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화에서 특이성으로: 입말과 쓴글 사이에서 역동화 과정
2021 07 03. 소서(小暑)가 나흘 후이다.
소서(小暑): 오뉴월 뙤약볕에 논에 벼가 아침저녁으로 다르다고 한다. <콩밭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는 가사에서, 년 중의 노동에서 가장 힘든 때이다.
<들불이 되자>는 여러 번 들은 기억나는 데, 이 노래가 김남주의 “죽창가”였다니...
이 두 가사를 이 글 뒤에 첨가하였다.
* 철학은 자료의 총체를 다룬다. 물론 과학들은 각각이 자기 한계(경계) 안에서 자료들을 다룬다. 이런 자료의 총체를 경계에 한정시키기보다 기원과 원인에 대해 까지 숙고 하는 것이 철학이다. 각 학문이 성립하고 규정한 것을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 초 중 고등의 교육이 있다. 18세 쯤에야, 이런 학문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또한 개별적 자아와 다른 연관들이 있는 세상에 대해 조화와 공명을 깨닫기 위해 철학을 한다. 이 철학의 기본에는 형이상학이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은 상층만을 지칭하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다른 형이상학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자가 15세라고 했던 학습(學習)이 근대에 와서 18세쯤에 이른 것도 인류의 사유의 전개 과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철학을 왜 배우고 익혀야 하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벩송은 철학이 올바른 문제제기에 있고, 그 문제제기가 정확하게 제시하자고 한다. 문제에 답이 있다기보다 공동체가 살아가면서 해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벩송의 또 다른 표현 중에서 비유에 속지 말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비유는 언제나 공간적 표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공간적 사고가 아니라 시간적 사유로, 즉 벩송이 주장하는 지속의 통찰(관점)에서 안으로부터 성찰하자는 의도 일 것이다.
<*결선투표제* 페라스와 아페이론이라는 철학의 기원적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제국의 전쟁기구가 될 것인가 인민들의 전쟁기계 역할을 할 것인가에 이른다. 불평등의 피라밑 사고와 공명의 다양체 사유 사이에는 다른 삶들이 있다. (54PMD)>
* 나는 윤구병 선배가 취학 전 아동과 취학 초기 단계의 아동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책을 내고 글을 쓰는 면에서 그를 좋아하고, 그가 스스로로 인민 대중을 태워갈 큰 수레가 되려고 평생을 ‘같잖은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 점을 더욱 좋아한다. 그의 주문은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를, 마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처럼 외우자는 것까지도 나는 그를 좋아한다.
우리나라가 처한 동북아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말하고 있으니 우선 젖혀두자. 나로서 서양철학사의 전개와 발전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풍토와 품성에 대해 유추적으로(아노ᄂᆞᆯ로analogie이며 allegorie가 아니다) 사유할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서양 철학사는 서방과 동방이라는 대립 또는 대결 의식이 있다. 이점에서 서방은 동방을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방이 무엇인가? 서방은 동방의 사고에서 전제 또는 황제(참주)의 지배를 보았고, 서방은 시민적이고 민주적이라고 간주했다. 물론 서방의 시각이다. 이 동방은 인도도 중국도 포함하지 않은 페르샤(이란)와 중동을 지칭한다.
