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사드의 초자아와 마조흐의 자아: Surmoi sadique et moi masochiste .
들뢰즈(Deleuze), in 냉정함과 잔인함(Le froid et le cruel, 1967), 원105-115, 번147-160.
-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Le froid et le cruel, avec le texte intégral de La Vénus à la fourrur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coll. « Arguments », 1967, P. 276.
§09. 정신분석학 124-133 La psychanalyse. 89-96
§10. 죽음 본능은 무엇인가? 134-146 Q’est-ce que l’instinct de mort? 96-105
§11. 사드의 초자아와 마조흐의 자아 147-160 Surmoi sadique et moi masochiste 105-115.
들뢰즈가 여러 방식에서 결국 마지막 3개의 절에서는 정신분석학과 대결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당대의 많은 논의가 되고 있던 사드가 아니라 자허-마조흐였을까? 그것도 프랑스 작가도 아닌, 폴란드 국경 가까이 외곽의 작가에 대한 분석하면서 문제거리를 만들었을까? 올바른 문제제기는 문제해소의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 소수자의 문제제기가 작동하는 권능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고, 여기서 흐름이 표면의 균열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탈출구 또는 분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은폐되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소수자 문학에 있는 것이 아닐까? 카프카도 그러하다. 그런데 영어로 쓰는 문학가들이 더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문학가들이 주류 사회의 소수자를 또는 탈주자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일까?
§09. 정신분석학, §10. 죽음 본능은 무엇인가?, §11. 사드의 초자아와 마조흐의 자아, 이 3 절에서는 정신분석학과 연관을 다룬다. 들뢰즈 가 요약한 내용은 < 9) 사디즘에서 초자아와 동일화(l'identification), 마조히즘에서 자아와 이상화(l'idéalisation). / 10) 탈성화와 재성화에 대해 반대되는 두 형식들 / 11) 전체를 요약하자면, 사드적 무감동(l'apathie)과 마조흐의 냉정함(le froid) 사이에 근본적 차이.>이다. 이 §11절의 제목과 달리 들뢰즈는 양자의 차이에서 결론으로 사드의 “무감동”과 마조흐의 “냉정함”으로 결론지었다.
** 이 마지막 절(§11.)의 설명은 이 저술의 종합적 결론인 셈이다. 11절의 소절에 맞게 11가지로 요약해 놓았다. 우리는 들뢰즈의 결론이 정신분석학적으로 사드와 마조흐의 차이를 드러낸 것보다,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고 본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스토아의 학파의 무감동과 이데아의 정식에 완벽함에 해당하는 냉정함으로 생각되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뢰즈가 설명하고 있는 듯하여 약간 당황스럽다. 말하자면 도덕적 행위에서 현실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아파테이아(무감동)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데아의 자기 완결성으로 현실의 표면과 떨어져서 고고함을 유지하는 냉정함과 비유되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9절에서, 사디즘에서 초자아의 동일화와 마조히즘의 자아의 이상화의 대비로 보면 철학적 사유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드는 논리적 사고의 극한에서 행위 한다면, 초자아의 방식으로 사물을 대할 것이고 사물에도(더군다나 인격에도)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이고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는 사물을 지배할 범주를 사물위에 덮어씌우는 것과 닮았다). 그리고 마조흐는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물(타자)들과 또는 여성(타인)들과 관계를 잘 정립할 필요가 있기에 휩쓸리지 않은 냉정함을 필요로 할 것이고, 타자와 타인의 성질과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벩송의 모두스 비벤디처럼 생명은 물질에 타협점을 찾는 노력도 하지만 이를 넘어서 다른 방식을 창안하려고 한다. 전자는 지성에서 후자는 직관에서). 이처럼 사드와 마조흐를 인식 주체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9절의 요약과 11절의 요약은 동일 선상에 있다고 생각된다. 