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창 기념전시회(12.25)
오늘은 성탄절이고 휴일이다.
아침에 서울 성곽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예전에 한번 가봐야지 마음을 먹은 일민미술관을 가보기로 했다.
점심으로 간단히 라면을 먹고 갈 때 체력 비축을 위해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시흥동가는 버스를 안양1번가에서 타고 석수역에서 150번 버스를 탔다.
석수역이 그 버스 시발점이니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 갔다.
서울신문 앞에서 내려서 청계천 입구에 동아일보 건물에 일민미술관이 있다.
미술관 옆 음식점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청계천과 비슷했다.
날이 성탄절이니 서울시내 웬만한 사람은 모두 청계천과 시청앞으로 모인 것같았다.
특히나 어제 서울 시청앞 잔디광장을 저렴한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TV 뉴스로 보냈으니 그거 타겠다고 줄이 몇백미터는 서있는 것같았다.
서울이 인구가 많다는 것을 오늘도 절실하게 실감을 하였다.
일민미술관에 가보니 수모인 정해창 선생의 전시회를 하는 것이다.
비용은 2천원이고 관람객은 그리 많지는 않아서 편하게 1층부터 관람을 했다.
정해창 선생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20세기에 활약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예, 전각, 사진 작가였다고 하면 된다.
우리나라 거의 최초로 서도전각전시회와 사진전을 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고 일본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에 가서 현대문명의 결정체인 사진을 접하고 사진을 배우셔서 우리나라에 왔었고 중국에도 다녀오셨다는 것이다.
전각은 위창 오세창과 성재 김태석에게서 배웠다는 것이다.
전시회 들어가는 입구에는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전시회의 사진 풍경이 게시되어 있었다.
전시회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해 전시회장의 풍경은 사진으로 전할 수 없고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서예작품과 자녀와 며느리들에게 호를 부여하고 편액을 써준 것도 있었고 그간 사용했던 낙관들이 전시되고 문방사우, 여러 방면의 예술적 능력을 키우신 서적들이 있었다.
특히나 인상깊었던 것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모든 글자를 하나의 낙관으로 만들어 족자를 만드신 것이다.
상당히 많은 유물을 고려대학교에 기증을 하시고 기증하였다는 글도 있었다.
국회도서관과 덕성학원인지 거기의 낙관도 만들어 주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책도 스물 몇권을 남기셨다고 하였고 전각을 할 때 쓴 여러 가지의 조각도도 전시되어 있었다.
1층은 서예, 전각 전시를 하고 2층은 사진 전시를 했는데 2층에 올라가니 거기도 화신백화점에서 사진 전시를 한 모습이 사진으로 게시되어 있었다.
사진은 자신을 찍은 자화상이 있었는데 요즘처럼 타이머가 있었는지 하여간 신기했다.
자화상 찍은 사진이 상당히 많았는데 안내 팜플렛처럼 웃통을 벗은 모습을 찍기도 하였다.
인물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설명서에 보니 주로 기생이나 모던여성들이었다고 하는데 사진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풍경도 많이 담았고 새나 조랑말같은 사진도 많았으며 특히 절, 탑 등과 같은 문화재를 많이 담았다고 한다.
사진을 주로 미술작품같은 차원에서 그림 그리듯이 찍은 것이 특징이고 그러다보니 정물사진과 인물은 자연스런 활동모습, 뒷모습 등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요즘처럼 사진 구도를 삼분법에 따라 구도를 잡았는데 간혹 가운데 목표물을 둔 것도 있었다.
문화재 사진은 너무 작게 잡아서 요즘처럼 탐이나 절의 세부 문양, 그림 등은 확인할 수 없었고 이왕이면 궁궐의 모습을 좀더 세밀하게 찍었으면 했는데 그런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의 사진관련 서적도 번역하여 발간할 정도로 우리나라 사진의 선구자였고 서예, 전각의 대가셨다.
전시회를 보면서 과거와 현재의 우리 문화를 이어주는데 선구자적으로 기여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사진은 찍을 수가 없어서 홈페이지나 팜프렛에 있는 것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일민미술관을 나와 청계천을 구경할까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구경할 수가 없어서 전철을 타고 안양으로 돌아왔다.
