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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봄집회
생명의 회복(2)
<요한복음 6장 48절~59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우리는 육신의 생명은 기계적으로 받았지만 영적인 생명은 놓쳐버렸다고 했다. 우리가 받을 것을 놓쳐버렸다. 우리는 혼만 있지 영이 없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다시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주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사람에게 주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동산 안에 생명나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었는데,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우리가 당연히 받았어야 할 생명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3장으로부터 11장까지에 나오는 그와 같은 역사가 진행되게 된 것이다.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 반복하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 테이프가 돌아가듯이 계속 반복하고 있다. 모양은 여러 가지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이다.
여기서 우리는 잃어버린 생명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 종교가 생기게 되었다. 인간이 뭔가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찾아보려고 한 것이 이것저것 찾아본 것이 종교가 된 것이다.
참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된 것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이 생명을 받을 수가 없다. 어제 말씀을 드렸다. 이 생명의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는데,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본 바요 들은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 되었다는 것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이 생명을 전함으로써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옛 생명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생명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으로 사귐이 되어야 그것이 참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내용이다.
참된 사귐, 참된 교통은 또 참된 생명에서만 오는 것이다. 개는 개들끼리 사귐이 있다. 소는 소들끼리 사귐이 있다. 또 사람들은 사람들끼리의 사귐이 있다. 그런데 그 사귐의 질이 다 다르다. 왜냐하면 생명이 다르니까 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개구리들도 사귐이 있고 다 사귐이 있다. 살아있는 것은 다 사귐이 있다. 그 생명의 정도가 그 사귐의 정도를 좌우하기 때문에 생명이 고품질이면 사귐도 고품질의 사귐이 되고, 생명이 저급하면 사귐도 저급한 사귐이 된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는 하나의 교통이기 때문에 생명이 온전한 생명이 오면 온전한 사회가 오고, 온전한 생명이 오지 못하면 온전한 사회가 오지 못한다.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의 사회를 보면 그 사회는 계속 뒤죽박죽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벨이 된다. 이것을 지금 계속 되풀이 하는 것이다. 지금 여의도에서도 되풀이 하고 있고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 저 사람들은 싸우기만 하는가? 국회의원이 되려면 주먹도 있어야 될 것 같다. 밀쳐내면 약한 사람은 못할 것 같다. 왜 그런가? 그 생명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왜 저런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우리가 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우리의 대표자들이다. 우리의 대표자들은 싸우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다. 우리도 가면 또 역시 싸울 것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수고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개를 가르쳐도 개의 수준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고, 소를 가르쳐도 소의 수준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어제 최목사님이 오셨는데 소를 타고 다니는 목사로 유명하다. 그런데 아무 소나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탈 수 있는 소가 아주 드물다고 한다. 그것도 그렇게 교육을 해서 말을 잘 듣는 소가 있는 반면, 등허리에 올랐다가 던져버리면 죽는 것이다. 그런 소가 아주 귀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소를 아주 귀중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아무리 해도 소는 소다. 세상에서의 모든 교육과 사귐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 수준의 사귐이고 그 수준의 교육이다. 또 인류가 발전해도 또 역시 거기서 발전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이 와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공위성을 타고 한쪽에서는 하늘을 날라 올라가고, 한쪽에서는 정신적으로 깊은 세계에 들어가서 심오한 것을 찾는 사람도 있고, 또 사람이 가히 보지 못할 것을 본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그 수준이다. 기계적 생명의 수준이다.
기계적 생명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개발만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쪽으로 개발하면 이렇게 되고, 저쪽으로 개발하면 저렇게 된다. 어렸을 때 아이들 뇌를 개발할 때 어느 한쪽으로 개발하면 다른 한쪽은 약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균형있게 개발될 수도 있고, 편중되게 개발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한쪽이 너무 강하게 개발되면 다른 쪽은 약해져버린다고 한다. 사람은 개발하기에 달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뇌는 5%인지 밖에 못 쓴다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얼마를 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발전하면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 우리도 날라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장만 갈아 끼우면 오래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줄기세포를 만들어서 돼지에게서 간을 만들어 우리 간에 집어넣거나 또 콩팥도 집어넣어 완전히 새로이 교체하여, 완전 정비공장에 들어가서 정비하여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추세로 간다면 그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가 없고 공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람의 타고난 생명도 굉장한 생명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생명은 그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을 말한다. 놓쳐버린 생명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한 번은 가져보았으면 이런 것인데 놓쳤구나하고 생각하겠지만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체 놓쳐버렸기 때문에 모른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부처를 믿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한 것이 좋으니까 그대로 해보고, 부처님 믿는 사람은 부처님이 하는 일이 좋으니까 그대로 해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친 것을 보니까 참 좋으니까 나도 병을 고쳐본다.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가셨으니까 나도 물위를 걸어가 본다. 그분이 한 것을 보니 좋으니까. 그렇지만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은 모른다. 어느 날 가니까 기적을 많이 행하시던 분이 기적을 행하시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저분이 분명히 물위를 걸어가던 분이었다. 남을 살려주던 분이었는데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는데도 살렸다. 그렇다면 능히 자기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도 있을 것이고 살 수도 있을 것인데 죽어버렸다. 그러니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 사람의 생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생명은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어느 때는 물위를 걸어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때는 십자가에 달아놓으니까 그냥 죽어버렸다. 그분의 생명이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해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게도 밖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뭘 감추어놓고 있다고 말한다. 감추어놓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 교회처럼 공개된 교회가 없다. 요즘 열린 교회가 있는데, 그렇게 열린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는 내장까지 다 열려있다. 안 열린 것이 없다. 그런데도 와서 보면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 사람들끼리는 뭔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그렇게 써놓았다. 눈을 빤히 뜨고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를 보고도 모르는데 예수님 같은 분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들이 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벌들이나 개미들이 사는 것을 보면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다. 어제도 길가에 가다가 새의 집을 발견했다. 얼마만한 새의 집인가 하면 계란 두 개 정도되는 크기의 새의 집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새는 얼마나 작겠는가? 알을 까놓고 나갔다. 그 새 집은 큰 나무에 만든 것이 아니고, 1년 초 풀에 지어놓았다. 얼마나 많은 지푸라기를 갖다가 돌려 돌려서 동그랗게 지어놓았는지, 어디서 그것을 배워서 만드는지 모르겠다. 알 두 개 정도 까고 자기가 앉으면 딱 맞을 것 같다. 새가 엄지손가락 보다 크지는 않을 것 같다. 누가 그것을 배워서 하겠는가? 가르쳐서 하겠는가? 몇 천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것을 만들었겠는가? 탄탄하게 만들어서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작은 새의 집은 생전 처음 보았다.
생명이 살아가는 것은 다 비밀이다. 다른 생명은 모른다.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기계적 생명으로만 사는 사람은 모른다. 왜 저렇게 사는지 알 수가 없다. 왜 우리가 오늘 여기에 와있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넓은 곳도 많고 천정 높은 교회도 많은데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를 것이다. 이것이 다 비밀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우리는 받지를 못했다. 놓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지켜서 못 들어오게 했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새어서 나오는 것도 없고 밀무역을 한 것도 없으니까 아무도 없다. 아담이후에 어떤 사람에게도 이 생명은 없다.
