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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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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문화 스크랩 김계행(金係行)|
혜명 추천 0 조회 195 13.12.19 00: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김계행(金係行) , 1431년 1521년
본관 : 안동(安東)
: 취사(取斯)
: 보백당(寶白堂)
시호 :

정헌(定獻)   純行不爽曰定 순행불상왈정:순행하여 어긋나지 않았으니 정(定)이요,

             嚮忠納德曰獻 향충납덕왈헌:충성을 다하여 덕을 쌓았으니 헌(獻)이다.

출생지 : 안동(安東) 불정촌(佛頂村)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예천(醴泉) 직곡(稷谷)
입사경로 : 1447년(세종 29) 생원시(生員試) 합격, 1480년(성종 11) 식년시(式年試) 병과 급제
내관직 :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외관직 : 고령현감(高靈縣監), 성주교수(星州敎授), 충주교수(忠州敎授)
증직및기타 : 이조판서(吏曹判書)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5세 되던 해 글공부를 시작했다.

부친이 말로 글자를 가르쳤는데,

배우면 금방 이해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이에 부친이 기대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고 전한다.

묵계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다

30세 되던 해 안동부의 길안(吉安) 묵계(?溪)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였다.

터를 잡은 곳은 산림이 울창하고 경관이 뛰어나 일찍부터 왕래하면서 동경해 오던 장소인데,

이 해에 농막을 짓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고자 했다.

조카인 학조 스님의 무례를 꾸짖다

32세 되던 해 성주향교의 교수(敎授)로 부임하였는데,

학조(學祖) 스님이 무슨 일로 성주에 들렀다가 향교로 직접 가서 숙부를 만나 뵈려고 하였다.

학조는 세조 때 왕의 두터운 신임으로 국사(國師) 대우를 받던 스님으로서, 김계행의 장조카이다.
학조의 뜻을 접한 목사가 스님의 신분을 고려하여 이를 말리며

 “국사께서는 수고롭게 거동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교관은 제가 청해서 오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향교로 보냈다.
그러나 김계행이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자. 학조가 부득이 가서 뵐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너는 왕의 총애만 믿고 교만해져 숙부를 찾아와 뵙지 않고 이 숙부보고 너를 찾아오라고 하느냐.

”며 매로 꾸짖었는데,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학조가 잘못을 사죄하고 김계행의 벼슬길에 자신이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으나 명분이 없는 일이라 하여 일언지하에 거절함으로써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김종직과 평생을 교유하다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과 평생에 걸쳐 교유하였다.

이 인연으로 무오사화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형(杖刑)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 일은 뒤에도 수시로 그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었는데,

심지어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금부에 끌려가 형벌을 치르는 곤혹을 겪기도 하였다.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다

49세 되던 가을 식년 동당시에 합격하였는데,

연만한 나이가 고려되어 바로 육품직에 올랐다가 이어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52세 되던 해 고령현감으로 나아갔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돌볼 때는 엄숙히 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자애로왔다.

항상 청렴과 근신하는 태도를 지키며 매사에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는데,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화가 이루어지고 기강이 바로 서 관과 민 모두가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섭렵하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김계행의 이런 강직함은 그가 지낸 관직만 일별하더라도 금방 드러나는데,

홍문관의 경우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응교(應敎), 전한(典翰) 그리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사간원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장령(掌令)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및 도승지(都承旨),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의 교유가 빌미가 되어 모함을 받아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조호문(趙好問) 등 10여 명과 함께 투옥되어 태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 일로 그 뒤에도 두 번 더 옥고를 치렀다.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듣고 복잡한 감회를 토로하다

76세 되던 해(1506)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 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보백당과 만휴정을 짓다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있다가

68세 되던 해(1498)에 풍산 사제(?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자신의 시구에서 따왔다.
김계행은 또 30대 젊은 시절부터 길안(吉安)의 묵계촌(?溪村)의 풍광에 심취하여 별장을 지었는데,

특히 71세 되던 해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만년에 휴식을 취하다.”는 이름 그대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던 장소였다.

