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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행자 때 어떤 스님은 자기는 삼매의 상태에서 부처님을 만나서 부처님이 나에게 경전을 전수해줬다. 그래서 옛날 대승불교 경전 보면은 어디 삼매에서 들어가서 대승경전을 받았다느니 아니면 뭐 용왕이 경전을 줬다느니 뭐 이런 얘기들이 있어요. 본인이 뭐 그런 걸 보고 짜낸 건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자기는 믿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름도 기억나요. 부처님이 자신에게 불설지옥경(佛說地獄經)을 줬다는 거예요.
“그럼 지옥경(地獄經) 나한테 좀 가져와 봐라, 좀 보자.” 그랬더니 “아 그건 볼 수 없다.” 그러면서 이상한 걸 하다가 은사 스님한테 혼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어떤 삼매 체험 같은 것들을 많이 하고 이러다 보면 막 부처님을 만나기도 하고 뭐 온갖 이상한 체험을 하는데 그걸 가지고 공부라고 여기면 그 경계에 빠져서 집착하는 겁니다. 심지어는 또 반대로 아주 막 최악의 죽을 것 같은 막 공포감에 시달리거나 이런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 거에도 거기에 따라가고 끌려가게 되면 거기 경계에 휘둘리는 게 되지요. 그래서 어떤 경계를 만나든지 그 모든 경계를 만나면 그냥 있는 그대로 지켜볼 뿐, 해석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결코 경계일 뿐이기 때문에 나를 집어삼킬 수가 없습니다. 나만이 나를 집어삼킬 수가 있어요. 내 의식으로 그걸 해석해서 그건 어마어마한 괴물일 거야. 저 괴물이 나를 죽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그 괴물에게 힘을 실어줘서 그 괴물은 진짜 나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병이 오거나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요. 그거는 진짜 그놈이 나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이 그렇게 힘을 실어 준 겁니다. 저 무슨 밤길을 갈 때도, 우리가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밤길을 가거나 아니면 그날따라 아주 무서운 공포영화를 보고 집에 혼자 들어갔다. 집에 나 혼자밖에 없다. 평소에는 집에 혼자서 잘 지냈는데 그날따라 막 공포감이 생기기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이 생각을 이게 생각일 뿐인 줄 알고 인연 따라 만들어 낸 건 줄 알고 거기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곧장 그냥 그것도 사라져버리죠. 그런데 ‘진짜 뭔가가 있지 않을까’ ‘저 방에 뭐가 있지 않을까’ ‘내가 뭐 어떻게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온갖 생각 생각들을 막 하게 되면 그날 혼자서 잠을 자기가 너무 힘들어집니다. 너무 공포스러워지고. 내 의식이 그렇게 만든 거지요. 이처럼 세상은 나를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고 내 의식이 만들어낸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공부하다 만나는 그 어떤 경계. 좋은 경계든 나쁜 경계든 그것도 전부 다 경계인 줄 알아야 하지. 거기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마음이 그걸 따라가지 않고 잊을 수만 있다면 법계와 같아져서 자재함을 얻게 된다. 이것이 공부의 요점이다. 즉 거기에 꿔 달려 가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 막 끌려가지 말고 그냥 탁 내려놓으라는 거지요. 그걸 실체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지요.
본래 마음에 계합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7)
법은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도(求道)라고 표현, 방편을 썼지만 구도자 이렇게 방편으로 말한 것이지, 법은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번뇌 망상이 깨뜨려지기만 하면 파해지기만 하면 저절로 이미 있던 현정(顯正), 바른 법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지요. 삿된 번뇌 망상만 조복 받으면 될 뿐이지, 따로 법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곧 법이니. 본래면목, 불성, 자성, 마음, 법은 그렇게 이름 붙여진 무언가를 대상으로 찾아볼 수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8)
그냥 가명으로 가짜로 이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이 부처, 마음, 법, 불성, 이런 것은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마음은 곧 마음 없는 마음이다. 있는 거라고 하면 우린 있다를 취하고 없다,라고 하면 없는데 취하거든요, 우리의 의식은. 의식이 판단하는 말로써 얘기를 하려면 이렇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정리가 돼야 되잖아요, 머릿속에서.