이 생명이 나타난바가 되었다. 그러니까 얼마나 신기한 일이겠는가! 이 생명이 나타난 바가 되어서 우리가 본 바요 들은 바요 주목하고 만진 바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놀라운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렇게 놀라운 일을 봤으니까 놀라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을 보고 어떻게 놀라운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사실은 별 것 아닌 사람들이다. 예수님 제자들을 보면 바닷가에서 그물 던져 고기 잡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놀라운 사람들이 된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을 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놀라운 것을 보면 놀라운 사람이 자연히 된다. 안 될 수가 없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그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생명이시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철학적으로 연구해서 이러이러하니까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다. 논문을 써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기들을 오늘 그렇게 놀라운 사람이 되게 한 그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나를 나 되게 하는 분이다. 예수를 너무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우주에 돌아다니는 신이나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신이 아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분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된 것이다. 나를 이런 사람으로 살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지 남의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찌되는지는 상관이 없고 나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천하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이 말은 나에게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가 그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나에게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객관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누가 홍해를 건너게 해주었겠는가? 누가 바로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내었겠는가? 누가 40년 동안 우리를 광야에서 먹여 살렸겠는가? 그분은 이분밖에 없다. 유일하신 분이다. 우리에게는 이분밖에 없다는 의미이지 결코 객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객관적인 세계에 들어가서 이분을 증명하려다 보니까 교리가 되게 된 것이고, 신학이 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헷갈리고 만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헷갈리고 아무리 말해도 헷갈린다. 우리가 결국 그것을 받아봐야 아는 것이다. 이 생명이 바로 하나님이구나로 아는 것도 하나님이라는 객관적인 대상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나 되게 하는 분이다. 나를 창조한 분이다. 나의 주인이다. 이런 뜻이다. 퀴리오스(kurios, αρχη(아르케, 시작))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말인데 창조자라는 뜻도 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이다. 어떻게 창조했는가? 1차적 생명으로 창조한 것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를 그물 깁고 있던 요한을 지금 새 예루살렘까지 보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렇게 하신 퀴리오스(kurios)다. 그러니까 자기의 퀴리오스(kurios)가 될 것 아닌가! 거기에 무슨 이름을 붙인들 마다하겠는가? 어떤 이름을 붙여도 세상에 있는 어떤 이름을 붙여도 다 붙일 수가 없다. 자기가 지금 너무나 놀라운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봐도 놀랄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나 할 것이다. 누구는 청와대에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고 꼬집어보았다고 한다. 엊그제까지 별 달고 있다가 갑자기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정말 맞는가하고 꼬집어보았다는 것이다. 아마 요한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진짜 맞는가?
이 생명을 주시려고 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왔다.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다른 것은 예수님이 해주신 일도 없고, 해주실 수도 없고, 오직 이 생명을 주려고 왔다.
8. 이 생명은 어떻게 받는가?
이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을 것인가? 오늘 이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A. 이 생명은 영원 전에 이미 주시기로 예정되었음
이 생명은 영원 전에 이미 주시기로 예정된 것이다. 우리가 계획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예정해놓은 것이다. 줄려고 해놓은 것이니까 받는 것이 쉬울 것이다. 줄려고 해놓은 것이니까 길만 제대로 알면 당연히 줄 것 아니겠는가? 정부에서도 예산 편성을 하는데, 가져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갖고 가고, 능력 없는 사람은 못 가져간다. 학교 교장선생님도 능력 있는 교장선생님은 교육청 돈을 많이 갖다가 공사도 하고 뭣도 하는데, 능력 없는 교장선생님은 돈 한 푼도 못 가져오는 것이다. 예산은 되어있는데 누가 가져가느냐는 가져가는 사람에 달려있다. 군에서도 군수가 유능하면 돈을 많이 가져다가 자기 군에 공사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 가져온다. 예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가져만 가면 되는데,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못 가져간다.
우리가 아무리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려고 예정해놓지 않았으면 우리는 가져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려고 예정해놓은 것이다. 왜 그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해놓았는가?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야 된다. 이 영원한 생명은 자기 생명이다.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나님과 우리가 뭐가 되는 것이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이 되지 그 생명이 없으면 우리와 교통이 안 된다. 우리는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통이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고, 그분 스스로가 필요해서 우리에게 주려고 예정해놓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다. 우리에게 미리 주려고 예정해놓았다. 너무 비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예산 편성이 다 되어있는 것이니까 ‘주시오’ 하면 되는 것이다. 엉뚱한 곳에 가서 달라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예산 편성해놓고 가져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예산을 엉뚱한 사람이 가져가거나 쓸데없이 서로 가져간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가져오다 보니까 쓸데가 없는 것이다. 연말 쯤 돌아오면 그 돈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써야 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퍼부어서 쓰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일을 저질러서 쓴다. 11월이나 12월쯤에 보면 공사가 벌어진다. 왜 그런가? 돈이 남아서 쓸데가 없는 것이다. 가져갈 사람은 그렇게도 가져가는데, 우리가 가져갈 줄을 몰라서 못 가져왔던 것이다.
이것은 예정된 것이니까 가져가면 되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두드리라고 하지 완전히 잠궈놓은 곳은 두드려도 안 된다. 못 들어오게 하는데 두드린다고 되겠는가? 열어주려고 작정하고 있는데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러고 있는 것이지 두드리기만 하면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1)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넣어 실재가 되게 하려 하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으니까 그 안에는 생명이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었으니까 하나님 생명이 들어가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커피 잔으로 만들었으면 커피를 넣어야 어울린다. 거기에 막걸리를 넣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커피 잔에 막걸리를 먹는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막걸리는 큰 사발로 쭉 들여 마셔서 좀 흘려야 된다. 옛날 사람들은 수염이 있어서 막걸리 마시고 나면 수염에 흘러서 닦아야 했다. 그래야 막걸리가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우리 한국에 딱 맞는 술이다. 양복 입고 막걸리 먹고 있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졌으니까 하나님 생명이 딱 어울린다. 다른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어놓으니까 배탈만 나고 가슴만 아프고 불평만 나고 원망만 난다. 먹을 것을 안 먹고 다른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제격에 맞지 않는 것을 먹었다. 핫바지 입고 양주를 마셨다. 핫바지 입고 폭탄주를 마셨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핫바지를 입었으면 막걸리를 먹어야 된다.
사람은 지금 먹을 생명을 먹은 것이 아니고, 안 먹을 것을 먹었다. 그래서 매일 싸우는 것이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매일 싸운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옳으니 그르니 해보았자 언제 끝이 나겠는가? 끝나지 않을 싸움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 생명이 필요하다.
2) 산 혼으로 지으시고 그 안에 생명이 되시려고 하심
산 혼으로 지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산 혼을 만들어놓았다. 산 혼은 그릇과 꼭 같다. 밭과 꼭 같다.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기에 뭔가가 들어가야 된다. 밭에는 씨가 뿌려져야 뭐가 된다. 마찬가지로 그릇에서 뭔가가 담아져야 뭐가 된다. 그릇은 좋은 그릇인데 나쁜 것을 담아버리면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도 빛이 나지 않고, 질그릇에라도 보배를 담으면 빛이 난다.
바울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보화가 너무 중요하다 보니까 질그릇의 보배를 담았다고 생각했다. 바울도 자랑할 것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고 자랑할 것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보물이 원체 좋다보니까 자기 인생이 질그릇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굉장한 사람으로 아는데, 참 보물을 만나고 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당신 앞에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 결국은 그 말이다. 그렇다고 그 여자가 못 생긴 여자가 아니다. 아주 미인이었지만 어쩐지 어떤 사람을 만나고 나니까 자기가 작아진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유명한 사람이고 잘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자기는 질그릇이 된 것이다. 이 질그릇이라는 자신이 비참한 것이 아니고 너무너무 행복한 것이다. 쓸모없어서 버려진 질그릇 같으면 비참할 것이다. 그런데 보화로 인해서 질그릇으로 발견되니까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말이다. 여자의 행복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것이 행복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이 행복을 모르기 때문에 참 불행하다. 여자들은 이런 행복을 아니까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우리는 결국 그런 행복을 알려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비로소 내가 질그릇으로 생각하게 된다. 질그릇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여자는 남자만 좋은 사람을 만나도 자기가 질그릇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남자들은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야 된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 다른 것을 아무리 만나도 안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만나도 안 된다. 잘 생각하라. 젊은이들도 잘 생각하라. 의미있는 말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을 해야지 졸다가 보면 놓쳐버린다. 대강 넘어가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다 속에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 혼으로 지어놓았다. 그 안에 생명이 되시려고.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다. 자기에게 딱 맞는 것을 지어놓았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다. 껍데기 보고 좋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거기에 들어갈 것이니까 좋다고 한 것이다. 집은 왜 만들어놓는가? 사람이 들어가서 살려고 만든다. 컵은 왜 만드는가? 쓸려고 만든다. 산 혼으로 지어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은 그 다음에 쓸 이유가 있어서 만든 것이다. 우리 인생을 잘 보면 우리를 누가 써야 된다. 내가 내 멋대로 사는 것 같지만 누가 나를 써야 된다.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영어를 듣든지 한국말을 듣든지 좌우간 말을 들어야 된다. 들어야만 한국말을 하든지 영어를 하지 아무 말도 듣지 않으면 다음에 완전히 벙어리가 된다. 들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 사람을 만들기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안 들으면 안 받으면 아무것도 모르도록 만들어놓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듣지 않으면 그냥 먹통이 되는 것이다. 원래 기능은 가지고 났어도 못 들었기 때문에 먹통이 되고 만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적어도 먹통은 아니다.
