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20070019 박정원.hwp
사진이 안 올라 가서 파일도 함께 첨부합니다~
<답사보고서>
근대 조선의 자취가 남아있는 동인천 답사여행
국어국문학과
20070019 박정원
동인천은 그동안 나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인천에서 태어나 20여년 넘게 학교를 다녔지만 차이나타운, 자유공원이 있는 동인천 일대는 갈 생각을 잘 안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지역 사람들을 만나 인천에 산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인천에 가볼 만 한 곳을 이야기하며 항상 ‘차이나 타운’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때마다 나도 아직 가보지 못했다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 한 번 꼭 가봐야지 하면서도 막상 가기가 어려웠는데 마침내 작년 가을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친구와 함께 처음 차이나 타운을 찾았다. 내가 생각했던 곳과는 조금 달랐지만 인천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국적인 풍경의 차이나타운,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자유공원 외에도 갖가지 일본건축물, 우리나라 우정의 효시가 된 인천우체국 등 근대조선의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조선시대 사회와 제도’ 수업을 듣고 답사를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바로 이곳 동인천이었다. 작년에 처음 가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대로 따지면 근대 조선이기 때문에 이번 수업과 별로 관련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답사를 핑계로 한 번 제대로 돌아보고 내가 사는 곳에 있는 역사 현장이기에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하게 되었다.
거대한 옥외박물관 인천 중구
인천은 1883년 개항 이후 열강이 첫발을 디딘 곳이다. 1884년 청나라에서 인천 중구에 조계를 형성하고 이를 시작으로 러시아, 미국,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어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현 중구청 건물이 있던 인천부청사를 중심으로 각국 대사관이 세워져 일대에는 인천의 유지들과 각계 고위층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고급 주택단지를 이루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제1은행을 비롯해 제18은행, 제58은행 등이 세워져 금융가를 이루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을 비롯한 서구식 건물이 터를 잡았다. 이 때 조성되었던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리, 근대 건물들이 남아있어 이 일대는 그 역사에 비해 조금 초라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근대 조선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거대한 옥외박물관이 되었다.
친구의 추억과 함께 시작된 도보여행
이번 답사의 가이드는 동인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천 중구 중앙동 거리 일대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가 해주었다. 이 일대에는 여러 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중 ‘인화여고’를 다닌 이 친구는 동인천 예찬론자였다. 이곳은 서울이랑 가깝고 주변 건물들이 운치 있어서 여러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했었는데 친구가 청소시간에 밖에 나가 소지섭을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터였다. 마침 우리가 간 날도 드라마 촬영이 있어 생각지도 못하게 연예인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차이나 타운을 집 드나들 듯 다녔던 친구는 고등학교 때 이곳의 답사레포트를 써 본 적이 있어서 이번 답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먼저 찾았던 곳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었다. 1888년 11월 9일 미국과 영국, 러시아, 청, 일본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하여 러시아인 토목기사 사마틴이 설계해 건립되었고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렸다. 1914년 각국지계 제도의 철폐와 함께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불리다가 인천 상륙작전을 기념하여 맥아더 동상이 세워지며 ‘자유공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벤치에 앉아계셨고 벚꽃나무가 정말 많았지만 이상기온 때문에 아직 꽃이 필 기미도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꽃이 피면 다시 오자는 이야기를 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제물포 구락부였다. 이 건물은 인천에 거주하던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던 곳으로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발음으로 1901년에 지어졌다. 멀리서 건물 앞에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했더니 건물을 배경으로 드라마 ‘풀하우스2’의 촬영이 한창 진행 중 이었다. 촬영을 구경하다가 잠시 촬영이 없을 때 건물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안은 사교장 답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재로 둘러싸여 있고 술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이는 바와 쇼파, 각국의 전시물들을 볼 수 있었다. 둘러 보는데 몇 분 안 걸리는 작은 크기였지만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이 이곳이 사교계의 중심이었음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제물포 구락부 앞에는 인천 역사자료관이 있었는데 인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했더니 원래 일제시대에 일본인 사업가 코노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서구식 레스토랑, 사교클럽 등으로 변모하다가 인천시에서 매입하여 한옥 건물로 개축하였고 시장공관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의 역사자료관이 되었다. 이 안에는 근대부터 현재까지의 인천의 역사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방명록을 보니 인천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은 차이나 타운이었다. 차이나 타운은 1884년 청나라에서 조계를 형성하면서 건너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됐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았다. 1920년대 ‘청관거리’라 불리던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요리집이 들어섰다. 