즉 사물을 대하는 인식의 방식에서 보면, 이 같은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데, 왜 도덕적 삶 또는 인격적 삶에 대해서는, 특히 성관심에 대해서는 거꾸로 일까? 작동의 기제가 상층인지 심층인지에 따라 다르다. 형상형이상학과 심층형이상학의 차히일 것이다. (53UMD, 54LME))
색다른 소감이 있다. 들뢰즈의 소설가 마조흐의 분석은 우선은 라깡의 초자아를 강조하는 데 대해 새로운 논의를 제시하는 것 같다. 상징계에 속하는 초자아와 주체의 정립을 상상계의 자아에서 만들어야 했던 프로이트의 고민이 라깡에게도 있다. 이들이 초자아를 염두에 둔 것은 유일신앙(유대교, 크리스트교)에 젖어 있어서 이를 벗어나고자(?) 이드(실재계)를 끌어와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초자아는 이드를 지배 통치하는 상부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자아에서 출발하여 자아가 주체로 성립하는 긴 과정에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그 상상계의 자아는 자기 생성과 되기를 초자아에서보다 이드에서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작가 마조흐도 크리스트교 속에 있으면서, 이교도의 그리스적 사유에서 자아의 생성과 성립을 길어 올렸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유일신앙(더하여 동방의 전제정)과 그리스적 신화적 사고는 유사한 점과 이질적인 점이 동시에 있다. 들뢰즈는 마조흐가 이질적인 점을 보조요소들로서 사용하고, 여전히 팔루스적 서술과 논의를 하였다고 보는 듯하다. 이점에서 들뢰즈가 1967년까지는 정신분석학에서 상징계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프로이트가 심층에 심으려는) 타나토스라는 두 가지 요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전자는 라깡의 영향으로 후자는 프로이드에 대한 분석이 부족한 시절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고 쓴 안티외디푸스를 보면, 상징계의 착각, 그리고 타나토스가 이드에 존속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게다가 그리스적 사유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둘(들뢰즈와 가타리) 함께 쓴 여러 작품들(소수자들)에 대한 글들에서는 유일신앙(유대교든 크리스트교든)에서 벗어났다. 내가 보기에 유일신앙에서 벗어날 기회가 이미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에서 있었다. 그런데 그 때에는 도덕론에 머물면서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깊이 있게 들어간 시절이 아니었다. 플라톤주의의 전복에 관한 글을 이 책을 쓰는 시기와 같은 시기에 여러 논문들을 쓰면서 들뢰즈가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유목적 또는 노마드를 쓰는 시기에 유일신앙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두 철학자의 긴 작업이, 그들이 표면에 내건 “플라톤주의의 전복” 뿐만이 아니라, 단지 말년에 두 사람의 마지막 합동 저술인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에서 또한 거의 마지막으로 쓴 논문 들뢰즈의 「플라톤과 그리스인들(Platon, Les Grecs, 1992)」에서는 그리스인이 철학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당대의 그리스인들이 하는 방식이다. 그들이 올바른 문제제기에서 풀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본 것 같다. 하나는 공동체의 성립과 운용은 민주적(데모스)적이어야 하며, 이 제도는 동방의 전제정도 그리고 그리스 전통의 신화의 방식도 아닌, 인격들의 협의와 조율, 합의[계약]와 조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속에 포함된 개인 또는 인격은 어떻게 형성되고 성립하는가? 그 개인의 성립을 영혼에다 두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아의 자치와 자율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의 노력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 철학하는 것이다. 아마도 들뢰즈는 학문의 과정에서 마지막에 이르러 유일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수 천개의 고원을 말할 수 있는 자연(Nature 본성)의 철학으로 생명(un Vie)의 철학으로 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가자 가자 저넘어 만디를 전자서! 였다. 그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고, 그 길은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제자라 할 만하다. (53UME)
**********
# 냉정함과 잔인함(Le froid et le cruel, 1967)
§ 11. 사드의 초자아와 마조흐의 자아 147-160 - Surmoi sadique et moi masochiste 105-115.