: 김혁(金革)
생부 : 김삼근(金三近)
: 영가김씨(永嘉金氏) 김전(金乷)의 딸
첫째 부인 서씨와 사별하고, 둘째 부인 남씨와 재혼하다

17세 되던 해 동복현감을 지낸 이천서씨(利川徐氏) 이운(李運)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23세 때 사별하였고,

이듬해 지평(持平)을 지낸 의령남씨(宜寧南氏) 남상치(南尙致)의 딸과 재혼하였다.
첫째 부인이 죽었을 때 김계행은 한양에 있었는데,

부인의 부고를 접하고 급히 돌아와 손수 예천의 용궁(龍宮)에 장사를 지냈다.

첫째 부인 서씨와의 인연

첫째 부인 서씨의 부친은 동복(同福) 현감인 서운이다.

서씨가 처녀로 있을 때 처음 배필로 혼담이 오고간 것은 황희(黃喜) 정승의 아들이었다.
혼담이 성사되자 황희는 혼인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문경현(聞慶縣)에 와서 유숙을 하였다.

그러다가 혼인 날 아침이 밝자 길을 재촉하였는데,

서운과 이웃해 살고 있는 사람 하나가 길에서 뵙기를 청하였다.

그는 서운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 혼인을 방해할 속셈이었는데,

황희가 서씨의 됨됨이에 대해 묻자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나 소경이라는 말은 들은 듯하다고 거짓 모함을 하였다.

그러자 황희는 펄쩍 뛰며 바로 사람을 보내 혼인 약속을 파하였다. 이에 서운도 크게 노하였다.
이 때 마침 김계행의 부친이 비안현감으로 있을 때이고,

김계행은 처음 진사가 되어 한양서 비안으로 친영하러 와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서운이 사람을 보내 혼담을 건네 옴으로써 혼인이 이루어졌다.
혼인하던 날 서운은 상주(尙州) 본가에 와 있던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 딸의 소경 모습을 한 번 보라고 요청하였는데,

이에 황희는 아들의 유모를 보냈다.

하지만 혼인식 날 신부석에 있는 처자가 소경이 아니라 용모가 너무 아름다운 규수인 것을 보고

유모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이를 전해 들은 황희 역시 자신이 서운의 이웃사람에게 속은 사실을 알고 후회하고는

서운의 둘째 딸에게 혼담을 다시 넣어 성사시켰다고 전한다.

자식복을 스스로 경계하다

슬하에 모두 5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첫째 부인 서씨의 소생이고,

다섯 아들은 둘째 부인 남씨의 소생이다.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극인(克仁)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고,

둘째 극의(克義)는 진사,

셋째 극례(克禮)는 생원,

그리고 막내인 극신(克信)은 무과에 합격하여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냈다.

찰방(察訪)을 지낸 박눌(朴訥)과 진사 유자온(柳子溫)이 각각 첫째와 둘째 사위이다.

유자온은 서애 유성룡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 유성룡은

『보백당선생실기』를 간행할 때

「영모록(永慕錄)」이라는 추모의 글을 지어 문집에 싣기도 하였다.
김계행이 81세 되던 해 내외의 종친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 일이 있는데,

이 때 아들과 조카 가운데 대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명이고 관직에 오른 사람이

7명이나 될 정도로 자식 복이 다복하였다.
이에 보는 이마다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를 두고 김계행은 자손들에게 타일러, “너희들이 잇달아 과거에 합격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이를 두고 이 고장 사람들은 더러 내가 복이 많다고 하겠지만 나로서는 집안의 번영이 한편으로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명심해서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고 사람들을 접함에 정성을 다하여

경박한 일로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이 늙은이가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시켰다.

지극 정성으로 부친을 간호하다

34세 되던 해 부친이 병환에 들자 의관을 벗지 않은 채 밤에도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친히 약을 다려 올리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며, 그러기를 여러 달을 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침저녁으로 죽만 먹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채과(菜果)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 결과 몸이 쇠약해져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여막을 지키며 예서(禮書)를 읽었고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묘소를 살피기를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유인물
김종직(金宗直), 성희안(成希顔), 성희증(成希曾)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재질을 보였다.

10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에 들었는데,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누구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부지런히 송독하였다.
또 12세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책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입학한 지 3여 년 만에 문학과 예술 방면에 큰 성취가 있었다고 전한다.

14세 되던 해 부친이 비안(比安)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5세에는 사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중용』과 『대학』을 수강하였다.