민주라는 제도가 완성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비슷하게(아날로지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시기가 소크라테스 생애과정 중이었다. 아테네가 동방의 제국이 밀려오는 압제의 힘을 뿌리친 것도 그 시기이며, 20여년 간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을 하면서 신화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그가 아테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것도 이시기였다. 그는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동지들과 제자들에 의해 남겨진 글들과 일화들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했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당시의 정체가 제국을 모방하는데 대한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청년에게 새로운 사유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이류로 고발당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새로운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분하다. 그러나 청년에게 교육은 근대 이래로 청년에 이르기까지 점점 무상교육 보통교육, 일반교육, 탈종교 교육이라는 이념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부류들이 있었다. 헤라클레스처럼 살아가는 활동가인 퀴니코스학파의 안테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전444-365), 도덕론에 관심 있는 퀴레네 학파의 아리스티포스(Aristipp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 전쟁의 패배로 노예로 팔렸는데 소크라테스 친구에게 부탁해 구해내어 제자로 삼은 엘리스의 파이돈(Phédon d'Élis, Φαίδων, s.d.), 소크라테스에게 배워 일찍이 학교를 연 메가라학파의 에우클레이데스(Euclide de Mégare, Εὐκλείδης, 전450경-전366경); 한때 소크라테스의 총애를 받았던 정치가 알키비아데스(Alcibiade, Ἀλκιβιάδης, 전450-404), 동방 제국의 정책을 바꾸려 제국의 왕자를 가르치려 했던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 전440경-전355경); 통상 소크라테스를 계승한 철학자로서 여기는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전427-347)과 그 영향하에 있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전384-322)등이 있다. 분류하자면, 많은 이들 중에서 크게 보아 네 부류들이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전달된 철학적 관심이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고 다른 사상가들은 거의 무시한다는 점이다. 아테네 시대야 말로 폴리스의 체제의 규범(노모스, νόμος)와 인민의(노모스, νομός)사이에 준안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민주주의가 생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시기가 “전쟁”의 시기라는 점을 강조한 것은 플라톤과 벩송을 전문으로 다루었던 박홍규 교수였다. 나는 박홍규에 관점에서 또 한 단어를 생각한다. 아르케(αρχή)인데,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원질이라 하는데 비해, 그는 원인 또는 이유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다루겠지만 요한복음의 첫 구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에서 태초에 라는 단어가 아르케(αρχή)이다. 그 단어의 동사형은 아르코(ἄρχω)인데,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는 책에서 명령하다와 시작하다는 양의성이 있다. - 여기서 그치겠지만 들뢰즈의 논의가 이런 용어의 다중성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제기한 것이 흥미롭다. 토 호플론(τὸ ὅπλον)은 무기와 도구 양쪽으로 쓰인다.
** 요즘 여론상으로 제기되는 차별과 공정이란 용어는 어느 쪽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는 문제제기보다 앞서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있다. 한때 분석철학자들이 철학은 교통정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먼저 다루어야 할 개념이 있다. 교통정리라면 규범 또는 규약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철학이 철학의 총체적 자료에 교통정리를 하겠다는 것이 될 것이다. 먼저 자료들이 있고 그리고 분류가 필요하며, 그리고 그들의 표현으로 배열을 하겠지만, 들뢰즈 표현으로 배치에 따라 규칙을 달라질 수 잇음을 그들은 간과하였다. 나로서 벩송을 따라 분석철학의 교통정리는 선전제에 대한 논의를 거치지 않아서 제국의 주구의 학문처럼 보인다.
차별과 공정을 말하는 부류가 어떤 부류인지 짐작되리라. 이런 논의에서 우선 차별은 차이와 차히의 대한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차이의 관점에서 순서로서 배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위계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들의 분노라고 하는 서열의 경우도 순서가 곧 지위의 계급적 질서이며, 이런 질서가 학력과 재력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는 데 대한 분노일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부류에서 순서를 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서로가 차히를 가져서 순서가 아니라 배치에 따라 다르다고 해도, 이들은 배치 자체도 순서로 되어 있다고 여긴다. 배치는 문제제기와 과정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한 인격은 유기적 조직에 참여하는 양태들에 따라서 다르다. 한 인물이 집에서 배치와 학교에서 배치와 직장에서 배치에 따라 그 인물의 역할과 권능이 달리 발현된다. 멀리가지 않을 것인데, 배치는 배치하는 조직화의 방식에 달려 있다.
