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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시무언의 열정
열정(열심)!
바로 이것이 신비주의자 시무언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의 집의 열정이 나를 삼켜버렸다." 이 구절은 시무언이 즐겨 인용한 구절이며 또한 그가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기도 했다. 열정에 휩싸인 사람을 본지 하도 오래되어서 그 누구도 시무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사탄은 그 불을 끌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그의 친구가 되어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 했다.
열정? 열정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주님 역시 열정의 외투를 입었다는 것을 모르는가?(이사야 59: 17)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혼자서만 날뛰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수 그 자신도 열정적인 시몬을 그의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 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피러 오셨다. 성자 윗필드(Whitefield)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설교를 했다."
한 목사는 그의 꿈에서 열정에 대한 분석을 내렸다고 한다. "열정의 총 무게는 100 파운드인데, 야망, 위선, 칭찬에 대한 애착, 권력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자부심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4 파운드, 인간에 대한 사랑은 3 파운드, 따라서 순수한 열정은 총 열정의 100 분의 7에 해당된다." 그러나 적어도 시무언의 열정은 이렇지 않았다.
자, 이제 시무언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순수한 열정은 마귀 사탄에 의해 시험당했다. 사탄은 시무언을 다른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겁한 방식으로 그를 쓰러트렸던 것이다. 겁쟁이만이 연약해진 사람을 때리듯이 사탄은 그렇게 시무언을 공격한 것이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시무언을 신비주의로 몰아넣어, 감리교단으로부터 그를 몰아내고 거짓된 운동과 관련지어 시무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이 새로운 교단은 "시무언의 정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비록 우리의 공식적인 관계는 변했지만 그와 단절할 필요는 없다. 그 역시 바울사도나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같은 친구이자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의 재능과 봉사하는 방법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하나다. 시무언의 형의 이름인 용채(Using Diversity)와 동생의 이름인 용구(Live Forever)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구원자는 세상에 있는 그의 모든 종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그의 임종의 시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아들이여,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시무언은 바로 이 사랑에 항상 의존하였다.
한 편지에 그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이 세상이 어려울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나라가 망할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사회가 격동할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사람들이 학대하고 비웃어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몸이 아플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육체는 죽을지라도 주님은 사랑이시다.
시무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초라한 아기 예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머리를 대고 편히 쉴 곳도 없었던 보잘 것 없는 나사렛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예수였다. 예수는 산 속에서 밤을 새며 기도했던 중재자이셨으며, 가족조차 미쳤다고 오해를 했던 만인의 스승이었다.
그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 49)라고 말씀하신 열정적인 분이었다. 예수는 제자의 발을 손수 씻겨준 겸허한 분이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거부당했던 슬픈 운명의 특출난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최후의 순간에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외친 사역자였다. 시무언은 예수의 이런 사역을 위한 뛰어난 청지기였다.
많은 점에서 시무언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주님의 종이었다.
1. 그 첫 번째로 우리는 사랑을 언급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나눈다는 사명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는 사람의 속 모습을 보십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그리고 외국인이나 내국인 또는 아동과 어른을 똑 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십니다. 창녀를 멸시하고 거지나 문맹인, 그리고 아동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모른척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와 같이 시무언의 사랑은 새와 나무와 바위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바위를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부르고 차갑거나 딱딱하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낮의 새들은 그의 설교 동료였고, 밤벌레들은 그의 기도 동료라고 시무언은 말했다.
2. 기도는 이러한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기도는 그의 삶의 일부였다. 따라서 그의 설교나 대화는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어지곤 했다. 듣는 사람은 그 변화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구슬과 같다. 아름답지만 서로 연관성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실에 달려있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시무언은 설교를 하면서 성경구절을 읽고 난 뒤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까지 인도하였다. 그러면 시무언은 "아, 아버지..."하며 기도를 드렸고 당연히 우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 만큼 기도와 설교의 전환이 자연스러웠다.
기도로 된 전보를 받은 적이 있는가? 한 대규모의 부흥회를 하고 있을 때, 시무언은 나에게 전보를 쳤다. "주님, 피목사를 즉시 보내시옵소서."