Triomphe du surmoi et état du moi dans le sadisme: l’ironie. / Triomphe du moi et état du surmoi dans le masochisme: l’humour. / Récapitulation des caractères différentiels du sadisme et du masochisme. / Le moi, le surmoi, leur scission structurale et l’instint de mort: imagination et pensée. / Conclusions sur l’“incompossibilité” du sadisme et du masochisme
사드 속에서 초자아의 승리와 자아의 상태: 아이러니 / 마조히즘 속에서 자아의 승리와 초자아의 상태: 유머. /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차이적 성격들 대한 요약. / 자아, 초자아, 그것들의 구조적 분해와 죽음 본능: 상상 과 사유. /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불공가능성”에 관한 결론들.
[§ 11.0. 사드의 초자아, 마조흐의 자아]
사디즘으로부터 마조히즘의 정신분석적 발생을 고려한다면(이런 점에서 프로이드의 두 가지 해석은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첫째 해석은 환원할 수 없는 마조흐적 바닥(깊이)의 현존을 이미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석은 초기 마조히즘의 현존을 주목하였지만, 마조히즘의 완전한 성격이 사디즘의 선회[되돌림]에 의해서만 얻어진다고 하는 이 해석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드적인 것은 특히 초자아에 빈약하고, 반대로 마조히스트는 사디즘을 선회하게 하는 게걸스러운 초자아로부터 고통을 받는다고 인상을 갖는다. (105, 147)
마조히스트의 자아가 겉으로만 뭉개질[으스러질] 뿐이다. 어떤 조롱, 어떤 유머, 어떤 불굴의 반항, 어떤 승리가 매우 연약하다고 선언된 자아 아래에 감춰져 있는가? 자아의 연약함이 마조히스트에 의해 펼쳐진 함정일 뿐이고, 마조히스트는 그 여성을 기능의 이상적인 점에까지, 즉 자신에게 할당되었던 이상적인 점에까지 이끌어가야만 한다. 만일 마조히스트가 어떤 것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초자아이지, 자아는 전혀 아니다. 매질하는 여성에게 마조히스트의 투사에서, 거기에서 나타나는 바로는 초자아가 단지 훨씬 더 웃음거리가 되기 위하여 또한 승리하는 자아의 목적들에 맞게 이용하기 위하여 외적 형식을 취할 뿐이다. (105-106, 148)
§11.1. 사드 속에서 초자아의 승리와 자아의 상태: 아이러니. - Triomphe du surmoi et état du moi dans le sadisme: l’ironie.
사디즘에서 다른 희생자들은 어머니와 자아이다. 사디즘에서 외부에 다른 자아가 있다: 그러한 것은 사디스트의 무감동의 근본적 의미이다. 사디즘에서 다른 자아는 자기 희생자의 자아이다: 초자아로 환원된 괴물, 그 초자아는 자기의 총체적 잔인성을 실현하고, 그리고 그 초자아는, 초자아가 밖으로 자기 권능을 도출하자마자, 자기의 충만한 성관심을 도약하여[비약적으로] 재발견한다. (106, 149)
밖으로 향해 되돌려진 [사드적인] 파괴의 광기가 외부 희생자들과의 동일시하는 것을 동반한다. 그러한 것이 사드적 아이러니이다: [이중 작용이기 때문에 아이러니이다.] 사디스트가 해체된 자기 자아를 필연적으로 저 바깥으로 투사하는, 동시에 마치 자신의 유일한 자아인 것처럼 외부를 살아가는이중작용이 있다. 거기에는 마조히즘과 실재적 통일성도 공통적 원인도 전혀 없으며, 그러나, 사디즘에 속하는 독창적 과정이, 즉 오로지 전적으로 사드적인 유사-마조히즘이, 겉보기에 또 조잡하게 마조히즘과 일치할 뿐이다. 사실상 아이러니는 게걸스런 초자아의 행사[실행]이며, - 모든 사드적인 귀결들과 더불어 자아를 배척하고 부정하는 기술(l’art)일 뿐이다. (106, 149)
§11.2. 마조히즘 속에서 자아의 승리와 초자아의 상태: 유머. - Triomphe du moi et état du surmoi dans le masochisme: l’humour.
