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오래된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서
1.
고교시절 나는 국어수업을 좋아했다. 총각선생님을 흠모하는 사춘기소녀라는 빤한 설정이 아니라 얼굴에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남고생이 중년의 무명비평가인 국어교사의 수업에 매료된 것이다. 이를 테면 「춘향전」에서 춘향의 수절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절을 지키는 고고한 여인의 모습이라는 유교적 도덕관에서 해석하기 보다는 관기의 딸로서 신분상승을 위한 유일한 통로를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사회학적 관점은 새롭기도 했지만 신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 초반 고등학교 교실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종종 학생들에게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물었고 누군가 어떤 책을 읽고 있다고 하면 그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있다고 하자 그는 반색을 하며 절반을 넘는 수업시간을 할애해가며 주인공 이명준의 선택에 대해 그리고 북의 광장과 남의 밀실에 대해 질문하고 또 스스로 답변을 하더니 마지막에는 친구의 안목과 독서수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날 나는 하굣길에 서점에 들러 『광장』을 구입했고 몇날며칠을 매달렸다. 하지만 분단된 나라의 남쪽에서 태어나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17세 소년의 눈에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둔 그리고 남과 북의 사회를 모두 경험하고 전쟁포로가 된 주인공이 왜 양쪽 체제 모두에 회의감을 갖는지, 왜 제 3국을 택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제3국으로 가는 배의 갑판에서 바다에 몸을 던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개인의 밀실은 없고 광장만 있는 사회’와 ‘개인의 밀실은 있으나 집단의 삶을 꾸릴 광장이 없는 사회’는 좀체 가늠하기 어려웠다. 소득이 있었다면 사람 사는 세계의 불가해함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 했고 그것에 대해 쓰는 예술가이면서 지식인이라는 문학인의 독특한 위상에 흥미를 느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수업이 좋았다. 시니컬하지만 텍스트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는 그의 수업을 들으며 나의 경험과 사유를 글로써 남기고 그것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는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막연한 결심을 한 것도 이때쯤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한 학기가 절반쯤 흘렀을 무렵 그가 숙제검사를 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숙제를 확인해오던 그가 내 공책을 보더니 “너 인마, 다음부터 글씨 오른발로 써!”라고 하며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내가 악필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며칠씩이나 공들였던 숙제의 내용은 무용지물이었고 내 글씨가 손이 아닌 발로 그것도 왼발로 쓴 것이라는 그의 지청구에 나는 절망했다.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나를 위로 한 것은 짝이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우리가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할 때면 컴퓨터가 모든 것을 하는 시대가 되기 때문에 글씨 쓸 일이 없어진다. 그러면 글씨 못쓴다는 타박을 받을 일도 글씨 못쓴다고 고민할 일도 없어질 거다. 잊어버리고 나가서 공이나 차자.”
그날 이후 숙제검사 때 그리고 대학시절 리포트를 제출하거나 논술형 시험을 치르고 나면 악필로 가슴 졸이며 괴로워했다. 그런 트라우마는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 보편화된 컴퓨터 보급으로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다.
그 후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문서를 만들고 또 글을 쓸 때면 가끔 그 친구를 떠올린다. 그날 그 친구는 의례적인 위로를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미래를 예측한 것이었을까. 근자에 초록색 칠판 위에 하얀 분필로 빽빽이 판서를 하던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필기를 하던 고등학교 동창들을 더러 만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의 소식도 전해 듣고 하는데 아직 그 친구의 소식은 듣지 못하고 있다. 학창시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인터넷 혁명의 시대를 넘어서 AI가 지배한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초입에 살며 장난기 많던 얼굴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2.
나는 1960년대 후반 도청 소재지가 있는 남쪽의 지방도시에서 태어났다. 농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두들 가난했던 시절, 전라북도의 잠업을 총괄한 제법 높은 지방공무원이었던 조부는 은퇴한 후 전주시 외곽의 송천동에 커다란 텃밭이 딸린 널따란 대지를 잡고 큼지막한 개량한옥을 지었다. 하지만 은퇴한 조부는 마작판과 작은댁으로, 아버지는 다른 지방 도시로 떠돌았기에 그 집은 할머니와 어머니, 과년한 고모들, 그리고 어린 누이와 내가 지키는 ‘여인들의 집’이었다. 노을이 내려앉고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드는 저녁 무렵이면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재한 커다란 한옥에는 쓸쓸함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나는 그 여인들의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 밤이면 구들방 아랫목에 깔린 이불에 옹기종기 모인 손주들에 둘러 싸여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어린 시절 약을 잘 못 먹은 탓에 할머니는 글을 익히지 못했고 유난히 길눈이 어두웠지만 대신 인간 복사기였다. 한번 들은 이야기는 잊는 법이 없었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한번 본 행동이나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는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였다. 나는 밤마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선채로 망부석이 되었다는 어느 바닷가의 젊은 아낙의 순애보에서부터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면 예쁜 처녀로 둔갑하여 지나가는 행인을 홀린다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이야기 그리고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이야기까지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 지난밤에 들은 이야기들을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재현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나는 동네아이들 사이에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었다.