3)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사람 안에 자신의 생명을 넣어 ‘하나님-사람’으로 살게 함으로써 그의 나라가 되게 하려는 것임(‘아담-하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사람 안에 자신의 생명을 넣어 ‘하나님-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속에 생명이 된 사람으로 그렇게 살게 함으로써 그분의 나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아담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하와에게 주어서 자기 아내가 되게 했다. 그 안에 살려고. 남자들이 똑똑한 것 같지만 별 것 아니다. 아내 안에서 사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이 아니고, 아내 안에서 사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아내 안에서 산다. 왜? 자기가 생명을 주었으니까 그 안에 사는 것이다. 아담은 갈빗대를 빼서 주었다. 자기 생명을 주었다. 그러니 그 안에 살고 있다. 내가 생명을 준 곳에 사는 것이다. 농부는 씨를 뿌려놓고 밤낮 밭에 가서 산다. 남자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아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우리가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어쩔 수 없다. 그래야만 생육하고 번성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으면 생육하고 번성이 안 된다. 그 아내 안에 들어가야 번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참 신기하게 만들어놓았다. 하나님도 자기가 혼자 있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 이 사람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저 사람도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그런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우주의 하나님이 되고 만다. 부르기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아무 관계없이 부르는 것이다. 논문에 쓰듯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분은 그런 하나님이 되지 않으려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려고 사람을 만들어놓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그 여호와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는가? 여호와 때문에 이방인들은 피해를 엄청나게 보았다. 여리고 성이 다 불타버리고 없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족속들이 다 멸망한다. 그 여호와 때문에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 결코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애굽에서 자기들을 끄집어내준 하나님이고, 홍해를 건너게 해준 하나님이고, 40년을 광야에서 먹여준 하나님이다. 그 이상이 없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너희가 기억하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가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 그러니까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니까 너희가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으면 안 된다. 다른 천하 만민들이 모두 아니라고 해도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여호와는 그냥 우주적인 보편적인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 하면 좀 멀어지니까 나의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예수님도 마지막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냥 보편적인 우주적인 신이라고 듣기를 원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이미 주시기로 예정했다. 이 예정은 확고하다. 우리에게 준다는 것은 확고하니까 절대로 이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B. 어떻게 하나님 생명은 분배되는가?
이제 분배하는 방식만 알면, 찾아오는 길만 알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생명을 자기가 분배하시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억지로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행에 있는 돈을 내 마음대로 가져오는가? 그것도 못 가져 오는데, 하물며 하나님 생명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가지고 오겠는가? 그분이 예정해놓았으니까 그분이 분배해주어야 된다. 예산 편성을 하여 분배해주어야 가지고 가지 분배해주지 않으면 못 가져간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가? 이것을 먹는 문제로 계시했다.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하고 이상한 말 같지만 이것보다 원초적이고 이것보다 확실하고 이것보다 진실한 것이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첫째로 먹는 것이다. 왜 먹는가? 먹어서 생명으로 살려니까 먹는다. 먹으려고 사는가? 살려고 먹는가? 물론 어떤 사람은 먹으려고 산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살려고 먹는 것이다. 아기도 태어나면 입을 벌리고 젖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어야 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깨달아야 된다는 말도 있고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아야 되는 것도 먹고 배부른 다음에 할 일이다. 일단 먹어야 깨닫든지 할 일이다. 안 먹은 사람은 먹어야 되는 것이다. 단순한 말 같지만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말이다. 깨달아야 된다고 하면 배고파서 못 깨닫겠다고 하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런데 먹으라고 말하니까 할 말이 없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완전한가! 먹는 것으로 제시했다. 자신의 영원한 생명이 엄청난 것인데 그 엄청난 생명을 분배하는 방식을 먹는 것으로 했다. 너무나 어려운 것을 너무나 간단하게 했다. 너무나 어려운 것을 너무나 단순하게 했다. 유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주 복잡하고 아주 거창한 것을 아주 단순하게 하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다. 문제를 풀려면 그 많은 문제가 자기에게 단순해져야 문제를 푼다. 사법시험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책이 많아 공부할 것이 많다. 왜 그렇게 어렵냐고 했더니 문제가 3개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정리된 사람이라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안 된다. 몇 년씩 공부한 사람이 모르겠는가? 알기는 다 안다. 개별적으로 물으면 다 안다. 문제 3개만 딱 내놓고 하라고 하면 못한다. 진짜로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무리 많은 것이라도 아무리 큰 것이라도 가장 단순하게 가장 적게 축소하는 사람이 진짜 아는 사람이다. 교수들도 처음에 교수가 되면 할 말이 너무너무 많다. 강의를 하면 들을 것도 많지만 추리려고 하면 별로 없다. 그런데 오랫동안 교수하신 분들은 말은 몇 마디 없지만 줄거리만 딱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닳고 닳아서 없어질 것은 없어지고 있을 것만 남는다. 글씨를 써놓고 거기서 제할 것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괴목처럼 닳아질 것은 다 닳아지고 썩어질 것은 다 썩어지고 남아있을 것만 써놓은 것이 진짜 잘 쓴 글씨라고 한다. 다 썩어버리고 줄기만 남은, 괴목 설악산에 가면 주목 같은 것이 닳아지고 닳아져서 뼈만 남아있다. 추사체 같은 것이 그런 글씨이다. 꼭 설악산의 주목이 서 있는 것처럼 글씨체가 그렇다. 아무리 봐도 고칠 곳이 없다. 군더더기가 있어야 되는데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잘 쓴 글씨라고 한다.
하나님은 먹는 문제로 제시했다. 어머니이니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기에게 자기를 줄 수 있는 방법, 키울 수 있는 방법, 모든 방법을 단순하게 알고 있다. 젖을 먹인다고 알고 있다. 이것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공부도 소용없고 다 소용 없고 아기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요즘 사람들은 고민을 많이 한다. 육아전서를 보고 어찌하는데 더욱 복잡해져서 아기 키우는 일이 너무 복잡해져버린다. 그렇다고 아기를 잘 키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너무 많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아기 하나를 가지고 떡을 치고 있다. 단순하게 아기를 낳으면 젖을 주면 된다. 아무것도 없이 젖만 주면 된다.
하나님이 아마 그런 분이다. 우리를 낳으신 분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생각하겠는가? 나를 낳으신 분이니까 딱 이 생각이 드신 것이다. 그리고 아기를 낳고 나면 저절로 젖이 나온다. 신기하다. 하나님에게도 딱 사람을 짓고 나니까 젖이 나왔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생명나무를 두고 먹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에서 할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혜로우신 것도 그분이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것이다. 일부러 지혜를 배워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엄마이다. 우리를 낳으신 엄마이다. 먹으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그렇다. 엄마는 아기에게 첫째로 먹으라고 한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먹는 것만 가르친다. 젖만 빨면 되는 것이다. 만사가 다 해결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먹는 문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1) 생명나무 형태로 계시되었음
생명나무 형태로 계시되었다. 생명나무라는 것이 상징적인 것이다.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산출하는 하나님 자신의 상징이었다. 이 생명나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주 캄캄하다. 왜냐하면 무슨 나무가 있길래 그 나무를 먹으면 사는 것인가? 그 나무의 열매가 무슨 열매인가? 한국에서 어떤 유명한 사람은 복숭아라고 하고, 서양의 어떤 사람은 사과라고 했다. 또 아예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노터치다. 먹으라는 것을 안 먹었다. 그래서 죄를 졌다고 생각한다. 먹으라는 것을 안 먹고 불순종해서 죄를 졌으면 다시 순종하면 된다. 잘못했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면 된다. 그런데 왜 회개도 안 되는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이다. 먹어서 속에 생명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주님을 위해 살고 싶고 주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 속에 뭐가 거한다. 내 속에 거하는 죄인이라고 한다. 이미 벌써 먹었다는 뜻이다. 단지 관계만 잘못된 것이 아니고, 이미 무엇을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겠느냐고 말했다. 그것은 자기가 회개를 하지 않아서 한 말이 아니다. 마음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다. 진짜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속에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겠느냐고 한다. 이것은 먹었다는 것이다.