마조히즘에 관한한, 마조히즘은 이 도식을 전도[역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확실히 자아가 승리하고; 다음 차례로 초자아는 밖에서 박해자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한편으로 초자아는, 마치 자아가 사디스트적 조작에서 부정되었던 것처럼 부정되지 않는다. 초자아는 겉으로는 판단하고 제재하는 자기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 다른 한편 초자아가 이 능력을 간직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능력은 조롱거리로 폭로되고, 다른 것들을 위한 단순한 변장이 된다. (106-107, 149-150)
마조히즘 속에서 아버지와 닮음에 반대하여, 어머니의 이미지와 자아의 이지미의 공모가 이렇게 설명된다. 아버지와 닮음은 생식기적 성관심과 동시에 억압의 담지자로서 초자아를 지칭한다. 그런데 하나는 다른 하나와 함께“vidé(속이 빈)”채 있게 된다.거기에 유머가 있다. 이 유머는 아이러니의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고유한 수단에 의해 진행한다. 유머는 초자아에 반대하는 자아의 승리이다. (107, 150)
사실상 프로이트는 자아의 이차적 은혜(un bénéfice)의 필연성을 유머의 일부로서 행해지는 것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초자아의 공모와 더불어 도전(un défi)에 대해, 자아의 요지부동 (une invulnérabilité, 불사신)에 대해, 나르시즘의 승리에 대해 말했다. (107, 151)
§11.3.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차이적 성격들 대한 요약. - Récapitulation des caractères différentiels du sadisme et du masochisme.
사디즘은 부정적인 사실(du négatif)에서 부정으로(à la négation) 간다. 부정적 사실로부터 부정으로, 전자는 항상 되풀이 되는 파괴의 부분적 과정과 같고, 후자는 이성의 총체적 관념과 같다. (108, 151) [사디즘은 추론에 의해 관념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마조히즘은 부인(la dénégation)에서 멈춤(le suspens)으로 간다. 부인에서 멈춤으로, 전자는 초자아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고자하는 과정이며, 후자는 팔루스의 권한들과 소유를 어머니에게 전이하는질적인 과정이다. (108, 152)
모성적 팔루스는 성적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중성적 에너지의 이상적 기관이며, 그 자체 이상적 생산자, 다시 말하면 제2의 탄생의 자아의 생산자, “성적 사랑을 모르는 새로운 인간”의 생산자이다. 만일 우리가 마조히즘 속에서, 항상 자아에 대한 중요성이라고 할지라도, 비인칭적 요소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자아를] 생산하는 것은 이런 이중화를 기능으로 해서 또 상위 인격의 조작을 기능으로 해서라는 것이다. (109, 153)
사드적인 냉정한 사유에 대립하여 마조히스트의 얼음같은 상상작용을 대립시킨다. 라이크(Reik, 1888-1969)가 지적들에 맞추어보면, 마조히즘의 기원적 장소(le lieu originaire)로서 “환상(fantasie)”을 개입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109, 153)
§11.4. 자아, 초자아, 그것들의 구조적 분해와 죽음 본능: 상상 과 사유. - Le moi, le surmoi, leur scission structurale et l’instint de mort: imagination et pensée.