"기도로 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몰라." 그가 말했다. "기도는 우리의 일이야.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이니. 우리의 본일에는 충실하지 않고 부차적인 것에만 매달려 사는 것은 힘든 일이지." 그리고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열정적인 기도는 살아있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학대를 당한다 해도 기도합시다. 외면 당한다 해도 기도합시다. 최후의 승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3. 그의 세 번째 장점은 겸손함에 있었다.
그의 겸손함은 그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했지." 그가 말했다. "거지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아이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달라고 나는 기도했어." 그는 탕아와 어린이들, 문맹인들, 불교 신자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가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 자주 언급하곤 했다.
"누구와 함께 있든지 나는 항상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려하지. 내가 그들보다 열등한 것이 있다면 나는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일은 당연하지 않는가. 평생을 거쳐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모든 것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야."
"겸손은 맨 마지막에야 가질 수 있는 미덕이네." 시무언이 말했다. "사랑이나 믿음과 같은 것은 겸손보다는 훨씬 더 빨리 가질 수 있어. 내가 기도할 때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하지. '주님, 당신의 구원을 목격하려고 기다리는 시무언입니다.'" 내가 한 모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축하해주자 시무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성령의 일을 단지 지켜봤을 뿐이네." 나는 그때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4. 시무언의 사랑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은혜로 이어졌다.
"주의 십자가 있는데"를 부른 후 가족 기도회 시간에 시무언은 바로 다음 대목에서 그의 기도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 고통을 알게 하소서 주님이 몸에 짊어지셨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입고 있는 옷까지도 수 없이 나눠주셨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피를 제외하고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때, 바로 그때서야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
5. 당연히 우리는 그의 세속적이지 않은 면도 높게 평가해야 한다.
"세상이 너를 외면했다고 해서 슬퍼하고 있나?" 시무언이 친구를 꾸짖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자네를 환영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수 천 번씩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몇 년밖에 되지 않더라도 내가 온전하게 기도하고 성령이 일할 수 있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나도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네."
어느 날 나는 주님의 짧은 생애가 이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고 그와 논쟁을 벌였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것과는 다르다. 그는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부활하여 우리가 전파할 수 있는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자네도 몸을 돌보게." 나는 이렇게 충고했다.
"내가 일찍 죽고 싶은 것은 아니네."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싶네. 웨슬리(Wesley)나 에디슨(Edison)의 긴 생애는 그것이 길었기 때문에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지칠줄 몰랐기 때문이지. 흘러가는 세월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그들이 이룬 사역이네. 몸을 돌본다고 해서 다 오래 사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야. 내가 오늘 사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을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서만 쓰고 싶네. 주님께서 내일도 날 쓸 수 있다면, 내 생명을 연장해 주실 것으로 믿네. 내가 모임에 가면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하지. '주님, 내가 이 모임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면, 나의 마지막 힘과 생각을 당신께 바치게 하소서.'"
그의 비세속적인 면은 금전에 대한 무관심에도 잘 나타났다. 그가 돈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주위 사람들과 그 돈을 다 썼다. 그리고 그에게 돈이 없을 때면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은 어떻게든 충족되었다.
시무언을 말했다. "내 가슴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는 많은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밥상에는 밥과 오이밖에 없다 해도, 그는 부담없이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그의 아내인 봉애는 오이 요리를 다섯 종류로 마련하여 반찬부족을 기가 막히게 잘 감췄다.
그의 비세속적인 면은 시간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잘 드러났다. "나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네." 시무언은 말했다. "나는 오늘만을 생각하지. 나는 지금 주님의 은총을 깨달아야 한다고 믿네. 그리고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아."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에 내가 과거의 방법을 다시 사용해서 성령이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나는 이미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거야. 이전의 승리와 축복은 어떤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것임을 믿네. 내가 새로운 은총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단지 성령과 연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시무언은 계산에도 연연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른 세속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예배를 보러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시무언은 주님께서 특별히 더 유익한 말씀을 건네주시라고 기도했다. "대중 앞에서는 정의가 실패하지."그가 말했다. "그러나 개인 앞에서는 정의가 승리해. 따라서 우리가 대중에 의해 그리고 단순한 수단에 의해 승리와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개인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실패를 하고 말지. 대중에 관해서는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각 개인에 대해서는 불가능해지지. 하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각 개인을 고려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네."
