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철학 산책’ 20 回 『키스 미 데들리』(1955) |
| ▲ 포스터. 추리소설 작가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 중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사진 마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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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판도라 상자 열려도 세상은 불변
[영화 속에서] 이상용 영화평론가
질주하는 여인의 거친 숨결로 시작하는 ‘키스 미 데들리’의 첫 화면은 단박에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인상적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녀가 숨가쁘게 뛰었던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시민 케인’이 톰슨 기자를 따라 주인공이 유언으로 던진 ‘로즈 버드’의 의미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영화였다면, ‘멋진 인생’이 고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도 사회적 명분과 선의지를 부여잡는 영화였다면,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이 작품에서 이전 세대의 영화들과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가 창조해 낸 주인공들은 대의명분이나 목표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선도 흐릿하다. 그것은 전후 세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정의에 대한 통념은 일찌감치 내던져 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악당보다 더 악랄한 인간이다. 알드리치의 영화 중에는 심지어 악당이 주인공보다 더 근사할 때도 있다. ‘베라 크루즈’에서 멕시코 악당 역을 맡은 버트 랭카스터가 대표적인 경우다.
“현실의 폭력이 영화의 폭력 만든다”
선과 악이 무너져 버린 시대, 허황된 명분을 쫓아 예술가들을 추방하고,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을 잠재워 버렸던 냉전 시대의 한가운데에 반골 기질을 드러낸 로버트 알드리치가 우뚝 서 있다. 영화 속 극단적인 폭력을 두고 비판이 일 때마다, 그는 “현실과 삶의 폭력이 바로 영화의 폭력을 만드는 것” 이라며 돌직구를 날렸다. 그것은 냉전 시대 속에서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던 알드리치의 영화 철학이었다.
숨 가쁘게 질주하던 여인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자동차를 멈춰 세운 크리스티나는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가 운전하는 차에 뛰어오른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이번에 화면을 채우는 것은 고문을 당하는 그녀의 비명과 길게 뻗은 다리뿐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붙잡혔고, 마이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크리스티나의 배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비록 부인들의 요청으로 남편들의 뒷조사를 하며 양측 모두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파렴치한 탐정이지만 크리스티나가 숨겨둔 ‘상자’는 그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한다. 이 상자의 실체는 경찰 팻에 의해 세 단어로 묘사된다.
‘키스 미 데들리’에서 수수께끼의 퍼즐처럼 등장하는 세 단어는 상자가 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려준다. 그것은 이 영화가 핵의 공포를 다루고 있는 탐정영화이며, 일찌감치 그 비밀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영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비밀이 풀렸음에도, 구소련의 스파이로 보이는 소버린의 정체나 마이크를 속여 상자를 탈취한 릴리의 정체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묘사할 뿐이다.
불행한 것은 핵이라는 비밀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죽임을 당해야 했던 시대성이다. 핵의 위압감에 압도당한 채 모두가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희생자 중 하나인 자동차 정비공 닉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바바 붐” 은 시대를 향한 농담인 동시에 핵의 공포를 희화하는 말이었다.
1950년대는 또한 핵의 공포와 함께 매카시즘의 열풍이 퍼지던 시기였다.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영화 속 닉이나 크리스티나처럼 희생양이 되던 냉전 시대의 한가운데였다.
시대의 공포에 맞서 삐딱하게 세상 응시
알드리치는 이같은 시대의 공포에 맞서 삐딱하게 보기를 선택한다. 냇 킹 콜의 음악이 흐르고 크리스티나를 태운 차의 앞창을 배경으로 ‘키스 미 데들리’라는 제목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시작 화면이나 영화 전반에 걸쳐 구현된 사선의 구도는 뻔한 탐정영화 속에서 알드리치가 가려고 했던 길을 대변해준다. 삐딱한 시선으로 영화라는 것이 하나의 악몽일 수 있음을, 그 악몽만으로도 거대한 세계의 비판과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숨겨져 온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그러나 상자가 열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죽음을 만들 뿐이다. 알드리치는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면서 세상의 모든 판도라를 열고자 했다. 그는 보여준다. 세상의 비밀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영화를 통해 세상 그 자체를 열어젖혀야만 한다는 것을. 알드리치처럼, 삐딱하게.
[영화 밖으로] 강신주 대중철학자
비밀은 ‘비밀 유지’ 될 때만 매력, 내용 알려지면 봄눈 녹듯 허망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비밀에 접근해 가는 해머의 급박한 모험을 통해 우리를 영화 속으로 빨아들인다. 적절한 하이앵글과 로우앵글 기법, 냇 킹 콜과 슈베르트의 선율로 충만한 흑백 영상의 강력한 미장센도 비밀을 향한 우리의 불안감과 호기심을 증폭시키지만, 무엇보다 주요한 미끼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비밀이 어떤 검은 상자와 관련되었다는 은밀한 ‘정보’다. 이 상자에 몰입하는 순간, 우리는 저예산 B급 영화의 조악함이나 스토리 전개의 엉성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과묵한 사람이 매력적인 것과 같아
검은 상자의 비밀은 영화 종반부에 해머의 친구이자 정부요원인 팻이 말한 세 단어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맨해튼 프로젝트, 로스앨러모스, 트리니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소련, 영국, 그리고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니 정확히 말해 완전히 파멸 하지 않기 위해 원자폭탄 제조법을 기를 쓰고 먼저 얻으려 한다. 역사는 최종 승자로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다. 바로 이 원자폭탄 제조계획이 ‘맨해튼 프로젝트’ 이고, 그것이 이루어졌던 장소가 ‘로스앨러모스’ 이며, 시험용으로 만든 최초의 원자폭탄 이름이 바로 ‘트리니티’였다. 검은 상자 안에는 바로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을 태워죽일 수 있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통해 알드리치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55년에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했던 원자력의 잔혹함을 경고한 것일까, 아니면 권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야비한 행각을 냉소적으로 보여주려던 것일까.
나는 다른 측면을 좀 더 크게 느꼈다. ‘비밀’. 감독이 내용과 형식을 통해 일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비밀’에 관한 이야기 아니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해 ‘비밀의 비밀’을 일찌감치 간파했기에 알드리치는 도저한 영화 감독으로 평론가들과 후배 감독들로부터 지금까지도 상찬을 받는 것이 아닐까.
검은 상자의 비밀이 알려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 ‘키스 미 데들리’는 사실상 끝난 것이다. 남은 것은 이제 해머나 관객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 상자가 열리는지를 확인하는 일뿐.
알드리치는 ‘비밀은 비밀로 유지될 때에만 매력을 가진다’는 사실, 간단히 말해 신비의 신비, 혹은 비밀의 비밀을 직감했던 감독이다. 비밀이 비밀로 유지되는 순간에만, 그것은 타인의 호기심과 관심, 나아가 애정을 자극할 수 있다. 성급한 관객들이 왜 빨리 검은 상자의 내용물을 공개하지 않느냐고 투정부린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에 섣불리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요구에 응답하는 순간, 관객들은 영화가 재미없고 빤하다고 투덜거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수다스러운 사람보다 과묵한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고, 예상치 못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관심을 받는 법이다. 심지어 밝은 화장보다 짙은 스모키 화장이, 파란색이나 노란색 옷보다 검은색이나 심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더 섹시해 보이기도 한다.
비밀의 실제 중요치 않은 비밀의 세계
영화나 소설, 그리고 예술만이 그럴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타인에게서 무관심의 대상, 혹은 권태의 대상이 된다. 철학자 짐멜은 진정으로 ‘분별’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도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분별의 심리학〉이란 논문에서 말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고 서로의 심리를 모르는 게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도취를 상실한 채 무미건조해지고 서로의 관계들은 그 생명력이 마비된다. (…) 생산적인 깊이를 지닌 관계들은 마지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서 언제나 가장 최후에 드러날 모습을 예감하고 존중하며, 또한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도 매일 새롭게 정복하도록 자극한다.”
우리도 생산적 깊이를 가진 관계를 위해 각자 검은 상자 하나쯤 지니고 살면 어떨까. 자신만 열 수 있는 금고를 하나 장만해도 좋겠다. 안이 텅 비어 있어도 별무상관이다. ‘뻥이야’라는 글이 쓰인 종이 한 장을 넣어 놓아도 그럴싸하겠다. 어차피 비밀의 세계에서 비밀의 실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비밀은 봄눈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뒤니까 말이다.
… 중앙SUNDAY | 제440호 |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 2015.08.16
‘영화 속 철학 산책’ 19 回 『멋진 인생』(1961) |
| ▲ 1 주택 협동조합을 이끄는 조지 베일리는 신뢰의 상징이다. 영화는 돈이 신뢰를 흔들 때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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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신뢰가 낳은 새옹지마 영원한 아메리칸 드림 대변 ‘시민’이다
[영화 속에서] 이상용 영화평론가
프랭크 카프라(1897~1991)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경제대공황 시기(1929~1939)에 선보였던 그의 대표작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선함을 강조했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1934) ‘디즈씨, 도시에 가다’ (1936) ‘우리들의 낙원’ (1938)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1939) 등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들을 앞세워 공동체(시골)의 정신을 예찬하고, 소시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주의를 보여주었다. 고달픈 시기를 살던 1930년대 미국인들은 카프라의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 현장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감독의 자리에 섰던 카프라의 인생은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었다. 그는 6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였다.
‘크리스마스 캐럴’ 뒤집은 묵시록 성격
| | | ▲ 2 영화 ‘멋진 인생’의 포스터. 3 영화의 한 장면 | | 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 현장으로 돌아와 선보인 ‘멋진 인생’ 은 카프라의 변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작은 마을 베드포드 폴스에서 가난한 조합원들에게 대출을 통해 집을 마련하는 사업을 펼쳐나간다. 베일리가 이끄는 조합은 이 마을의 유일한 자본가 포터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 유일한 기업이다. 그런데 베일리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에 입금해야 하는 8000달러를 분실한 것이다. 이 영화는 절망에 빠진 한 남자가 어떻게 구원되는가를 보여주는 크리스마스 영화다.
은행가 포터가 원하는 것은 마을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베일리는 다 쓰러져가는 집을 조금씩 고쳐가며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행조합의 대출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짓는 사업을 펼친다. 명백하게 대립하는 두 인물의 구도를 통해 자본주의 대 인민주의,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의 구도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베일리의 연설을 통해 펼쳐지는 인간을 향한 믿음과 당위성은 1930년대 카프라 영화처럼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한다.
영화에는 이전의 카프라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요소인 ‘천사’ 가 등장한다. 영화는 절망적인 기도를 들은 신이 2등급 천사 클라렌스에게 베일리를 도와주라고 지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는 베일리 앞에 나타난 이가 바로 클라렌스다. 그는 베일리의 소망대로 ‘만약에 베일리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마을이 어떻게 변했을지 보여준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버전을 뒤집어 전개하는 이 에피소드는 일종의 묵시록이다. 포터의 손에 의해 탐욕스럽고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린 마을은 인심을 찾아볼 수가 없고,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충격적인 장면은 조합 대출을 통해 짓던 주택단지가 ‘무덤’으로 변해 있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이다.
이 악몽은 카프라 영화의 새로운 비전을 생각하게 한다. 카프라나 주인공 베일리 역을 맡은 제임스 스튜어트는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인물들이었다. ‘멋진 인생’은 전쟁이 끝나고 만들어진 카프라의 첫 영화다. 개봉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장르 영화는 코미디가 아니라 ‘필름 누아르’였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비정하고 냉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었다. 악몽을 경험한 베일리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8000달러가 넘는 돈을 모으는 장면은 설득력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올드 랭 사인’을 ‘떼창’ 하는 장면도 당시 관객들에게는 어설픈 판타지로 보였다. ‘멋진 인생’은 시대착오적인 영화였다.
인간 향한 믿음 … 성탄절 이브의 ‘기적’
그러나 이 영화의 생명력은 의외로 강했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던 ‘멋진 인생’은 저작권이 풀린 후 연례행사처럼 크리스마스 전야마다 방영되었다. 그것은 곧 미국인들의 신화를 대변했다. 사람들은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도 영화를 통해 희망을 느끼고 싶어 했고, 영화를 TV에서 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열렬한 애정을 표하기 시작했다.
카프라의 영화적 주제 중 하나는 인생은 새옹지마 (塞翁之馬)라는 것이다. ‘멋진 인생’의 새옹지마는 영원한 아메리칸 드림을 대변하면서 사람들의 희망을 품어주기 시작했다. 카프라의 삶도 그랬다. 그는 이민자로 미국에 들어왔지만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이방인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미국적일 수 있었던 카프라의 새옹지마야말로 영화만큼이나 극적인 ‘멋진 인생’을 대변해 주었다.
전쟁보다 무섭던 냉전시대 인간 속에서 ‘천사’를 찾다
[영화 밖으로] 강신주 대중철학자
‘멋진 인생’은 자본가 포터와 협동조합을 이끄는 베일리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영화다. 흥미로운 점은 포터라는 자본가를 악당으로, 베일리는 선인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미국 사회는 냉전 논리에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었다. 미국이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 소비에트 연방에 맞서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멋진 인생’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영화가 아니다. 냉전 시대에 발표된 반자본주의적 영화가 후대에 가장 미국적인 영화로 떠올랐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베일리가 꿈꾸었던 것은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자발적 공동체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건축 협동조합이었다. 조합원들이 돈을 모아 집 한 채를 짓는다. 조합원 중 한 사람이 순서에 따라 입주한다. 비싼 이자로 대출받을 일은 없지만 신뢰가 담보되어야 한다. 조합원이 집을 몰래 팔아 마을에서 탈출하는 순간, 불신이 자라게 되고 협동조합은 붕괴될 테니 말이다.
자본주의 · 사회주의를 넘으려 한 감독
베일리는 위기에 빠진 타인을 구하기 위해 항상 자신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바친다. 자신의 귀,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꿈, 심지어 신혼여행마저도 포기한다. 베일리는 협동조합을 떠받치고 있는 정서적 토대인 신뢰의 상징이다. 그러니 은행을 운영하는 자본가 포터에게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마침내 포터에게 베일리를 무너뜨릴 기회가 찾아온다. 베일리의 삼촌이 잃어버린 협동조합비 8000달러가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베일리에게 닥친 위기의 본질은 돈을 잃은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베일리의 뇌리에는 ‘사람’이 사라지고, ‘돈’이 들어오게 된다. 돈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매정하게 굴던 베일리는 자살이라도 해서 생명보험금을 타려는 생각을 품는다.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베일리를 구한다. 천사의 도움으로 베일리는 순간이나마 자신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집으로 돌아간다. 곧이어 크리스마스 이브답게 기적이 일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조합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찾아온 것이다. 신뢰를 신뢰로 갚은 것이다.
‘멋진 인생’은 표면적으로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전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의가 있다는 것, 그래서 타인을 자발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생겨난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 어쩌면 카프라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마저도 넘어서려고 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긍정한다면, 사회주의는 그 본성을 구조적으로 원천봉쇄하기 위해 사유재산 자체를 부정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동물성을 사회에 풀어놓으려고 했다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동물성 자체를 감금하려고 했던 것이다.