아래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벽癖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
● 이 전시는 1929년 우리나라 최초로 ‘예술사진개인전람회’를 열었던 무허(舞虛) 정해창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하는 기념전시회이다. 1907년에 태어난 정해창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독일어를 전공하면서 그림과 사진을 배웠으며, 금석학 연구를 위해 중국유학을 다녀온 근대지식인의 한 전형이었다. 그는 해방 이전 사진가와 서도전각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금석학 연구 및 불교미술사 연구에 전념하면서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본 전시는 이처럼 다양한 예술 및 학문 연구 활동을 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근대지식인의 한 전형을 살펴보고, 딜레탕트의 한계를 넘어 취미를 벽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그의 문화예술 관련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정해창의 예술활동 영역에 따라 크게 제1부 ‘사진인문학을 열다’와 제2부 ‘서도전각의 길을 가다’의 2부문으로 나누었다. 제1부는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사진가로서 활동한 시기의 사진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며, 제2부는 1941년 <서도전각전>의 개최 이후 서예가와 전각가로 활동했던 시기의 서예 및 전각 작품들로 꾸몄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정해창의 빈티지프린트는 한국근대사진사연구에 있어 소중한 실물자료이자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촬영한 몇 안 되는 근대기록물 중의 하나이다. 또한 해방 이후 전국을 답사하면서 촬영한 총 2,483점의 불교미술사진은 근대시각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전통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정해창은 평생 ‘조선적인 것’을 쫓아 사진에서 서예와 전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미술 연구의 길로 걸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가 성취한 예술작품과 연구 성과들은 우리에게 문화적 자산으로 남겨졌다. 이번 전시가 그가 남긴 자료들을 발굴·정리·복원하여 정해창이라는 근대적 텍스트를 다시 읽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 이경민
제1부 사진인문학을 열다,
무허舞虛 정해1부창 ● 1929년 첫 번째 전시 이후 1939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한 정해창은 10여 년간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5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정해창은 나라 잃은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전통, 민족, 조선적인 것에 주목하였으며, 사진을 통해 근대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전통의 이미지를 표출하는데 노력했다. 그가 발견하려 했던 것은 여항문인화가들이 그림 속에서 다뤄왔던 주제와 내용들이었으며, 주로 인물화, 풍속화, 산수화, 점경인물화, 화조영모화 등 전통회화의 화목과 양식에서 ‘조선적인 것’을 찾으려 했다. 따라서 제1부는 전통회화의 화목에 따라 정해창의 사진을 분류했으며 여기에 정물, 자화상, 문화재를 보태 총 8개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한편 정해창은 금석학 및 불교미술 연구를 위해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전국을 답사하면서 8000여점의 사진을 촬영하였으며, 그 중 2483점을 선별하여 5권의 스크랩북에 정리했다. 이번에 처음 발굴, 공개된 이 불교미술사진첩은 그의 예술사진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기의 중요한 역사기록물로서, 사진인문학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창의 사진은 몇몇 사진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제목과 제작연도를 알 수 없어 따로 캡션을 붙이지 않았다. 사진의 대부분은 정해창이 사진가로 활동했던 192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촬영되었으며, 유리건판에서 밀착인화한 젤라틴실버프린트이다. 본 전시에 출품된 사진은 1941년경 정해창이 직접 인화한 유일한 원본사진(빈티지프린트)들이다.
제2부 서도전각의 길을 가다,
수모인水母人·물아재物我齋 정해창 ● 1939년 네 번째 사진전을 끝으로 사진활동을 접은 정해창은 1941년 화신백화점에서 개최한 ‘서도전각전’을 통해 서도전각가로 데뷔하였다. 근대 전각의 양 대가였던 위창 오세창과 성재 김태석에게서 사사한 그는 이 전시를 계기로 자신의 스승들처럼 서예가이자 전각가이자 불교미술사가의 길을 걸었다. 당시 대표적인 미술평론가였던 윤희순으로부터 ‘그 계(界)의 계승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정해창은 35세의 젊은 나이에 서예와 전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서도전각전’은 그의 첫 번째 사진전과 마찬가지로 전람회 형식의 개인전으로는 매우 선구적인 전시였다. 따라서 현존 작품뿐만 아니라 그가 촬영한 전시장 전경사진과 복제사진 등을 활용하여 당시의 전시 상황을 일부 재현하였다. 제2부의 구성 역시 정해창이 ‘서도전각전’에서 분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예, 전각, 각석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또한 그가 참고했던 서적들과 작품제작에 사용된 서예 및 전각 도구 등 관련 유품들을 함께 진열하여 이해를 구하고자 했다. 정해창의 서예 및 전각 작품은 그 자체로 감상될뿐더러,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교유관계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글로 쓰거나 새긴 명문의 내용을 통해 그의 미의식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예 및 전각을 넘어 사진에서 그가 표출하고자 했던 바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분과학문이 나누어놓은 학문간, 매체간 경계를 넘어 종합학문, 종합예술의 입장에서 정해창을 바라본다면, 시간적 편차를 두고 진행되었던 그의 다양한 예술 활동 및 학문 연구 활동들이 서로 교통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정해창 연보(年譜)
1907년 배우개(현 종로4가)에서 원제약방元劑藥房을 운영하던 정종두鄭鐘斗와 이옥증李玉增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유재悠載, 정유鄭悠라 하였고, 호는 무허舞虛를 비롯하여 물아재物我齋, 수모인水母人, 하연생何延生이라 하였다. 부친 정종두(관명 정성여鄭星汝)는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에서 삼성당을 운영하던 김관섭 등과 함께 1908년 9월 현 대한한약협회의 전신인 조선약업총합소를 창립하여 업권신장을 도모했다.