그 정리가 돼야 되는 습관을 버려야 되는 겁니다. 정리가 돼야 된다,라는 것은 정리해서 뭔가를 취해서, 정리한다는 건 뭐예요? 이건지, 이건지 어느 게 옳은 건지 정리해서 옳은 건 취해서 내 머릿속에 딱 정리하고, 싫은 건 버리는 거잖아요. 옳은 거는 정리하고 나쁜 것 잘못된 건 버리잖아요. 자기만의 체계가 생기거든요. 그건 자기만의 체계를 취한 거거든요. 본래 취하고 버릴 게 없는데. 자기만의 체계를 취한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거야,라고 얘기 안 합니다.
그거야,라고 얘기하면 그걸 취하는 거니까. 선(禪)에서는 긍정해주는 게 하나도 없어요. 긍정해주면 그 긍정하는 걸 ‘아 저 스승님이 이것이 맞다, 고 긍정했으니까, 오케이 이건 맞는 거야’ 해서 내 머릿속에 딱 취해버려요. 그러니까 그렇게 취하도록 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머릿속에 넣을 게 없어요. 집어넣을 게 없습니다. 제가 뭐 필기하지 마라,고 하는 이유는 필기한다,라는 거는 중요한 요점이라고 생각하니까,
요점에 필기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요점을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거 아니에요. 집어넣으면 그건 어긋나는 겁니다. 이건 중요한 거니까 집어넣어야지. 집어넣을 게 없어야 됩니다, 집어넣을 게 없어야 됩니다. 집어넣게 되면 머릿속에 체계화시키는 거고, 취사 간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머리가 마음공부하면 할수록 이 불교 공부에 대해서는 ‘아휴 참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이것도 아니라 그러고 저것도 아니라 그러고 그럼 나는 도대체 뭐 알 수도 없고 안다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 그러고 모른다 해도 알 수도 없고 그냥, 그냥 모를 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구나. 불교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점점 더 바보가 돼가는 것 같다’ 이게 기가 막히게 공부를 잘 하는 거예요.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점점 바보가 되는 것처럼 머리가 텅 비어야 됩니다.
취할 게 없어져야 돼요. 취할 게 없어져야만 결국에는 내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온갖 오물을 주워담아 놨거든요. 분별해가지고 취해 논 거를 막 취하고 버릴 건 버리고 이렇게 막 취사 간택해 놔가지고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바른 법문은 여기다가 좋은 거를 자꾸 취하도록 해주는 게 아니에요. 이건 좋으니까 이건 밑줄 쫙 긋고 암기해 놔라. 이러고 있으면 자꾸 좋은 걸 취하는 거잖아요.
금강경에선 요거, 요거 요걸 취하고 법화경에서는 요거 요걸 취하고 이렇게 막 취하게 해주면 이 오물을 더 크게 만들어주는 것밖에 안 돼요. 법이라는 상(相)을 취하게 하는 거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오물을 걷어내는 게 불교의 목적이거든요. 그런데 이 오물을 걷어내게 하면서 세속적인 많은 오물은 걷어내게 해주는 대신 불교적인 또 다른 오물을 집어넣게 해주니까 법상조차 없어야 된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그래서 불교는 불교의 방편으로써 어쩔 수 없이 불교에서 좋은 것을 상구 법문이라고 하잖아요. 좋은 것을 주고 열반이나 해탈이나 뭐 불교 공부 하는 방법, 수행하는 방법, 기도하는 방법, 다 이런 게 있다,라는 주고 나중에 가서는 그걸 빼앗는다는 말이지요. 빼앗아야만 비로소 가장 좋은 걸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반드시 줬다 뺐습니다, 불교는. 놀리는 것도 아닌데. 항상 주었다 뺏어야지만 정상입니다.
