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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강 건너 맹그로브 숲에는 사나운 어미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내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는 젖을 못 뗀 새끼 호랑이가 쿨쿨 잠들어 있는데 이 녀석이 수컷일까, 암컷일까, 아무튼 오늘은 내 결혼식 날, 한껏 부풀린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관을 쓰고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식장으로 들어섰다 정장을 한 당나귀 신랑이 벙글거리며 털복숭이 손을 내민다 박수소리, 폭죽소리, 남이야 쑥덕거리든 말든 누런 달이 떴는데 이상하다, 떡갈나무 아래 어른거리던 그림자 보이지 않네 떠들썩하던 웃음꽃 시들어가는데 흥겨운 음악도 멈췄는데 자꾸만 근질근질 발굽이 돋아나고 줄 끊어진 바이올린 금간 틈으로 맹그로브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난 칭얼대는 새끼 호랑이를 안고 우유를 먹인다 그래 그래 착하지, 라디오에선 강을 훌쩍 건너 뛴 호랑이가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 숲을 내달리며 집채만 한 슬픔으로 포효하는 저 얼룩무늬, 아직 선물상자들을 열지도 못했는데 어쩌나 아가야, 울울창창해지는 이 숲의 소리들을
다시 봄날
1
책갈피에 앉는다
두툼한 잎사귀 속으로 더듬이를 내린다
숨 쉬지 마라
고요한 날개
왕의 비빈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나비가
글자를 훔친다
2
호피무늬로 치장한 나비, 하느작하느작 허스트 명품관에서 쇼핑하고 오늘은 마사지 숍에 들르는 날 눈썹 다듬고 손톱을 붙이면 실금 파인 눈가에 졸음이 내려앉는다 꽃병에는 붉은 튤립 한 다발 장자는 먼 봄꿈 속으로 출장가고 창밖엔 구름, 나비는 거울을 보다 초초상*처럼 초조해져서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인다 무덤처럼 고요한 봄날, 여기저기 주저앉아 똥을 누는 민들레, 검은 차에 타고 귀 얇은 귀머거리 나비 포르말린 향기에 날개를 접었다 폈다
3
무엇에 홀려 식당 즐비한 그 골짜기로 접어들었는지 물오른 조팝나무 가지마다 떡고물처럼 묻어있는 흰 꽃, 비킬 곳도 돌아설 곳도 없는 흐드러진 나무 아래 흘레붙은 검은 개, 주춤주춤 비켜서는 떨어지질 못하고 쳐다보는 간절한 눈빛, 토요일 오후 천천히 차를 몰고 그 많은 봄날이 한꺼번에 쳐들어왔나 웅성거리는 빛과 기막힌 어둠, 온 산 만장 같은 진달래 산벚나무,
*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불면
거대한 불가사리 같은 바단지린 사막이 스멀스멀 내 이부자리로 기어오른다 쩍쩍 갈라지는 등을 긁는다 자판 치듯 타박타박 낙타 떼가 옆구리를 횡단해 가고 얼룩덜룩한 잠 속으로 스며드는 냄새
아주 먼 곳에서 날아오는 듯한 담배 연기, 코끝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폈다, 누런 갱지들을 허물처럼 벗어놓고 사막은 밤새 내 등 위에서 뒤척인다 모래폭풍이 일고 누각이 파묻히고
디, 디, 디제이 하는 염소들
꽃 진 언덕 구름 피어난다 말뚝에 매인 염소들, 날마다 똑같은 축을 물고 맴 맴 맴돈다 반경 내의 풀들은 키가 작다 정장을 한 염소, 수염을 기른 흑염소들이 뿔로 둥근 대기를 긁는다 파랗게 돋아나는 악보, 풀을 뜯는다 풀 향기 맡으며 메―― 턴테이블 위 여러 장의 음반, 염소들은 바람을 베끼고 구름을 훔치고 땅을 긁어 오물오물 대기와 대지를 믹싱한다 전혀 딴판인 음악을 리믹스한다 염소들의 영혼이 담긴 메― 에―― 메― 에―― 언덕을 날아다니는 염소들의 랩, 기절할 듯 열광하며 몸을 눕히는 잡초, 수컷은 연방 음표같이 까맣고 동글동글한 똥을 눈다 골짜기엔 염소탕으로 보신한 중년의 남녀들 노래방 기계에 맞춰 피둥피둥한 몸뚱이를 흔들어댄다 저들 몸속에서 쿵 쿵 되울리는 음악, 경사진 언덕 검은 디 디 디제이들, 레 레 레코드판이 미 미 밀리고 당기고, 뭉게 뭉게 뭉게구름 위로 퍼져가는, 메― 에― 에―― 메― 에― 에――
멀고 먼 추억의 스와니
그리워라, 당신 흔적을 따라
앨라배마 루이지애나를 거쳐 증기선을 타고 헤맨지 수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당신 몸속 시퍼런 물길을 지도에 표시해봅니다
흥얼거리는 한 자락 노래 같은 길
당신은 한 번도 길을 잃지 않았더군요
어떤 이는 공원의 벤치에서 마른 빵을 씹는 당신을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벤조를 울리며 걸어가는 당신을 보았다 하고
외로움에 먹혀 험상궂은 짐승이 되어 금광으로 흘러갔다 하고
나는 당신이 지나간 길에서 태양과 먹구름, 천둥 냄새를 맡아요
세월이 갈수록 당신 희미해져
눈을 감아야 엽맥 같은 모습이 보이네요
켄터키 옛집엔 여름을 못 견뎌 칸나가 피고 있어요
뭉게구름 사이로 그래요, 저렇게 키 큰 칸나는 처음이에요
저 붉고 깊은 음원을 단숨에 들이킨 당신, 피 속에 태양이 흐르고
머리 위론 폭포수 같은 햇살 쏟아져 내리고
태양이 최후의 악보라고 당신, 또 내 귓전에 중얼거리고
그리워라 스와니,
나는 늙고 이제 당신의 장르는 슬픔이 깃들어 잠이 올 듯한 담회색
날마다 되불러보지만
고장난 테이프처럼 혀뿌리를 겉돌기만 하네요
밤의 음악
어둠의 골짜기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나는 인드라망의 구슬그물을 흔든다 화음으로 가득 차는 둥근 하늘을 측량한다 뭉클하게 만져지는 밤의 촉감, 물을 뿌리면 카시오페아, 오리온, 북두칠성,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별빛에 귀를 곤두세운다 멀찍이 서서 기다린다 반짝일까 말까 반짝일까 말까 반짝거리는, 무한천공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더듬어내는, 다시 별들의 길을 추적한다 별빛들을 끌고 와 손끝에 휘감아서 펼쳐낸다 캄캄한 반구, 집집마다 머리맡에 풀어놓은 시계처럼 일시에 째각거린다 그중 하나를 손목에 찬다 관절 구석구석 둥지 트는 메아리
f 홀
1.