잠언에 보면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잠3:18)는 말이 있다. 지혜는 무엇인가?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다. 그리스도를 얻는 자에게는 그것이 바로 생명나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가 되면 기름 부음 받는 자가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되는 그런 사람이 되면 그것은 바로 생명나무다. 왜냐하면 생명나무에서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3:18)고 했다. 생명나무를 가지면 내가 지혜가 생산된다는 말이다. 소고기를 먹으면 기운이 난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미국사람들은 소고기를 많이 먹어서 힘이 좋다, 힘이 세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지혜가 나온다. 그러니까 복 되다.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가? 계시록 2장에 보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리라”(계2:7)고 시작한다. 창세기 3장 이후로 사람에게 생명나무를 다시 약속한 곳이 계시록 2장이다. 그동안까지 없었다. 거기서 이기는 자에는 내가 낙원에 감추어둔 생명나무를 화염검으로 그룹들로 감추어 못 들어오게 했던 그것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 주었는가?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고, 교회에게 준다는 뜻이다. 왜 생명나무에 대해 사람들이 모르는가? 여기도 신학서적도 보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머리좋은 사람들이 모른다. 왜 모르는가? 이것은 교회에 준 것이다. 교회가 아니고서는 필요도 없고, 교회가 아니고서는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출발할 때 딱 부딪치는 것이 이 문제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딱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 살 때는 몰랐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 성경에만 있지 나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신화처럼 들린다. 내가 언제 먹었느냐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남자들이 이것을 먹다가 목에 걸려 목뼈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 어렸을 때 그렇게 가르쳤다. 여자는 꿀꺽 삼켜서 없고 남자는 여자에게 얻어먹다가 걸려서 목이 그렇다고 했다. 교회가 없으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문제가 안 된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선악을 잘 알아야 똑똑한 사람이 된다. 어디를 가든지 말발이나 하는 사람을 보면 선악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다. 뭔가 한 가닥 하는 사람을 보면 그 방면의 1인자라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것이다. 싸움 잘하는 사람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도사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안 진다. 내가 더 잘한다는 것이다. 너는 모른다. 나밖에는 모른다고 생각한다.
선악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나무다. 또 세상을 만드는 나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을 세상되게 하는 나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교회가 되려고 하니까 연합을 하려니까 하나로 살려니까 제일 걸리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이 있으니까 판단이 된다. 저 사람은 저렇고 저 사람은 왜 삐딱하게 앉았는가, 저 사람은 왜 드러누웠는가? 별 것이 다 문제가 된다. 더군다나 우리가 처음부터 출발할 때 군대식으로 출발했으면 그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마구잡이로 방목식으로 했다. 풀어놓으니까 자기대로 했다. 더군다나 생명이란 말을 조금 오해하여 생명대로 산다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생명대로 사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 한번 상상해보라. 그때는 지금과 비교가 안 된다. 생명대로 산 젊은 청년들이 모였으니까 어찌 되겠는가? 참 가관이었다. 그것도 대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한 20대 청년이었다. 이 사람들을 생명대로 다 풀어놓았으니 이것을 보고 걸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걸린다. 와서 보고 고개를 흔들고 지나갔다. 저래서 되겠는가? 얼마 못 갈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쩌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더 많이 걸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는 정돈이 되어있으니까 덜 걸린다. 미리 그런 문제들을 막아놓았다. 문명이 앞선 나라들을 보면 그런 문제들을 많이 막아놓았다. 서양사람들은 노터치다. 나도 너를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너도 나를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간섭을 하다보면 싸우게 된다. 싸우는데 우리처럼 음성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힘이 좋아 양성적으로 싸웠다. 피터지게 싸워서 죽고 살고 했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사귀자는 것이다. 나도 너를 터치하지 않을 테니까 너도 나를 터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 조건도 나를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조건이라고 한다. 여자에게 나를 간섭하지 말라. 나도 너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한다. 어쩌면 참 편리하고 좋다. 그런데 교회는 안 된다. 세상은 그런 안전장치를 만들어놓았다. 자기들이 하다 보니 너무 피해가 많으니까 터치하지 않기로 간섭하지 않기로 안전장치를 만들어놓았으니까 덜 걸린다. 또 걸린다 하더라도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남을 간섭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서양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간섭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개인주의가 되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되어간다. 이런 데서는 별로 문제가 안 되다가 우리 교회처럼 완전히 풀어놓고 나면 문제가 10배 20배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없던 것까지도 나온다. 교회 잘 다니던 청년이 우리 교회 온 다음에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운다. 모태 신앙에 경건의 생활을 하던 사람이 우리 교회에 풀어놓으니까 마시고 피운다. 피우던 사람이 들어오면 안 피워야 되는데, 안 피우던 사람이 들어와서 얼씨구 좋다, 그동안 내가 율법에 갇혀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했다고 한다. 학생들도 공부를 못하던 학생은 우리 교회 와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있고, 반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던 학생이 우리 교회에 와서 학점을 놓친 학생도 있다. 생명대로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나한테 원망이 된다. 생명대로 했는데 학점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농땡이 치고 공부도 안 했는데, 목사님을 만나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 못할 사람이 졸업한 사람도 우리 교회에 있다.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있다. 교수까지 되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뒤바꿔져서 잘하는 사람은 못하게 되고, 못하는 사람은 잘하게 되었다. 헤쳐모여 하는 셈이 되었다.
교회가 될 때, 교회로 들어올 때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문제가 된다. 그전에는 문제가 안 된다. 보통 교회에서는 문제가 안 된다. 신학자들이 모른 이유가 그것이다. 문제가 안 되니까 모를 것 아닌가? 우리는 당장 해보니까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 선악을 없애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튼 선악을 없애야 한다고 하다보니까 선이 나오기만 하면 조지는 것이다. 누가 조금 선한 행동을 하면 저것은 인간적인 선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기간을 지나갔다. 잘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잘하면 저것은 선이라고 한다. 악한 것은 별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 얌전한 사람들이 상당히 수난(고난)을 겪었다. 저것은 자기 선이지 하고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이다. 세상이 잘 알아주는 사람들인데, 다른 교회를 다닐 때는 잘 알아주던 사람들인데 우리 교회 오니까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교회가 시작하려니까 그렇게 되었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생명나무의 길만 가다보니까 정리가 되었다. 요즘에는 다들 양반되었다.
계시록 22장에 가니까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계22:2)라고 한다. 계시록 2장에서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일을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하더니 계시록 22장까지 가니까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더라고 한다. 거기서 생명나무의 과일이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더라. 조금 더 나가면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라”(계22:15)고 한다. 상당히 빠른 속도다. 계시록 2장에서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해놓고, 스무 장을 넘어 22장에 가니까 생명나무가 있더라. 조금 넘어가서 15절로 넘어가니까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는 벌써 나아간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라”. 계시록에서 요한은 앞으로 올 세계를 이미 보았다. 이것이 계시다.
생명나무!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가. 희랍어에서 나무가 두 가지 말이 있다. 크술론(xulon) 하는 말이 있고, 덴드론(dendron) 하는 말이 있는데, 물론 100%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크술론(xulon) 하는 말은 우드(wood)다. 영어로 하면 Wood, 목재, 나무를 이야기 한다. 덴드론(dendron) 할 때는 진짜로 살아있는 나무를 말한다. 섞어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여기 생명나무라는 나무는 어디 해당되는가? 덴드론(dendron)에 해당될 것 같은데 아니고 크술론(xulon)에 해당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도 70인 역 번역을 보니까 크술론(xulon)으로 번역을 해놓았다. 참 이상한 일인 것이다. 살아있는 나무로 말할 것 같은데 목재를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나무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감히 그런 해석을 한 것이다. 이 나무는 바로 십자가 나무이구나.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맞는지 틀린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석을 해보는 것이다. 덴드론(dendron)을 안 쓰고 왜 크술론(xulon)을 썼는가? 쓴 사람이 알고 썼는지 모르고 썼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내 생각에는 십자가라는 것이 사실은 나무에 달린 자라는 것이다. 로마에 와서 형틀이 십자가로 바뀌었다 뿐이지 성경에 나오는 것은 나무다. 그냥 목재, 나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다.
하필이면 왜 이 나무를 이야기했을까? 이 나무가 예수님이 달려죽은 나무다. 이 생명나무라는 것이 바로 그 나무이구나. 예수님이 달려 죽어서 부활이 나온 그 나무이구나. 그러면 생명나무 열매라는 것은 결국은 죽고 다시 산 생명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된다.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는데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라.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에 다른 사람이 생각을 안 한 것이니까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아도 되는 것이다. 아무도 생각 해놓지 않은 것이니까 우리 멋대로 좀 생각해도 된다. 누가 이미 점령해 놓은 것 같으면 내가 마음대로 못하는데, 누가 점령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개척을 할 수도 있다.