김종직과 학문을 논하다

평생의 지기였던 김종직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또한 학문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충주향교의 교수에서 물러나 풍산 고향집에 돌아와 있던 때인

40대 중반 시절에는 당시 상주에 있던 김종직과 서로 왕래하면서

『주역』과 『근사록』을 직접 강론하기도 하였다.

성리설에 심취하다

굳고 명석한 자질에 힘입어 늙어서까지 경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성리(性理)의 문제에 침잠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였다.

문집명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문집인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는 김계행의 유문과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초간은 1732년(영조 8)에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 5)년에 중간되었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세계도(世系圖)

- 권1: 연보(年譜), 시(詩), 소(疏)

- 권2-4: 부록

유성룡이 지은 「서애선생영모록(西厓先生永慕錄)」을 비롯하여

이보(李?)가 쓴 유사(遺事)와

이재(李栽)가 쓴 「행장」이 실려 있고,

이광정(李光庭)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다른 사람들이 쓴 봉안문과 축문, 고유문, 교지(敎旨)

그리고 상량문, 기(記), 발(跋)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 칭 :  안동김씨 보백당종택(安東金氏 寶白堂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건 축 주 :  김계행(金係行, 1431~1517)
건축시기 :  15세기 말
소 유 자 :  (관리자 : 김해동 / 김주현)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1980년 6월 17일 지정

건축 이야기

김계행은 무오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작은 집을 지어놓고 보백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후진을 교육하고 산수를 즐기는 것으로 시종하였다.

묵촌(?村)의 궁벽지고 조용한 산수를 사랑하여 무오년 후에는 항상 드나들며 머물곤 하였다.


건축 배경
풍산의 소산마을에 살던 김계행이 묵계의 산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건축 특징

보백당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있는 정자라 할 수 있다.

작고 아담한 규모, 아마도 김계행의 미학이 일정 부분 작용한 설계일 것이다.
보백당의 북쪽으로는 사당이 있다.

사당의 동편은 口자 형태의 살림집이다.
口자 형태의 구조 앞쪽으로, 즉 본채의 서남쪽 부분은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 돌출되어 있는 구조이고,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그 동북쪽으로 조금 물러나 있다.
사랑채는 보백당보다는 크고 화려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남향을 하고 서 있다.

정문 큰대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지는 셈이다.

서쪽 2칸은 앞에 폭 좁은 쪽마루를 두고 있는 2개의 방이다.

동쪽 2칸의 앞쪽 1간은 마루방을 이루고 있고, 뒤쪽 한간은 방으로 되어 있다.

쪽마루 서쪽 벽과 마루방 동쪽 벽은 나무판 문으로 차단되어 있다.
파초잎의 푸르고 시원스런 색감과 자태가 사랑채 앞을 막고 서서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여 준다.

청량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흐른다.

바깥마당이 평지에 상당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느낌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솟을 대문 너머로 앞산의 꼭대기가 멀리 물러나 보이는 것,

뒤울 너머 계명산의 한 산봉우리가 멀리 물러나 앉아 그 능선을 드리우고 있는 것,

그리하여 공간이 한없이 넓고 편안해 보이는 것도 이 느낌을 생산하는데 동참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건축 구성

서쪽에서 동향하여 서 있는 것이 보백당이다.

본채와 사당은 산기슭 쪽으로 물러나 남면하여 서 있다.

보백당과 본채 사이에는 사당이 있고, 그 동편으로는 口자 형상의 본채가 있다.
본채의 앞쪽으로 용계당이라는 편액이 걸린 사랑이 있고,

본채는 그 뒤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문채는 앞쪽으로 내려와서 넓은 국면을 다 싸안은 울타리를 양쪽으로 거느리고 있다.

통상의 경우보다 아주 넓은 대문 안의 바깥마당에는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현판
  보백당(寶白堂)

정면의 가운데 칸 처마 밑으로는 김가진(金嘉鎭)이 쓴 보백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글씨는 단아하고 둥글둥글한 모양이다.

현판은 80° 정도의 각을 이루며 10cm 정도 폭의 돌출된 판으로 둘러막았는데,

위쪽의 판은 양쪽으로 머리를 내밀며 봉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돌출된 판의 표면은 또 인동덩굴을 둘렀는데,

혹시 이것이 인동덩굴 문양이 아니라 봉황의 깃털 문양인지도 모를 일이다.