할머니는 이제 막 글자를 익히기 시작한 나의 첫 번째 책이자 나만의 책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상상력의 보물창고였다. 이것은 빈곤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이나마 문학적 토양을 갖추고 글을 쓸 수 있게 한 맹아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라는 나만의 책은 사실 할머니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물려준 할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다시 그 할머니에게 물려준 이전의 할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 ‘오래된 책’을 내가 물려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이 책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출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재현하는
이야기꾼이 되곤 했다
아직 글을 다 깨치지 못한 어린 내게
할머니는 살아 있는 귀한 책이었다
할머니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을 테고
다시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도
오래된 그런 책이 있었을 게다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만
「오래된 책」(『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사, 2014.)
언제 누구에게서 시작되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내가 그만 잃어버린 이 책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다. 종이책이 보편화 되고 나아가 차고 넘치게 되면서 그런 ‘오래된 책’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과 인식마저도 희미해졌을 뿐만 아니라 돈을 받고 소설을 읽어준다는 전기수(傳奇叟) 이야기가 되레 새롭고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종이의 탄생은 인류의 기록을 향한 오랜 욕망의 완성형일지도 모른다. 파피루스에서부터 점토, 나뭇잎, 대나무조각과 나뭇조각, 비단, 동물의 가죽을 거쳐 마침내 종이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희생을 딛고 이룩한 기록문화의 완성을 향한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또 채륜이 종이를 발견한 이후 고선지, 아부 무슬림, 칭기즈칸 등 영웅들의 원정길은 정복과 전쟁의 길인 동시에 종이가 전파된 문명의 길, ‘페이퍼로드’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오랜 욕망이 실현됨으로써 우리는 기억이라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대신 저자 또는 작가의 탄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그러면서 더러는 감해지고 더러는 더해지기도 했을 ‘오래된 책’을 영영 잊고 또 잃어버렸다. 그리고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종언을 예상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종이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보편화되고 디지털 환경이 고도화되면서 종이를 대신하게 될 것에 대한 관심이 더해진다.
이제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더 이상 책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종이 책 위에 들어선 새까만 활자들이 빚어내는 의미망에 대한 경외심도 행과 행 혹은 활자들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는 떨림도 찾을 수 없다. 종이책을 펼치기 전의 머뭇거림과 가벼운 두려움도 마침내 종이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희열도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읽지 않고 보는 사람들, 찾지 않고 검색하는 사람들 그리고 계속해서 링크하고 또 링크하며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구글의 바다를 헤엄치는 사람들에게 책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저자/작가는 누구이고 텍스트/작품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더 이상 책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횡으로 종으로 혹은 행과 행 사이
새까만 활자들의 관계 맺기와 의미망 속에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경외하지 않는다
책장을 펼치기 전의 작은 떨림도
가지 않은 길을 여는 머뭇거림도 없다
등잔불에서 백열등 수은등 형광등 LED등까지
어둠 아래 유구하게 이어지던 종이와의
날 선 동거는 책 속에 깊이 잠들어 있다
아직 가지 않은 길 어귀에서의 서성임
방황 속에서 마침내 길을 찾는 기쁨은
이제 먼 기억 속 전율로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미로 같은 QR코드를 생성하면
더 선명하게 더 현란하게 열리는 디지털 세계
아이들은 더 이상 알파벳 순서를 외우지 않는다
읽지 않고 본다
찾지 않고 검색한다
계속해서 링크한다
잃어버린 활자를 찾아서
구글의 바다에서 프루스트가 헤엄쳐 나온다
책이여, 이제 안녕!
「미래의 책」(『너는』, 문학과지성사, 2018.)
3.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텍스트/작품 본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담는 그릇과 그것을 둘러싼 생산 및 소비환경의 변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매개하는 매체의 변화는 있었을지 몰라도 전달하고자 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텍스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설령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엽적이거나 주변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내용과 형식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내용은 형식에, 형식은 내용에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관계에 있는 한 몸뚱이 같은 것이라는 나를 포함한 많은 동료와 독자들의 오랜 믿음이 그냥 아날로그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말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다 내가 그만 잃어버린 ‘오래된 책’과 새까만 활자들이 단어와 단어, 행과 행, 단락과 단락들로 관계를 맺고 의미를 확장하는 ‘종이책’, 그리고 계속해서 연결되는 하이퍼텍스트들로 망망대해를 펼치는 ‘미래의 책’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며 각각의 책들이 품고 있는 텍스트/작품, 저자/작가에 대하여 그 역할과 변화를 곰곰이 생각한다.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며 악필로 실의에 빠졌던 고교시절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책이여! 안녕하실 수 있겠는가.
※이 글은 『문학사상』 2022년 3월호 ‘이달의 시인’ 산문에 수록 한 것을 일부 수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