냉전 시대 미국인들이 ‘멋진 인생’에 감동했던 까닭은 전쟁보다 더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의 도가니에 수많은 사람과 재화를 쏟아버리고 간신히 소생한 자본주의는 이제 모든 미국인을 상호 불신과 경쟁의 콜로세움에 세웠다. 공동체라는 감각이 거의 증발해버린 무정한 사회에서, 미국인들은 안방극장에서나마 베드포드 폴스 마을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천사는 없지만 ‘천사’가 될 수는 있다
불행히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타인보다 먼저 신뢰를 보내는 이는 드물다. 행여 타인을 믿었다가 배신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베일리가 되기보다는 베일리와 같은 사람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어쩌면 ‘멋진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은 위기에 빠진 베일리를 도왔던 2등급 천사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띨띨한 천사가 없었다면 베일리는 결코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영화 이면에 깔려 있는 비장한 절망감이 은근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에는 천사가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서로 신뢰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그렇다고 천사가 없다는 것에 너무 절망하지는 말자. 바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수호천사가 될 수도 있을 테니. 잊지 말자. 천사를 기다리는 방법 말고, 우리가 천사가 되는 근사한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 중앙SUNDAY | 제439호 |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 2015.08.09
‘영화 속 철학 산책’ 18 回 『시민 케인』(1941) |
| ▲ 3 영화 ‘시민 케인’은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거의 매번 1위로 꼽히는 작품이다. 스물 다섯의 오손 웰즈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이 작품은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로즈버드(rosebud)’가 무엇인지 묻는다는 점에서 시공을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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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지 못한 남자, 그래서 케인은 ‘시민’이다
[영화 속에서] 이상용 영화평론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단어 중 하나가 ‘로즈버드(rosebud)’다. 이 말이 유명해진 이유는 오손 웰즈의 데뷔작 ‘시민 케인’ 덕분이다. 얼마 전 발표된 영국 BBC의 미국 영화 베스트 100 선정에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1위에 등극한 ‘시민 케인’은 미국 영화의 신화가 된 작품이다. 오손 웰즈는 이 영화에서 케인이라는 인물의 신화 벗기기에 나선다.
케인이 마지막에 남긴 말 로즈버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다니는 톰슨 기자에게 케인과 한 시절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고 경험한 케인을 들려준다. 그리고 톰슨 기자는 허망한 결론에 도달한다. “로즈버드는 그가 가질 수 없었던 것, 아니면 그가 가졌지만 잃어버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 케인’은 로즈버드의 의미와 케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허망한 인생을 추적하는 영화일망정 결코 허망한 영화는 아니다. 그만큼 영화가 던져주는 주제 의식은 묵직하다. 이 영화에 쓰인 유명한 기법 ‘딥 포커스(deep-focus · 광각렌즈를 이용, 초점을 화면구도의 중앙에 맞춰 전경과 후경 모두를 선명하게 찍는 촬영기법)’는 관객을 인간의 내면으로 한 발짝 데려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케인의 지인들이 들려주는 증언은 너무나 생생해 우리는 전기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은 허망한 말들의 향연이다. 그들의 말을 증명할 길도, 그들의 사랑과 증오에 반문할 방법도 없다.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되새김질 할 따름이다.
세상을 자기 안에 가두는 중년의 케인
| | | ▲ 1 유럽에서 제작된 포스터 . 2 영화속 어린 케인의 모습 | | 25살의 젊은 감독은 생뚱맞게 던져진 로즈버드의 의미를 쫓는 과정을 통해 누구나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공허를 절묘하게 묘사해 낸다. 로즈버드는 결국 삶의 공허함에 대한 치열한 의미 추구의 상징이다. 허망한 인생을 만들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각자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케인 역시 그렇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양아버지 대처와 싸우며 자본가를 공격하고, 막대한 유산으로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하는 혈기방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지사 선거 막판에는 스캔들로 인해 무너져 버리기도 하며, 정치를 포기한 채 조금은 모자란 수잔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한다. 그토록 대중 앞에서 호방했지만 결국 대저택에서 홀로 삶을 마감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케인의 모델은 동시대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였다. 그는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을 듣고 개봉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관객의 입장에서 허스트와 영화의 사실관계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으로 로즈버드를 찾아 저마다의 케인을 발견하는 재미야말로 이 영화 의 매력이다. 이번에 내게 다가온 케인은 정치적 스캔들 이후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젊은 날의 케인은 세상에 다가가려고 싸웠지만 중년 이후의 케인은 세상을 자기 안에 가두어 버린다. 거대한 성을 짓고 세계의 풍물을 사들인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 한 남자의 좌절의 이야기다. 그래서 로즈버드는 썰매일 수도, 수정 구슬일 수도, 두 번째 아내 수잔의 노래소리일 수도 있다.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무엇으로 채우든 가능하게 되어 있는 이 영화의 신비로운 구조는 아메리칸 드림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20대에 쓰여진 또 하나의 위대한 미국 작품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게 한다.
좌절한 남자가 남긴 ‘로즈버드’의 뜻은
1925년 발표된 ‘개츠비’는 ‘시민 케인’의 선배다. 독자들은 개츠비가 벌이는 사업이 정직하지 못하고, 그의 모순적 인간됨을 소설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는 ‘위대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무엇이 도대체 위대한 것일까.
강 건너 집을 짓고 매일 밤 파티를 벌이는 개츠비의 목적 중 하나는 첫 사랑이었던 데이지에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화자인 닉은 그런 개츠비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톰슨 기자도 두 번째 부인 수잔에게 “케인에게 동정심이 느껴진다” 고 말했다.
이런 인물들은 모두 거친 인생을 살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순수하고 순진한 구석들이 있다. 바로 그것을 두고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으며 오손 웰즈는 ‘시민’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민은 보통 사람, 보통 미국인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케인이 보통 사람일 수가 있는가. 그렇다. 꿈이 좌절된 자이기 때문이다. 좌절된 자의 초상은 시대를 넘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기꺼이 저마다의 로즈버드를 지니고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가 소중히 여긴 걸 아는 것
[영화 밖으로] 강신주 대중철학자
케인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오손 웰즈는 그의 지인도 순차적으로 배치한다. 유년시절 케인의 후견인이었던 은행가 대처는 고인이 되었기에 그가 남긴 비망록이 대신한다. 언론인이자 직장 후배인 번스틴, 친구 리랜드, 두 번째 부인 수잔, 그리고 집사 레이몬드를 통해 관객들은 처음 보았던 부고 영상보다 더 자세하게 케인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 중 누구도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몰랐다. 때문에 케인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들이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관객들은 받게된다. 모두 자기의 관점에서, 혹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케인을 일정 정도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로즈버드’는 케인을 이해하는 열쇠
이것이 웰즈가 이 영화로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무리 친해도 그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 웰즈는 이것을 바로 ‘로즈버드’라는 케인의 유언에 응축시켰던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웰즈는 관객들에게 한 가지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아무리 케인과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케인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이같은 웰즈의 탁월함은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집사 레이몬드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케인의 대저택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수집품 정리 때문이다. 사회적 평판, 친구, 애인 등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케인은 물건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자신의 상실을 무언가로 보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이 사라진 소장품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분류된다. 남은 사람들 눈에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물건들은 거대한 벽난로에 던져진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물건 하나에 웰즈는 카메라 앵글을 맞춘다. 흔하디흔한 목재 썰매. 그런데 썰매 표면에 뭔가 보인다. 장미꽃 봉오리 문양과 함께 ‘로즈버드’라는 선명한 상표가.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로즈버드는 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를 가장 잘 안다고 했던 다섯 사람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한 사람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것이 벽난로에 던져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연기와 재로 소멸된 로즈버드와 함께 케인은 이제 정말 우리 곁을 떠나간 셈이다. 아무리 그를 기리는 영상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이 회고록을 쓴다고 해도, 남겨진 자들이 기억하는 케인은 그저 쭉정이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겨졌으니 말이다. 결국 벤야민의 말처럼 죽은 자의 삶은 남겨진 자들의 값싼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영화에는 케인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확신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허구이자 오만이다. 반면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후견인에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소년 케인, 그리고 주인을 잃고 눈에 덮여가던 그 쓸쓸한 눈썰매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품 속에 들어있던 눈썰매.
떠난 자의 유품 정리할 때 느끼는 낯섦
자, 웰즈는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 당신은 이제 케인이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케인의 유언속 ‘로즈버드’가 정말 그 썰매를 가리키는가. 그게 썰매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만큼 케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헐떡이면 내뱉는 마지막 단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이 ‘찔레꽃’일 수도 ‘리자드’일 수도,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때, 떠나려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우리의 오만은 여지없이 좌절되고 만다.
혹은 이 순간 죽은 자의 유품을 정리하며 당혹스런 물건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옷장에서 발견된 한 번도 보지 못한 ‘참빗’일 수도, 아버지의 책을 정리하다 책갈피 속에서 떨어진 ‘편지’일 수도, 누나의 방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어느 남자의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이때에도 우리는 친숙했던 고인이 하염없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들만의 ‘로즈버드’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들이 남긴 로즈버드를 다른 유품과 함께 태워버려도 된다. 아니면 하나의 수수께끼로 가슴에 품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모험, 결코 완결될 수 없는 모험을 떠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침내 그 수많은 낯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진실로 우리는 고인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를 일이다.
… 중앙SUNDAY | 제438호 |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 2015.08.02
‘영화 속 철학 산책’ 17 回 J.D.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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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현재는 지루한 법,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라
영화는 문화다. 사회상을 반영하고 역사를 담는다. 대중철학자 강신주와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할리우드, 아시아,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 7인의 대표작을 선정, 영화적 재미와 예술적 성취 그리고 영화 문화의 현재성을 각각 조망한다.
[영화 속에서] 이상용 영화평론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는 미국의 대표 감독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현재를 보라” 고 충고하는 영화다.
할리우드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인 길은 아름다운 약혼녀 이네즈와 열애 중이다. 그런데 길은 시나리오보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그 꿈을 이뤘던 선배들이 즐비한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한다. 이네즈와 함께 파리에 온 길의 소망은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다.
길의 바람은 우연하고 신기하게 이뤄진다. 길 잃은 그의 앞에 오래된 푸조 자동차가 나타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의 권유로 길은 차에 오른다. 이들과 함께 가게 된 파티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과 피카소를 만난다.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와는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이 몇 차례 되풀이되다 보니, 길의 관심은 현재로 돌아와도 늘 1920년대로 향해 있다. 길은 현재의 파리를 즐기지 못하고 헤밍웨이에게 보여 줄 소설을 쓰며, 1920년대 파리와 관련된 물건에만 눈길을 준다.
욕망의 판타지와 환멸을 절묘하게 묘사
| ▲ 1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주인공 길은 우연한 기회에 1920년대 파리로 돌아가 당대의 예술가들을 만난다. | |
그러다 길은 다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드리아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로 가 화가 고갱 · 드가 · 로트레크 등을 만난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가 너무 좋다며 기뻐하지만 드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 시대는 텅 비었고 상상력이 없어. 르네상스 시대야말로 좋은 시대야.”
그들과 헤어진 후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에서 계속 살겠다며 의사를 밝힌다. 길은 반문한다. “피카소,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있는데도요? 그들은 최고의 예술가들이잖아요.” 아드리나아는 답한다. “그건 현재잖아요. 현재는 지루해요.”
길은 그 순간 깨닫는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현재를 지루해한다는 사실을, 또한 모두가 저마다의 황금시대를 꿈꾼다는 것을.
‘미드나잇 인 파리’는 욕망의 판타지와 뒤이어 오는 환멸을 절묘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헤밍웨이가 길의 소설을 읽은 후 던지는 충고다. “완성된 소설이 마음에 들어요. 다만 한 가지가 걸리는데, 어째서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약혼녀가 현학적인 남자랑 바람피우는 걸 모를 수 있는 거지?”
길은 스타인에게 헤밍웨이의 말을 전해 듣고 황급히 현재로 돌아온다. 그는 현재의 연인 이네즈에게 그녀의 친구이자 잘난 척하는 교수 폴과 바람을 피웠는지 추궁한다. 역시 사실이었다. 이 사태의 책임은 바람을 피운 이네즈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에 무심했던 길에게도 있다. 과거를 향한 그의 집착은 현재의 아름다운 연인을 속물처럼 만들어 버리고, 급기야 내팽개쳐 버린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열정과 취향을 강조하면서 소비를 부추기고 자꾸 현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중요하게 성찰해야 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현재의 지루함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예술과 문화를 만들었다.
헤밍웨이의 낚시는 지루함과의 사투
길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두고 열광만 할 줄 알았지 작가들의 지루함을 읽지는 못했다. 파리를 떠나 키웨스트에서 머문 헤밍웨이가 집착한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낚시’다. 그것은 지루함과의 끝없는 사투였다. 말년에 쿠바에서 살게 된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노인과 바다』를 썼다. 삶의 지루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최고의 소설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부뉴엘,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이나 당대를 주름잡았던 춤꾼들이 깜짝 등장한다. 그들은 1920년대 파리의 ‘핫 플레이스’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스웨그(swag: 약간의 허세)’를 뽐낸다. 그런데 당대의 지루함을 벗어나려는 이들의 몸짓은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 현재를 직면하지 않는 열광은 일시적 탈출을 가능케 할지는 몰라도 아드리아나처럼 또 다른 욕망을 품게 만들 뿐이다.
이네즈와 헤어진 후 이어지는 장면들은 길의 지루한 일상을 보여 준다. 노천 카페에 홀로 앉아 있거나 서점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프랑스 여인 가브리엘과 마주친다. 두 사람은 골동품을 파는 거리에서 점원과 손님으로 만난 적이 있다. 가브리엘은 가게 사장이 콜 포터의 새로운 음반을 구입했다며, 며칠 전 당신이 생각났다고 말을 건넨다.
이처럼 과거의 예술은 현재를 이끌어 가는 교감의 코드로 작동하며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과거의 걸작을 돌아보고자 하는 이유는 현재보다 과거가 좋다는 단순한 예찬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의 영화와 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죽음 잊게 할 사랑이 불가능 할 때, 스스로 세상과 이별한 헤밍웨이
[영화 밖으로] 강신주 대중철학자
헤밍웨이의 모든 작품은 생생히 살아 있다. 위기가 찾아올 때 인간적 품격과 가치를 지키려고 사투하는 정신 때문인지, 간결하고 그만큼 절절하다. 자유를 위해, 당당함을 위해, 인간적 품위를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그는 이 모든 소중한 가치를 삶으로서 입증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믿었던 사람, 아니 남자였다. 나약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했던 헤밍웨이와 그의 삶은,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지키려고 상어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과 바다』의 노인과 꼭 빼닮았다.
마초라고 불릴 만큼 강성의 남자였지만, 사실 그는 여린 사람이었다. 태생적으로 당당하고 강했던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고 강해지려고 무던히도 자신을 몰아세웠다. 엽총으로 자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이 나약해지는 데에 극도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의 주어진 모습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헤밍웨이 삶에서 영감 얻는 주인공 길
이제 우리는 그가 왜 파시즘, 사자, 상어, 그리고 여자들 틈바구니로 자신을 그토록 내몰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강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 속으로 자신을 내던졌던 것이다. 동양 병법의 지혜를 빌리자면 일종의 ‘배수진 (背水陣)’을 친 셈이었다.
여기 배수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화인이 있다. 우디 앨런이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나약하고 소시민적 이미지는 헤밍웨이와 완전 딴판이다. 또 그가 연기하고 감독했던 영화들은 당당한 기개를 뽐내는 헤밍웨이의 소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우디 앨런에 대해 지닌 이런 인상이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길이 파리, 그것도 자정(미드나잇)에 겪은 환상적인 체험을 다룬다. 할리우드 자본이 요구하는 흥행 시나리오 집필에 신물이 난 주인공은 진정한 작가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그래서 문학과 예술의 도시 파리로 오게 된 것이다. 한편 파리로 함께 온 그의 약혼녀는 애인의 꿈을 순간적인 일탈 정도로만 치부한다. 그녀는 돈맛을 본 애인이 소설을 집필하는 데에 실패하면 언제든 다시 시나리오 작가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은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곳은 속물들과 무관한, 진정한 예술가들이 우글대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우디 앨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주인공 길은 바로 감독의 분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디 앨런이 좋아했던 예술가들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 길에게 가장 커다란 영감을 주는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다.
