 같은 가수들에게 내미는 도전장과도 같은 것 이였으며 기성세대와 젊은 층의 간극을 확실하게 벌렸던 충격적인 사건 이였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기타가 하나의 유행이 되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앨범이다.
1969년 12월, 화려한 불꽃처럼 타오르던 이들은 갑작스런 팀 해체를 발표한다. 집안의 반대로 짬짬이 활동했던 윤형주가 학업을 위해 경희 의대 본과로 학교를 옮겨야 했기 때문 이였다. 아마도 이 충격적인 선언은 비틀즈(Beatles)의 해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것만큼이나 이 땅의 젊은이들을 잠 못 들게 했을 것이다. 12월 21~22일 양일간 드라마센터에서 개최했던 마지막 공연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인사와도 같은 윤형주의 “이제 우리 트윈 폴리오는 그만 해체하려 합니다”라는 멘트는 수많은 10대 소녀 팬들의 가슴에 커다란 멍 자국을 심어놓았다. 공연 도중 송창식이 신중현의 '떠나야할 그 사람'을 부를 때 두 멤버는 부둥켜안고 참고있던 눈물을 떨어뜨렸으며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릴 수 없었던 팬들 역시 울음을 터트렸다. 이후 이들의 공연은 마치 바브라 스트라이잰드(Barbra Streisand)의 끝나지 않고 되풀이되는 은퇴 공연처럼, 계속 이어져 무려 6차례나 비공식적인 고별공연이 있었으며 MBC, TBC 등의 공중파 방송들도 5차례나 고별공연을 방송하며 식지 않는 인기를 보여주었다. 은퇴공연 직후 <튄폴리오 리사이틀>이란 음반을 발표(이 앨범은 이후 세 차례 재판을 찍었다)나 했던 이들은 해체 후에도 가끔 주위의 요청으로 몇 곡씩 행사장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조영남과 함께 <크리스마스캐롤음반>, <조영남 리싸이틀쇼> 등을 발표했다.
해체 후 송창식은 솔로가수로 국내 최고 가수의 반열에, 윤형주는 최고의 작곡가 입성에 성공해 인기 스타로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은 1981년 기존의 음반과 비슷한 레퍼토리에 윤형주가 작사·작곡한 '축제의 밤', 송창식의 '우리',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Crying in the rain'을 리메이크한 '빗속을 울며' 등을 추가해 앨범을 발표했다(이들의 해체를 끝까지 인정하지 못했던 팬들에게 위로가 된 앨범이다). 1982년엔 '편지', '축제의 노래' 등이 수록된 금성사 판촉 카세트테이프를, 1988년엔 김세환과 더불어 책자가 들어있는 <하나의 결이 되어> 박스음반발표에 따른 기념공연을 열며 에벌리 브라더스,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le)에 필적할만한 화음을 선도했던 실력이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셋은 전국을 순회하는 콘서트를 주기적으로 가지며 아직까지도 포크의 전성시절을 잊지 못하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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