생명나무! 우리를 살게 하는 나무는 이 나무밖에 없다. 산에 있는 나무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매달아 놓았던 그 말뚝이 나를 살려놓았다. 그 말뚝에서 나온 무엇인가가 나를 살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해도 무리는 아니지 않겠는가? 좀 비약은 비약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비약을 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더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살리는 나무다. 나를 살리는 나무다. 출애굽기에 보면 나오다가 물이 써서 못 먹게 되었을 때 어떤 나무를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다고 되어있다. 그것도 역시 우리가 영적으로 해석을 하면 예수님께서 달렸던 그 나무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달렸던 그 나무를 우리 인생의 쓴 바닥에 던지면 달아진다. 쓰디쓴 내 인생, 먹을 수 없는 내 인생, 구역질나던 내 인생에 그것을 딱 던지면 달아진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는데 있어서 무슨 나무인가? 이 나무가 아닌가? 지금 산 나무는 산에 심겨져 있는 저 나무가 아니고, 말뚝으로 세워져 있는 그 나무다. 예수를 매달아 놓았던 그 나무다. 우리는 그 나무 때문에 살았다. 우리가 생명나무로 제시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셨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이미 벌써 예수님이 죽을 것을 다 아시고 했는지 아니고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먹는 문제로 제시하고 생명나무로 제시했다.
2) 생명의 떡으로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딱 오셔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떡이다. 생명의 떡으로서 이제 발전한다. 생명나무가 생명의 떡으로서 발전했다. 결국 먹는 문제의 회복이다. 먹는 문제를 되찾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었어야 되는데 안 먹었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될지 모르니까 먹는 것부터 우리가 배워서 무엇을 먹게 되어야 된다.
a. 광야의 양식
맨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양식이 떨어졌다. 그래서 주신 것이 만나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고 되어있다.(출16:35)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참 만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만나라고 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만나라고 이름을 붙였다. 만나라는 말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이다. 그때도 모르고 지금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애굽에서는 무엇을 먹고 살았는가? 바로가 준 양식을 먹고 살았다. 바로가 준 양식을 먹고는 바로의 종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바로는 왜 양식을 주었는가? 자기 종을 삼아서 국고성을 쌓으려고 양식을 주었다. 일을 시키려니까 양식을 준 것 아닌가?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면 하나님이 양식을 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광야에 와서 만나를 준 것이다.
이것은 양식을 바꾸는 문제다. 우리가 애굽에서 먹던 양식은 떨어지고, 광야에서 먹던 양식으로 바꿔졌다는 말이다. 애굽에서 준 양식은 바로가 준 양식이고, 광야에서 준 양식은 하나님이 준 양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살기 시작하면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 백성이 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수가 없다. 그 양식을 먹어야 짓는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말씀이 없이는 절대로 할 수가 없다.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서 간수했다.(출16:33,히9:4)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안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았다는 말이다. 유태인들은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1)라고 했다. 너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양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양식을 바꿔야 된다. 세상에서 먹는 양식을 먹고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집이 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크면 세상에서 먹는 양식을 먹기 시작한다. 세상에서는 다 먹어야 되니까 안 먹을 수가 없다. 세상 양식을 먹고서 세상 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면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바꿔야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주일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어찌되겠는가? 안 보내면 세상 양식밖에 없다. 세상으로 사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나가면 별 말이 다 있다.
말은 하나님 말씀과 사탄의 말 둘 밖에 없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은 다 세상 말이다. 그러면 세상으로 살게끔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먹은 놈한테 하나님 일을 시키려면 되겠는가? 안 된다. 애굽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을 데려다가 성막을 건축하려면 건축이 되겠는가? 안 된다. 성막을 건축할 때 자기들이 감사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성막을 지었다. 금은보석을 다 내놓아서 지었다. 왜 지었는가? 만나를 주니까 그것을 내놓았다. 만나를 먹고 나니까 그것을 내놓았지 애굽에서 애굽 양식 먹을 때 같으면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겠는가? 아무도 안 내놓는다. 헌금을 왜 안하는 줄 아는가? 애굽 양식을 먹었으니까 안 내놓는다. 애굽 양식을 먹으면 하나님께 헌금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애굽 양식 자체가 바로를 위해서 살도록 만들어졌다. 세상을 위해 살도록 하는 양식이다. 종을 부릴 때 왜 밥을 주는가? 자기 일을 하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것을 먹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하나님 양식을 먹은 사람이 헌금을 할 수 있지 먹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돈이 세상이다. 세상의 대표가 돈이다. 돈 빼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똑똑한 사람이고 잘난 사람이고 돈 빼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돈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전 세계가 돈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돈이 가장 중요하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가장 최고다. 하여간 머니(Money)가 최고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하나님 성막을 짓는데 내놓는다는 것은 광야의 만나를 먹었기 때문이다. 먹지 않고는 내놓을 수가 없다. 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 것 같다. 성막을 지을 때 보니까 전부 금으로 입혔다. 나무로 만들어서 다 금으로 입혔다. 그럼 그 금이 과연 어디서 나왔겠는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인데 만나를 먹고 나니까 그것을 내놓은 것이다. 그래서 짓게 되었다.
b. 생명의 떡
생명의 떡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 광야의 만나를 예표로 주신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을 먹으면 성막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육신을 먹여 살리는 양식이니까 먹고는 죽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시기는 그래도 그것은 죽었다.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내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선문답처럼 내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네가 무슨 양식을 주겠는가 했더니 내 양식은 내 살이고 피다. 완전히 선문답이다. 그래서 죽이려고 한 것이다.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고 했다. 진짜로 하나님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떡이다. 그런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6:55)라고 했다. 사람들이 정말 놀랬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랬겠는가? 제자들은 또 얼마나 놀랬겠는가? 선생님이 또 실수하신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비난이 많고 그렇지 않아도 잡아먹으려고 난리인데, 저런 소리를 왜 하셔서 걸림이 되게끔 하셔서 올 사람도 안 오게 만드는가?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 내 살을 먹어야 산다. 내 살을 안 먹으면 죽는다. 이래놓으니까 이 말을 알아듣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온 양식을 먹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하늘에서 온 떡이다. 예수님을 먹어야 하나님이 살 수 있다고 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고 한다.
기계적 생명은 창조에 의해서 음식으로 산다. 밥을 먹고 산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산다. 영생하는 사람은 영원한 양식을 먹는 사람이 영생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양식을 바꿔야 된다. 그런데 그 양식이 무엇이냐 했더니 ‘나다’라고 말했다. ‘내 살이다’라고 말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문제는 그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무조건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의 머리가 또 안 그렇다. 부처님도 그런데 공자님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냐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생명의 떡이 아니냐고 말할 수가 있다. 예수님만 왜 생명의 떡이냐? 하필이면 왜 그 사람을 먹어야 영생하는가?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이것이 중요하다. 훌륭한 사람이 누구냐?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구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음식이 많다고 내가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인가? 많이 차려놓았는데 내가 보니까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 왜? 다 맵고 짜고 해서 내가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잘 차려놓았다고 하는데, 나는 속으로 속상하다. 내가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네가 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음식이 좋다고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먹을 양식이 있어야 한다. 나는 세상을 두루 살펴본 결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석가모니를 먹으려고 생각해보면 아예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같은 사람은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를 할 자신이 없다. 먹고 사는지 안 먹고 사는지 잘 모르지만 좌우지간 훌륭한 분이다. 훌륭하지만 먹을 수가 없다. 세상에는 훌륭한 분들이 한 두 사람인가? 많다. 부러운 사람이 한 두 사람인가? 많다. 훌륭한 사람이 참 많다. 사람의 어떤 것을 넘어서는 사람이 많다. 놀라운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존경한다.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먹을 수가 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먹을 수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갓난아기가 먹을 것이 무엇인가? 젖 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 음식이 많다고 먹을 수 있는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가서 뷔페식당에 간다고 먹을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젖 밖에 먹을 것이 없다. 단순하지만 엄마 젖 밖에 먹을 것이 없다.