열정적 사랑은 우디 앨런이 공포 이겨내는 법
놀라운 반전 아닌가. 창작자로서 자신의 뿌리를, 본인과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헤밍웨이로부터 더듬어 찾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미드나잇 인 파리’는 헤밍웨이에게 바치는 오마주였던 셈이다. 이 영화는 결코 마초가 되지 못한 한 소시민의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디 앨런은 마초라는 휘장에 가려진 나약한 헤밍웨이의 맨얼굴을 읽었다. 그래서 길에게 젊은 헤밍웨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마저 잊게 만든다네. 두려운 건 사랑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야. 용감하고 진실한 사람이 죽음과 맞설 수 있는 건 열정적인 사랑 때문이라네. 죽음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때문이지. 물론 두려움은 언젠가 돌아오지. 그럼 또 뜨거운 사랑을 해야 하고.”
여기에서 ‘죽음’은 문자 그대로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개개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건 고독이자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 있다는 건 홀로 죽는다는 것에 다름아니니까. 그러니 여자든, 자유든, 글이든, 물고기든, 사자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무엇이든지 사랑하게 되면, 잠시나마 우리는 죽음과 관련한 모든 외로움과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까.
우디 앨런은 ‘마초’ 헤밍웨이의 이면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이기려는 처절한 의지를 발견한다. 그는 강함 속에서 약함을, 당당함 속에서 우유부단함을, 고독 속에서 사랑을 찾아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노감독은 그렇게 강해 보이던 헤밍웨이가 왜 자살로 삶을 마쳤는지 직감한 것이다. 헤밍웨이는 죽음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사랑이 아예 불가능해졌을 때 그 공포에 집어삼켜져 버렸다. 이제야 알겠다. 이 노감독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면서까지 사랑을 다시 시작했던 이유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이유를. 우디 앨런은 죽음이 던지는 외로움과 공포를 열정적인 사랑으로 이겨내려 했던 것이다.
… 중앙SUNDAY | 제437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7.26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6 回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
|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1919~2010),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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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하게 죽기 바라는 영웅의 여정
한 권의 책이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레이코가 와타나베를 향해 이상한 말투를 쓴다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닌지”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컨스피러시’(1997, Conspiracy Theory)에서는 집에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쌓아 놓는 멜 깁슨이 나오는데, 그는 이 책이 음모를 전파한다고 믿는 편집증적 캐릭터다. 역사의 스캔들로 남아 있는 장면 하나는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이 이 책을 지니고 있던 모습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호밀밭의 파수꾼』과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20세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았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Jerome David Salinger·1919~2010) 가 이 책을 완성한 것은 1950년 가을이다. 그는 원고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펼쳐지던 해안에서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다듬어 완성한 원고를 샐린저는 주변 편집자들에게 발송한다. 미국 하코트브레이스앤컴퍼니의 편집자 로버트 지로는 작품에 수긍하지 못했다. 영국 출판사 해미시해밀턴 대표 제이미 해밀턴도 “샐린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에서는 엄청난 재능이 느껴지고 이야기 자체도 아주 재미있지만, 미국 청소년의 은어가 영국 독자들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해밀턴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이 책을 출간한다. 미국에서는 리틀브라운앤컴퍼니의 편집자에게 새롭게 전달되어 출간됐다. 샐린저는 요구가 많았다. 미국 출판사에는 사전에 홍보용 책자를 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뒤표지에 실린 작가 사진은 빼 달라고 요청했다. 영미권은 물론이고, 국내 판본에도 책표지에 사진이나 이미지가 없는 것은 그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51년 7월 16일 마침내 미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소설은 출간 직후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7개월 동안 머물렀다.
허위와 기만에 찬 중산층을 향한 혐오
작품은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영어를 제외한 네 과목에서 모두 낙제하여 퇴학을 당한 후 (벌써 네 번째다!) 겪는 2박 3일 동안의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다. 변호사 아버지에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를 형으로 둔 이 부유층 자제의 불만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고. 조금이라도 긁힐까 봐 걱정하지를 않나, 모이기만 하면 1갤런으로 몇 마일이나 달릴 수 있나 하는 얘기들을 하지. 새 차를 사 놓고도 금세 새로 나온 차를 갖고 싶어하고 말이야. 난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아. 관심조차 없지.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잖아.”
차보다 말을 선호하는 홀든의 태도에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중산층 계급과 기성세대를 향한 혐오가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홀든에게 유일한 희망이 하나 있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켜 주고 싶은 여동생 피비에게 자신의 꿈이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고 말한다.
| ▲ 뉴요커’의 담당 편집자 윌리엄 맥스웰의 아내 에밀리와 함께 서 있는 샐린저. 이곳은 샐린저가 평생 은둔하며 지낸 뉴햄프셔주 코니시 부근이다. 사진 민음사 | |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순수성의 열망이라고 해야 할 홀든의 태도를 두고 시답지 않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토록 반향을 일으킨 것은 홀든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지나가야 하는 길이 조목조목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홀든이 찾아갔던 앤톨리 선생은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홀든의 여정은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영웅의 여정이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에 여동생 피비를 위해 서부로 향하는 발길을 접는 모습은 그가 성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앤톨리 선생이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성숙이란 여행을 해본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가 보지 않는 자는 묵묵히 살아가는 데 답답함만을 느낄 것이다. 홀든은 가 본 자이기에 성숙의 길도 선택할 수가 있다.
은둔 생활로 작품 지킨 ‘파수꾼’
샐린저 또한 묵묵히 살아가는 것을 원했다. 그는 65년 이후로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80년 이후로는 인터뷰조차 응하지 않았다. 함께한 사람들은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출간 이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클레어 더글라스와의 결혼이었다. 55년 2월 17일, 두 사람은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이 보는 앞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열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았다. 샐린저는 이러한 결혼 생활과 집필 생활을 동양 종교의 자장 속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딸 마거릿 앤을 낳았음에도, 67년 클레어와 이혼하게 된다. 그사이 샐린저는 꾸준히 글을 썼다. 『프레니와 주이』(1960),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들어라』(1963)와 같은 소설들이 이때 나왔다.
그러나 샐린저의 삶은 점점 더 세상과 단절되어 갔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건은 전기 출간에 대한 소송이었다. 86년 10월 10일, 샐린저의 전기를 출간하려던 영국 작가 이언 해밀턴에 대한 소송의 승리를 통해 샐린저는 자신에 대한 과거를 지워 버렸다.
여기에 대한 비난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은둔이 지켜낸 것은 바로 그의 작품들이다. 비록 홀든처럼 살지는 못해도 그의 언어와 작품이 침묵함으로써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상의 신비로 지켜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점이 샐린저의 가장 위대한 측면인지도 모른다. 창조자의 베일이 벗겨진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은 오랫동안 음미되지 못할 수도 있을 터다. 그는 작품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
… 중앙SUNDAY | 제435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7.12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5 回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이게 다예요』 |
| ▲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1960) 포스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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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잃을 게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쓰게 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 1914~1996)를 유명하게 만든 공쿠르 상 수상작 『연인』(1984)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연인』은 1930년대 베트남을 배경으로 ‘열다섯 반’ 나이의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30대 후반의 부유한 중국인이 일 년 반에 걸쳐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뒤라스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뒤라스는 1914년 베트남 호치민에서 태어났다. 수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풍토병에 걸려 요양차 프랑스로 떠났는데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베트남에서 17살까지 살았다. 이때의 기억들은 『연인』뿐 아니라 뒤라스의 작품 곳곳에 펼쳐져 있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간 후 가정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미움과 폭력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닌 음습함은 대부분 작가 자신이 창조한 작품들을 통해 전해진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1950), 『숲 속의 나날들』(1976), 『연인』(1984), 『북중국의 연인』(1991)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작품의 연대기를 보면 평생에 걸쳐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다양한 형태로 쓰였다.
뒤라스가 겪은 고독은 글쓰기에 담겨 있다. “나는 초기 작품들에 나타나는 그런 고독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어디에 가든 항상 내 글쓰기는 나를 따라다녔다. 파리에서도, 프랑스의 트루빌에서도, 뉴욕에서도.”
글쓰기로 승화된 고독, 문학과 영화를 넘나들다
뒤라스는 같은 기억을 다양하게 쓰는 사람이다. 문학과 영화를 오가며 매체를 바꾸기도 하고, 기억의 실타래를 조금씩 빼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 기억은 영화의 세계로 옮겨지기도 했다. 칸 영화제에 상영되어 예술 및 비평 부문을 수상한 ‘인디아 송’(1975)은 베트남의 기억을 콜카타로 옮겨 놓은 결과물이자 뒤라스가 성취한 영화적 시도였다.
“어머니는 코친차이나의 빈롱에서 지역민을 가르치는 학교 교사였어요. 어느 날, 행정관이 다른 임지로 발령을 받아 떠나갔어요. 그리고 새 행정관이 라오스에서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도착했지요. 처음으로 그 부인이 내 소설에 등장한 것은 내가 40세였던 1964년에 쓴 소설 『롤 발레리 스탱의 황홀』이에요. 그녀는 65년작 『부영사』에서 안 마리 스트레테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요. 그녀는 75년 영화 ‘인디아 송’에 다시 등장하게 돼요. (…) 나는 영화를 찍으면서 그녀의 생애를 재설정했어요. 빈롱을 인도의 콜카타로 설정했죠.”
60년 알랭 레네가 연출한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집필할 무렵, 뒤라스는 연극과 영화의 세계에 몸을 담근 상태였다. 자신이 직접 연출한 작품과 대본을 쓴 작품은 60년 이후 뒤라스 작품 세계의 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뒤라스의 글과 영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기억을 탐색하듯 흘러가는 영상이나 느릿느릿 전개되는 시적 문장들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던 60년대와 70년대 뒤라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38세 연하의 연인이 받아 쓴『연인』
‘인디아 송’을 선보이던 때는 뒤라스의 유명세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75년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캉(caen)의 뤽스 극장에서 ‘인디아 송’이 상영됐다. 그곳에 사는 젊은 남자가 뒤라스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요즘 한국 극장가에서 이뤄지는 시네마 토크는 60~70년대 프랑스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행사였다. 젊은 남자는 영화를 보고 열광했으며, 뒤라스의 책에 사인과 함께 주소를 받았다. 그 후 남자는 뒤라스에게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보냈고, 트루빌에 있던 뒤라스로부터 80년 7월에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된다. 그는 뒤라스의 마지막 연인 얀 앙드레아였다.
80년 7월 당시 뒤라스는 66세였고, 얀은 28세였다. 얀은 자기 책에서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80년 9월 ‘리베라시옹’에 기고한 주간 칼럼을 에디시옹 드 미뉘에서 책으로 묶어 출판했지요. 책 제목은 『1980년 여름』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에게 헌정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얀 앙드레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뒤라스의 임종을 지켰다. 『연인』은 뒤라스가 구술한 내용을 얀이 타이핑으로 완성한 것으로, 그는 그녀 사후 『이런 사랑』이라는 책을 통해 뒤라스와의 기억을 정리하기도 했다. 뒤라스 또한 그와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남겼다. 92년 발표한 『얀 앙드레아 스테네르』를 통해 자신의 젊은 연인을 소설의 본격적인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마지막 작품인 『이게 다예요』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와 기억의 편린들을 마지막 책으로 갈무리해 내놓았다.
뒤라스는 복잡한 작가다. 하나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조금씩, 다양한 형태의 글 위에 풀어 놓는다. 그러나 기억을 탐구하는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뒤라스는 항상 출발로 돌아간다. 『이게 다예요』에서 인상 깊은 대목 중 하나는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책은 뭐죠?” 라는 얀의 질문에 대해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베트남 체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 장편 소설은 그녀가 처음으로 글쓰기를 통해 과거와 대면한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작품들의 무수한 원천이 된다. 뒤라스는 말한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쓸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쓰게 된다” 고. 뒤라스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 쓴 글은 놀랍게도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오래도록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유전자로 인간 사이에 남겨지고 기억된다는 것을. ●
… 중앙SUNDAY | 제433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6.28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4 回 사무엘 베케트와 『고도를 기다리며』 |
| ▲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1906~1989)는 파리를 무대로 활동했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고도를 기다리며』는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쓰였다. 1막과 2막의 마지막 대사는 모두 동일하게 끝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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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속 색다름 추구한 열정의 삶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1906~1989)는 파리를 무대로 활동했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고도를 기다리며』는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쓰였다. 1막과 2막의 마지막 대사는 모두 동일하게 끝난다.
-자, 그럼 가 볼까? -응, 가자. (두 사람은 꿈쩍하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1막에서는 에스트라공이 가자는 말을 꺼내고, 2막에서는 블라디미르가 가자는 말을 꺼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말하든 결과는 똑같다. 두 사람은 합의를 하고도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어서 막이 내린다. 두 사람은 고도(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언제 오는지 모른다. 종종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의미를 향해 달리는 이야기지만,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후 베케트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그가 쓴 작품 제목들은 의미와 유의미,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간다.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떨어지는 모든 것들』『버려진 한 작품에서』『왔다 갔다』 『죽은 상상력을 상상하라』 『나는 아니야』『잘못 보이는 잘못 말해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친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베케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일종의 휴식 같은 행위였다. 그는 오랫동안 공들인 『몰로이』와 『말론 죽다』를 쓰는 동안 기분 전환으로 ‘고도’를 떠올렸다. “나는 산문(소설) 쓰기가 몰아넣은 끔찍한 우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희곡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삶이란 너무 지긋지긋해서 연극은 기분 전환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48년 10월 9일 시작돼 49년 1월 29일 탈고됐다. 하지만 바로 무대에 올려진 것은 아니다. 53년 1월 5일 바빌론 극장에서 비로소 초연됐다. 당시 아방가르드의 선두 주자 로제 블랭은 이 극의 연출뿐 아니라 ‘포조’라는 캐릭터의 역할도 맡았다. 이 작품은 바빌론 극장에서만 400회 이상 공연됐다. 그런데 정작 베케트는 마지막 리허설에 참여한 후 첫 공연도 보지 않은 채 파리 근교 우시(Ussy)의 시골집에 칩거한다.
| ▲ 1 사뮈엘 베케트의 1960년 사진 ⓒ OZKOK/SIPA/Rex/Evening Standard Ltd. 2 로열헤이마켓 극장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세트(2009) ⓒ wikipedia 3 사뮈엘 베케트의 영화 ‘필름’(1965)에 출연한 노년의 버스터 키튼 ⓒ www.voxsartoria.com | |
열정에 불 지핀 제임스 조이스와의 만남
이처럼 베케트의 삶에는 모순된 것들이 공존한다. 베케트에게 파리는 기회의 땅인 동시에 절망을 안겨 준 장소였다. 28년 파리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환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그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큰 흥미를 주지 않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오후나 저녁 무렵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일랜드 문학의 대표적 인물인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면서 그의 열정은 비로소 피어난다. 눈병을 앓고 있던 조이스를 위해 그는 책을 읽어 주고, 대필을 하거나, 조이스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주는 등 비서 일을 2년간 자청했다. 그는 조이스의 문체, 말투, 여러 가지 몸가짐까지도 모방했다. 무엇보다 침묵을 배웠다. 출판업자나 연출가, 기자, 배우들과의 관계에서 비판당하거나 언쟁을 피할 수 없을 때, 혹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베케트는 침묵함으로써 문제를 피해 가거나 해결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을 작품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다. 조이스 역시 베케트를 위해 비평문을 쓰고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엉뚱한 오해로 두 사람의 관계는 벌어지게 된다. 조이스의 딸 루시아는 베케트를 짝사랑했다가 거절당하자 심한 우울 상태에 빠지고, 조이스는 이 사태에 대한 충격으로 베케트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토머스 맥그리비는 조이스와의 결별 이후 낙담해 있는 베케트에게 ‘시 경연 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고한다. 대회 측으로부터 응시작들이 실망스럽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베케트를 떠올린 것이다. 때는 마감 전날이었다. 베케트는 맥그리비가 방을 나가자마자 시를 쓰기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 무렵 르네 데카르트의 생애와 점성술을 연결한 98연의 시 ‘호로스코프’를 완성한다.