정부의 외국인 제한정책으로 상권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한국을 떠나기까지, 이 곳 차이나타운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활력 넘치는 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차이나 타운 입구에서 처음 본 것은 유치원이었고 그 옆의 계단은 너무 잘 정비되어 어색한 모습이었다. 친구가 고등학교 다닐 당시에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아 더 고풍스럽고 운치있었다고 하는데 시에서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기로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 같다.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주변 경관을 해치는 개발이 이루어 진 것이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차이나 타운 안에는 여러 중국집들과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중국인 점포주택에서는 월병, 공갈빵, 포춘쿠키, 각종 중국 기념품 등을 팔고 있었다. 그 중에는 최초의 짜장면이 만들어졌다는 공화춘도 있었다. 본래 건물이었던 곳은 짜장면 박물관으로 변신 예정에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청국 영사관 터와 연결되어 있는 인천화교중산학교에는 운동장에서 한창 학생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이 학교 남학생들이 잘생기기로 유명했다고 해서 용기를 내서 운동장입구까지 가보았지만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그냥 나왔다. 잠깐 본 아이들의 모습은 한국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학교 뒷담에는 차이나타운을 위해서 조성된 듯한 150m의 대형벽화 ‘삼국지 벽화’가 있었는데 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 그냥 스치듯 둘러보기만 했다.
일본과 청국의 조계지를 나누었던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을 지나자 이제는 일본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제1은행부터 시작해서 18은행 58은행 등이 같은 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각각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야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우정업무의 효시가 된 인천우체국은 아직까지 우체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서양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건물이라고 하는데 삼거리 길 한가운데에 덜렁 있으니 그 느낌이 잘 안사는 것 같았다. 중구청은 이 일대를 ‘테마박물관 거리’로 지정하고 근대 건축물들을 매입한 뒤 개항장에 있는 기존 박물관들과 연계할 계획이라고 한다. 뭔가 어색해진 차이나타운을 보고난 후라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제대로 계획을 세워서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리를 거의 둘러 본 우리는 이제 홍예문과 답동성당, 내동성공회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홍예문은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란 뜻으로 그냥 모르고 지나치면 그냥 터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곳이었다. 1906년 인천 시내 남북간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착공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거주민들의 영역확대가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좁은 길에 여전히 차, 사람 구별 없이 지나다니고 있으니 아직 그 명분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길이지만 친구는 여기에서 한 번도 교통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라 내동성공회당으로 향했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내동 성공회성당은 다소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로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코프 주교와 내과의사인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당 자리에는 원래 성누가병원이 있었으며 여기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1902년에는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6년 다시 세운 것이다. 문이 잠겨 있어 안에는 들어가 볼 수가 없어 벤치에 조금 앉아 있다가 마지막 답사지인 답동성당으로 향했다.
답동성당은 1890년 7월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빌렘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면서 설치된 것이다. 1897년 고딕식의 단층건물로 세워졌고 현재 모양의 답동성당은 1933년에 옛 성당건물을 보존하면서 외벽을 벽돌로 쌓아올려 1937년에 완공한 것이라고 한다. 내동교회와는 달리 안을 구경할 수가 있었는데 너무 엄숙한 분위기라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다.
답사를 마치며
5시간 정도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좀 더 빨리 이곳을 둘러봤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전에 아직 개발이 되기 전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 졌기 때문이다. 또한 조금만 신경쓰면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외국인들에게도 흥미로울 만한 관광명소로 소개할 만한 곳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나 타운이 변해버린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의 모습을 더 잘 정비하고 보존하면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로 넘쳐났던 백 여 년 전 모습을 다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일대는 현재 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있고 여러 가지 사업이 한창 진행 중에 있으며 이 일대를 올레길로 지정하는 등 2014년 인천 아시아게임을 앞두고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 개항이후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관문역할을 했으며 최초로 서구화된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었다.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들이 이 역사를 말해주고 있지만 최근까지도 동인천 일대는 인천의 쇠락한 동네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 동네가 가지고 있는 많은 근대조선의 문화 유산을 토대로 아시아게임을 앞두고 세계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