아마도 이것은 자아, 초자아, 또 이 둘의 관계에 대한, - 두 변태들의 통일성을 이루려는 발생적 착각에 토대를 둔 관계들에 대한, - 잘못된 해석일 것이다. .. 초자아의 구조는 전적으로 사디즘에 속한다. ... 자아의 구조는 전적으로 마조히즘에 속한다. (109-110, 154)
간단히 말해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발생적 파생작용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구조적 분열(scission structurale)이라는 면에서 이다. 최근에 라가쉬(Daniel Lagache, 1903-1972)가 그러한 자아-초자아 분열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는 나르시즘적 자아ㆍ이상적 자아의 체계와 초자아ㆍ자아의 이상의 체계를 구별하고 필요에 따라 대립시켰다. [그리고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한편으로 자아는 이상화작업(idéalisation)의 신화적 기획 속에 던져져있고, 이 기획에서 자아는, 마치 “이상적 자아”를 반영할 수 있고 또 심지어는 생산할 수 있는 거울처럼, 어머니의 이미지로사용된다. 여기서 “이상적 자아(le moi idéal)”란 전능하다는 나르시스적 이상인 한에서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아는 동일화작업(identification)의 사변적 기획 안에 던져져있고, 또 “자아의 이상”을 할당할 수 있는 초자아를 생산하기 위한 아버지의 이미지로사용된다. 여기서 “자아의 이상(un idéal du moi)”이란 마치 나르시즘에게 외적 근원(une source)을 개입하게 하는 권위성을 지닌 이상과 같다. (110-111, 154-155)
마조히즘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초자아가 파괴되었는지, 무엇인 이파괴로부터 나오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청자들이 이야기를 잘 못 이해하고, 초자아가 자기가 단발마를 지르는 순간에 승리한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111, 155)
그러므로 마조히스트는 자신의 징후와 자신의 환상에 대해 전력을 다하여 말한다. “일단 세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는 여성들이 치른 전투에 대해, 그리고 구강적 어머니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 (111, 155-156)
나르시즘 자아는 죽음의 모계적 거울에서 이상적 자아를 관조한다. 그러한 것이 이브의 도움으로 카인에 의해 시작된 이야기[역사]이다. 그런데 성처녀의 도움으로 크리스트에 의해 계속된 이야기이다. [또한] 미리암의 도움으로 사바타이 쯔비에 의해 다시 이어졌다. 그러한 것이 마조히스트의 환영을 보는 자(le visionnaire)이며, 그리고 “신은 죽었다”라는 그[마조히스트]의 경이로운 환영(la vision)이다. (112, 156)
사디즘은 또한 하나의 이야기[역사]이다. 그 이야기[역사]는 이번에는 어떻게 자아가 다른 문맥에서 그리고 다른 전투에서 졌으며, 추방되었는지를 이야기 한다. (112, 157)
재성화가 마조히스트의 계시자(le visionnaire)에 비추어서 대립되는 “자아의 이상” 안에서 즉 사드적 사고자 안에서 어떻게 생산되는 지.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112, 157)
우리는 단지 다음을 제시하고자 탐구했다: 즉 사람들은 여전히 성적 생활에서 폭력과 잔인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폭력 또는 잔인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성관심(la sexualité)과 조합된다(se combiner)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한 조합에서 다른 조합으로 통과하는 수단들을 발명할 수 있다. (112, 157)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통일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두 절차들을 이용한다. 한편으로 병인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잘라내는데, 그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 몇 가지들로부터 잘라내는 데, 서로 서로 이것들의 상호 이전들(transitions)을 하기 위하여 이다. (이처럼 사디즘의 본질적인 구성부분인 초자아는 반대로 사디즘이 마조히즘으로 되돌려진다는 그 점에서 제시된다. 마찬가지로 마조히즘을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도 이와 같다.) 다른 한편 증후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조잡한 징후(des syndromes)을, 유사한 모호한 효과들, 사도-마조적 본징의 증거들처럼, 일치하는 모호함들을 고려한다. (이처럼 사디스트의 “어떤” 마조히즘, 마조히스트의 “어떤” 사디즘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의사도 발열(la fièvre)을, 가능한 질병들의 매우 일반적인 표현처럼 비결정적인 징후(syndrome)를 거기서 보는 대신에, 특별한 질병의 정확한 증상(le symptôme)처럼 다루었을 것인가? [의사는 발열을 징후로 본다.] 