프랑스의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사무엘 베케트가 2년간 파리에서 연구하던 인물이었다. 주최 측은 베케트의 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기교에 감탄을 보내며 그것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부탁했고, 베케트는 20개의 주석을 붙여 출판하게 된다. 이것이 베케트 최초의 단독 출판물이었다. 이처럼 베케트의 선택과 경험은 ‘왔다 갔다’하는 삶의 부조리 속에 놓여 있다.
명성 얻은 뒤에도 다양한 실험 시도
부조리함을 살다 간 베케트의 이력은 다채롭다. 64년 베케트는 ‘필름’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연출하기 위해 찾아온 러시아의 거장 에이젠슈타인과 만난 적이 있던 베케트는 36년 자신을 그의 조수로 받아 줄 수 있겠느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침묵의 작가’ 베케트가 새로운 예술적 흐름에 그 누구보다 민감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필름’에는 확실한 주인공이 있었다. 더블린 시절 영화를 즐겨 보았던 베케트는 무성 영화야말로 영화의 본성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절 무성영화의 제왕인 버스터 키튼을 앞세워 단편 영화를 완성했다. 그것은 본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지닌 흑백 단편 영화였다. 그의 매체에 대한 관심은 라디오는 물론이고 TV로도 이어졌다. 65년에는 ‘에이 조’를 집필, 66년 7월 BBC를 통해 방영하기도 했다.
69년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튀니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노벨 위원회는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새로운 소설과 희곡 형식으로 고도를 얻으려는 현대인의 궁핍함을 다룬 저작을 높이 평가한다.”
‘고도’는 그에게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가 됐었고, 젊은 날에는 선생 역할을 하면서도 베케트는 꾸준하게 글을 썼다. 유명해진 이후에도 정답을 내리기보다는 정답을 찾으려고 여러 매체와 여러 형식 사이를 오갔다. 89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매년 작품을 발표하고 연출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행위야말로 고독한 기다림을 넘어서는 생명력이 아닐까. 그는 단순히 침묵하고 기다리기보다 끊임없이 행동하고 집필하는 생명력 넘치는 예술가였다.
… 중앙SUNDAY | 제429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5.31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3 回 C. S. 루이스와 『나니아 연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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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초월한 ‘나’가 되는 길이란 …
영국 작가 닉 혼비가 각본을 쓴 영화 ‘언 에듀케이션’(2009)에는 데이비드가 여고생 제니의 부모님께 여행 승낙을 얻어 내기 위해 그녀의 부모님께 C. S. 루이스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제니는 어릴 적부터 그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독자였고,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옥스퍼드대 영문학과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터였다. 당시 루이스는 교수이자 작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와 친구들은 옥스퍼드의 정문을 지나쳐 버린 후 술집에 앉아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에 ‘클라이브’ 라는 이름으로 사인을 할지, ‘C. S.’로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언 에듀케이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가 일기 시작한 1961년 영국을 무대로 삼고 있는데, 그 가운데 클라이브 스테플즈 루이스(Clive Staples Lewis·1898~1963)라는 대작가가 있다.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비평가 조지 베일리 교수는 “전후 옥스퍼드에서 루이스의 명성은 아무리 높다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라고 평한다.
루이스는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1925년부터 모들린 칼리지에서 영문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중세 영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33년부터는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옥스퍼드에서 만난 톨킨을 비롯한 지인들을 중심으로 ‘잉클리즈’ 모임을 꾸리고, 자신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모델 삼아 『순례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낸다.
38년에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창작한다. 루이스와 톨킨은 아이들이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판타지를 쓰기로 약속하는데, “한 사람은 시간 여행 이야기를, 다른 사람은 공간 여행에 대해 쓰기로” 했다. 공간 여행을 맡게 된 루이스는 우주를 무대 삼아 3부작을 쓴다. 삼부작 중 첫 권이 『침묵의 행성 밖에서』(1938)이다.
39년은 복잡한 해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 역시 참전의 기치를 내걸었다. 39년 10월 22일 일요일, 루이스는 옥스퍼드의 세인트메리대학교 교회에서 ‘다른 신들은 없다: 전시의 문화’라는 제목으로 전쟁 발발 이후 드러난 세상의 실체와 현실에 대한 낙관주의적 환상을 거둬내야 한다는 강연을 펼친다. 그리고 40년에는 본격적인 기독교 변증서 『고통의 문제』를 내놓았다. 이 책은 곧 BBC 강연으로 이어지는 토대가 됐다. 41년 8월에 시작된 강연은 복음 자체보다는 복음의 준비를 위한 변증에 초점을 두었고, 이 강연은 변증론의 핵심이 모아진 『순전한 기독교』의 초석이 됐다.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회심
『순전한 기독교』가 출간된 것은 전쟁이 끝난 한참 뒤인 52년의 일이다. 원래 무신론자였던 루이스의 회심은 자서전인 『예기치 않은 기쁨』을 통해 공개되는데, “1929년 부활절 이후 학기에 나는 드디어 항복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는 고백과 함께 출발한다. 이 시기는 흔히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변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후 가톨릭이었던 톨킨과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인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30년대 초반의 일이다. 33년에 『순례자의 귀향』을 쓴 것도 회심 이후 시작된 기독교 저작의 출발인 셈이다.
48년 9월 8일 루이스는 ‘타임’의 표지 인물이 됐다. ‘타임’은 “옥스퍼드 대학의 가장 인기 있는 강연자” 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이며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의 대변인 중 한 사람” 이라고 그를 규정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지닌 또 다른 명성은 전쟁 기간 동안에 시작돼 전쟁이 끝난 후 본격화됐다. 일화에 따르면 39년 9월의 어느 날 아침 루이스는 가까이 지내던 여성들 앞에서 “어린이 책을 쓸 거예요” 라는 말을 꺼냈다. 그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루이스는 아이도 없는 독신 남자였기 때문이다.
전쟁기간에 루이스는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못하다가 48년부터 51년까지 일곱 편으로 이루어진 『나니아 연대기』 중 다섯 권을 쓴다. 그 첫 권이었던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은 50년에 발표된다. 작품은 전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고스란히 출발한다.
“옛날에 피터, 수전, 에드먼드, 루시라는 네 아이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이 전쟁 때 공습을 피해 런던 밖으로 피란 가 있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아이들은 시골 구석에 사는 늙은 교수 집으로 보내졌다. 교수의 집은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서도 16km나 떨어져 있었고, 또 가장 가까운 우체국에서도 3km 쯤 떨어져 있었다. 교수는 아내도 없이, 아주 커다란 집에서 매크리디 부인이라는 가정부와 세 하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창조가 아니라 놓여있는 것을 사용할 뿐”
『나니아 연대기』를 판타지 문학이나 아동문학쯤으로 취급하지만, 이야기의 출발은 전후 영국 사회를 향해 던지는 루이스의 메시지였다. 그것은 거짓과 믿음,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다. 사람들은 나이 어린 소녀 루시가 옷장 뒤에 이상한 세계가 있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루시를 따라 옷장의 세계로 들어간 아이들은 나니아라는 세계를 발견하게 되고, 아담의 자식들이라 불리는 소년, 소녀들은 왕족이 되어 검과 활을 들고 하얀 마녀를 물리친다.
그런데 루이스는 나니아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작가는 정원사처럼 ‘놓인 것들’을 가져다 새롭게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새로운 활용이 우리를 새로운 경험으로 안내해 준다. “이런 문학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을 우리에게 허용해 준다…문학은 이 모든 경험이 들어오도록 해 주는 입구다.”
그러나 이 경험은 우리의 자아를 여전히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다. “위대한 문학을 읽을 때, 나는 수천의 자아를 가지면서도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아 있다.”
이 말을 달리 풀자면, 수천의 경험을 하면서도 여전히 내 경험을 갖고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는 무수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자는 여전히 바로 나 자신이다. 참배 속에서, 사랑 속에서, 윤리적인 행위 속에서, 앎 속에서처럼 바로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한다. 그리고 나는 이때처럼 더 이상 나 자신이 된 적이 없다.”
나 자신을 초월하는 나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루이스가 회심을 통한 영성의 회복과 함께, 양대 세계대전을 통과하며, 판타지의 글쓰기 속에서 세상을 향해 던져준 메시지였다.
… 중앙SUNDAY | 제427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5.17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2 回 보르헤스의 미로형 글쓰기 (Jorge Luis Borges) |
|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영화 ‘장미의이름(The Name of the Rose)’ / 중세 수도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음모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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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창작, 그 틈을 메우는 해석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형이상학적인 작가’ ‘미로의 작가’ ‘모더니즘 문학의 탈출구’ 등으로 불린다. 대표작이 『픽션들』이다. 이 책은 1941년 출간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하 오솔길들)과 44년에 추가한 ‘기교들’ 로 나뉘어 있다. ‘오솔길들’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이 있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이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이 너무나 유명한 서문은 짧게 써도 다 말할 수 있는데, 길게 쓰는 것은 무식한 방법이라며 장편을 공격한 것처럼 축약되어 퍼져 왔다.
그런데 원문을 제대로 읽어 보면 장편에 대해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글쓰기를 합리화하는 선언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다. 이 짧은 소설은 메나르의 작품 목록을 일별한 후 그가 남긴 미완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메나르가 쓰려고 했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다른 것이 아니라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 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 대해 논평을 가하기 시작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 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어떻게 똑같은 문장으로 쓰인 작품을 표절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풍요롭다고 예찬할 수 있을까? 세르반테스의 문장은 “단순한 수사적 찬양” 에 불과하다며 절하하고, 메나르의 똑같은 문장을 두고는 “이런 생각은 어머어마하게 놀라운 것이다” 라고 극찬할 수 있을까?
글에 허구를 섞으며 기자에서 작가로
이 소설은 이야기의 재미가 아니라 생각의 재미를 안겨준다. 화가 마르셀 뒤샹의 세계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뒤샹은 화장실에 걸린 변기도 미술관에 걸리면 예술품이 된다고 생각했다. ‘샘(fountain)’이라는 그럴듯한 제목도 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방식이지 작품의 수준이 아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개념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예술가가 비평가이자 독자가 되는 방식을 통해 보르헤스는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당시 보르헤스는 일간지 ‘크리티카’의 토요일자 문학섹션 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격주로 지면에 글을 썼는데, 주로 신간 서평이나 외국 작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본격적인 소설 쓰기를 고민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을 그대로 활용해 보기로 했다. 그는 영어권 신간의 내용을 스페인어로 요약하면서 첨삭을 가했다. 처음에는 출전을 명백히 밝혔지만 나중에는 이를 귀찮아 하거나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사실에 얽매이기보다는 기존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핵심을 전파할 수 있는 허구를 뒤섞어 버리거나 비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자에서 작가로 건너가는 순간이 됐다. 실존하지 않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인물을 만들어 그가 20세기에 『돈키호테』를 새롭게 썼다고 우겨대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당신도 보르헤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원문의 내용을 번역하거나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에 있지 않다. 원문의 긴 문장은 방해가 될 따름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오마주(hommage)
『픽션들』의 비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교들’에 수록된 작품의 공통점은 불면증이다. “두 편에 대해서는 아마도 조금 자세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바로 ‘죽음과 나침반’과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대해서다. 두 번째 작품은 불면에 대한 긴 메타포다.”
기교들의 서문에 실린 이 언급은 보르헤스에게 불면증이 찾아온 35년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밤은 거대한 나팔이 되어 그의 귓가를 맴돌았고, 설상가상으로 치통이 찾아오면서 누울 수가 없을 지경이 됐다. 그의 머리에는 동네 골목골목의 세세한 정경과 호텔 창문 밖 정원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어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에서 읽었던 부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40년에 쓴 시 ‘순환하는 밤’은 불면과 치통에 시달리던 보르헤스의 헛소리 같다. “켄타우로스는 미래의 통말발굽으로 / 파피테스 족의 가슴을 짓밟으리. / 로마가 티끌로 화할 때, 미노타우로스는 / 악취 풍기는 그의 궁전 속에서 무한한 밤을 신음하리라.”
“악취 풍기는 그의 궁전 속에서 무한한 밤을 신음하리라” 는 불면증과 치통을 경험해 보았다면 한 번쯤 떠올려 볼 수 있는 문장이다. 이 고통 속에 무한히 기억하는 탐정의 이야기와 푸네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다만 켄타우로스, 피파테스, 미노타우르스를 적절히 인용할 줄 알려면 책도 꽤 많이 읽었어야 하고, 적절한 언어 조합의 능력도 갖출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와 카프카의 『변신』을 번역한 역자였고, 46년 독재자 페론 정권에 의해 잘리기 전까지 도서관 사서였다. 55년 페론의 몰락으로 인해 그는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되어 도서관으로 회귀한다.
이 모습은 하나의 상징이 됐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보르헤스를 부활시킨다. 젊은 수도사들이 의문사를 당한다. 윌리엄 수도사와 젊은 수사 아드소가 수도원의 비밀을 파헤친다. 공통점은 이들이 웃음의 비밀을 예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을 탐독했다는 것이었다. 장님 수도사 호르헤가 책장에 독을 발라 놨다. 이 책은 웃음을 예찬하는 신성모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르헤는 보르헤스의 이름을 빌려온 존경의 표시인 동시에 수도원의 책에 묻혀 자신만의 벽을 쌓은 고집스러운 노인으로 형상화된 비판이기도 하다. 책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에 앉아 이 책과 저 책을 인용하고 뒤섞으며 짧은 글을 썼을 따름이다. 다만, 에코 · 푸코 · 존 바스 등 후대의 독자와 주석가들이 이런저런 ‘설’을 추구하며 해석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것이야말로 보르헤스의 핵심이다.
그가 원한 것은 서가의 한 칸을 채울 수 있는 책의 볼륨이었다. 될 수 있다면 이 볼륨을 작게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독자와 비평가들이 상상과 해석의 볼륨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보르헤스의 작지만 무한한 미로는 그렇게 이어져 왔다.
※ 오마주(hommage) : 경의,존경,감사(의 표시) / 영화에서, 다른 작가나 감독의 업적과 재능에 대한 경의를 담아서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모방하는 일.
… 중앙SUNDAY | 제420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3.29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1 回 ‘쥘 베른과 모험소설들’ (Jules Verne) |
| ▲ 조르주 엘리아스의 영화 ‘달세계 여행’ 중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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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 · 해저 · 우주 … 탐구정신 밑바탕은 세상에 대한 사랑
『80일간의 세계일주』『달세계 여행』 『해저 2만리』의 작가 쥘 베른(Jules Verne·1828~1905)은 처음부터 과학소설을 쓴 작가가 아니었다. 프랑스 서부 낭트 출신이었던 그는 1847년에 파리의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가업을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문학이었다. 파리 생활 중 여러 문학 살롱에 출입하며 문단 인사들과 인연을 쌓았는데 그중에는 『삼총사』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도 있었다. 1849년 법학사 학위를 받지만 베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뒤마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비서로 일을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쥘 베른은 희극과 오페레타의 대본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1858년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할 일이 생겼다. 사진작가이자 모험가로 유명한 나다르가 기구를 타고 최초의 항공사진 촬영에 성공한 것이다. 그에 대한 존경심은 훗날 『달세계 여행』 주인공의 이름으로 활용됐다. 세 우주인 중 하나인 아르당(Ardan)은 나다르(Nadar)의 철자를 바꾼 것이다.