주어놓기만 하고 뺐지 않는 사람은 바른 스승이 아니에요. 그런데 빼앗으면 되게 당황스럽지요. 그래서 되게 기분 나쁘거든요. 내가 자꾸 축소되는 거 같고 내가 자꾸 깨지니까. 나한테 자꾸 뭔가 좋은 걸 넣어줘야 되는데 자꾸 빼앗아가니까, 그래서 참된 스승님 밑에는 제자가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자꾸 빼앗아가니까. 내가 여태까지 어렵게, 어렵게 불교에서 잔뜩 좋은 것만 잘 모아다가 짝 엑기스를 모아놨는데,
그거를 스승님이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거예요. “이게 법 아닙니까.”라고 말하면 바로 깨뜨리고 바로 한 대 때리면서 발언을 하고 한 대 친단 말이에요. 그래서 스승님 앞에서는 말을 못 하게 해요. 왜냐면 내가 “이것이 법 아닙니까.” “이것이 수행 아닙니까.” 뭐 하고 내세우려는 뭔가가 있으면 그것을 깨뜨려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기 때문에. 전부다 빼앗아갑니다. 그러다 나중에 멍해져서 더 이상 입도 뻥긋 못하게 되지요. ‘다 이거 다 아니구나’
‘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쥘 게 아무것도 없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게 바로 스승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주기만 하고 좋은 걸 주기만 하고 빼앗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오히려 망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주기만 하고 빼앗지 않는다면. 반드시 빼앗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좋은 거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열반에도, 법에도, 수행법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이끌어줘야만 되는 것이지요.
불성을 어떤 대상이라고 여겨 찾아 나서려고 한다면 평생토록 찾아 헤매더라도 결코 찾을 수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8)
대상이라고 여겨서 찾아 나서면 안 되는 거죠.
본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 아이고 이거는 제가 해설해놓은 거네요.(웃음) 어쩐지 익숙하더라고요. 그다음 221쪽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見聞覺知) 것을 마음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1)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보면 보는 것이 마음이다. 들으면 듣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깨달아 알면 깨달아 아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보면 보는 모든 것이 다 마음이야.” “모든 것이 다 부처야.” “다 불성이야.”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중생들은 ‘아, 보는 게 다 불성이구나. 그런데 내가 지금 분별을 하고 보니까 분별하는 습관 때문에 보는 게 부처인데, 내가 부처로 못 보고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원래 보는 게 부처인 것이겠지’ 이렇게 내 생각을 해서 정리를 해가지고 ‘보는 게 부처야’ ‘보는 게 부처야’ 이걸 자꾸 쥐고 다닌다 말이지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에게는 “보는 게 부처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디에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그것이 부처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리고 또 어디에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 한 것이 부처라고 인식하면 그건 아니다.” 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주로는 깨달음을 얻을 때요. 견문(見聞), 보고 깨닫는 게 많습니다. 보통은 선사 스님들이 깨닫는 이야기를 보면요. 보고 나서 보자마자 깨닫는 게 한 20∼30% 정도 되고 듣고 깨닫는 거, 듣고 깨닫는 게 한 70∼80% 됩니다. 즉 법문을 듣다가 깨닫는 경우가 가장 많고요. 혹은 법문을 듣고 혼자서 이렇게 탁 이게 뭔가 모르는 참 답답한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니면 뭐 만행을 하다가, 이렇게 길을 가다가,
아니면 일을 하다가, 뭐 이렇게 대나무가 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닫거나, 뭔가 어디서 남들이 심지어는 시장통에서 막 시장 사람들이 서로 막 싸우는 소리를 듣다가 깨닫기도 하고. 옆에서 어떤 뭐 번쩍하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할 수 있고. 그런 경우 어떤 특정한 소리를 듣고 깨닫는다. 그런다고 해서 그 어떤 공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시장통에 어떤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깨닫는다는 얘기를 듣고,
계속 사람들이 싸우는 것만 가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돌멩이가 대나무에 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얘기를 듣고 자꾸 돌을 가지고 와서 대나무에 자꾸 던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지하철에 이렇게 앉아있으면 모든 소리가 들리지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는 그 내용을 따라가는 거니까. 상을 따라가는 거니까. 우리는 상(相) 하고는 상관없는 공부를 하는 거거든요.