1918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졸업연도를 기준으로 추정, 입학 당시 4년제 과정이었음)
1922년 보성고보 졸업 후 동갑나기인 민영덕(閔泳悳)의 딸 민억만이(閔億萬伊)와 결혼하였다.(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일본으로 유학, 동경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였다. 유학 당시 동경의 천단화회川端畵會와 태평양화회太平洋畵會 등에 가입하여 서양화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동경예술사진학교연구실에서 사진화학과 피그먼트인화법을 연구하였다. (1966년 <사진예술>과의 인터뷰 기사에 근거함)
1927년 동경외국어대학 독일어과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시작하였다. ‘정해창씨는 다년 일본과 중국 방면에서 사진술을 연구하여 귀국’했다는 1929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기사로 보아 1929년 이전에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중국 체류 당시 금석학(동양철학과 고고학) 연구를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1929년 광화문빌딩(현 광화문빌딩 서남측에 위치) 2층에서 제1회 예술사진개인전람회를 개최하였다. 3월 29일에서 4월1일까지 열린 이 전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사진전람회로 기록되었다. 4절 40점과 전지 10점 등 총 50점의 사진이 출품되었으며, 주로 조선풍경과 인정풍속을 전시장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사진에 담았다.
1931년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제2회 개인사진전을 개최하였다. 1회전 때의 사진 10점과 신작 40점을 가지고 추석을 기하여 5일간씩 대구, 광주, 진주에서 지방순회전을 가졌다.
1934년 소공동 낙랑다방(현 반도조선아케이트 앞)에서 제3회 개인사진전을 개최하였다.
5"x7"와 11"x14" 크기의 사진 50점을 출품한 이 전시는 인형을 통해서 인간 세계를 부각시킨 서양화풍의 작품전이었다.
1939년 네 번째 개인사진전인 '정해창사진인화개인전'을 화신백화점 7층 화랑에서 개최하였다. 총 49점의 사진을 출품하였는데, 사진을 부채꼴 또는 원형으로 표구하거나 가리개와 8폭 병풍에 붙인 실험적인 작품이 많았다. 정해창 최고의 사진전으로 알려진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예술사진 활동을 중단하였다.
1941년 제1회 개인 서예·전각 전람회인 '수모인정해창서도전각전'을 화신백화점 7층 갤러리에서 개최하였다. 서예작품 23점, 전각작품 32점, 각석刻石작품 2점 등 총 57점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1942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서예 및 전각, 사진 작품과 함께 사진관련 도서 1,240점을 기증하였다.
1950년 5월 덕성여자대학 창설 당시 학장이었던 송금선과의 인연으로 강사로 초빙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출강할 수 없었다. 1953년 환도 후에 다시 덕성여대 교수로 돌아와 동양미술사를 강의하였다.
1951년 1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3년 여름에 환도하였다.
1951년 두 번째 개인 서예전람회인 '수모인서예전'을 부산 동광동 1가의 고려당에서 개최하였다.
1953년 피난시절 사촌지간인 화가 현초 이유태가 교수로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으며, 교양과목으로 예술사진 강의를 하였다. 이는 대학 최초의 사진학 강의로 기록되었다.
1953년 서울 환도 후 덕성여자대학교 가정과로 옮겨 동양미술사와 사진학을 강의하였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그동안 촬영한 불교미술 관련 사진자료들이 손·망실되자 다시 전국을 돌며 불상, 불화, 석등, 석탑, 비각, 사찰 등 각종 불교 문화재를 사진으로 남겼다.
1955년 덕성여대에 출강하면서 미술평론가로 활동하였다.
1955년 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한 장병들에게 일반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설립된 전시군인연합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7년 불의의 사고(낙상으로 인한 대퇴골 부상)로 자택에 칩거하면서 한국의 불교미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신문과 잡지에 수필을 기고하고 사진서적의 번역작업을 하는 등 완성한 집필활동을 펼쳤 다.
1959년 맥클로이(MeCloy, Robert A)의 <실용사진학實用寫 眞學>(東明社, 1959)을 번역·출간하였다.
1959년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성욱박사의 송수기념논집에 '부도浮圖의 양식에 관한 고략考略 - 신라시대의 팔각당형八角堂型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수록하였다.
1962년 한국사학회에서 발행한 학회지인 <사학연구>에 '고 달사지高達寺址의 부도浮圖와 비부碑趺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65년 7~8년간 병석에 누워있다 다소 기력을 회복하자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촬영한 불교미술관련 사진을 정리하였다. 5권의 스크랩북에 총 2,483장의 사진이 목록과 함께 정리한 불교미술사진아카이브이다.
1966년 정리된 사진자료를 대상으로 <한국 석비의 양식>을 집필 중이었으나, 병환으로 인해 출간하지는 못했다. 대한사진문화사에서 발행한 <사진예술> 창간호에 '한국사단의 개화자開花者 1_ 유재悠哉 정해창 편'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정해창의 이력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으로 남았다.
1967년 10월 28일, 낙상으로 인한 대퇴골 부상이 골수염으로 발전하여 끝내 합병증으로 만 6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첫댓글 왕성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셔야 할 아까운 나이에 타개하셨군요. 소개 고맙습니다. 작품 몇점 서예. 전각방에 올려놓겠습니다.
예. 그러십시오. 우리나라 20세기초의 대표적인 서도, 전각, 사진의 대가였던 것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