아무튼 기구에 고무된 쥘 베른은 ‘공중 여행’의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두문불출하며 집필에 몰두해 있는 베른을 위해 뒤마는 1859년 한 출판인과의 만남을 주선하는데, 그의 이름은 피에르 쥘 에첼이었다. 에첼은 단순한 출판업자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 공화국 아이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려는 교육자였고, 새로운 아동잡지 출간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베른의 원고를 건네받은 에첼은 작품의 제목을 ‘기구를 타고 5주간’ 으로 바꾸고 대폭 수정을 요구했다. 그렇게 1863년 1월 31일에 출간된 이 책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기구의 성공에 고무돼 탐험기 집필
책의 부제는 ‘세 영국인의 아프리카 탐험여행’이다.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새뮤얼 퍼거슨 박사는 친구이자 사냥꾼인 딕 케네디와 하인 조 윌슨과 함께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로 탐험여행을 떠난다. 여정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나일 강의 발원지를 확인하는 것과 아프리카 탐험의 선구자들이 탐험한 지역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모험에 앞서 친구 케네디는 질문을 던진다. “자네가 아프리카를 횡단하고 싶다면, 그게 자네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왜 보통 방식으로 횡단하지 않나?” 과학자인 퍼커슨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시도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야. 니제르 강에서 살해된 몽고 파크부터 와다이에서 실종된 포겔에 이르기까지. 뮈르뮈르에서 죽은 오드니, 소코토에서 죽은 클래퍼턴… 정말로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의 희생자 명단에 올랐다네. 어떤 방식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봐야지. 중앙을 돌파하지 못하면 옆이나 위를 돌파해야 돼.”
그것이 바로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이유였다. 세 명의 주인공은 5주간의 여정을 통해 머무는 지역마다 극한의 위기를 겪으며 세네갈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은 쥘 베른을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이의 여행’이라는 총서명으로 에첼이 펴낸 잡지 ‘교육과 오락’ 에 먼저 연재가 되고, 단행본으로 발간되는 출판문화의 형태를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총 62편의 시리즈 중 40편이 잡지에 연재된 후 출간됐다.
그러나 진정으로 경이로운 것은 쥘 베른의 상상력이 땅 속, 우주, 해저로 뻗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기본적인 요소는 『기구를 타고 5주간』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이며, 에피소드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위기를 만들고, 전체 팀을 이끄는 리더 역할은 군인이나 정치가가 아니라 과학자가 맡는다. 여기에 순종적이면서도 모험에 순응하는 캐릭터가 있고, 회의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케네디와 같은 인물이 있다. 그래서일까? 쥘 베른은 작품들을 읽다 보면 행동보다는 모험에 대해 ‘토론’할 때가 더 많아 보인다.
원하는 문장이 나올 때까지 쓰고 또 쓰고
『기구를 타고 5주간』 이후 또다시 세간을 들썩이게 한 작품은 『80일간의 세계일주』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영국신사 포그다. 여타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도에서 미망인 아우다를 구해내는 로맨스를 첨가해 두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었다. 1869년 운하가 개통되면서 런던에서 봄베이까지 여행 기간이 절반으로 단축됐다. 베른은 해운 회사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실현 가능한 계획표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소설의 반전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포그 일행은 80일을 넘겨버린 후였다. 그러던 중 포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포그 일행은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일정을 짰기 때문에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하루를 벌게 되는 셈이었다. “우주를 대상으로 한 유머” 라고 불렀던 이 아이디어는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사랑받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수십 편의 작품을 써내려간 쥘 베른은 성실한 작가였다. “늘 새벽 5시가 되면 일어납니다. 5시에 서재에 앉으면 11시까지 일합니다. 난 아주 천천히, 매우 꼼꼼하게 일하는 편이에요. 원하는 문장이 나올 때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쓰고 또 씁니다. 항상 내 머릿속에는 적어도 열 권 정도의 소설이 미리 쓰여 있어요. 주제라든지 줄거리 같은 게 아주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시간만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도 여든 권 정도의 소설쯤은 어렵지 않게 써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의 성실성은 일관성만큼이나 다양한 캐릭터의 탐구로도 이어졌다. 쥘 베른을 과학과 미래에 대한 예찬론자나 계몽주의자로만 여기지만 대표작 중 하나인 『해저 2만리』의 네모 선장은 인간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네모 선장은 노틸러스 호를 직접 설계한 천재 과학자이지만 인간에 대한 증오감으로 인해 세상과 거리를 둔다. 과학의 위력이 인간의 손에 의해 잘못 쓰일 수 있을 것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쥘 베른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은 과학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상상력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를 거닐면서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시선을 요구하고 있다. 둘 중 쥘 베른의 어느 계열의 작품을 먼저 손에 쥐든 끝내 모든 작품을 따라가게 만드는 작가다. 그것은 그가 사랑한 세상과 미지에 대한 탐구 정신 때문이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중앙SUNDAY | 제418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3.15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0 回 톨킨과 『호빗』 (J. R. R. Tolki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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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세계에서 출발 세상을 구원하는 신화의 세계로 접속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로웰 톨킨 (J. R. R. Tolkien, 1892~1973)은 사후에 명성을 더해 가는 인물에 해당된다. 그를 둘러싼 숭배 현상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1965년 미국에서 해적판 『반지의 제왕』이 출간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매니어 팬들이 생겨났다. 톨킨은 서둘러 개정 부분이 삽입된 ‘정식’ 페이퍼백을 출간한다. 68년 초 BBC에서 ‘옥스퍼드의 톨킨’이라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숭배 현상은 절정에 이르렀고, 톨킨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 답했다. “살아 있을 때 숭배 받는 인물이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람을 거만하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는 어찌되었건 저를 극히 위축되고 서툴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겸손한 우상이라 해도 추종의 달콤한 향기에 조금이나마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겠지요.”
평소 기계를 다루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던 톨킨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자신의 문장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이를 표했을 것이다. 피터 잭슨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반지의 제왕’은 새로운 클래식이 되었고, 최근에는 ‘호빗’ 3부작이 영화로 나왔다. 상업적 판단에 따른 것이긴 하겠지만,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호빗’의 이야기를 3부로 길게 늘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난해 연말에 개봉된 ‘호빗’의 마지막 편에서 난쟁이들의 전투는 지루했고, 스마우그(용의 이름)의 최후는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미국서 출간한 『호빗』 최고의 어린이 책 명성
허나 『호빗』은 톨킨이 평범한 교수에서 작가로 변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품이다. 조지앨런&언윈 출판사의 수전 대그널은 톨킨의 제자였던 일레인 그리피스로부터 톨킨이 쓴 동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원고를 받아 들고 런던으로 돌아온다. 건네받은 원고는 미완성본이었고, 용이 죽은 다음의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톨킨이 완성본을 내놓은 것은 36년 10월의 일이다. 타이핑한 원고의 제목은 ‘호빗, 혹은 그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출판사의 의견에 따라 톨킨이 직접 그린 삽화가 삽입되고 수정이 가해지면서 최종적인 교정쇄를 만들어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던 톨킨의 작업을 통해 『호빗』은 37년 9월 21일에야 출판된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친구인 C. S. 루이스의 서평을 포함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초판이 매진되기에 이른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포장된 『호빗』은 몇 달 뒤 미국에서 출간돼 최고의 어린이책으로 ‘뉴욕 헤럴드 트리뷴 상’을 받는다. 그 후에 『반지의 제왕』이 나오면서 『호빗』은 어린이책을 넘어서는 중간땅의 신화로 재편됐지만, 이 책의 시작은 분명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에 대해서는 톨킨의 증언이나 기록에 여러 판본이 있다. 30년 무렵 아버지 톨킨은 서재에서 아이들에게 빌보 배긴스라는 호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모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지금 알려진 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용의 이름은 ‘프리프탄(Pryftan)’이었고, 난쟁이들을 이끄는 대장은 소린이 아니라 오늘날 가장 유명한 영화 캐릭터 중 하나인 ‘간달프’였다. 『호빗』이 유명세를 타면서 톨킨은 호빗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나는 키만 빼놓고는 사실상 호빗입니다. 정원과 나무들과 기계화되지 않은 시골을 좋아하지요. 담배를 피우고 맛있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지만 프랑스 음식은 질색입니다.”
“땅 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로 시작되는 유명한 문장은 영국 시골 사람 혹은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시류에 의해 골목쟁이 빌보는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마법사 간달프와 난쟁이들의 방문을 맞이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운명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빌보는 수수께끼를 통해 골룸으로부터 신비한 반지를 얻고, 위험을 극복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빌보는 칼 잘 쓰는 영웅이기보다는 꾀 많은 영웅에 가깝다. 그러나 빌보의 지혜는 중간땅에 불어닥칠 미래를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소 모자라고 사소한 감정들이 작은 호빗을 채우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 구원하는 신화
『호빗』의 성공 덕분에 톨킨은 평소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본격적으로 그려나갔다. 『호빗』출간 이후 구상을 시작한 『반지의 제왕』은 골룸으로부터 얻은 반지의 과거와 현재를 재구성하면서 난쟁이, 요정, 인간, 호빗, 그리고 트롤을 비롯한 온갖 캐릭터들이 사는 중간땅의 면모를 담았다. 악의 화신 사우론이 부활하자 중간땅의 캐릭터들이 연합한 반지원정대가 결성돼 여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에도 위기를 타파해야 할 최종 임무는 마법사나 요정 혹은 왕의 후계자가 아니라 작고도 작은 호빗에게 부여된다. 『반지의 제왕』첫 장의 제목은 ‘오랫동안 기다린 파티’ 인데, 이 제목은 『호빗』의 첫 장인 ‘뜻밖의 파티’ 로부터 따온 것이다. 『호빗』의 주인공 빌보가 모험 중 우연히 반지를 찾아내 위기 때마다 요긴하게 활용했다면,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이자 빌보의 조카인 프로도는 불의 산에 반지를 던져 없애 버려야 한다. 절대반지가 악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은 파멸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짝을 이루면서 두 호빗의 모험담을 들려주었고,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구원되는 이야기의 신화를 이루었다.
톨킨은 작가이자 영문학자이며 언어학자다. 그는 북유럽의 신화와 옛이야기의 형식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대에 사라진 ‘신화’를 복원하려고 했다. 거기엔 일찌감치 고아가 되어 버린 개인사와 11랭커셔 퓨질리어 연대보병대의 하급 장교로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중 하나인 솜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적군의 포화를 뚫고 전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솜 전투의 첫날 약 6만 명의 영국군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톨킨은 인간적인 가치를 담은 이야기의 형식을 고민했고, 현실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2차 세계라 부른 중간땅을 통해 세상의 모순과 어둡고 밝은 면모들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것은 판타지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그리고 톨킨은 이를 통해 철학적, 종교적 비전을 선포한 것이다. “판타지는 유사 이래로 줄곧 인간의 권리였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의 형상대로 비슷하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된 능력의 범위 안에서 이차적인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다.”
… 중앙SUNDAY | 제416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3.01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9 回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Andrei Tarkovsky) |
| ▲ 영화 ‘노스텔지아 (nostalgia)’ 중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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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구원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구원받는다
| | |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 | 얼마 전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1932~1986)의 ‘노스텔지아(nostalgia 향수 鄕愁)’ 를 강연하는 자리에서 “현대 영화를 타르콥스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뻔한 수사학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타르콥스키 작품의 강렬함은 영화가 오락거리라는 고정관념을 훌쩍 넘어선다. 그의 영화는 거의 영적인 매체다. 그는 영화의 본질이 산문이 아니라 시적인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노스텔지아’를 만들던 즈음의 시절로 돌아가 보면, 러시아 당국은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어떻게든 검열하고 통제하려 했다. ‘보드카’ 라는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면의 의미가 무엇이냐 등등 그들은 모든 것을, 심지어 영혼의 침묵조차 정치적 의도로 환원했다. 타르콥스키는 분노한다. “바보천지 같은 자들이 결제를 하고 있는 판에 무슨 영화를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노스텔지아’ 는 점점 심해지는 러시아의 훼방에도 1983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비롯해 3개 부문 상을 거머쥔다. 수상을 계기로 예술가는 더 많은 작업을 더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러시아 감독 본다르추크가 심사위원 중 하나였는데, 타르콥스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를 해치기 위해 그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버린 셈이다. 내가 상을 받게 되면 외국에서 작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이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타르콥스키 영화에 종종 인용되는 시인이자 스승인 편지를 통해 귀국을 권유한다. “가능한 한 빨리 오너라. 사랑하는 아들아, 모국어도 없고, 고향의 산천도 없고, 귀여운 아들 안드류스카도, 예쁜 딸 올가도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다른 시대를 살기로 결심한 타르콥스키는 이렇게 답장을 쓴다. “본다르추크는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상관의 사주를 받아 나의 출품작 ‘노스텔지아’ 가 상을 받지 못하도록 모든 짓을 다 했습니다…저의 애국심에 관해서는 ‘노스텔지아’를 보십시오. 그러면 조국을 향한 감정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일치할 것입니다.”
그의 영화의 본질은 산문이 아니라 시
타르콥스키는 ‘햄릿’ 공연을 비롯한 여러 작업을 위해 3년간 해외에서 체류할 수 있는 여권 발급을 신청했고, 그것도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수상 이후의 기대감이 좌절로 끝이 나자, 타르콥스키는 1984년 7월 10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망명을 선언한다. 이제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생전에 출간된 『봉인된 시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노스텔지아’의 제작은 끝났다. 그러나 곧 나의 영혼이 내가 영화 속에서 다룬 것과 똑같은 향수를, 그것도 영원히 갖게 될 줄을, 나는 촬영 중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노스텔지아’는 러시아 시인 고르차코프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경험하는 일들을 그렸다. 그는 광인 도메니코를 만나, 그로부터 촛불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영화의 절정은 로마의 광장에서 연설을 끝낸 도메니코가 분신자살을 시도하고, 고르차코프가 온천을 횡단하며 촛불을 옮기는 장면이다. 두 개의 불꽃(분신, 촛불)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통해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다” 라는 도메니코의 말은 예언처럼 실현된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는 두 개의 시간의 봉인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촛불을 옮긴 후 죽음을 맞이한 고르차코프의 내면을 파고든다. 토스카니 지역의 폐허가 된 성당과 러시아의 농가가 합쳐지면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통합된다.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 영화를 두고 타르콥스키는 “이탈리아에서 나는 너무나도 러시아적인 영화를 찍었다” 고 술회한다.
영화 속 주인공 고르차코프의 삶은 곧 타르코프스키를 향한 예언이 됐다. 85년 12월 13일의 일기에는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부탁으로 칼롤링어 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된 과정이 남겨져 있다. 타르콥스키의 건강은 이후 계속 악화됐고, 암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타르콥스키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영화의 내용처럼 ‘향수’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향수는 단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예술과 생명에 대한 그리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정점을 향해 가는 인간의 외로움이다. 이를 증명하듯 타르콥스키는 유작 ‘희생’ 을 완성했다.
새로운 도덕적 이상을 만들고자한 열망
“사람들은 묵시론적 침묵의 증후군이 임박한 지금, 생존에 대한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명의 물을 부어 넣은 메마른 나무에 관한 전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수도승은 메마른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언덕에서 산마루까지 한 걸음씩 날랐다. 오직 그의 행위가 신에 대한 신념, 그 기적에 대한 믿음 속에서 필연적이라는 생각으로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기적을 보기 위해서 살아간 셈이다. 어느 날 아침 나무는 살아났고, 가지에는 잎사귀가 덮였다. 기적은 분명 진실에 다름 아니다.”
