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칼럼] (62)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명사, 람페두사 / 존 알렌 주니어
수많은 사건과 희로애락이 가득한 역사 안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하게 하는 지명들이 있다. 여기에는 ‘게티스버그’나 ‘둔케르크’, ‘로벤 섬’(남아프리카공화국이 양심수들을 가두던 곳), ‘우드스톡’ 등이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람페두사’를 여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람페두사는 교황의 사목방문 중 가장 짧았지만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람페두사 사목방문 7주년을 기념하는 미사를 주례했다.
세상의 선익을 위해 부단히 애쓰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람페두사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에 있는 펠라제 제도의 세 섬 중 하나다. 펠라제라는 이름은 4세기 자신 만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단 교리를 설파했던 수도승과는 관련이 없다. 펠라제는 그리스어로 ‘열린 바다’라는 뜻이다.
시칠리아 섬 먼 바다에 있는 람페두사는 이탈리아의 최남단 지역이지만 오히려 튀니지에서 더 가깝다. 튀니지에서는 110여 ㎞ 떨어져 있지만, 시칠리아에서는 무려 190여 ㎞ 거리이며, 지리적으로는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속해 있다. 람페두사는 유명한 휴가지로, 2013년 호텔 등 여행과 관련한 가격비교 사이트인 트립어드바이저는 람페두사의 토끼 해변을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해변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람페두사는 스페인과 몰타, 대영제국, 나폴리왕국이 지배했고, 1861년부터 이탈리아령이 됐다. 이들 나라에 대한 람페두사의 주민들의 충성심은 허울뿐이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한 영국인 비행사가 연료 부족으로 람페두사에 착륙해야 했는데, 이 지역 주둔군 사령관이 혼자였던 이 비행사에게 투항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역사적 사건에도 람페두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곳은 아니었다. 대신, 사람들은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서 파도를 넘어 유럽으로 향하는 이들이 처음 닫는 곳으로 기억했다.
람페두사에 이주민을 접수하고 수용하는 시설이 생긴 것은 1998년이었다. 지중해를 건너는 수많은 이민과 난민, 망명자들이 많아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가난과 폭력을 피해 온 가나와 말리, 나이지리아 사람들이었다.
1990년대 말 시작한 이주의 잔물결은 2000년대 들어서 큰 파도가 됐다. 특히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고, 튀니지와 리비아에서 격변이 일어난 뒤로는 더 심해졌다. 수용정원이 800명이었던 이 시설은 금세 정원을 초과해 한 번에 2000명 넘게 수용하기도 했다. 이어 수용소 외곽 평원에 간이 천막이 설치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내게 됐다. 수용소의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이탈리아 국영방송 RAI는 이 람페두사 수용소를 나치의 수용소와 비교하기도 했다.
람페두사를 역사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인류의 드라마가 아니라, 강렬한 인상을 남긴 2013년 7월 8일 교황이 로마 외곽으로 나선 첫 사목방문지로 선택했다는 데에 있다. 4시간30분 동안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 반나절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직의 상징과 본질로 가득 차 있다.
람페두사에 도착하자마자 교황은 곧 낡고 오래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념하기 위해 바다에 화환을 던졌다. 지난 10여 년 동안 약 2만 명이 여기에서 목숨을 잃었다. 교황은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이 수용됐던 평원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 평원은 ‘배 묘지’라고 불리는데, 이들이 타고 온 수많은 배들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교황이 미사를 봉헌했던 제대는 실제로 이러한 아픔이 담긴 배로 만들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폭력과 가난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했던 이들의 운명을 모른 체하는 ‘무관심의 세계화’를 비난했고, 난민들과 이야기를 하고 이들을 얼싸안으며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교황은 수많은 이민과 난민의 영상을 보고 ‘마음속의 가시’를 느꼈으며, 꼭 람페두사에 가야만 했다고 말했다.
이후 교황은 두고두고 람페두사를 언급했으며, 그만큼 그의 사회와 복음화 의제의 대명사가 됐다. 교황은 매년 람페두사 방문 기념미사를 봉헌했으며, 지난 7월 8일에도 미사를 주례했다. 이날 교황은 한 에티오피아 난민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통역사가 속이 뒤틀리는 상세 내용을 생략했다는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나중에 한 연회에서 또 다른 에티오피아 여성이 교황에게 통역사가 교황에게 전달한 내용은 난민들이 겪은 고문과 고통의 4분의 1도 안 된다고 말해줬다.
그로부터 7년 뒤, 교황의 짧은 방문이 준 영향은 한 비정부기구 연대단체가 제정한 ‘세계 지중해의 날’로 이어졌다. 이들 단체는 이주민과 난민이 겪고 있는 고통과 지중해 지역의 생태적 도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세계 지중해의 날’을 정했는데, 바로 교황이 람페두사를 방문한 7월 8일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대통령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티스버그를 가야한다는 말이 있다. 비슷하게, 람페두사에 가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지도에서 한 점에 불과 한 이 람페두사에는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보다, 교황이 현재 살고 있는 로마보다 교회와 인류애를 위한 교황의 사목 전망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존 알렌 주니어 (크럭스 편집장)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럭스(Crux) 편집장이다. 교황청과 교회에 관한 베테랑 기자로, 그동안 9권의 책을 냈다. NCR의 바티칸 특파원으로 16년 동안 활동했으며 보스턴글로브와 뉴욕 타임스, CNN, NPR, 더 태블릿 등에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