보백당은 김계행의 호이면서 이 집안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김계행은 ‘청백이 자신의 보배’라고 매양 이야기 하고 있는데,

보백당의 보백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용계당, 묵은재(龍溪堂, ?隱齋)

본채의 바깥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용계당이다.

동쪽으로부터 두 번째 칸의 처마 밑에는 용계당(龍溪堂)이라는 편액이,

서쪽으로부터 두 번째 칸 처마 밑에는 묵은재(?隱齋)라는 편액이 판각되어 붙어 있다.

가운데 두 칸의 처마 밑을 각각의 현판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빛 판면에 금색 글씨인데, 모두 김가진의 글씨이다.

보백당 글씨의 단정한 품새는 여기 이르면 조금 흩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없는 문제지만,

무지함을 앞세워 말해 보면, 잠시 보기는 용계당 글씨 쪽이 나을 것이고,

오래 두고 보기는 보백당 글씨가 낫다고 여겨진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도 조금 열려 있다.

열린 문 너머로 동천고택(東川古宅)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천지정시능조화, 성현우처시공부(天地靜時能造化, 聖賢憂處是工夫)

용계당 편액 동쪽에 바짝 붙어 있는 기둥 위에는

“하늘과 땅은 고요할 때에도 능히 조화를 부린다.”는 내용의 주련이,

묵은재 편액 서쪽에 바로 다가서 있는 기둥 위에는

“성현이 걱정하는 곳에서 공부는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주련이 종서로 써진 나무판이 붙어 있다.

보백당중건상량문(寶白堂重建上樑文)
유연즙(柳淵楫)
문중 이야기
- 보백당장학재단

보백당장학재단설립취지문(寶白堂?學財團設立趣旨文)
1994년 설립된 보백당장학재단은 ‘청백공무원 자녀 장학금’이다.

시청과 군청, 교육청, 경찰서 등 공공기관 공무원 가운데에서

청렴하다고 추천받은 공무원 자녀들에게 주는 장학금이다

- 청백만이 보물이다

1498년 무오사화가 시작되자

김계행은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당으로 지목되어 세 차례 체포 국문을 당했고,

겨우 풀려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나중에 연산군이 폐주가 되었을 때는 신하였음을 자처하며 눈물을 흘렸다.
일찍이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 청백(靑白)만이 보물이라.

”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병으로 눕게 되자 “청백과 효우(孝友)는 가문을 지켜나가게 하고,

교만과 사치는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린다.”는 경계의 말을 남겼다.

- 학조대사

학조대사는 김계행의 형 김계권의 장자이다.

사대부가의 장손이 불문에 적을 둔다는 것은 김계행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계행은 학조대사에게 커다란 불만을 가졌으며 찾아오더라도 만나주지조차 않았다고 한다.



관련문집
- 구경연의(九經衍義)

이 책은 안동김씨 보백당종택에 소장되었던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구경연의(九經衍義)』이다.

총6책으로 엮여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 당시요선(唐詩要選)

안동김씨 보백당종택(寶白堂宗宅)에 소장되었던 책이다.

총 1책으로 시작(詩作) 공부를 위하여 필사한 시선집이다.

- 문헌록(文獻錄)

이 책은 안동김씨 보백당종택에 소장되었던 『문헌록(文獻錄)』이다.

문묘(文廟), 태묘(太廟), 원우(院宇) 등 3편을 총1책으로 엮은 필사본이다.

- 사문초(事文抄)

이 책은 안동김씨 보백당종택에 소장되었던 『사문초(事文抄)』이다.

총1책으로 엮어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관련유물
- 총마계축(?馬契軸)

이 문서는 안동김씨 보백당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총마계축이다.

1459년(세조 5)에 작성된 이 문서는 사헌부감찰의 별칭인 총마와 관련된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紀)

이 책은 의성김씨 지촌종택에서 보관하던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이다.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시문들을 총4책으로 엮어서 신축년 목판본과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 달수재(達壽齋)

안동김씨 보백당 종택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이다.

‘달수’란 ‘천수(天壽)에 이르러 복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종택 올라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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