사도-마조히즘도 이러한 유형이다. 차이있는 진단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분해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도착증 일반의 징후이다. (113 158) [징후상으로 사드와 마조흐를 도착증 일반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둘은 미분화된 차이가 아니라 세분화된 차이로서 서로 다른 도착증으로 보아야 한다. 질병의 증상은 서로 다른 구성물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마조흐를 읽어야만 한다. 문학비평과 정신분석 두 분야에서 사드가 문학비평과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동시에 영향을 주고 또 이 두 분야를 또한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하면서 매우 깊은 연구의 대상이었을 때, 마조흐를 읽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 (113, 158-159)
사실상, 사드의 천재성과 마조흐의 천재성은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그들의 세계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공상적 기교(leur technique romanesque)[소설적 서술 방식]도 서로 연관이 없다. (114, 159)
문학적으로 마조흐는 환상과 긴장을 대가이다. 이러한 기술(cette technique) 뿐이겠는가. 그는 훌륭한 작가이며, 사드가 자기 서술들을 통하여 논증의 힘들 재결합할 수 있었듯이, ㅁ마조흐는 민담을 통하여 신화의 힘을 재결합하였다. 두 작가의 이름은 두 가지 기초적 도착증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 그것은 질병들이 원인으로 기능하기에 앞서서, 징후들에 의해서 이름 지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상기해야 한다. 의학의 과학적이고 실험적인 부분인 병인학은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부분인 증후학에 종속되어야 한다. (114, 159)
§11.5.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불공가능성”에 관한 결론들. - Conclusions sur l’“incompossibilité” du sadisme et du masochisme
사도-마조히즘은 잘못 붙여진 이름들 중의 하나이며, 기호학적 괴물(monstre sémiologique)이다. 우리는 겉보기에 공통적 기호(un signe) 앞에 있다고 하자마자, 환원할 수 없는 증상들(symptômes irréductibles)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징후(un syndrome dissociable)가 문제거리였다. 요약해보자.
1) 사디즘의 사변적이고 증명적인 권한(la faculté 능력), 마조히즘의 변증법적이고 상상적인 권한.
2) 사디즘 안에서 부정적인 것과 부정, 마조히즘 안에서 부인과 중지적인 것.
3) 양적 반복, 질적인 중지(le suspens)[긴장]
4) 사드적인 것에 고유한 마조히즘, 마조히즘에 고유한 사디즘, 하나는 다른 하나와 결코 조합되지 않는다.
5) 사디즘에서 어머니의 부정과 아버지의 팽창, 마조히즘에서 어머니의 “부인”과 아버지의 무화(l’annihilation). [부정 없다, 부인 아니다]
6) 두 경우에서 물신(le fétiche)의 역할과 의미의 대립, 환상에서도 마찬가지[대립]이다.
7) 사디즘의 반미학적(l'antiesthétisme), 마조히즘의 미학적(l'esthétisme)
8) 하나는 “제도적(institutionnel)” 의미, 다른 하나는 계약적(contractuel) 의미.
9) 사디즘에서 초자아와 동일화(l'identification), 마조히즘에서 자아와 이상화(l'idéalisation).
10) 탈성화와 재성화에 대해 반대되는 두 형식들
11) 전체를 요약하자면, 사드적 무감동(l'apathie)과 마조흐의 냉정함(le froid) 사이에 근본적 차이.
이 열한가지 명제들은 사디즘-마조히즘의 차이들을, 이에 못지않게 사드와 마조흐의 절차들(des procédés)에 대한 문학적[인문학적] 차이를 표현하였다. (114-115, 159-160, 마지막 문단 전체) (lu, 53TLG) (7:22 53VLG) (7:34, 54LME)
**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쾌락 원리의 저편(Jenseits des Lustprinzips, 1920; Au-delà du principe de plaisir)
1888 라이크(Theodor Reik, 1888-1969) 오스트리아-미국 정분석학자. Trente ans avec Freud (From Thirty Years with Freud, 1940), 현대인에서 마조히즘(Masochism in Modern Man, 1941(Le Masochisme, Paris Payot, 1953) / 성과 사회에 있어서 마조히즘, M. H 바이젤, B.M. 커스 역(그로브, 1962), pp 201, 209.
1903 라가쉬(Daniel Lagache, 1903-1972)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lu, 53TLG) (7:35, 53VLG) (8:08, 54L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