좋은 소리 나쁜 소리 상관없습니다.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기차의 소리든 이게 ‘지하철 소리는 철커덕 철커덕하는 기계의 소리니까,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 더 잘 깨닫는 거 아닐까’ 이거 분별입니다. 상(相)을 따라가는 그런 어떤 소리 하고는 상관없습니다. 들을 때 우리는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듣는 소리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소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요. 이걸 위빠사나라고도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 이러거든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들어라. 그 소리를 들을 때 내 식대로 해석해서 듣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는 거지요. 그러면 좋은 소리 나쁜 소리 해석하지 않고 그냥 그 소리를 그 소리 자체의 소리 파동으로만 들어라.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해요. 분별해서 듣지 말고 그냥 소리 그 자체 있는 그대로 들어라. 그래서 위빠사나에서 얘기하는 게 듣는 연습을 합니다, 위빠사나에서. 있는 그대로 듣는 연습.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그 소리에 개의치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공부에 기본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참선하는 선방에서 참선하다가 자꾸 차 소리 들리고 기차소리 들리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 들리고 이러면 ‘아휴 그 절은 정말 내 시끄러워서 참선을 못하겠다’ 저 산중에 고요한 곳에 선방을 만드는 게 사실은 어찌 보면 어리석은 겁니다. 조용한 곳에서는 깨닫기가 힘들어요. 시끄럽게 자꾸 뭔가 소리가 딸그락거리면서 나야지 그걸 있는 그대로 관하는 연습을 할 수 있잖아요.
공부를 할 수가 있잖아요. 있는 그대로 듣잖아요.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으면 그게 무슨 공부입니까. 그 소리를 듣다 깨달아야 되는데, 이를테면. 그래서 내가 명상을 하는데 자꾸 소리가 들린다. 좋은 소식이지요. 그 소리를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을지. 그래서 이 소리가 지금 초침 소리가 안 들리시잖아요. 조용히 혼자서 좌선하고 있을 때는 이 초침 소리 가요, 가슴에서 아주 크게 들려옵니다. 그냥 평상시에는 아예 들리지도 않던 소리가.
심지어 바람소리가 교회 예배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기차소리가. 그래도 여기가 용산역 가까이라 기차소리가 들려요. 그런 소리들이 아주 미세한 소리들이 그냥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듣고 보고 볼 때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지요. 해석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견문각지 할 때 오직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면 보고 듣고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러니까 보세요.
뭔가 느낀다. 느끼는 그놈이 바로 부처가 느낀다는 거지요. 뭔가 인식한다. 인식하는 건 중생이라고 지금까지는 얘기했어요. 그런데 인식하는 그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분별심이 일어나잖아요.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이 생각이 일어나는데 생각을 쫓아가면 그건 중생심이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디서 일어나요. 분별심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생각은 일어났다 사라지잖아요. 그 생각의 출처가 어딥니까.
분명히 어딘지는 모르지만 생각이 올라왔다가 생각이 사라졌어요. 생각이 온 곳, 생각이 간 곳, 그곳이 어디냐는 거지요. 출처, 거기가 바로 본성 자리에서 드러나고 사라진다는 거예요. 이 자리에서 느끼고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아 알 수가 있단 말이지요. 알고 모르고 하는 그 내용물을 따라가면 중생이지만 그 내용물이 일어난 당처. 그 본성 자리가 어디냐. 그것을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견문각지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 견문각지 하는 이 마음을 ‘이것이 마음이구나’라고 내가 헤아려서 인식을 하려고 하면은 그건 아니라는 거지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뒤덮이게 되면 사로잡히게 되면 밝은 본바탕을 보지 못한다. 견문각지가 부처라고 하니까 견문각지 하는 그 내용물을 따라가서 여기에 부처가 있다 하고 찾아가면 안 된다. 견문각지 하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그 바탕 그 바탕이기 때문에.
