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닮은 여자 / 김남철
남자 선생님들만 진을 치고 있는 교무실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군데군데서 문제를 일으킨 애들을 불러놓고 훈계하는 선생님들의 고성에 남자고등학교의 교무실은 더 삭막하기까지 하다.
상담실도 있고 휴게실도 있지만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애들은 주로 교무실에 불려온다.
거기다 교무실 한가운데 떡 버티고 무게 잡고 앉아있는 교감선생의 무뚝뚝한 표정이 분위기를 더 가라앉게 만든다.
별명이 두꺼비라 불리는 교감선생은 머리 크기가 몸통의 굵기와 비슷하니 좀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한 분위기가 숨 막히는지 급사 아이가 가끔 꽃을 구해와 교감선생의 책상위에 꽂아두기도 한다.
그러나 60명이 사용하는 너른 교무실에 꽃 몇 송이는 소위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그럴 때는 곳곳에서 “영숙아! 여기도 꽃 좀 꽂아주면 안되것나.”하는 선생님들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그런 환경이 싫었던 몇몇 선생님이 근로 장학생이란 이름을 붙여 교무실에 달랑 한 명뿐인 여자인 영숙이에게 매월 얼마씩 보조하기로 했다. 꽃을 자주 꽂아주는 조건으로,
그는 가정 형편상 낮에는 급사로 일하며 야간 여상에 다니고 있었다.
남자학교인지라 영숙이가 일하기가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는 지혜롭게 잘 처리한다.
가끔 엉뚱한 녀석들 몇이 영숙이 주위를 맴돌기도 하지만 무시해 버린다.
남자들 속에서만 몇 년을 생활하다보니 면역이 생겼는지 우리가 염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성격도 서글서글한 것이 선생님들이 모두 그 애를 좋아했다.
그 뒤로 군데군데 꽃이 꽂히니 교무실의 분위기는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특히 5월이면 담장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넝쿨장미를 꺾어 와서 꽂아 놓으니 분위기가 싹 달라진다.
또 한 명의 근로 장학생이 있었다.
교무실 한쪽 편에 구두 통이 놓이고, 그 애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선생님들의 벗어 놓은 구두를 닦아 놓는다.
2학년인데, 역시 가정형편상 자퇴하겠다고 온 애를 담임이 어떻게 도와보려고 낸 아이디어다.
월급날에는 얼마씩 거출하여 영숙이와 그 애에게 건넨다.
하기야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크게 도움은 되지 않지만 너무 착실한 학생이라 선생님들의 건의로 학교에서도 감면혜택을 주고 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 뒤로는 영숙이의 꽃 구입비도 학교에서 보조하기로 했다.
그러한 교무실의 분위기지만 가끔 학생의 어머니나 누나가 방문하면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위 생동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선생님들 사이에 봄 인사이동 때에는 제발 여선생님 몇 명이 부임하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특히 총각 선생님들은 더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녀 선생을 남고에 발령 내는 일은 그 당시로는 매우 드물었다.
요즘처럼 남녀공학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남녀 부동석 사상이 남아있을 때라 미혼인 여선생을 남고에는 발령 내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 학교 근무 2년차일 때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입학식 날 많은 학부모들이 왔다.
평일이었으니 주로 학생들의 어머니나 이모 누나 등등 여자들이었다.
모처럼 학교 내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입학식 순서에 담임 소개시간이 있다.
그때는 각 반의 담임을 소개하는데, 학생은 물론 학부모들과도 처음 대면하는 자리라 옷차림이며 머리 손질 등등 신경을 쓰게 된다.
교장선생님이 소개할 때마다 담당과목, 출신고교, 출신대학, 경력 등등 시시콜콜한 것 까지 나열한다.
완전히 밑천이 다 드러나는 날이었다.
그날이 소위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선보이는 날이었다.
식이 끝나고 내 반 애들을 교실에 들여보내고 수업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 한 분이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누구누구 어머니라 하는데, 금방 그 애들과 상면했는데, 얼굴이며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기를 권하니 그 옆에 같이 온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의 여자를 딸이라며 소개한다.
교무실의 선생님들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어있다.
그리고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수업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왜 그 어머니가 미인 딸을 데리고 왔을까?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뭐 딴 뜻이 있었을라고.
내가 지례짐작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조례시간에 출석 점검을 하면서 그 애 이름을 부르니 대답하는데, 곱상하게 생긴 애다.
그의 누나와 비슷한 것 같다.
신학기가 되면 바쁘다. 내 반 학생들 60명의 신상파악에다 여러 가지 학급사무를 비롯하여 맡은 업무의 계획과 처리, 학습지도안 작성과 수업준비 등등으로 모두 정신이 없다.
경력이 좀 된 선생님들은 그들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 그렇게 서둘지 않지만 나 같은 초임은 방향을 잘못잡고 헤매기도 한다.
그렇게 멋모르고 헤매는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토요일만 되면 은근히 기다려지는 일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퇴근 무렵에는 꼭 그 학생의 누나가 교무실에 나타난다.
동생을 데리러 왔다가 인사하러 들렸다는데,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다면 왜?
몇 번은 동생을 데리고 가더니 그 후로는 은근히 내가 퇴근할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같이 나가기도 하는데, 할 말이 별로 없으니 학생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와 가족관계 등등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공무원으로 구청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공통된 관심사를 찾아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이 떠오르지 않아 미지근하게 대하다 헤어지곤 했다.
학부모입장인 그녀에게 여느 여인처럼 내 감정을 털어놓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녀도 은근히 다가오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눈치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역시 교사라는 입장이다 보니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다 5월 중순쯤 이었을 것이다.
화창한 봄날에 덩굴장미로 수놓은 교무실에 그녀가 들어서는데, 교무실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다.
계란색의 화사한 원피스차림의 그녀는 5월의 살아 움직이는 한 송이 꽃이었다.
남자들만의 교무실이니 장미 말고는 그렇게 봄을 느낄만한 꺼리가 없는데,
봄은 역시 여자의 옷차림에서부터 온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눈이 부셔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들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그녀와 퇴근을 하게 되었다.
월요일 출근을 하니 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교장실에 들어서니 자리에 앉으라 하며 학교생활이 어떠냐고 물어 신다.
그러면서 어려운 일은 선배선생님들에게 조언을 구하라 하신다.
그런 이야기 하려고 나를 부른 것 같지 않아 긴장하고 있는데, 본론이 나온다.
김선생은 아직 미혼이니 누구를 만나 연애를 해도 상관없지만, 여기는 교육기관이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특히 학부모들로부터 항의 전화도 온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집에 가서 부모에게 부풀려서 이야기도 하니 교내나 학교 인근에서 만나는 것은 삼가라고 하신다.
거참! 선생이란 직업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퍽 서글프기도 하다.
머리가 띵했다. 연애라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그런 것 시작도 해보지 않았는데,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은 내가 그녀와 연애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 후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멀리하기로 작정했다.
내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그러한 것을 느꼈는지 교무실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1월 어느 날 그 애가 조퇴 허락을 받으러 왔다.
사유를 물으니 누나가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허! 허!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내게는 잔인한 5월이 되어 맥 빠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