조직화를 사회 또는 국가의 기구로서 이루어진 것을 기본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재로는 생명체로서 유기화가 먼저일 것이다. 유기화는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아프고, 이를 해서하기 위해 작용과 방향을 달리하는 경향이 있다. 부분과 단위 전체는 유기적 관계만큼이나 능동적이고 실재적으로 변모한다. 이에 비해 사회 조직체는 조직체의 부분들은 전체의 부속과 같아서, 부분의 훼손과 마모는 부분을 우선 대체하거나, 다른 관계에서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제거하나 방기한다. 전자에서 유기화 방식의 사유는 정의에서도 조화를 더 강조하는 데 비해, 후자에서 조직화의 방식은 조직의 활용와 유용성에 따라 비례 또는 평균을 강조한다. 전자의 관점의 관심은 퀴니코스학파에 이어서 초기 스토아에 있었고, 철학사적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루소 벩송 들뢰즈 등에서 나타나며, 동정이 아니라 연민의 정을 바탕으로 한다. 이에 비해 후자의 관심은 통속적 유물론자와 관념론에서 성취되는데, 유물론은 대체의 방식을 생각한다면 관념론은 방기해 버리는 쪽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전자에서 자연의 발현에는 다양한 부분들 간의 공감과 공명이 필수적이라 연대를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어째거나 하나의 단위의 굳건함과 필수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단위의 성립과 과정자체가 그리고 그 운용이 변증법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부정적 요소의 배제와 파기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유지는 기존 체제의 정당성과 존립에 대해 의문 자체가 없다. 그 문제제기자가 같잖은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기에 배제하거나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동일성의 유지가 어떤 전제인가를 그들은 묻지 않는다. 마치 종교적 신앙처럼, 전제의 확고한 신념이 과학과 인류사의 증거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가 사회 전반에 토대로서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선전제를 만들었을까? 수학과 물리학에서 원리와 법칙이 너무나 사물들에 잘 적용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과 심리학에서도 원리와 법칙이 적용될 것이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수학의 무한에서 물리학의 미시물리과 거시 천체 물리학에서도 법칙이 먼저 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내에서 확률적으로 정합적(합당하다)이라고 여기는 부분들일 뿐이라고 한다.
차별과 공정을 말하는 자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 것이다. 여기에 페미니즘의 논의를 생각해 보자. 생명 종에서 암컷과 수컷이라는 종 내에서 차이는 서로 다르다는 차이일까? 유기화에서 다른 차원일까? 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 사이는 비교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양태에서 차히이다. 어는 한쪽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에 다른 한쪽은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게다가 생물학사에서 암과 수의 개념이 같은 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시할 때는 난초를 예를 든다. 게다가 난자와 정자 사이에 관계를 다시 고찰하는 입장에서 어느 성이 지배적이냐는 것에서도 난자에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대 사회이래로 남성우위 였다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 사회의 레짐(체제)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그리고 체제 유지와 그 체제의 저항들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앞의 생물학적 경우와 달리 사회체에서 어느 성의 상위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3천년 정도라고 해서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오래인지를 강조하는 이들에게 생물학적인 이야기를 들이댄다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사회체에서 차별을 심은 것은 불균형이 원인이다. 불균형은 차이가 아니라 차히이다. 사회체이건 생명체이건 간에 두 성 사이에 환원불가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 개체 또는 개인으로 개념을 설명해 버리면,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법칙과 규약 속에 변증법적 통일을 이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일 수 있고, 종교적으로 유일신앙이 갖는 우화에 닮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방식 하나의 방향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허위의식으로 간주하면, 개인들의 특이성이 보이게 된다. 여성은 여성의 고유한 권한이 있다. 이 권한에 대해 유비적으로 남성이 말할 수 있을지라도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라는 위상을 남성에 유비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낙태에 관하해서도 생물학적으로 여성에게 고유한 본성(자연)이고, 사회적으로도 여성의 고유한 권리(범주)이라는 것이다. 자연상으로 계약에는 합의로서 동의를 구하는 것이지, 생명의 원리,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을 개입시켜서 태아에 대해서는 남성이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여기는데, 생명과 인간 본성(자연)에거 별개로서 또한 차히로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단지 사회체서 합의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여성들의 고유한 양태에 대해 그들의 고유성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더욱 크게보아 생태계에서 인류가 꼭 남을 보장이 있기나 한가? 이런 성찰한다면 같잖은 사유를 깊이있게 경청해야 할 것이다. 선전제의 이념과 관념을 버리고...