오늘 우리도 우리 인생에도 우리 인격에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보니까 먹을 수 있는 분이구나. 나도 옛날에는 예수님을 먹을 수가 없었다. 왜 못 먹었는가? 물 위로 걸어가니까 못 먹었다. 물 위로 걸어가신 분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니까 먹을 수가 없다.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니까 그것도 역시 못 먹었다. 아무데도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실 나는 믿기만 했다. 먹지는 못하고 믿기만 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믿습니다. 급할 때는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었다. 먹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나와 하나가 안 된다. 아무리 믿어도 나와 하나가 안 된다. 믿기는 믿는데 나와 하나가 안 된다. 그것도 어떻게 하면 더 좀 잘 믿을 수 없나? 확실하게 콱 믿을 수가 없나?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성질이 그래서 콱 안 믿어지는 것이다. 믿기는 믿는데 콱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어떤 부분에는 믿어지는데 어떤 부분에는 콱 안 믿어진다. 이래서 어려웠는데 거기서 내가 평생을 헤맬 뻔 했다. 거기서 내가 안 믿어지는 부분에 대해서 믿으려고 평생을 헤맬 뻔 했다. 그런데 믿으라는 말에서 먹으라는 말이 나오니까 완전히 차원이 달라진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예수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분이다. 왜 먹을 수 있는 분인가? 물 위로 걸어가신 분도 못 먹는다. 나사로를 살린 분도 못 먹는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분도 못 먹는다. 다 못 먹는다. 심지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분도 우리가 못 먹는다.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시더라고 한다. 그러니 피땀은 고사하고 땀도 못 흘리는 사람이 어떻게 피땀을 흘린 사람을 먹겠는가? 그것은 결사적인 기도다. 거기 가면 우리는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만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을 보니까 나하고 똑같다. 아무것도 틀린 것이 없다. 지금까지 너무너무 틀린 사람이었는데, 나와 너무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보니까 나와 너무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삼켜도 안 걸린다. 꿀꺽 삼켜도 안 걸린다. 나와 똑같으니까. 내 생명하고 똑같으면 목에 들어가자마자 소화될 것 아닌가? 개고기가 왜 소화가 잘 되는 줄 아는가?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람 고기와 개고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틀리고 비슷하기 때문에 별로 부담 없이 소화가 잘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아야 먹을 것 아닌가? 왜 육체가 되었던가? 우리를 먹게 하려고, 같이 살려고 육체가 되었다. 원체 능력이 많다 보니까 우리가 그분과 멀어져 버렸던 것이다. 육체가 되실 때는 우리와 같은 분이 되셨다는 말인데, 너무 높은 분이 되니까 우리는 먹을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죽으신 것을 보니까 아무것도 어려운 것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이상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기한 사람, 기인으로 생각했는데 기인도 아니고 신기한 사람도 아니고 나와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물 위로 걸어간 사람을 먹었더라면 나도 물 위로 걸어갈 것이다. 그런데 못 먹어서 못 걸어간다. 내가 만일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를 먹었더라면 나도 죽은 나사로를 살릴 것 아닌가? 그런데 못 먹어서 못 살린다. 먹기만 먹었으면 살릴 것이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예수를 먹기만 먹었더라면 오늘 여기서 떡 한 조각을 가지고 여러분을 다 먹일 수 있을 것인데 못 먹었다. 못 먹었기 때문에 못 준다. 안 먹었는데 어떻게 주겠는가?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먹고 보니까 다 줄 수 있다. 먹고 보니 다 줄 수 있다. 누구도 못 먹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거기에 가서 못 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존경하고 있다가 못 먹는 것이지 너무 존경하지 않으면 다 먹을 수 있다. 똑같으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 없다. 그래서 그분이 죽으신 것은 이래서 죽으셨구나. 나와 수준을 맞추느라고 눈높이를 맞추느라고 생명의 수준을 맞추느라고 죽으셨구나. 그분이 안 죽어도 되실 분이지만, 그냥 산 채로 승천해도 될 것 아닌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산 채로 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구름 타고 가면 누가 뭐라고 하는가? 아무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왜 죽었는가? 나와 눈높이를 맞추느라고. 공부 못하는 학생한테는 공부를 시키려면 그 사람 수준을 알아야 된다. 그 사람 수준에 맞게 공부를 시키면 쉽다. 그러면 한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개인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수준을 이만큼 높여놓고 가르치니까 못 따라간다. 그러면 평생 못 따라간다. 밑에 있는 사람은 평생 못 따라간다.
하나님도 우리를 이렇게 높여놓고 따라오라고 하면 못 따라갈 것 아닌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나같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 같다. 물 위로 걸어가지도 못하고, 보고 하라고 하는데 해봐도 안 된다. 내가 물 위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너도 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안 된다. 병자를 고치면서 너희도 해봐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봐도 안 된다. 내가 옛날에 누가 아파서 기도해 달라고 하면 얼마나 난감한지 몰랐다.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먹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먹을 수가 있다. 이분을 못 먹으면 누구를 먹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더 훌륭한지 석가모니가 더 훌륭한지 나는 모르겠다. 석가모니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았는가? 안 해보았다. 겨우 한다는 것이 예수 밖에 연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석가모니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는데 단지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그분도 만일 먹을 수만 있다면 먹을 수 있는데 소문 들어보니까 너무 어려워서 못 먹겠다. 그런데 예수는 연구해보니까 연구할수록 먹을 수가 있다. 나와 같은 한 운명이다. 한 운명이니까 한 영이 되고, 한 육체가 되고 하나가 된다. 너무너무 쉬워졌다. 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어떻게 그 살을 먹고 어떻게 그 피를 마시겠냐는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의 살 조각을 어떻게 먹겠는가? 그때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태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어떻게 살을 나누어 주겠는가? 제자들은 감당하기 어렵다. 어떻게 우리가 선생님을 쪼개먹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랬더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로 걸림이 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영이요 생명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 십자가에 죽은 그 사람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영이요 생명이다. 이것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죽은 사람을 먹느냐는 것이다. 죽은 것을 보고 내가 먹게 된다. 내가 거기 참여하게 된다. 내가 일부러 참여를 해서가 아니라 내 모양도 보니까 나도 딱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진실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고, 저것이 바로 나다. 저 자리가 바로 나다. 전에 있던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래도 어디까지 가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것은 내가 아니다. 지금 저렇게 꼼짝을 못하고 있는 저것이 바로 나다. 거기서 내가 딱 못이 박히니까 꼼짝을 못한다. 못 박으면 꼼짝 못할 것 아닌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분을 볼 때 내가 거기서 딱 못 박혀 버린다. 나는 거기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거기서 다시 겟세마네로 가겠는가? 다시 베세다 광야로 가겠는가? 다시 저 물가로 가서 걸어가겠는가? 갈 수가 없다. 거기에 딱 못 박혀 버린다. 꼼짝 못하게 못이 박혔다. 우리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그렇다. 자세히 보라. 여러분도 거기서 한 치도 옮길 수가 없다. 운명을 한 치도 못 바꾼다. 어떻게 바꾸는가? 못 박힌 것이 그것 아닌가? 딱 박혔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
3) 생명의 연합으로서
생명의 연합이 생기게 된다.