따뜻한 음역의 바다 소년단원들 음표처럼 물장구치며 간다 얼핏, 후각을 자극하는 피 냄새 한낮의 휴양지 차양 아래 웃음들 싱그러운데
찢어진 눈, 뭉툭한 머리통, 어뢰처럼 미끄러진다 shark- shark- shark- 바다를 두 조각으로 자르는 지느러미, 쏟아지는 햇살 아래 눈을 감는다 출렁거리는 평화를 접수한 자 심해를 다 삼킨 자
긴 꼬리 여미며 사라지는 저 순찰선 후미를 우지끈 들이박겠다 낭떠러지로 몰아버리겠다 농익은 벌거숭이들 떠다니고 더위 먹은 바다 기우뚱거리는데 백상아리 해안선을 툭, 끊어버린다
2.
금요일 밤 f 홀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두근거리는 몇 개의 문을 거쳐야 들어 갈 수 있는, f 홀에서는 깜깜, 자신을 지워야 한다 출몰하는 백상아리 추격하는 피아니스트 아우성치는 바다가 작살을 받는다 피로 흥건해지는 홀, 대리석 기둥에 기대 누가 지난여름을 흐느끼고 있다
피아노악어
혼자 지키는 집,
늪으로 변해버린다
땀이 거머리처럼 머리 밑을 기어다니고
눅눅한 공기가 배밀이를 하며 들어온다
수초가 슬금슬금 살을 뚫고 자란난다
피아노 뚜껑을 연다
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악어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여든여덟 개의 면도날 이빨 덥석 양팔을 문다
숨이 멎는다
입에선 토막 난 소리들의 악취
손가락은 악어새처럼 건반 위를 뛰어다녔는데
놈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내동댕이친다
물 깊이 물고 내려가 소용돌이 일으킨다
수압에 못 이긴 삶은 흐물거린다
대궁 아래 숨어 있는 눈망울
나는 수초 사이 처박혀 한없이 불어 터진다
어디선가 웅성거림 들려오는데
핏물 흥건한 이곳으로
물거품이 궤적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죽어라 헤엄치다 돌아본 늪엔
수련이 가득
구설수처럼 피어 있다
오, 나의 태양
활활 타는 아궁이지요 누군가 닥치는 대로 불쏘시개를 던져넣네요 높고 높은 탑 속, 실을 잣는 그레첸 물레에 다친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툭, 툭, 떨어지네요 그래도 끝없이 비단실을 풀어내는군요 수사자 한 마리 으르렁거리다 금세 암컷과 새끼들을 거느리고 내 눈꺼풀 속으로 뛰어드네요 맹수들, 더위에 지쳐 바다에 가도 갈기 나부끼며 몰려오네요 사는 게 전쟁이라고, 종일 화기를 뿜는 태양 세포 분열하는 태양이 케이블 선에 매달려 네거리 차도에도 우글우글 뜨고 지고 그럼요 산목숨들을 삼켜 그 힘으로 익어가는 무덤입니다 무덤이 삼킨 것들을 가지런히 답안으로 뱉아놓았군요 산자락 마다 볼록볼록한 음향판들,
태양, 물 위의 연꽃들
누각은 기러기나 오리의 날개처럼 세워진다 그 아래 내 안압을 팽창시키는 못이 있다 중얼중얼 물결 퍼지자 대궁은 움켜쥐었던 햇살 펼친다 꽃잎은 손가락이다 못의 근심이 밀어올린 태양, 망막을 찢으며 수면 구석구석을 수런댄다
매표소 근처 바람개비 파는 여자, 장맛비 못 둑 넘치게 울어 눈이 벌겋다 생각난 듯 가슴 헤치고 돌아앉자 주린 젖먹이, 어미의 무덤 속으로 파고든다 아기 잇몸 뚫고 하얀 꽃잎 돋아난다 가쁜 숨들 어둠 삼키고 자맥질 치며 솟아오른다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
산자락마다 볼록 볼록한 음향판들....축하드립니다^^
감기는 오래 앓으면 안되는 것인디?
축하드립니다^^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