윤구병의 이야기로 모든 제도적 기구에는 여남 동수로 하고, 위원장을 여성으로 한다고 선언했었다. 그의 견해는 삶이 먼저이고 그다음 철학한다는 견해와 마찬가지이다. 삶의 터전은 필요한 제도적 기구들은 인구적인 비례로 보아도, 여남에게 공유 또는 공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 같잖은 생각일까? 그는 스스로 같지 않은 생각을 한다고 한다.
문제거리를 대하는 반성, 성찰, 통찰이 다른 경우는 우리사회 어디에서나 있다. 문제거리에서 먼저 원리, 법칙, 기준, 규약을 먼저 찾거나, 먼저 설정해야한다고 하여 법률적으로 라는 방식이 제대로 성립한 것이 언제인가? 근대사회인가? 얼마 되었던가. 그 근대라는 이름에 매여, 무엇을 고치는데 법령의 미비를 바로 잡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성(la raison)을 말한다. 그 이성이란 단어가 이유 또는 근거와 같은 의미일진대, 법령을 만들어야 실행이 된다고 하는 그 이성이 속좁은 이성일 뿐이다. 어쩌면 푸꼬가 근대의 이성이 한쪽으로 치우친 범주를 만들고 실행하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억제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광기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본주의는 광기의 겉모습일 수 있다. 법령과 제도가 문제거리이라면 법령을 고치는 것보다 삶의 양식을 고치자는 쪽이 변역(變易)과 혁명(革命)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차히라는 점에서 또한 인격이 다양체라른 점에서, 사고의 경직성에 대해 철학적 사유의 전복이 중요하듯이, 사회의 고착화에서는 여전히 혁신은 유효하다. 벩송은웃음거리를 이야기 했다. 웃게 할 줄 아는 인간. (54RKC)
*** 다시 한 번 벩송이 말한 비유의 도식에 속지 말기를. 공간적 표상의 이야기들은 편리와 유용(utile)의 방편이며, 상식에 준한다. 성찰의 양식, 총체적 자료에 대한 고등양식의 통찰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적 사유와 유대계 사유를 구분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들뢰즈 식으로 보면 아테네 사유와 로마 사유일 것 같다. 아테네는 이오니아 전통에서 질료를 로마의 사유는 엘레아 전통의 존재(한계)의 사유에 있을 것 같다. 이 두 사유의 차이에서 유대 전통의 메시아의 사유와 로마(황제) 지배와 크리스트로 상징되는 제국의 사유가 다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와 이오니아의 기원전 587년의 사유에는 공통점이 있고, 크리스트교와 로마제국의 기원전후의 사고에 같은 제국의 위계적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들뢰즈가 그리스인에 관해 호의적인 것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개인의 특이성의 발달에 주목한 것이고, 은연중에 시저 이후 로마가 동방(페르샤와 이집트)의 황제정을 본 따서 로마 제국을 형성하는 시기에 크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제국화하는 것도 같은 방향으로 보았을 것이다.
동양(동방이 아니다)에서 중국은, 마치 난바다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다. 상부가 지배층을 형성했다고 하더라도 백성 즉 인민이 주체임을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타성에 젖어서 상층이 인민을 가르치고 거꾸로 가르친 바가 자기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질적 구조가 변함에 따라 인민이 상층을 뒤엎고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려 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시대적 간격을 두고서 변화해 왔는데, 그들의 입말과 쓴글의 차이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는 입말과 쓴글의 차이가 워낙커서 변화를 역동적으로 일으키기에 부족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 서서히 입말과 쓴글의 간격을 좁히더니, 2017년에 촛불에는 입말과 쓴글 사이가 시시각각으로 전하는 손바닥 놀이(스마트 폰)가 등장하였다. 60여년을 역동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과 정을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54RKA)]
[[(54QMJ)자유란 인간적인 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자연을 도구로 다룬 다고 해서 자연에 대해 자유라는 것은 부분적일 수 있지만 기 세월에서 인간은 자연에 부속이다. 그럼에도 자유는 인간과 인간적인 것들 사이에서 임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이다.