마른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희생’은 나무에 잎사귀가 열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와 함께 타르콥스키는 사라졌지만 그는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영화가 기적을 보여줄 것임을 믿었다. 85년의 마지막 일기 말미에 적어 놓은 기도는 절절하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지쳤나이다. 저의 육신과 영혼이 심한 충격을 받았사오니 저에게 건강을 다시 주옵소서. 저를 외면하지 마시고 저희 영혼을 구해 주소서.”
그러나 이듬해 12월, 타르콥스키는 죽음을 맞았다. 다행히 그의 영화는 하나의 기적이, 그리고 예술이 됐다. 각자가 자신을 구원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비전은 여덟 편의 남겨진 영화 속에 온전히 새겨졌다.
오늘날 이런 태도로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대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그의 열망은 “새로운 도덕적 이상”을 만드는 데 있었다. 그가 영화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예술가의 신화를 통한 불씨를 당기는 일이었다. 비록 그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영화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스크린 위에서 부활한다. 그것은 타르콥스키의 영화처럼 신비로운 일이다. 21세기에도 그의 영화는 여전히 타오른다.
… 중앙SUNDAY | 제413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2.08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8 回 린드그렌과 ‘삐삐 롱스타킹’ (Astrid Lindgren) |
| ▲ TV 시리즈 ‘말괄량이 삐삐(Pippi Longstocking)’ 의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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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지만 씩씩한 소녀 통해 용기를 말하다
| |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Pippi Longstocking) | |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동화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1907~2002)이다. 그녀는 ‘삐삐 롱스타킹(Pippi Longstocking)’을 창조한 작가이자, 여성의 삶에 대한 대변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1941년 겨울, 아스트리드는 침상에서 폐렴에 걸린 딸 카린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었다. 카린은 아스트리드를 향해 “삐삐 롱스타킹 얘기 좀 들려줘!”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삐삐 롱스타킹은 딸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름이었다.
가족도 없이 원숭이 닐슨 아저씨, 말 한 마리와 쿤터분트 저택에 홀로 사는 빨강머리 소녀는 외로운 아이다. 이따금 찾아오는 어른들이나 경찰에게 경고를 보내거나 협박을 하기도 하고, 말을 한 손으로 드는 괴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토미와 아니카에게는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다정한 친구다. 거짓말도 잘하지만 “콩고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너희들은 내가 어쩌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콩고에서 너무 오래 살았던 탓이라는 걸 기억하고 용서해 줘야 어쨌든 우린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라고 답하는 번뜩이는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44년 3월 작가는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다. 최소 두 주 정도는 다리를 매달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이 참에 아스트리드는 삐삐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작성된 타이핑 원고는 카린의 열 번째 생일을 위한 선물이 됐고, 또 한 부는 스웨덴의 유명한 어린이 출판사 본니에스르로 발송됐다.
출판사는 이 원고를 거절했지만, 이것은 그녀에게 절망이 아니라 본격적인 동화 쓰기의 시작이 됐다. 아스트리드가 두 번째로 쓴 동화 『브리트 마리는 마음을 놓는다』는 라벤 & 셰그랜 출판사의 작품 공모전에서 2등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또 한 번 같은 출판사의 공모전에 내놓은 작품이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다. 결과는 1등. 그렇게 이 책은 스웨덴에서 가장 성공한 어린이 책을 넘어 세계적인 동화가 됐다. TV시리즈로 만들어진 ‘말괄량이 삐삐’는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다.
이 책을 내놓기까지 아스트리드의 삶에는 삐삐 이상의 괴력의 필요했다. 그녀는 스웨덴 남부 지방 네스의 한 농가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20세기 초반의 스웨덴은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지나 부랑자들이 많았다. 아스트리드 역시 부엌 문가로 온 그들을 목격하고는 했다. 이 경험은 대표작 『라스무스와 방랑자』에서 묘사된다.
어릴적 농가 체험의 생생한 투영
당시 농촌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만으로 학교 교육을 마치곤 했다. 그녀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 마디켄의 힘이 컸다. 상급학교가 있는 빔메르뷔 지역 은행장의 딸이었던 마디켄은 친구 아스트리드의 부모님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자신의 부모를 졸랐다.
빔메르뵈에서 경험한 도시 생활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중 하나는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일이었다. 전화로 이 상황을 알리자 아버지의 반응은 “그래, 그렇다면 집에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낫겠구나” 였다. 당시 여성에 대한 태도는 엄격했다. 부유했던 마디켄은 빔메르뷔에서 멀지 않은 린셰핑에 방을 구해 김나지움으로 진학을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23년 ‘중등학교 시험’을 마지막으로 학교생활을 마치게 된다.
이 무렵 지역 신문인 ‘빔메르뷔 티드닝엔’에서 편집장과 단 둘만 있는 잡지에서 수습으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아스트리드의 임신과 함께 스캔들이 되어 버렸고, 작은 도시 빔메르뷔를 발칵 흔들어 놓았다.
아스트리드는 스톡홀름으로 떠나 10대 미혼모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서 양성 교육을 받고, 아이 문제를 위해 변호사이자 여성운동가인 에바 안덴을 찾아간다. 그녀의 도움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링 병원을 소개받는다. 그곳은 스칸디나비아 국가 전체에서 신생아를 출생과 동시에 자동으로 호적에 올리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다.
26년 장남 라르스 에릭손이 태어났다. 3년간 도움을 받아 아이를 위탁하기는 했지만 29년 말 아이와 함께 스톡홀롬에서 지내야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녀가 일을 하러 가면 세 살 된 아이는 홀로 집에 남아야만 했다. 다행히 30년 5월 아스트리드의 고향으로 아이를 보내면서 그녀는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이 무렵 두 번째 남자를 만난다. 아홉 살 연상인 그스투레 린드그렌이었는데, 52년 사별한다.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도 영향
이후 작가는 아이들을 위한 책을 쓰면서 자식들을 키우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한다. 44년에서 54년 사이에 열여덟 권의 책을 썼다. 그녀의 명성을 알린 대표작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발표됐다. 50년대를 지나면서 아스트리드는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 중 하나가 되었다. 58년 5월 동화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은 그녀는 그 영예에 대한 감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는 도시로 나오기 전 농가에서의 어린 시절이 매우 행복했다고 여러 번 술회했다. 그녀의 행복한 글쓰기를 두고 독자들뿐만 아니라 후배 작가들도 열렬한 애정을 바쳤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밀레니엄』시리즈의 스타 작가 스티그 라르손이다. 주인공 미하엘의 별명인 슈퍼 블롬크비스트는 아스트리드가 창조한 『소년 탐정 칼레』시리즈의 주인공인 칼레 블롬크비스트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천재 해커 리스베트는 삐삐의 성인 버전이었다.
아스트리드는 78년 독일도서협회가 주는 평화상 연설문을 통해 “폭력을 포기하는 법을 배울 수는 없을까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반문 했지만, 『밀레니엄』시리즈를 통해 계승된 인물들은 여전히 폭력적인 세상과 맞서 싸우고 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가 아이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사로잡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의 동화는 모든 사람을 위한 위로와 저항의 이야기였고, 성인의 말이 아니라 아이들의 언어와 상상을 통해 더욱 빛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중앙SUNDAY | 제410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5.01.18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7 回 마르케스 ‘마술적 리얼리즘’ (Garcia Marquez) |
| ▲ 2007년 마이클 뉴웰 감독이 만든 마르케스(Marquez) 원작의 영화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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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비옥함이 끝없는 사랑 이야기의 샘
올 4월 타계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는 장편소설 여섯 권, 중편소설 네 권, 단편소설집 여섯 권, 논픽션 일곱 권 등을 남겼다. 『백년의 고독』으로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상징이 되었다.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의 첫 대목은 어머니와 함께 자신이 태어난 콜롬비아 아라가타카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집을 팔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작가로서의 삶을 결심한 그에게는 이 무렵이 작가로서의 삶을 결단하는 시기였다.
어머니는 연락도 없이 바랑키야에 있는 마르케스를 찾아온다.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이 아름다운 지역은 마르케스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곳이다. 그는 이 지역 일간지 ‘엘 에랄도’에 칼럼을 쓰며 서점과 카페를 배회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서점에 있는 마르케스를 찾아낸 어머니는 아들과 아라가타카로 향한다. 길을 가는 도중에 마르케스의 눈을 사로잡는 간판이 있다.
‘마콘도(Macondo)’라는 이 농장의 이름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처음 여행을 다녔을 때부터 줄곧 내 관심을 끌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 이름의 시적 울림을 좋아했다. 나는 누가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에게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책 세 권에 등장하는 상상의 마을에 그 이름을 붙였다. 우연히 어느 백과사전에서 그것이 나무의 이름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꽃도 피지 않고 열매조차 맺지 않으며 가볍고 스펀지 같아 카누나 부엌 세간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세이바나무와 유사한 열대나무.
『백년의 고독』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빌어먹을! 마콘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라고 말할 때, 독자들은 이 마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머릿속에 각인된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 개인의 기억과 상상력이 뒤엉켜 있는 하나의 장소였고, 마르케스의 소설은 대부분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문학과 현실에 관하여’라는 산문에서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이 유명해진 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 소설이 유명해지자 중남미의 여러 곳에서 돼지꼬리와 흡사한 것을 지니고 있던 남녀들의 고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한 독자는 서울에서 돼지꼬리를 갖고 태어난 한 소녀의 사진을 오려서 보냈다. 내가 소설을 썼을 때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서울의 그 소녀는 꼬리를 자르고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내 책의 모든 것은 실제 사건에서 비롯”
마르케스의 작품들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창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마르케스는 모든 것이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책에 쓰인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마르케스가 태어난 카리브 해안의 문화적 특징이기도 하다. “카리브해에는 신대륙 발견 이전의 주요 신앙 속에 존재하던 본래 요소와 마술적 믿음이 그 이후에 도착한 여러 상이한 광범위한 문화와 혼합되어 ‘마술적 혼합주의’라는 이름으로 성립된 곳이다. 그래서 이런 카리브해에 대한 예술적 관심과 예술은 고갈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다.”
마르케스의 이야기는 마술적 혼합주의라고 스스로 명명한 카리브해의 비옥함으로부터 나왔고, “카리브해에서 태어나 카리브해에서 자란” 그는 “현실보다 더 가공할 만한 것을 떠올릴 수도 없었던” 작가다. 그러나 공통의 관심사는 있다. 그것은 ‘절대적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당대의 관습과 운명을 거스르는 인물들의 태도다.
2011년 헤닝 카슨에 의해 영화로 옮겨진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평생 독신으로 90세 생일을 맞은 노인이 십대 소녀와 하룻밤을 보내며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이야기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마르케스는 이게 바로 진짜 현실이라고 느끼게 해 주는 작가다.
부모의 사랑 이야기로부터 작품 구상
2007년 마이클 뉴웰에 의해 영화로 옮겨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콜레라와 내전으로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고 뒤이어 터진 전쟁으로 인해 편할 날 없던 시대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그린 50년간의 짝사랑이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은 18세기 말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를 무대로 삼는데, 열두 살 소녀와 사제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성령은 신앙보다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르겠으나, 마르케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로부터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콜라주입니다. 제가 알고 있거나 들어본 적이 있거나 읽은 적이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콜라주이지요.”
이처럼 세상사와 인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직접 영화판에 뛰어들어 각본을 쓴 적도 있고, 로마에서 영화 제작에 대해 공부를 한 적도 있다. 1996년 선보인 호르헤 알리 트리아나 감독의 ‘오이디푸스’는 콜롬비아, 멕시코, 스페인의 합작으로 만든 마르케스 각본의 꽤 알려진 영화다.
마르케스의 삶은 다채로웠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현실과는 불화를 겪을 때가 많았다. 콜롬비아의 정치적 혼란과 부정에 펜으로 맞서면서 써내려간 르포 작품인 『칠레의 모든 기록』은 마드리드에서 만난 칠레 출신의 영화감독 미겔 리틴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마르케스의 진면목은 이러한 작품들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아무리 어두운 현실을 다룬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가 문학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독특한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백년의 고독』을 출간할 무렵의 젊은 기자 시절, 해군 구축함 승무원 여덟 명의 실종 사건을 취재하고 돌아온 마르케스에게 편집국 직원들이 질문을 던졌다.
“자, 위대한 가보가 무슨 얘깃거리를 가져왔는지 한 번 봅시다!” 나는 그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죽은 생선 한 마리밖에 없어요.”
가보는 마르케스의 애칭이다. 그에게 문학이란 실종 사건을 취재한 뒤 남은 ‘죽은 생선 한 마리’ 와 같다. 이 생선의 부패함(현실)과 아이러니(유머)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페이지로 이어진다. 마르케스는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 “바람에 의해 부서질 것” 들과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질 것” 들을 돌아본다. 왜냐하면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 이다. 바로, 그것이 마르케스가 직시한 인간이란 가문의 운명이었다.
… 중앙SUNDAY 제407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12.28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6 回 피터 래빗과 베아트릭스 포터 (Beatrix Pot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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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아픈 아들 위한 위로 · 힐링 그림 편지가 아동 문학의 전설로
“깊은 숲 속 / 아주 아주 커다란 전나무 밑동 / 모래 언덕 토끼굴에 / 엄마 토끼랑 꼬마 토끼 네 마리가 살았어요. / 꼬마 토끼들의 이름은 /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였어요.”
맨 마지막에 등장한 토끼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피터 래빗’이다. 꼬마 토끼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엄마의 충고가 이어진다. “들판이랑 샛길이랑은 나가 놀아도 좋다마는 맥그리거 아저씨네 텃밭에는 들어가지 말거라. 맥그리거 부인이 아빠 토끼를 잡아갔단다.”
아빠를 잃은 토끼 가족은 어땠을까. 엄마 말 잘 듣는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은 산딸기를 따러 오솔길로 갔지만, 말썽꾸러기 피터는 혼자서 맥그리거 아저씨의 텃밭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상추를 뜯어 먹고 강낭콩을 까먹고 당근을 뽑아 먹는다. 그러다 맥그리거 아저씨와 마주치게 된 피터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친다. 그물에 걸리고 말지만 기지를 발휘해 옷을 벗어 던지고 물통에 숨어 있다가 간신히 돌아온다.
『피터 래빗』 시리즈를 아름다운 동화나 그림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냉혹한 현실을 그려낸 책이고 아이들에게 교훈적 메시지도 강하다. 20세기 초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함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품의 시작은 ‘위로’ 였다.
1893년 스코틀랜드에 머물던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는 노엘이라는 아이에게 편지를 쓴다. 포터의 가정교사였던 애니 무어의 어린 아들이다. 포터는 그림 편지로 아픈 아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노엘에게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네 마리 토끼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단다. 그 토끼들의 이름은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야.”
베아트릭스는 벤저민이라는 토끼를 키우기도 했었고, 이 토끼를 모델 삼아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1893년에는 피터라는 토끼를 키운다. 이 토끼는 베아트릭스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도 했다. 베아트릭스가 노엘에게 편지를 쓴 것도 여행 중의 일이었다.
출판사마다 출간 거절, 자비로 책 펴내
한 명의 아이를 위해 쓴 글은 1902년 『피터 래빗 이야기』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많은 출판사에서 번번이 거절당한 끝에 결국 자비를 털어 만든 첫 책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250권이 2주 만에 동났다. 그러자 출판사 프레더릭 워른은 색을 칠한 컬러판을 내는 데 동의했다. 1902년에 나온 정식 컬러판은 선주문이 8000권에 달했다. 그리하여 1905년까지 그녀는 『피터 래빗 이야기』『다람쥐 넛킨 이야기』『벤저민 버니 이야기』『말썽꾸러기 쥐 두 마리 이야기』 『파이와 파이 틀 이야기』 『골로스터의 재봉사』까지 여섯 권의 작은 그림책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워른 집안의 편집자 노먼 워른의 공로가 컸다. 워른은 포터가 5년간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 둘은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된다. 르네 젤위거가 주연을 맡은 전기 영화 ‘미스 포터’(Miss Potter · 2006)는 이 무렵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뤘다.