a. 죽음을 통한 연합으로
이것이 죽음을 통한 연합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고 했다. ‘들려야 하리니’는 죽는다는 뜻이다. 그 나무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광야에서 놋 뱀을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나도 그렇게 놋 뱀에 매달려야 된다는 이 말은 결국 죽는다는 말이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매달려 있는 예수를 보고 그것을 믿으면 영생이 되느냐는 것이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매달려 있는 예수를 보고 그것이 나라고 믿어지면 나라고 알아지면 그때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영생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 사람한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하나님이 아예 주시지를 않는다. 화염검을 두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내가 얻고자 해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에게는 거기서부터 영생이 시작된다. 부활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영생이, 영원한 생명이 부활이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가 바로 거기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새 생명이다. 우리는 원점으로 가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 잘못되었으면 원점으로 돌아가야 된다. 완전한 회개는 이것이 완전한 회개다. 우리가 조금 회개했다가 다시 유턴하고 갔다가 다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온 것이 완전한 회개다. 우리 원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서 보니까 우리가 경거망동했다. 거기서 보니까 내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는 존재인데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하나님 같이 될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경거망동한 것이다. 그전에는 몰랐다. 그전에는 우리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우리도 하나님 같이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십자가에 가보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사람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선악을 안다고 하더라도 안 된다. 선악을 알면 예수님보다 더 알겠는가? 의를 행하면 그보다 더 행하겠는가? 하나님에게 마음이 맞으려면 그보다 더 마음이 맞게 하겠는가? 기도를 하면 그분보다 더 하시겠는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니까 절에서는 7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이 있다. 완전히 기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거기 가서 보니까 우리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 가서 회개하는 것은 거죽 회개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를 보고 회개해야 제대로 돌아오는 것인데, 그것은 안 보고 내가 한 것이니까 도덕적인 회개, 종교적인 회개다. 기독교인들은 도덕적인 회개에 종교적인 회개가 덧붙여있다. 그러니까 회개할 일이 더 많다. 오래 다니면 더 많아진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 회개할 일이 더 많아진다. 회개하면 갚아버리고 없어져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시간이 많을수록 더욱 많아진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다 아실 것이다. 처음에 갈 때는 회개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죽을 때쯤 되면 정말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회개하려면 거기에 와야지 진짜 회개다. 옛날에 회개할 것이 별로 없는데 자꾸 회개하라고 하니까 부흥회 가면 답답하다는 것이다. 부흥회 가면 스케줄이 정해졌다. 첫째 날은 회개하는 날, 두 번째 날은 뭐하는 날, 세 번째 날은 뭐 하는 날로 딱 정해져 있다. 부흥회에 가면 첫째 입문할 때 회개부터 해야 된다. 그런데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맹맹해서 앉아있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개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제 부흥사들이 젖 먹을 때부터 회개를 해야 된다. 엄마 젖꼭지 물어뜯은 것도 다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막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막 회개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아닌데 눈물 흘리고 회개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이 그렇다. 성령이 하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람도 있는데, 아무리 회개를 해보았자 어디로 돌아갈 때를 알고 돌아가야 될 것 아닌가? 집을 잃었으면 집을 알고 찾아가야 되는데, 이것은 집을 모르고 찾아가는 것이니까 맨날 찾아갈수록 더 멀어질 수도 있다. 차라리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누가 가서 데리러 올 것인데 내가 찾아간다고 돌아다니다 보니까 서로 엇갈려서 못 찾는 것이다. 전 시내를 서로 돌아다닌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가든지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좌표를 하나 알아놓아야 된다. 대구에 오면 신천 강변을 알아놓아야 된다. 어디를 가든지 길을 잃었으면 신천으로 무조건 가보면 되는 것이다. 좌표가 하나 있어야 된다.
우리가 회개를 하려면 회개할 자리를 알아야 회개가 된다. 그리고 거기 가봐야 내가 비로소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도 알고, 거기 가봐야 내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도 알고, 거기 가봐야 내가 경거망동한 행동을 한 것을 안다. 그 이전에 내가 아는 것은 그냥 사회생활 하는 동안에 교회 생활 하는 동안에 그것만 아는 것이지 깊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참된 회개가 안 되고, 참된 회개가 안 되니까 참된 거듭남이 또 안 된다. 당연히 안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약간 거듭났다가 말고 약간 거듭났다가 만다. 끓는 죽은 위에 좀 걸러내고 나면 또 위에 무엇이 생기고 걸러내고 나면 또 무엇이 생긴다. 똑같다. 끓이다 보면 그렇다. 위에 또 막이 생긴다. 다 건져내어도 끓이다 보면 또 생긴다. 평생 그렇게 하는 것이다. 확 뒤집지 못하니까. 그러면 밑에서는 눌어붙고 위에서는 막이 생긴다. 내가 언제 죽까지 다 끓여보았는가 모르겠다. 죽 끓이기가 어렵다. 타니까 계속 저어야 된다.
우리가 죽음을 통한 자리에서만 비로소 내 정체가 발견되었다. 내 정체가 발견되면 이제 돌아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이미 다 돌아온 것이다. 내 정체가 발견되었으면 이미 나는 거기 돌아온 사람이다. 확실히 발견되었으면 나는 못 박힌 사람이다. 꼼짝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주님은 이렇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우리와 연합을 하셨다. 이것을 접붙임이라고도 말하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 맺는다(요12:24)고도 말하고 여러 가지로 말했다.
b. 접붙임을 통한 연합으로
접붙이려면 두 개를 서로 잘라야 된다. 그래야 접붙임이 된다. 원 나무도 잘라야 되고, 가지도 또 잘라야 된다. 둘 다 잘라야 접붙여지지 자르지 않으면 접붙일 수가 없다. 살아있는 나무는 자르지 않고 거기에 붙여놓으면 접이 안 된다. 완전히 잘라버려야 이놈을 키우지 자르지 않고 옆에 붙여놓으면 키우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죽고 다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서로 잘라야만 죽든지 살든지 거기서만 붙어서 살려고 할 것 아닌가? 가지도 붙어살려고 생각할 것이고, 뿌리도 살려내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 밖에는 없으니까. 그래서 둘 다 잘라야 된다.
이것은 접붙이는 원리인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요15:5),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나는 열매를 맺고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려면 서로 죽어야 되는 것이다. 가지도 죽어야 되고, 나무도 죽어야 접붙여지는 것이다. 접붙여진다는 말을 했다.
영생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사는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분과 연합해서 사는 삶! 죽음 안에서 연합해서 살았는데 영원한 생명이다. 지금까지 생명과는 다르다. 지금까지 생명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살았다. 선악을 아는 능력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으로 사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는 비밀을 깨달아야 이것을 내가 경험해 보아야 내가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는 것이다. 삶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산다. 그런데 나온 것은 영생이 나온다.
4) 영원한 생명의 풍성(누림)을 누림
영원한 생명의 풍성을 누리게 된다.
a. 함께 죽었으므로 옛 생명과 그 내용이 끝났으며, 함께 살아남으로 새 생명과 그 내용이 왔음
함께 죽었으므로 옛 사람(생명)과 그 내용이 없어졌다. 함께 살아났으므로 새 생명과 그 내용이 온다.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형상으로서 실제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빈 그릇이 이제는 내용물을 얻었다. 그러니까 풍성해진다. 아무리 크리스탈 글라스라고 하더라도 그냥 있으면 되는가? 거기에 포도주를 넣어놓으면 빛깔이 아주 아름답게 나타난다. 이것이 누림이다. 크리스탈 잔이 포도주가 들어갔을 때, 그것은 포도주를 누리는 것이고 크리스탈의 진가를 누리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둘이 땅 해야 진가를 누리는 것이다. 쨍~ 하는 소리가 난다. 크리스탈은 무늬도 좋지만 부딪힐 때 쨍~ 하는 소리가 난다. 그러면 둘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명의 풍성을 누리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풍성을 못 누린다. 들어오니까 풍성을 누렸다.
b. 형상으로서 실재이신 하나님을 누림으로
우리는 형상이다. 우리가 아무리 풍성을 누려보았자 껍데기 풍성에 불과하다. 그런데 실재이신 하나님을 누리게 되니까 충만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을 실재로 누리는 것이다. 내 생명으로 누린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나를 운전하던 운전사는 엉터리 운전사였다. 그런데 진짜 운전사가 왔다. 그러니까 차가 편안하게 되었다. 운전 잘 못하는 사람 옆에 타보면 나도 고생이지만 차가 고생한다. 맨날 덜커덩 거리고 기아를 넣었다가 바꿨다가 하는데, 잘하는 사람은 부드럽게 하니까 언제 기아를 바꿨는지 안 바꿨는지 모르고 간다. 나도 편하지만 차도 참 편안하게 가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하는 사람 차를 타면 힘들다. 원선형제 차를 타면 힘들다. 왜 그런가 하면 차를 막 움직이는 것이다. 차를 타고 노래를 부르니까 이 차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멀미해서 못 탄다. 거기 타는 사람도 고생이지만 차도 고생이다. 우리는 우리를 운전하실 분이 들어와야 된다. 좋은 운전사가 들어와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실재를 가지기 때문에 실재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껍데기다. 원래는 껍데기다. 그러니까 생명이 있어야 실재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의 질이 얼마나 높은 질이냐? 얼마나 아름다운 질이냐? 이것에 따라서 나는 아름답게 된다. 크리스탈 잔에 좋은 잔에 막걸리를 부어놓으면 모양이 나는가? 안 난다. 간장을 부어놓아 보라. 모양이 나는가? 거기는 좋은 포도주, 백년 된 포도주를 담아놓아야 제대로 모양이 날 것 아닌가? 보기도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
하나님을 내가 누린다는 것은 너무너무 충만한 것이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우신 이를 내가 내용으로 누린다. 내가 그분으로 인해 산다. 하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되면 만유를 실재로 누리게 된다. 내가 상속자의 위치가 되니까 진짜로 내가 사람이 되니까 그때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나에게 복종하게 된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했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축복이 언제 오는가? 하나님이 내 실재가 될 때 온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는 그 안에, 그를 통해서, 그를 위해서 만물이 지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영어로 in Christ, through Christ, for Christ. 연설문 같다. in him, through him, for him이라고 되어 있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그를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이다. 만물은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어졌다는 말이다. 만물은 나를 위해서 지어졌다. 나를 위해서 지어졌는데, 내가 잘못된 사람이 되어서 보니까 오히려 만물이 나를 지배해서 내가 만물에게 눌려서 부대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니까 내용 있는 인간이 되니까 더군다나 좋은 내용이 있는 인간이 되니까 모든 만물이 다 나를 위해서 나를 통해서 내 안에 있더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보면 그렇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는 모든 만물이 다 통일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세상이 만물이 다 나한테 복종하는 것이 된다. 자기 돈도 자기 마음대로 못 쓴다. 자기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쓴다. 매여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양질의 생명이 들어오니까 좋은 생명이 들어오니까 그것들이 다 복종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을 보이게 했다는 말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보이게 하는 자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어디서 보는 것인가? 결국 본체의 형상에서 보는 것이고, 영광의 광채로 보는 것이다. 거기서 보지 우리가 어디서 보겠는가? 그분이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전부다 그 형상을 통해서 표현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는 보존하신다는 뜻이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는 인간이 최고로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 자리를 찾아 먹었다. 잃어버린 자리를 찾아먹었다.