다만 곧장 마음이 없기만 하면 본바탕이 스스로 드러나니, 마치 허공에 태양이 뜨면 시방의 모든 세계를 두루 비춤에 장애가 전혀 없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잘 알아서 삶 속에서 행동하고 움직일 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잘 비울 수 있다면,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1, p222)
그걸 따라가지 않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 대상을 따라가지 않고 그걸 잘 비워낼 수 있다면, 이걸 비운다는 마음을 쓴 거예요. 표현을 쓴 거예요. 그러니까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때 그 내용물을 쫓아가지 않고 거기 취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비울 수 있다면,
마음의 길이 끊어져 들어갈 곳이 없게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마음이 갈 곳이 없어진다 말이에요. 아까 있다,라는 것도 아니야. 없다,라는 것도 아니야. 있다 이러면 아 마음이 있다,라는 걸 딱 취하거나, 없다 이러면 없다,라는 걸 딱 취해야 되는데 마음이 갈을 잃어버려요. 있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러니. 보는 것이 부처다. 그런데 보는 것이 부처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거 보는 것이 부처라고 해석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없어요. 뭔가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이 갈 곳이 끊어져서 들어갈 곳이 없게 된다. 갈 길이 끊어져서 들어갈 곳이 없게 돼야 됩니다.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해야 돼요, 의식이. 그러니까 요점 정리가 없어야 됩니다. 좋은 강사는 한 시간 딱 강의해주고 요점 요거 딱 정리해주잖아요. 저는 요점 정리는 안 해드립니다.(웃음) 주절주절 얘기만 할 뿐이지. 요점 정리를 해버리면 ‘아 오늘 배운 핵심은 요거구나’ 하고 그걸 딱 취해서 머릿속에 딱 집어넣을 거니까. 어떤 것도 취하지 못하게 해서 마음의 길이 끊어져서 들어갈 곳이 없게 해줘야 되거든요. 어떤 것도 집어넣지 못하게 해줘야 되거든요.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본래 마음을 깨달으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것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대서 깨달으라고 하니까, ‘아 본래 마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데 속해 있나’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벗어나 있지도 않다.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벗어나 있지도 않다. 견문각지(見聞覺知)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마음의 길을 딱 끊어버리는 겁니다.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견해를 내지도 말고,
보는 것이 부처인가. 듣는 것이 부처인가. 이걸 듣는 걸 잘 듣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이걸 어떤 방식으로 들어야 되지. 막 이렇게 견해를 내지 말라는 거예요. 생각으로 정리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생각을 움직이지도 말며,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그냥 볼 뿐. 그냥 들을 뿐. 그게 정견입니다. 그게 위빠사나고. 그냥 볼 땐 볼 뿐. 들을 땐 들을 뿐. 느낄 땐 그냥 느낄 뿐. 인식이 일어날 땐 그냥 인식이 일어날 뿐.
생각을 움직이지도 말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그렇다고 떠나서 따로 마음을 찾지도 말고,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바로 그 자리에 마음이 있으니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하지도 말아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서.
함께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고 종횡으로 자재하여 도량이 아님이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참으로 이 법당 아닌 곳이 없고 참으로 진리 아닌 것이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이 마음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위에 따로 증명하고 취할 수 있는 한 개의 법이 있다고 오해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보다가 깨닫는다. 듣다가 깨닫는다. 이러니까 뭔가 보다 보면 내가 지금 안 보이지만 열심히 보다 보면 뭔가 법이 내가 지금까지 보지 않던 어떤 법이 하나 딱 드러나서 그게 비로소 보이게 되겠지. 그러면서 법을 자꾸 취하려는 마음. 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게 되니,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22)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게 되는데, 바로 그 찾는 그것이 마음이라는 거지요.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구한다면 천만 겁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마침내 얻지 못할 것이다. 즉각 마음이 없으면 곧장 본래의 법이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구하려고 하면 눈을 가지고 눈을 찾으려고 아무리 천 날 만날 온 세계에 있는 모든 걸 다 쳐다보고 다녀도 눈을 볼 수가 있습니까?
그냥 뭘 보든지 아무 걸 봐도 상관없는데. 온 우주를 다 돌아다니면서 다 볼 필요가 없잖아요. 아무거나 아무 걸 보더라도 보는 데서 눈이 확인되는 거지. 본다,라는 그 자체가 벌써 눈을 확인시켜 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보면서 막 그 눈을 찾아다니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요. 보는 게 눈이니까. 볼 때 보는 게 마음이고. 들을 때 듣는 게 마음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을 접촉할 수 있는 것, 내가 이렇게 숨 쉴 수 있는 것, 이게 호흡관을 하라 이러잖아요. 앉아서 좌선할 때 보면 생각이 딱 끊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이 딱 끊어져도 그래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 선에서는 요. 깨달음은 언제 일어나느냐면 고요히 좌선해서 아무것도 없이 딱 끊어질 때는 일어나지가 않아요. 사람들은 좌선하다가 깨닫는 줄 아는데 좌선하다가 깨닫는 사례가 없습니다.