당대의 풍속을 거르고 포터는 자신의 작품과 세계를 이해해 주는 남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약혼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워른은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다. 낙심한 그녀는 작품의 배경이자 마음의 안식을 얻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에 있는 ‘힐탑’으로 이사한다. ‘미스 포터’는 포터가 이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포터의 삶은 이곳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데, 포터는 매매가 성사되기 전부터 힐탑에 머물면서 상실감을 달랠 수 있었다.
“돼지를 팔았다. 장사치들이 ‘헐값’이라고 부르는 가격에…이 일대 전역으로 내 돼지가 팔려갔다. 우리는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다. 녀석들이 무럭무럭 자라준다면 우리는 분명 돼지로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돼지로 얻는 명성이라니!”
농가의 일상을 담은 유머러스한 글을 보고 있으면, 자연의 치유력은 상실한 자의 마음을 친근하게 어루만져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연의 힘을 믿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열여섯 소녀 시절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지로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그렇게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피터 래빗이 활동하는 숲 속의 무대가 됐고, 연인이 떠난 이후에는 새로운 집필 장소가 됐다.
환경운동가이자 농부로 변신
포터는 이곳에서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고 자연 보호에 앞장서는 환경운동가이자 농부로 변신했다. 지역의 농장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목초를 관리하고, 양을 돌보고, 심지어 양 품평회의 심사위원까지 하게 된다. 1920년대부터 이 지역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늘어났고, 그런 한편으로 힐탑 근처를 순례하는 포터의 미국 독자들 역시 나날이 증가했다.
“‘피터 래빗’은 자신을 위해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거대한 건물과 도시의 시설이 들어와 황폐화될 위협에 직면한 윈더미어 선착장의 호숫가와 숲, 그리고 목초지를 구할 기금을 마련할 수 있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다정하고 친절한 미국인들이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다녀가셨고, 몇몇 분은 피터 래빗에 대해 묻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사인을 해서 준다고 하면 기금 마련을 위해 1기니를 낼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성금을 내기 시작했다. 농장들이 매물로 나오자 포터는 협상을 시작했다. 자금은 전적으로 책을 팔아 충당했다. 19세기 말 설립된 자연과 사적의 보호단체 내셔널트러스트에서 기금을 마련하는 대로 부지의 절반을 협회에 팔기로 합의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녀가 내셔널트러스트의 방향과 정책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녀의 노년은 조언자의 삶이었다. 자신의 땅을 내셔널트러스트 협회에 기증하면서 “원래 모습대로 보존해 줄 것” 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협회는 세계적인 환경운동의 메카가 됐다.
오늘날 이곳은 영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장소 중 하나가 됐다. 그것은 자연의 생생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백 년 넘게 사랑을 받아 온 조끼 입은 피터 래빗이 탄생하고 성장한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은 보존되어야 하지만, 신화가 될 때에야 비로소 굳건하게 지켜질 수 있다. 포터는 단순한 동화작가가 아니라 동화 같은 삶을 실천하고 만들어 갔던 살아있는 예술가였다
… 중앙SUNDAY 제403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11.30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5 回 ‘천의 얼굴’ 로맹 가리 (Romain Ga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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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모순 덩어리” 다양한 가면 쓰고 자기 앞의 생 풀어내
훈장을 탄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자 외교관이었으며 작가로 이름을 높인 로맹 가리(Romain Gary·1914~1980)는 요약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는 1975년에 일어났다.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상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로맹 가리는 56년에 『하늘의 뿌리』로 이미 공쿠르상을 받았었다. 공쿠르상은 규정상 한 작가에게 두 번 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진실은 5년 뒤 밝혀졌다. 로맹 가리는 80년 파리에서 권총을 입에 넣고 자살했다. 그리고 반년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출간됐는데, 이 책은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이며 아자르라는 이름은 로맹 가리가 쓴 다섯 개의 필명 중 하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이 출판될 즈음에는 어쩌면 이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까지 충분히 감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 후손 앞에서 나 자신을 밝히는 한, 이 글이 내 작품들 중, 그중에서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네 편의 소설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될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세상에 대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로칼랭』을 완전히 끝낸 뒤, 나는 출판사에도 알리지 않고 가명으로 발표할 결심을 했다. 명성, 내 작품의 평가 기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내 얼굴’, 그리고 책의 본질 사이에는 모순이 많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두 번이나 가명을 쓴 적이 있었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족집게 예언
이처럼 가면을 쓰며 살아가야 했던 것은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이 받아들여야 했던 근본적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맹 가리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배우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 남부 지역인 니스에 정착한다. 니스에 정착한 모자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는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에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자기 대신 아들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기 위해 홀몸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후원한 한 여성에 대한 헌사이자,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담이다. 시장 사람들에게 대거리 질을 하던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호언장담을 한다. “더럽고 냄새 나는 속물들아! 감히 너희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란 말이야. 입센, 가브리엘 단눈치오가 될 거라고! 내 아들은!”
어머니의 ‘말’은 모두 ‘사실’이 됐다. 로맹 가리는 엑상프로방스대학과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그가 대위로 제대한 로렌 대대는 45년 5월 28일 훈장을 부여받는다. 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3000번 이상의 출정으로 2500톤이 넘는 포탄을 퍼부었다. 로렌 대대의 최정예 대원 일흔다섯 명 가운데 네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그 네 명 가운데 하나가 로맹 가리였다.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35년에 쓴 단편 ‘소나기’를 ‘그랭그아르’에 발표하면서부터다. 어머니의 말처럼 입센 못지않은 유명한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작품은 훈장을 받은 해에 출간된 『유럽의 교육』. 이 작품의 수상과 함께 이등대사 서기관으로 프랑스 외무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45년은 로맹 가리에게 어머니의 예언이 진정으로 실현된 해였다.
‘네 멋대로 해라’의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인연
어머니는 전쟁기간 동안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언은 계속되었다. 『새벽의 약속』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사교계 여자들, 유명한 발레리나들, 프리마돈나들, 라셀이나 뒤즈나 가르보 같은 여자들, 바로 그들이 내가 운명적으로 차지할 여자들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나로 말하자면, 나도 몹시도 원하는 바였다.”
로맹 가리의 여성 편력은 유명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연은 미국 주재 프랑스대사로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여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1938~1979)와 만난 일이다.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인기가 많았던 진 세버그는 장뤼크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로맹 가리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를 주인공 삼아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하나는 자신의 유명한 단편을 영화로 옮긴 ‘새들의 페루에 가서 죽는다’였고, 다른 하나는 71년에 만든 ‘킬’이라는 작품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해에 로맹 가리의 나이는 예순한 살이었다. 이 무렵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 합의 이혼한 상태였고, 모든 일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에 공쿠르상이 문제가 되었을 때 ‘아자르’로 알려진 나의 친척은 이미 유명해져 있었고, 내가 다시 공작을 시작했더라고 아무도 그 이유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진짜 이유는 한마디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로맹 가리는 공쿠르를 두 번 수상한 작가라는 신화를 남겼다. 이 결과의 책임을 작가에게 짊어지우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이야기를 하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은 성인이 아니라 어린 소년 모모다. 아이는 42년에서 43년까지 폴란드의 숲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희망을 찾는 일이었다.
로맹 가리가 자살을 한 해는 진 세버그가 자살한 1년 후의 일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말이 말았고, 로맹 가리 역시 세간의 말들에 대해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는 침묵을 선택한다. 로맹 가리가 남긴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로 끝이 난다. 죽음을 통한 침묵은 수많은 작품과 말들을 남긴 세상을 향해 던져 둔 가장 완전한 문장이었다.
… 중앙SUNDAY 제402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11.23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4 回 헤밍웨이 신화 (Ernest Hemingway·1899~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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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기억과 4명의 뮤즈가 창작의 원천
1952년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그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는 작가의 신화를 써내려간 인물 中 맨 앞자리에 서있다. 그의 신화는 20세기 초의 굵직한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 파리, 마이애미, 쿠바 등 장소를 옮길 때마다 새 작품과 새 연인이 함께했다.
열아홉 살 헤밍웨이는 적십자사 운전병에 자원하면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물건을 수송하는 것이 주업무였지만 포화의 한가운데서 부상병을 도운 공로로 훈장까지 탄다. 그렇게 소년은 전쟁 영웅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온다.
1921년에는 파리로 간다. 특파원 신분으로 무솔리니와 인터뷰를 하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파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화가 피카소,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예술가와 교분을 쌓을 수 있는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통해 헤밍웨이는 ‘로스트 제너레이션’(길 잃은 세대)의 선두주자가 된다.
37년에는 종군기자가 되어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그는 이 일이 단지 스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생각은 당시 헤밍웨이를 비롯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내전을 바라보는 공통적인 정서였다.
44년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자 2차 세계대전에도 뛰어들어, 다시 파리에서 한 시절을 보낸다.
원고 작성법도 남달라서,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자판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선 채로 타자기를 두드렸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20세기 미국 문학사의 전반부를 채웠다.
아내만 네 명 … 작품 탄생에 기여
정력적인 사내의 개인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헤밍웨이의 첫 번째 부인은 연상의 해들리 리처드슨이다. 그녀와 함께 파리에서 보낸 시절을 통해 헤밍웨이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27년에는 ‘보그’의 편집자로 일하던 폴린 파이퍼와 결혼한다. 부유했던 폴린 덕분에 마이애미 키웨스트로 건너가 낚시를 하며 여유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다룬 『무기여 잘 있어라』(1929)를 쓴 것은 그녀와 함께한 기간 중이었다. 하지만 키웨스트의 삶이 녹아 있는 작품은 바다 사나이 해리 모건을 내세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1937)다.
세 번째 부인은 저널리스트 마서 겔혼이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 중에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결혼을 한 해에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내놓았고, 두 사람은 20세기의 현장을 고루 돌며 기사와 작품을 남겼다. 이들의 휴식처는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쿠바였다.
헤밍웨이의 말년을 지킨 아내는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였다. 그녀는 병들어 가는 헤밍웨이를 돌봤고, 『노인과 바다』(1952)의 완성을 지켜봤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뮤즈들과 함께 탄생한 영감의 기록물이었던 셈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헤밍웨이
이렇게 20세기 전쟁사와 여인들을 따라 작가의 신화를 정리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영화라는 필터는 신화적 인물들을 관객들에게 다소의 거리를 두고 보여준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에는 헤밍웨이가 잠깐씩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연인과 함께 파리에 온 소설 지망생 ‘길’ 이다. 자정 무렵 갑자기 등장한 구형 푸조 자동차에 올라타게 된 그는 꿈에 그리던 과거의 파리를 만나게 된다. 20년대의 파리는 미국인 예술가들의 천국이었다. 길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난다. 미국인 실비아 비치가 영어 도서 전문 대여점 겸 출판사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연 것도 이 무렵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은근히 참고하고 있는 것이 바로 헤밍웨이의 에세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에서 밥값을 빌리는 젊은 작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나 문학적 교감을 나누기도 하고, 주변의 예술가 친구들과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원제는 ‘이동축제(A Moveable Feast)’ 인데, 이 말은 부활절처럼 특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휴일을 가리키는 교회 용어다. 조금은 배고픈 예술가이던, 파리의 센 강 좌편에 거주했던 시절을 ‘축제’ 기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불확실하지만 미래를 향한 기대감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다큐멘터리 촬영도
헤밍웨이를 묘사하는 또 다른 영화는 ‘헤밍웨이와 겔혼’ 이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세 번째 부인 겔혼은 마이애미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난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영화화로 인해 헤밍웨이는 커다란 명성을 누리게 됐지만, 그는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36년 스페인내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헤밍웨이는 네덜란드의 다큐멘터리 감독 요리스 이벤스와 함께 스페인 내전을 찍기로 결정한다. 영화를 통해 프랑코가 아니라 스페인 민중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엔 ‘시민 케인’ 의 감독 오손 웰즈에게 내레이션을 부탁했지만 다툼으로 인해 헤밍웨이가 직접 마이크를 잡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스페인의 대지’는 이벤스와 헤밍웨이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합작품이다.
‘헤밍웨이와 겔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겔혼이 포화가 퍼붓는 한가운데서 아랑곳하지 않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한 예술가를 목격하는 대목이다. 인간에 대한 열정과 개인의 집착 그리고 정력적인 태도가 수많은 글자를 써내려가게 했고, 헤밍웨이를 20세기의 작가 중 앞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는 인간 카메라였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사건의 중심에서 거리를 두고 초연해서 문학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를 넘겨 헤밍웨이가 남긴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쟁이나 바다 한가운데의 광풍 속에서도 상처입기 쉬운 영혼을 붙잡는 집요함이 느껴진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등장하는 기도문은 이와 같은 영혼의 표현이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그대’를 위해 두드린 타이프가 남긴 헤밍웨이의 글은 인류에게 위로와 행운이 되었다. 그의 시대와 삶은 복잡했지만 그가 써내려간 것들은 언제나 보편적인 명쾌함을 향하고 있다.
… 중앙SUNDAY 제400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11.09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3 回 감독 히치콕과 부인 알마 레빌 (Alfred Hitchcock) |
| 부인이 OK 해야 다음 장면 찍었던 초보 감독 히치콕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감독은 영국과 미국에서 총 50여 편이 넘는 장편을 연출했으며, 초기 무성영화와 컬러영화 시대까지 두루 경험하며 영화사의 절반을 넘게 쓴 인물이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히치콕키언(Hitchcockian)’이라는 단어는 공포감과 긴장을 자아내는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어떤 이는 히치콕을 ‘사이코’로 대변되는 공포물의 대가로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옥수수밭에서 비행기가 엄습하는 스릴러의 긴장감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히치콕의 가장 오랜 관심사 중에 ‘히치콕적인’ 것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가 있다. 그것은 히치콕의 영화가 남녀 ‘로맨스’의 모험을 즐겨 다뤘다는 점이다.
히치콕은 런던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1920년 영화사에 입사해 자막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곧 미술감독을 맡게 되었고, 어느새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을 오가며 직접 연출까지 하게 된다. 영화사에서 미술감독이 연출작가가 된 경우는 드물다.
이 무렵 히치콕의 눈을 사로잡은 알마 레빌(1899~1982·이하 알마)은 히치콕보다 5년 앞서 영화계에 입문한 선배였다. 알마는 편집실에서 일을 돕는 것 외에도 스크립트를 담당하거나 시나리오 수정 집필도 했다. 편집기사와 시나리오 편집자 역할을 한 셈이다.
히치콕은 ‘여자 대 여자’의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에다 미술감독까지 겸하는 상황이 오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퇴사한 알마에게 전화를 건다. 이즐링턴에서 함께 일한 적은 있지만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위험한 환경에서 탄생하는 연인들
첫 연출작 ‘쾌락의 정원’의 촬영이 1925년 5월에 시작됐다. 초보 감독 히치콕은 당대 인기 여배우였던 버지니아 발리를 바라볼 때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연기를 지시할 때는 너무 겁이 났습니다. 내 미래의 아내에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릅니다.”
촬영이 끝날 때마다 히치콕은 매번 알마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알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비로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어서 촬영된 ‘산독수리’를 함께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이 배를 흔들었는데, 알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침상에서 발작적으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릴 때, 객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히치가 들어왔어요.” 그리고 히치콕이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요?”