원래 하나님은 이렇게 예정해 놓았다. 사람을 이런 자리로 예정해 놓았는데 빗나가서 다른 데 가서 고생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땅에 살도록 예정해 놓았는데 배고프다고 애굽에 내려갔다가 400년 동안을 종살이를 했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결국은 우리는 바로의 종이 되어서 사탄의 종이 되어서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어버렸다. 만물이 사람을 보고 다 웃게 되었다. 만물이 조롱한다. 돈이 사람을 조롱한다. 권력이 사람을 조롱한다. 전부 인격을 조롱하는 것이다. 인격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면 됐지. 인격이 무슨 소용인가? 권력이 있어야지. 그렇게 조롱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권위를 찾았다. 그러니까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이 보존되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게 되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에 앉으셨다.
그래서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히1:4)라고 했다. 세상에 천사가 제일 아름답고 천사가 제일 위대하고 천사가 제일 잘났는데, 이제는 천사보다 얼마나 뛰어난 이름을 받았는지 하나님 아들로서의 이름을 받았다. 이것을 기업으로 얻었다. 기업은 자기 몫이다. 자기 몫으로 얻었다는 것이다. 천사는 영물이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동안 빈껍데기에 다른 것이 들어가서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제는 내용이 딱 바꿔지니까 내용이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지니까 천사도 흠모하게 되었다.
c.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 생명을 살아내기 때문에 우리는 풍성을 누릴 수밖에 없다.
(1) 동산을 다스리며 지킬 수 있었음
원래 하나님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라고 했다. 네가 이것을 다스리고 지키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처고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공원이다. 이것을 내가 관리할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 권세를 상실하고 말았다.
(2) 모든 민족들을 치료하게 됨(계22:2-5)
그런데 내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나니까 그리스도를 먹고 나니까 모든 민족을 치료하게 되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 아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종으로서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고,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빛 비춤 안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최종적인 은혜다. 우리가 모든 민족을 치료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사람, 그의 권리를 가진 사람, 하나님을 실제로 담고 있는 사람, 형상으로서 인간은 모든 사람을 치료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게 된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듯이 병든 모든 사람을 치료하게 된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 아래 있게 된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통치다. 어린양의 통치 아래 있는 평화로운 세계 아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데 그 얼굴을 본다는 말은 그와 아주 가깝다는 말이다. 얼굴을 본다는 말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이마에 옛날에 내가 뭐라고 썼는가? ‘사탄의 종’이라고 써있었다. 애굽에 살 때는 ‘바로의 노예’라고 써있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노예’라고 써있었다. ‘세상 사람’이라고 써있었는데 이제 이마에 그의 이름이 있더라. 하나님의 이름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더라. 이마에 왜 있는가? 남에게 보라고, 모든 사람에게 보라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머리를 다 가리고 다닌다. 이마가 안 보인다. 그러면 누군지 모른다. 이마를 딱 나처럼 내놓고 다녀야 누군지 알 것 아닌가?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딱 써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그분의 빛 비춤 안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몸으로 나타냄으로서 하나님을 더욱 풍성히 누린다.
d. 체현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냄으로
(1) 예수께서 먼저 하나님을 체현하셨음
예수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2:9)는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신 것은 그분을 먹으면 먹은 사람이 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되신 것은 그분을 먹은 사람도 다 그렇게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러니까 우리라고 해서 하나님을 체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체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체현을 통해서 누리는 풍성이 또 엄청난 풍성이다. 분명히 육신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체현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풍성인가! 형상으로 실재를 누리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체현이 되는 것이다. 생명나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먹었는데, 먹기는 씁쓸한 것을 먹었는데 나온 것은 영 다른 것이 나왔다.
(2) 형상으로서 실재를 누리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체현이 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다.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혼자 골고다에 올라갈 생각하면 안 된다. 혼자 올라가서 못 박힐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혼자 못 박힐 수가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우리는 보자마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보면서 내가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못 박힌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이 풍성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내가 사는 풍성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 풍성을 누린다.
기계적 생명이 가지고 있는 풍성은 누려보았자 얼마나 누리겠는가? 육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누려보았자 얼마나 누리겠는가? 일은 많이 할 수 있다. 놀라운 일도 물론 할 수 있다.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할 수 있다. 해보았자 다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누려지는 축복이 아니고 일이다. 능력 있는 사람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업적은 내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 업적을 생각하지만 업적은 내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무 업적도 없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보다 뛰어난 이름을 기업으로 얻었다. 이 인격 안에 있는 이 풍성은 우리가 아직 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니까 우리가 계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체험의 문제다. 경험의 문제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풍성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먹고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생명의 풍성을 누리게 된다.
꼭 먹어야 된다. 먹는 것을 꼭 바꿔야 된다. 먹는 것이 잘못되었구나. 원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먹는 것이 잘못되었다. 나는 성질이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먹는 것이 잘못되었구나. 나는 버릇이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먹는 것이 잘못되었구나. 나는 꼬라지가 심한 것이 아니고 먹는 것이 잘못되었구나.
먹는 것이 잘못되었다. 아무 이유가 없다. 그것만 바꾸면 된다. 먹기만 먹으면 된다. 거기 있는 그분을 먹기만 하면 된다. 딱 못 박혔으니까 이제 딱 못 박힌 그 자리에서 내가 살면 된다. 그러면 내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것은 해봐야 안다. 만날 말해도 안 해보면 모른다. 당장 집에 돌아가서, 아니면 집에 돌아가기 전에 내가 죽은 자로 살아보라. 죽은 자를 살아내 보라. 그러면 당장 알게 된다. 그렇지만 안 살아보면 맨날 모른다. 안 살아보면 맨날 졸린다. 살아봐야 안다.
부활은 우리의 체험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데까지는 역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어도 부활은 체험이다. 거기서 내가 살아봐야 이 부활을 알게 되지 살지 않고는 부활을 알 수가 없다. 부활에 대한 기록은 아무리 읽어봐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체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문을 잠그고 있는데 언제 들어왔다거나 3명이 분명히 갔는데도 누군지 몰랐다거나 음식을 입에 넣어주니까 그때야 알아보았다거나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있는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느니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해서 만져보고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었다. 다 보고 만져보라고 그러지. 나를 붙잡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그러니까 부활한 후의 사건을 읽어보면 헷갈린다. 뭐가 뭔지 모른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해야 정리되는 문제다.
우리가 먹고 하나되면 우리는 풍성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다. 창세기부터 마지막 계시록까지 전부 생명의 문제다. 이 생명을 바꾸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먹는 문제를 바꿔야 생명이 바꿔진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회복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우리가 어디서 이탈했는지 우리가 어디 있던 사람인지 우리가 까마득히 다 모르고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는 당신에게로 이끌어 주시고 십자가까지 끄집어 당기시고 하나님의 동산까지 이끌어 주시고 내가 흙으로 지어진 거기까지 이끌어 주시고 내가 누군가를 알게 해주셔서 내가 거기 꼼짝 못하도록 이의가 없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이 삶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못 박힌 자들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변명할 수가 없고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더 이상 빠져나갈 수가 없는 자리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사탄이 뭐라고 속이든지 간에 이제 우리가 정체를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를 보았습니다. 이 정체 안에서 우리가 진실하게 살게 되기를 원하고 이 진실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