좌선하다가 깨닫는 게 아니에요. 좌선은 공부의 어떤 기초 작업 같은, 번뇌 망상을 조복시켜주니까 그런 어떤 그 준비작업 같은 겁니다. 좌선하다가 여기 앉았다 깨닫겠지. 부처님도 앉았다 깨달은 게 아니지요. 앉았다 깨닫는 줄 알고 앉아 있다가 ‘아휴 진짜 안 되네’ 안 되니까 앉았다가 허망하게 눈을 떠서 그냥 이렇게 하늘을 보는데 하늘에 갑자기 새벽별이 반짝거리고 움직인 거예요. 그 반짝거리고 움직이는 걸 보고 깨달은 겁니다.
보고 깨달으신 거지요, 부처님도. 눈에 뭔가가 움직임이 있을 때 그 움직임을 보고 딱 깨닫습니다. 마치 맑은 물이 있어요. 호수 물이 있는데 호수 물이 막 이렇게 오염돼가지고 호수 위에 가 표면이 막 움직일 때는 그 밑에 가 깨끗하게 안 보이지요. 안 드러납니다. 그런데 호수가 깨끗해요. 깨끗할 땐 호수가 환히 드러나요. 호수가 환히 드러나다 보니까 이렇게 보고 있을 때 여기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마치 깨끗한 유리창을 이렇게 들고 있으면 그 유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 신도님들도 우리 여기 문에다가 얼굴을 몇 번 박으셨잖아요.(웃음) 유리가 너무 깨끗하면 유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다가 이렇게 딱 띠를 붙여놨어요. 그 띠를 붙여놓으니까 이 유리가 있다는 거 이제 알잖아요. 그것처럼 띠를 붙이는 행위를 해야지만 우리는 그걸 아는 것처럼.
물이 깨끗하면 이게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거기 물 있는 걸 알 수 있을까요. 물이 있어서 우리 물밑에 있는 돌이며 자갈이며 이런 거 우리 맨 날 보고 살았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야 그 물밑에 있는 자갈만 보지 말고 그 위에 있는 물을 봐. 그런데 물이 고요하니까 물밑에 있는 것만 보이지 물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럼 부처님이 물을 보라니까 아무리 얘기해도 물을 못 보니까 어떻게 해야 물을 볼까요.
물을 한번 쓰윽 손가락으로 이렇게 만지든지. 거기다 돌을 하나 던지든지. 해서 물의 파장을 일으켜줘야 되잖아요. 움직임을 줘야 물이 움직이는 걸 보고서 ‘아 거기 물이 있었네’ 하고 그제야 아는 거잖아요. 그것과 똑같다는 거지요. 그래서 좌선하다 깨닫는 게 아니라 그런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때 뭐 이런 얘기를 사실은 해주는 게 별로 안 좋습니다.(웃음)
왜냐면 이렇게 하면 또 이걸 정리해가지고 계속 움직임을 찾아다니고 애쓰고 그 움직임을 자꾸 해석해서 애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도 선어록에도 일부 그런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는데요. 그것처럼 그렇게 견문각지 할 때 어떤 확인을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이 마음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위에 따로 증명하고 취할 수 있는 한 개의 법이 있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게 되니,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임을 알지 못하는 거라고 했지요. 그래서 즉각 마음만 없으면 곧장 본래의 법이 드러난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 시간에 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1시간 39분 녹취)
첫댓글 이처럼 세상은 나를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리가 돼야 되는 습관을 버려야 되는 겁니다. 본래 취하고 버릴 게 없는데
집어넣을 게 없어야 됩니다. 집어넣게 되면 머릿속에 체계화시키는 거고, 취사 간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읽고 그냥 끝이면 되는 것을 저는 한번 더 정리해 봅니다. ㅠㅠㅠ
읽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낫겠군요 라고 분별을 해 봅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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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