이 일화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으나, 중요한 건 히치콕의 로맨스 영화에서는 늘 풍랑이나 폭풍 같은 위험한 환경이 바로 연인들을 맺어주는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해외특파원’과 ‘구명선’에는 바다 위에서의 청혼이 등장하고, ‘리치 앤 스트레인지’, ‘찢어진 커튼’에도 선상 로맨스가 등장한다. 특히 ‘리치 앤 스트레인지’는 히치콕 부부의 진짜 로맨스에 기초한 영화이기도 했다.
바다와 폭풍우를 벗어나면 위기에 처한 연인들이 커플로 맺어지는 순간은 ‘39계단’,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새’에서도 반복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히치콕과 알마는 26년 12월 2일 런던 브롬튼 성당에서 결혼서약을 했다.
촬영 현장 이끌던 부인 알마의 존재감
그런데 위기에서 맺어진 커플은 결혼 후에는 어떻게 변할까? 히치콕이 TV와 영화를 오가며 전성기를 누리던 1960년에 완성한 ‘사이코’의 현장은 이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사차 제바시 감독이 2012년 선보인 영화 ‘히치콕’은 스티븐 레벨로가 쓴 『히치콕과 사이코』를 원작 삼아 ‘사이코’ 제작 당시의 히치콕 부부를 등장시킨다 (히치콕 역에는 앤서니 홉킨스, 알마 역에는 헬렌 미렌, 그리고 야심작 ‘사이코’ 의 여주인공인 자넷 리 역은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제작기가 아니라 히치콕 부부의 미묘한 감정싸움이 테마다. 히치콕은 알마에게 접근하는 멋진 중년 시나리오 작가 휘트를 경계하는 한편, 새로운 영화 ‘사이코’를 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여배우를 물색하던 히치콕은 자넷 리를 만나 은근히 추임새를 던지고, 알마는 그런 히치콕의 태도에 신경질을 내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영화 ‘히치콕’은 거장 부부의 뒷모습과 권태에 빠진 일반 부부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당신, 휘트랑 바람피워? 그 재능 없는 머저리랑 왜 온종일 붙어 다녀?” 히치콕의 신경질에 알마가 분노에 찬 대답을 한다. “지난 30년간 당신의 모든 영화에 그랬듯이 첫 시사 때마다 당신은 내 의견을 물었고 평이 좋으면 함께 웃고 나쁘면 함께 울었죠. (…)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위대한 천재 앨프레드 히치콕뿐이니까! 그런데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히치콕의 작품이 아닌 딴 작품을 한다고 당신한테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해요? (…) 잊었나 본데, 난 당신 아내 알마 레빌이에요. 당신이 그 ‘독특한’ 연기 지도로 괴롭히는 금발 여배우가 아니라고!”
영화 ‘히치콕’은 히치콕을 대신해 현장을 지휘하는 알마 레빌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녀야말로 히치콕의 진정한 숨은 작가였고 히어로였다. 하지만 최대 히트작 ‘사이코’는 결혼생활에 혐오를 느끼는 한 정신이상자의 엽기행각과 불륜과 권태를 둘러싼 히치콕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다. 시작은 샘과 희생자 마리온이 대낮에 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들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은 살인마 노먼이 거주하는 베이츠 모텔로 이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뒤에는 처벌과 광기가 도사린다. 영화 속 히치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잖아!”
결혼 생활에 대한 불안이 영화로
알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제작한 히치콕의 영화들은 처음부터 결혼생활에 대한 불안을 깔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다이얼 M을 돌려라’는 아내가 옛 동창이자 추리소설가인 마크와 사랑에 빠지고 사업조차 곤경에 처하자 아내의 유산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계획하는 남편을 묘사한다.
물론 ‘사이코’의 마리온처럼 여주인공을 난도질하는 경우는 드물기는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진정한 충격은 난도질이 아니라, 여주인공이 시체로 변해 중반부 이후론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한 모험가 커플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 진정한 불화의 판타지이자, 히치콕이 탐구했던 중년의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 중앙SUNDAY 제396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10.12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2 回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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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떠난 아빠 삶의 큰 상처였지만 창작의 샘으로 작용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 1932~1963)는 작품보다도 그녀의 삶과 죽음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녀의 삶이 20세기 여성 혹은 여성 예술가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살한 후 18년이 지나 남편이자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에 의해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1981)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는데, 작가 사후에 퓰리처상이 수여된 경우는 실비아 플라스가 유일하다. 죽음 이후에도 실비아 플라스라는 현상은 거부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만 이름을 알렸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녀의 대표작 ‘아빠’는 애송 되지는 않을지라도 지금까지도 자주 언급되는 시다.
아빠, 나는 당신을 죽여야 했지. 당신은 내가 그러기 전에 죽었지. 대리석처럼 무겁고, 신으로 가득 찬 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처럼 크고 잿빛 발가락 하나가 달린 무시무시한 조각상
‘아빠’는 생물학적 아버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6연에서 “나는 모든 독일인은 아빠라고 생각했지” 처럼, 그것은 대량학살을 자행한 나치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아빠’의 역사적인 의미를 상세히 묻고 따지지 않더라도 젊은 시절에 읽은 시의 마지막 부분은 기묘한 쾌감을 주었다.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이 시가 쓰인 것은 1962년 10월 12일이다. 실비아가 자살한 해가 63년 2월 11일이니 ‘아빠’는 그녀가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에 쓰인 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역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수많은 ‘아빠들’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빠를 향한 분노는 거역할 수 없는 힘들에 대한 항변을 의미했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은 행복한 결과로 끝날 수 없다. 아빠의 몰락은 곧 나의 몰락일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다 끝났어.”
아빠의 죽음에 충격 … 아홉살에 첫 자살 시도
실비아 플라스의 실제 아버지 오토 플라스는 보스턴대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범블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당뇨병을 앓았던 아버지는 합병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비아는 그 모습을 목격했고, 사랑하는 아빠의 이른 죽음은 오래도록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에 주요한 상처이자 모티브가 된다. 이듬해 실비아는 생애 첫 번째 자살을 시도한다. 아홉 살의 나이였다.
실비아는 이후의 삶에서도 수많은 아빠들을 향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그 절망감을 안겨준 가장 유명한 아빠는 남편 테드 휴즈다.
두 사람의 시작은 런던의 케임브리지에서였다. 미국의 스미스 여자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장학금에 대한 신화는 유명하다)을 받게 된 실비아는 런던으로 건너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를 이어 간다. 두 사람은 56년 1월의 한 파티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같은 해 6월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영화 ‘실비아’(2003)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첫 장면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캠퍼스다.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에 막 도착한 실비아는 문예 비평지를 판매하는 친구를 쫓아간다. 이 책자에는 자신의 시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그리고 문예지에는 또 다른 시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테드 휴즈의 시는 압도적이었다. 두 사람은 파티장에서 만나 첫 입맞춤을 하고, 결혼한다.
처음에 실비아의 계획은 단순했다. 테드가 시를 쓰고, 자신은 생계를 떠맡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남편은 첫 시집부터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명성을 얻은 것과는 달리 틈틈이 써내려간 자신의 시에 대해서는 세간의 관심이 붙지 않았다. 그것은 불안을 증폭시켰다.
영화는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의 생을 따라가면서, 감출 수 없는 시 쓰기의 열정과 좌절 그리고 결혼 생활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중반을 살아간 ‘여인의 초상’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실비아 플라스 역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기네스 펠트로가, 테드 휴즈 역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맡았다.
주목 받고 싶었고 훌륭한 예술가를 꿈꾸던 여성
아이를 낳고 현실의 무게에 고통을 느끼던 영국 시절. 두 사람을 갈라놓은 현실적인 이유는 테드 휴즈의 본격적인 바람기 때문이다. 62년 5월 이웃에 사는 위빌 부부가 집을 방문하여 친구로 지내게 되는데, 실비아는 같은 해 7월 남편이 아씨아 위빌과 사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9월부터 별거에 들어간다.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고,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며, 밤에는 자신의 삶을 저주한다. 영화의 엔딩 타이틀에 등장하는 마지막 자막은 이러하다.
1963년 2월 11일 실비아 플라스는 자살했다. 부엌에서 가스를 마시고 숨진 채 발견됐다. 1년 후 테드 휴즈는 그녀의 유고 시집을 출간했다. 유고시집 『에이리얼』은 20세기의 베스트셀러가 됐고 실비아를 독자 세대의 우상으로 만들어 줬다. 1998년 테드 휴즈는 30년간의 침묵을 깨고 시집 『생일 편지』를 출간하여 실비아를 다뤘다. 이 책은 그들의 관계를 담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몇 주 후 암으로 사망했다.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은 그녀의 자살은 테드 휴즈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실비아의 신화는 현대 여성의 신화로 높여졌다. 한평생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실비아는 복잡한 인물이다. 자신의 예술적 야심을 펼치고도 싶었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도 싶었고, 아름답고 주목받는 여성이고도 싶었다.
그러나, 끝내 세상의 아무것도 소유되지 않았다. 좌절된 이의 시어는 영혼의 편린으로 부서져 우리를 향해 날아든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 중앙SUNDAY 제394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09.28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 回 화폭에서 은막으로 (Pierre-Auguste Renoir) |
| ▲ 목욕하는 여인들 (1918~1919) 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 1841~1919)가 자신의 뮤즈 「데데」를 모델로 그린 유작이다. 데데는 이후 아들 르누아르와 결혼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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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은막으로 … 한 여인에게 투영한 르누아르 부자 예술혼
| | | 영화감독이 된 아들 장 르누아르(사진 왼쪽)와 화가인 아버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 | 르누아르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어쩐지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 1841~1919)와 장 르누아르(Jean Renoir·1894~1979) 때문 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오귀스트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이끈 화가, 아들 장은 프랑스 영화사의 가장 앞자리에서 20세기 영화의 전반부를 이끈 상징적 인물이다.
장은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에서 장은 스스로가 “못 말리는 아이” 였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애정을 듬뿍 안겨 준 것은 화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의 머리카락을 즐겨 그리셨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나의 금발 곱슬머리에 대한 아버지의 애착은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 많은 사람들은 여섯 살의 나를 (바지까지 입었는데도) 여자아이로 착각했다.”
장은 아버지의 그림을 달가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우리 아파트 벽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그림들은 내 조그만 삶의 배경을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 이었다. (…) 나는 아버지의 그림들을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림들의 존재는 항상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림이 장에게 실질적인 보탬이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두 번째 작품 ‘나나’를 준비할 때 그에게 100만 프랑이 필요했다. “나의 개인 재산은 주로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그림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화 만들기는 나의 분신과도 같은 유화들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특징 지워졌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와 나 사이의 대화가 영원히 단절되는 것과도 같았다.”
아들 영화의 배우가 된 아버지의 뮤즈
장이 물려받은 것은 제작비만은 아니었다. ‘나나’는 아버지의 친구인 에밀 졸라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였다. 게다가 나나 역을 맡은 카트린 에슬링은 원래 아버지의 모델로 잘 알려진 여인이었다. “내가 미래의 카트린 에슬링을 만난 것은, 니스 근처에 있던 부모님의 소유지 레 콜레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때였다. 당시 그녀의 이름은 ‘데데’ 였다. 데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대형 그림인 ‘목욕하는 여인들’ 을 위해 금발의 모델을 찾고 계셨는데, 어머니가 ‘니스 회화 아카데미’에 신청해 데데를 발견하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사연은 질 부르도스가 연출한 프랑스 영화 ‘르누아르’(2012)에 등장한다. 뼈가 굳는 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화가의 집에 데데가 찾아온다. 르누아르는 그녀를 기꺼이 캔버스 앞에 세운다. 그리고 얼마 뒤 전쟁에서 다리를 다쳐 제대한 장이 아버지의 작업 과정을 도우며 데데와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뮤즈였던 데데는 자연스럽게 아들 영화의 여배우가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아니고 장 르누아르도 아닌 ‘르누아르’ 인 것은 한 여인을 통한 두 명의 르누아르 사이에 흐르는 예술 유전을 담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장과 데데는 1919년 아버지 르누아르가 타계하고 4년 뒤에 결혼을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숙명적으로 영화에 빠져든다. “내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순전히 내 아내를 스타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1924년 직접 만든 영화 ‘물의 소녀’ 부터 장은 카트린과 함께 무성영화 시대를 통과한다. 영화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장의 초기 영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장 르누아르의 무성영화는 사실상 여배우 카트린 에슬링에 의해 지배된다. 그의 아내이자 총애하는 배우였던 카트린에 대한 장의 찬사를 우리도 공유해야만 할까? 커다랗게 빛나는 눈 주위를 검게 칠한 인형 같은 도발적인 얼굴과, 인상주의 그림에 나올 법한 불완전하면서도 기이하게 분절된 신체를 가진 이 경이로운 여인에게는 과연 기계적인 것과 생생한 것, 동화 같은 것과 관능적인 것이 여성스러움의 구현 속에서 당혹스러우리만큼 뒤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르누아르는 그녀를 감독으로서보다는 화가로서 바라본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장이 한 예술가로 성장하게 된 것은 그를 지배하던 아버지의 유산과 거리를 두면서다. 장은 31년 ‘암캐’ 라는 영화를 준비하는데, 제작자들의 요청과 시험을 통과한 그에게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여주인공 역할에 응당 카트린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작자들은 “여배우 자니 마레즈가 빌랑쿠르 스튜디오에 전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여주인공에 대한 선택권을 그녀에게 주었다. 자니 마레즈는 룰루라는 여인의 역할을 열연하면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2주 후 교통사고를 당하며 ‘암캐’는 유작이 돼버렸다. 이래저래 말이 많았던 ‘암캐’는 큰 성공을 거두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아버지의 터치를 카메라에 담아낸 아들
하지만 이 영화의 성공은 아내를 향한 배신처럼 여겨졌고, 카트린은 결국 장에게 이별을 고한다. 영화의 성공이 초래한 결과는 이혼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부터 장은 초기 영화에 드리워진 인상주의 이미지와는 다른 사실주의에 집중하면서 ‘게임의 규칙’ ‘위대한 환상’ 같은 걸작을 만들어 낸다. 40년대에는 할리우드로 건너가 몇 편의 범작을 만들며 방황하지만 인도의 지원 아래 촬영한 ‘강’은 장 르누아르의 새로운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는 감독은 아니었다.
50년대 초반 프랑스로 돌아온 장은 새로운 행보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영화 ‘프렌치 캉캉’ 이나 ‘풀밭 위의 점심’ 은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를 누비던 시절의 도시와 시골을 담고 있다. 남프랑스에 머물던 말년의 아버지가 앵그르와 같은 과거의 예술 작품에 경도되었던 것처럼, 장 역시 인상주의에 새로운 인장을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마네의 회화 제목을 가져온 ‘풀밭 위의 점심’은 데데를 처음으로 만났던 레 콜레트에서 촬영됐다. “내가 이 영화를 찍으며 누렸던 큰 기쁨은, 아버지께서 자주 그림을 그리셨던 올리브 나무들을 필름에 담았다는 것이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르누아르 집안이 프랑스 예술을 대변할 수 있는 큰 이유가 된다. ‘풀밭 위의 점심’은 여인들의 발그레한 뺨을 칠했던 아버지의 터치처럼, 따사로운 카메라의 눈길 아래 관능을 향한 긍정성을 선사한다. 그것은 떼어낼 수 없는 예술의 유전이자 자연의 예찬론이었다. 캔버스 위의 인상주의는 화가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인상주의의 아들이자 프랑스 영화의 중심이었던 장을 통해 또다시 피어난 것이다.
… 중앙SUNDAY 제392호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201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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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 ·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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