이 인간적인 관계는 하나 일 경우에는 존재와 무, 맞다 틀리다 두 경우 밖에 없지만 둘이면 4 경우, 셋이면 8 경우, 수가 많아지면 경우의 수를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유를 논하게 된다. 그 많은 것 중에서 어느 한 경우를 선택하는 것이 선택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선택지에 대한 분류나 비교는 항상 가능하다. 셋일 경우 8가지 경우에서 좌는 공집합 우는 절대통합이다. 그 외에 6가지가 있는 데 좌로부터 [다양체] 심층, 표면내부, 안표면/겉표면, 표면외부, 상층 [절대자]으로 나눌 수 있다. 선택자는 분류상으로 자기 위상을 반성하면서, 여러 분류에 대해 성찰이 필요하다. [통일흐름], 민중당, 노동당, 민주당진보/보수, 국민의 당(보수), 국민의 힘(수구) [토왜세력]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 윤석열의 기자회견은 1에서 8로 분류 속에서 거의 7-8에 위치하고 있다. 최재형은 7이라면, 안철수는 7로 보이며, 홍준표는 6-7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치를 평한다고 하는 이들은 자기 위치를 4-5에 두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정치공학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위상적으로 5-6에 위치하고 있다. - 참고로 나는 1에서 시작하는 철학적 논의에서 벩송과 들뢰즈의 방향을 택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현재 알려진 쓴글과 입말을 통하여 보건데, 가타리는 1, 박노자는 2, 홍세화는 3, 심상정은 4-5, 유시만 5-6, 진중권은 6-7을 넘나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민은 7-8의 위상에 있을 수 있다. 다른 인물들도 나름대로 위상을 대입시켜볼 수 있다. 여기서 위상이라고 하는 것은 각자가 다른 위치에 대해 우월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회오리가 넓혀지면서 확장해 나가는데 그 가장자리는 원과 닮아있어서, 그 것을 원으로 간주하면 8방향으로 나눌 수 있는 각각의 방향을 위상이라고 한다. 각 위상은 우리 땅, 우리 시대에서 무엇을 문제제기 하느냐에 따라 달리 행동이 나오고, 입말과 쓴글이 다르다. 그런데 한 두 번의 것이 아니라, 삶에는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을 검토해보면 그 위상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하고 다른 점은 입말과 쓴글이 전혀 다르다. 자치와 자주를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다시 윤구병 표현은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민주당내에서 4-5 사이의 간격이 드러나는 것이 대통령 후보 결정 선거에서 일 것이다. 지금까지 후보자들이 중도확장을 표방하여 여러 입말들을 남기고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 정치적 과정에서 활동의 방향을 보건데, 또한 쓴 글이나 언론(방송과 신문)과 대하는 방식에서 보면 이낙연 4, 이재명 5이다. 사람들은 거꾸로 이재명을 4 이낙연을 5로 간주하는 듯하다. 그 이유는 공약의 제시라는 것인데, 아직은 공약의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검증의 기간은 아직 길게 남아 있다. 그런데 검찰과 언론에 대해 두 후보자가 대하는 태도상으로 이낙연 4, 이재명 6으로 보인다. (54QMJ)
(6:23, 54RKC)
*** *** ***
# 죽창가: 김남주(1946-1994)
[이 노래 들어보니 여러 곳에서 들었던 노래인데, 제목이 죽창가인 줄은 처음 알았다. 게다가 시가 전사 김남주 시인의 시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 죽창가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 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 시집 『사랑의 무기』(창작과비평사, 1989) [이 속에 실리지 않는 것 같다. 목차를 찾아 보았는데, 그 속에 죽창가라는 제목은 없다.]
- 1997년『월간중앙』9월호에 처음 실린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의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54RKAC)
## 하지(夏至)를 지나 소서(小暑)에 이른 시기에 농사의 어려움을 논에 피뽑기라고 했지만 이제는 기계농이고 제초제를 사용하는 지라, 피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여전히 남아있는 노동의 어려움은 “콩밭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에서처럼 호미를 들고 골골의 잡초를 매야하는 일은 하루라도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울림이 있다.
*칠갑산
주병선(1964-), 1989. - KBS2TV 1990 가요대상 - 1990년 12월(19901229)
콩밭 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54RKB) (7:35, 54R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