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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 - 그 민낯과의 만남. 제목부터가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한정된 금액을 가지고 원래 사려고 했던 다른 책을 기회비용으로 치르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영성서적이나 교회사 책들을 볼때마다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빠짐없이 나오던 영지주의. 그 영지주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영지주의의 민낯은 무엇인가? 민낯이라 하니 우선 뭔가 까발리는 듯한 부정적인 느낌이 밀려왔다. 영지주의의 무엇을 까발리는 책일까 싶었다. 영지주의는 과연 내가 상상했던 대로 추녀일까 아니면 예상외로 봐줄만 한 얼굴일까 나름의 기대을 하며 책을 폈다. 이 책은 영지주의를 왜 알아야 하는지로 시작하며 18세기 이후에 발견된 사본들을 토대로 정의와 기원을 더듬고, 초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영지주의의 역사를 개괄한다. 그리고 영지주의의 문학적 전거와 종교로서의 영지주의, 신화와 모티프들을 더듬고, 영지주의에 대한 성찰로 끝이 난다.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Gnosis에서 유래한 영지주의자와 영지주의라는 용어. 얼핏 듣기에는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자의 느낌이 났지만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하던 것은 그저 신에 대한 정보 차원의 숨겨진 지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직접적 체험을 통해 자기 자신과 신적 실체에 관한 ”앎”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다. 그 궁극적 “앎”을 머리로 알기 보다는 이미 깨달았거나 깨닫기를 갈망하던 사람이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이전부터 있어왔고, 신약성서에도 영지주의의 씨앗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웠다. 바오로 사목서간과 요한계 문헌에서 그당시 퍼져있던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이 나타나는데 초세기 교회에서부터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와 그리스도교간의 논란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교부들과의 논쟁에서 영지주의가 패했고 결국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과정에서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단으로 단죄되기 전에는 그들도 그리스도교인에 속하지 않았던가. 발렌티누스는 죽을때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아있었고, 이단으로 단죄된것은 그의 사후라고 한다. 왜 영지주의가 이단으로 단죄되었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불변하는 하나의 진리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으로 받아들이고 교회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또 다른 길로서 인정 될 수는 없었을까? 그들의 신관이나 다른 주장들을 보면 가톨릭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신적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교회에서 충분히 수용해서 발전시킬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신의 이름을 넘어선 신성이라는 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신적 각성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에서는 최고신과 창조주를 구분한다. 비록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구약의 질투하시고 엄하신 하느님과 신약의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을 동일시 할 수 없어서였다. 신약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기에 구약의 하느님을 차마 연결시킬수 없어서였나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의 주류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사순5주간 주일인 오늘의 복음이 지금과는 다르게 해석되었을지 싶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에온(Aeon)이고, 예수님이 찾아간 마을 베타니아는 천상 플레로마(Pleroma)이고, 라자로는 깨달음을 얻어 영적(pneumatic)인간이 되었으나 그것을 망각하고 다시 육적(hylic) 내지는 혼적(psychic)인간으로 타락하여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깨닫게하여 부활시킨 것이라고 말이다. 위험한 생각이겠지만 그럴듯도 하다.
영지주의는 이단이니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하던 나의 오해가 이 책을 통해 많이 풀렸다. 꼭 나쁜것만은 아니었다. 그들도 적어도 1세기까지는 엄연한 그리스도교의 일원이었고, 도덕적으로도 당시 사람들보다 금욕적이었지 문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세기에 나타났다가 이미 사라진것이 아니고 역사 곳곳에 숨어 이어져왔고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현세기에도 뉴에이지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경각심이 들었다. 특히 크리스천 심리학자로 알고있던 융의 심층심리학과 프리메이슨, 영화 매트릭스에도 영지주의의 영향이 있다는 점에서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나같은 초심자에게는 말이다. 이사야 신부님과 사도요한 신부님께서 해주신 충고가 떠올랐다. 다른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전에 기초부터 튼튼히 잡아놓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잘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는 극약과 같은 것이 영지주의가 아닐까 싶다. 윤회라는 점에서 힌두교와 불교와의 소통의 통로가 될 수도 있고 신적각성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에 도움이 될 듯도 하다. 세상을 안좋게만 보는 이분법과 세상 곳곳에 숨어 하느님이 없는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그리스도교에 큰 위협이 될 듯도 하다.
영지주의의 민낯은 생각했던것 만큼 추악하지 않고 봐줄만 했다. 하지만 장미와 같아서 예쁘다고 무심코 손을 뻗었다간 피를 흘릴듯 하다. 주제넘게 영지주의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판단은 하느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차근차근 그리스도교의 기초부터 쌓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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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지주의 형성 배경과 핵심 이론 소개, 예수님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단으로 결정되어 교회 밖으로 밀려났지만 사실은 사도들의 시대부터 교회사 안에서 그리스도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들.. 모두 잘 지적했네요. 좋은 글이란 이렇게 길지 않으면서도 언급해야 할 말들을 다 찾아서 언급해 주면서 자신의 소신도 밝히는 글입니다. 이 책 저도 필요할 것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제 방 앞에 가져다 두시면 감사...
균형이 잘 잡힌, 책에 관한 설명과 소감이 모두 인상적인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지주의....
필요한 영성이기도 하지만 혹여라도 잘못 인식하게 되면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달게되는 것이라고 나의 머릿속에 있는 각인되어 있는 불편한 이론입니다.
담백하게 잘 설명해주신 글 덕분에 무조건의 거부보다는 조금은 시선을 곱게 돌려도 될 듯싶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글솜씨가 없는데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글의 내용 전개 모두 깔끔합니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영지주의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좋은 글이네요..^^ 많이 부족한 저는 기초를 쌓으면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