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말의 불편함
배경
사회사업 슈퍼비전 글쓰기 모임 2023년 10월 공부에서,
<복지관 사례관리 공부노트> 함께 읽다 '그래도 가족의 힘을 믿습니다.'
이 문장에서 공부를 멈추고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정리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생각이 나아간 데까지 일단 쓰고 나눕니다.
'가족'이란 말이 왜 이렇게 거슬리게 되었을까
'가족'이란 말이 왜 이렇게 거슬리게 되었을까요?
문득, 각자 가족의 '정의'나 가족과 얽힌 '경험'이 달라 벌어진 모습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 가족은 벗어나고 싶은 '지옥'입니다.
가족은 지친 몸을 맡기는 '안식처'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만난 가족들 역시 모습과 형태가 다양하고
그들을 지원한 사회사업가의 경험이 달랐으니,
'가족'이란 말이 주는 온도에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가족의 강점을 믿고 여기서 시작한다'는 말을 물리고 싶지 않습니다.
가족을 안식처로 느끼는 이에게는 내가 그러했듯이 당사자에게도
가족 관계를 '회복 개발 유지 생동 개선 강화'하고 싶은 마음(규범적 욕구)이 생겨납니다.
평안과 위로로써 가족이란 쉼터를 당사자에게도 지원하고 싶습니다.
반면, 가족이 고통이었던 사람에게도 '그래도 가족'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 힘과 쉼을 주는 게 '혈연' 가족만이 있지 않음을 안내하기도 합니다.
천륜이란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지적 관계를 꾸려보자고 할 겁니다.
사회사업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 사람 속에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 보기에
어떤 형태든 기대고 어울리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혈연 관계에서 벗어나 만난 새로운 인연 사이 속에서도 분명 사랑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결실로 새로운 (혈연) 가족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가족 따위는 낡은 제도이니 벗어던지라, 자유연애와 사회적 육아와 사회적 돌봄에 기대라' 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 양육, 사회적 돌봄만 주장하면 사회주의 국가가 떠오릅니다.
그런 무채색 사회야말로 숨막힙니다.)
'가족'을 재정의 해야 하는 시대
'가족'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 우선이겠습니다.
제 둘레에도 가족이 없어 행복했다는 이가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나 책 속에도 가족이 지옥이었기에 언제나 탈출을 꿈꾸는 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럴 때도 그 주인공에게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자'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은 내 선택으로 만난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혈연관계라는 굴레가 목을 조여오기도 합니다.
벗어나야지요. 이때야 말로 가족 외 다른 관계가 절실합니다.
다른 관계가 없으니 억압적이고 폭력적임을 알면서도 혈연관계에 매달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과 제도가 어떠하든,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관계, 그런 관계만 가족이라 할 수 없을 뿐이지,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눌 다양한 관계, 이를 가족이라 부를 수 있다면 당연히 '가족'은 있어야 합니다.
이때 '가족'이 누구를 말하고 어떤 관계를 뜻하는지 그 의미와 정의를 다시 정리해야 함을 느낍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이들 대부분이 반려동물과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이미 동거하는 이 존재를 '가족'이라 부릅니다.
홀로 자연과 벗하며 지내는 이도 대자연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
사랑 외에도 우정 인정 애정 관계가 있어야 하지만
한편, 이것이 혈연가족을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여전합니다.
사랑 또한 사람의 기본 감정이기에, 인생에서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의 끝이 고통임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인간은, 처음부터 우리는 그런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습니다.
우정 공동체, 이를 가족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우정이 다시 사랑으로 변하는 관계도 자연스럽습니다.
사랑의 결과도 또 다른 혈연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으니 헤어지기도 하고,
그때는 상실의 고통을 또 다른 관계에서 위로받으며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
...
'그래도 가족의 힘을 믿습니다'
어린 왕자가 만난 여우는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합니다.
사람 사이 갈등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물러나거나 도망가지 말고
관계 속 모난 부분을 서로 부딪치며 다듬어보자는 제안으로 이해했습니다.
더 나아가, 타자와 관계에서도 타자를 동물과 식물, 사물과 인공지능까지 포함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아이고,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가족이 누구이고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혈연가족이든 아니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아가 사물일지라도.
가족을 혈연이든 비혈연이든, 법적이든 그렇지 않든,
함께 사는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뜻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가족으로 묶여 살아온 그 관계를 응원합니다.
갈등 불화 생겨 사회사업가가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다시 시작해 보자 제안하기도 하고,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게 거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다른 가족 관계를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나태주 시인의 시 한 편 함께 읽고 싶습니다.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충남가정위탁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이연신 선생님께서
지난 2년간 책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책자기: 책방에서 자기 책 만들기> 과정에서
'가족'에 관한 책과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생각을 쓰고 모았습니다.
<아이들이 물었다, 가족이 무엇이냐고>
4월에 '도서출판 구슬꿰는실'에서 출판합니다.
*
돌봄care이란 무엇일까요?
가족과 공동체에 기대어 살아왔던 삶,
그런 돌봄이 이제는 복지 서비스만을 이르는 말로 바뀌어 쉽게 꺼내기 어려워졌습니다.
가족 기능을 대신하는 사회적 돌봄.
이때 사용하는 '사회적'의 의미가 서로 다르기도 하니,
이것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댓글 아주 어린 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돌봄'이라는 말이 안 쓰이는 데가 없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저도 요즘 그 의미가 과연 어디까지일지 하는 물음속에 빠져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일하는 사회사업가로서 가족이 주는 힘과 불편함 모두 느낍니다. 불편함을 준다하여 갈등이 있다하여 가족을 버리라 할 수 없지요. 다만 아이들에게 가족이 주는 부담으로 짖눌리지 않도록, 가족이 주는 폭력에 상처받지 않도록, 필요하다면 또다른 가족을 만들 수 있고 그것도 가족임을, 그 안에서 안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혈연중심의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확장되어 ‘사회적’ 가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절실히 필요합니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도 행복할 수 없어 보입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가족과 함께 때론 다투고 갈등이 있어도 서로 의지하고 힘을 낼 수 있다면 가족이 누구이건 가족입니다.
지난 2년 구슬꿰는 실 책방에서 김세진 선생님과 여러 사회사업가와 가족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함께 읽고 쓰고 나누니 제가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이 변합니다. 저의 변화가 함께 일하는 아이들에게 작지만 힘이 되길 바랍니다. 계속 공부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이렇게 글로 나누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위 주제로 함께 이야기 나누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그때 답을 찾지 못하고 자리를 마무리했었어요.
조금 더 궁리해 보시겠다고 하셨었는데, 글로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읽고 저도 생각해 보았는데,
여전히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책임감, 의무감이 큰 것 같습니다.
가족의 의미가 크다 보니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형태를 갖춰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듭니다.
정상(?) 범위 밖으로 벗어난 가족 형태를 이룬 사람은 특별하게 보이고요.
그러함에도 가족이라는 존재, 곁에 누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족되는 안정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족으로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습하며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혈연에서 벗어나 열린 가족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변화로부터 다른 많은 차별의 시선 또한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