따라서 수명, 돈, 시간, 그리고 숫자와 같이 육적인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시무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쉘리(Shelly)가 말했던 "조금씩 퍼져나가는 세상의 죄의 더러움"에 말려들지 않는 이런 사람을 우리는 소리 높여 부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실패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오히려 사람답게 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데이빗 그레이슨(David
Grayson)이 말했듯이,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순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야 한다."
이제는 그의 열정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이 "이 순간"이 그에게 가져온 모든 것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는 그 대범함. 그가 편지에 썼다. "형제여, 나에게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그 어떤 계획이나 방식이 없다네. 심오한 철학적 원리를 내게서 요구하지 말게나. 죽음! 그것만이 나의 계획이며 나의 방식 그리고 나의 원칙이네. 매일같이 나는 죽음을 직시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전진하네."
이것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 거한 시무언에게 특별하게 선사하신 5-6개의 은혜이자 모든 이들을 위한 그의 장점이다. 만일 한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모두가 그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황혼, 샛별, 그리고 분명히 부르는 소리..." 3월에 그는 일을 그만 두었다. 4월과 5월 동안 휴식을 취했으나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길 바랬다. 여름이 지나자 가망이 없었고 시무언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를 존경하던 한 젊은이는 시무언을 대신해서 죽기를 기도하였다. 시무언은 그 젊은이에게 편지를 썼다:
"서서히 사라지는 나의 인생을 위해 진정으로 날 대신해서 죽고 싶은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병상의 자리를 대친 차지하려 하지 말게. 자네의 몸의 기력이 사라지고 땅에 묻힐 때까지 진리를 선포하며 기도하며 사람들의 외면을 견뎌내게. 나를 대신해 자네가 의미 없이 죽기를 원하지 않네. 하지만 진정으로 나를 따라, 십자가를 짊으로 내 진리를 채우게."
시무언은 몇몇 온천을 찾아가 봤지만 그의 건강은 여전히 악화되었다. 8월에 그는 원산에 있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다. 1933년 10월 2일 시무언은 1928년의 아름다웠던 부흥회를 회상하면서 조용히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새로운 친구들은 그의 임종을 같이 하였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인상적이다.
"주님, 저에게 3년만 더 주소서. 그러면 저는 저의 모든 힘을 거지들에게 설교하는데 쏟겠습니다. 저는 그들과 같이 굶고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울 것입니다. 오 주님, 저 거지들을 위해서 저에게 삼 년만 더 주소서!"
시무언의 어머님인 양 마리아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근완(Nearly Perfect)은 이년 반전에, 순례는 몇 달 전에 저 세상으로 갔다. 용채와 용구만이 남았을 뿐이다.
시무언이 마지막 숨을 들이 쉴 때 형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형, 내 눈을 봐. 죽음이 보여? 아니야, 죽음이 아니야. 형, 거기에는 삶이 있어. 생명이!"
시무언에게서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했던 형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받았다. 그는 어린 소년 시절 황해도에서 살던 때 이후 처음으로 주님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때 가족과 의견이 대립되었던 아버지도 지금에 와서 마침내 가족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슬퍼 보였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 해 봄에 그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다. 어느 날 자정 경에 그의 신음소리가 가족 전체를 깨웠다. 그리고 새벽에 이르기까지 가족 식구들은 그가 죽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두운 영혼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 그는 구세주를 대면했다. 주님께서는 못자국에 상처 입은 모습으로 의를 위해 부활하셨다.
평온이 있었고, 드디어 이씨 가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초대교회에는 그 나름대로 열정적인 시몬(베드로)이 있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열정적인 시무언(이용도)이 있었다. 그들의 덕목이 그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앙적 열정? 주님, 그렇습니다. 열정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드리며, 그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 그와 더불어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그래서 우리가 사탄의 속임수를 알아 볼 수 있게 하소서. 열정과 지혜, 이 두 가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갈망합니다. 주님, 그 열정과 지혜가 구체화되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방문할 날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화덕에 따뜻한 불을 지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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