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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무속과 기독교(전통종교와 외래종교)간의 갈등과 비극...
예전 한국문학 교과서에 실렸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문으로 국어시험에 등장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한국단편문학은 졸업과 동시에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접하기 쉽지 않은 분야인 듯 하다.
종전에 윤정희님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로 시청한 바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화충돌현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종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적 신념은 그만큼 강력하고 확고부동하다. 한치의 양보도 불허하는...
일단 한 번 수용하게 되면 평생동안 한 사람의 중심(core)을 이루고, 생각을 지배하고, 활동범위를 정해준다.
즉, 해야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의 경계나 지침을 내리고 때로는 수용자에게 절대복종의 명령을 요구한다.
가족들과 강원도로 여행갔다가 오면서 모 천주교 성지(정확히 어디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경기도쪽?)
를 들러서 분위기를 느낀적이 있다.
우리 집은 기독교(개신교/신교)측 인지라 천주교(카톨릭/구교)의 성지를 찾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지만,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의 참혹했던 모습은 지금(여행 당시 1995년 쯤)이슬람권이나 불교가
성행하는 아시아권 선교지에 떠난 사람들(지인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현재진행형 소식들과 오버랩되며
숙연해지기도 했다.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
진리는 하나다.
그에서 벗어난 것은 이단이다.
카톨릭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다소 극단적 보수주의를 자칭하는 신학을 받아들인 관계로
카톨릭 성지를 찾는 것은 이색적인 행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왜 예수상조차 우상일 수 있으니 세워서는 안된다.
성모마리아 숭배는 명백한 오류다.
카톨릭측에서 보면 기가 찰 말들이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종교를 문화의 하위개념으로 보았을 때)가 충돌하며 희생을 치른 사람들을 기리는 현장.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신앙적 양심...
그렇게 파고든 기독교(구교와 신교를 포함)는 이제 불교와 더불어 한국사회의 중심종교로 자리매김한다.
이제는 셀 수 없는 교회들과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수급현상으로 경쟁에서 탈락한 목회자들은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농어촌 지역으로 자청해서 떠나야 한다.
우리가 일반역사서나 교과서를 통해서 접하는 잔혹한 살상의 기억들에 종교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도 하고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그런 종교적 신념들 간의 갈등으로 피의 대가를 치루기도 한다.
거대담론의 중심주제가 되는 종교와 전쟁...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여러가지 역사 이야기들...
십자가전쟁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영화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2002)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현재 진행중인 중동전쟁...시온주의자들...자하드...)
고려시대의 불교를 배척, 조선의 유교적 이상국가건설(숭유억불)-정도전의 불씨잡변에 나타난 불교비판...
민족분쟁과 함께 일어나는 종교갈등문제...
인간사회가 형성된 이후 피할 수 없는 종교갈등문제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고된다.
지구상의 종교분쟁을 논하라.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리포터로 활동을 하든, 아니면 인류학자가 되어서 원시종족간의 비생산적인 투쟁이
사실은 종교적 이유가 시발점이었다는 논문을 쓰든....
종교가 무엇인기에 침투하고 막고 다시 수용하고 다시 교화과정에서 희생을 치르고...
영화 <<미션>>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원시림이나 다름 없는 곳으로 떠난 선교사 제레미 아이언스와 원주민을
동물이나 다름 없는 미개인으로 다루는 로버트 드니로의 회심과정을 그리며 감동을 준다.
종교는 서양의 정신과 탐욕을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말하자면, 정복을 위한 앞잡이 노릇 정도?
개인적으로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늘 드는 것은 아마도 어디선가 읽은 내용이 생각 깊이
박힌 탓일지도 모른다.(사실이 그러했다는 역사적관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또 신문을 보다보면 부모자식간의 종교적 갈등도 한 가정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부모의 종교강요에 못이겨 고통을 당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든지, 연인사이로 발전한 두 남녀가
서로의 집안(부모님)이 종교적 문제를 제기하자 마침내 갈라서고 마는 것과 같은 일 등.
전통을 지켜나가는 사람들,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보수의 자리에 올라서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때때로 그 전통이 실은 신문물과 함께 등장한 신흥종교이거나 신문화로 배척을 받던
외래문화였다는 것쯤은 상식에 속한다.
자연스럽게 중심을 차지하기까지 숯한 희생을 치루거나 배척을 당하고 또는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한다.
한국만큼 시대에 따라서 종교의 변화가 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지금은 기독교 전성시대라고 해야 하나?
저녁이면 공동묘지를 방불케 하는 붉은 십자가 천지.
테레사 수녀의 일침...
이렇게 많은 십자가가 있으면 무엇하는가?
과거 국어시간 선생님이 난데없이 하는 말...
"너희 기독교인들은 반성해야 돼."
"통일교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어?"
아니, 왜, 기독교에 통일교를 포함해서 싸잡아 비난을 하는 것인가?
지금 생각하면 넓게 보면 그렇다는 말씀 같다.
서양적 사고방식을 터득하고 습득하는데 성서만큼 중요한 고전도 없어보인다.
나 또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유로 어려서 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며 자라왔다.
그리고 신학 비스무리한 전공도 한터라 성경을 좀 안다고 하는 축에 속하기도 한다.(조족지혈이라 할 수도 있지만.)
해외여행에 별 매력을 못느끼는 탓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지는 못했지만,
한국지도만큼 많이 들여다 본 것이 또한 이스라엘 지도다.
교차로 문화라고 하나?
한국이 중국과 일본-중앙아시아와 동유럽 그리고 몽골을 포함-등의 사이에서 문화를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늘 위력이 강해지는 나라들의 틈바구니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했던 아픈 역사.
거쳐지나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역사.
토착화 되면서 거름망읕 통해 수용된 침전물들은 고스란히 기존의 토착물들과 섞여 전통을 이룬다.
어찌보면 타 문화에 개방적이지만 반면 그것이 오히려 외래문화 수용과정이 주는 자생성의 한계?로 인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내외적인 해석과 영향력으로 인해-문화수용주체자의 수동적 자세로 주체적 정신을 약화시키는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스라엘도 지리적으로 그런 위치에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역사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는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실제 강연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라는 공통분모에서 나오는 동병상련의 심정같은.
하지만 그들은 성서라는 고전을 통해 서양문화의 한축을 형성했다.
여기까지는 공인되거나 많은 이들의 입으로 거론되는 역사적 사실을 두서 없이 나열해 본 것.
소박한 의미에서의 구분으로 거시사-미시사라고 해야하나?
방향을 틀어서...이야기를 진행하자면...
미시사라고 해야 하나?
서울 외곽지역의 어느 조용한 시골마을.
증조부 사시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요한 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어느날 증조부께서 농사를 지어 쌀을 수레에 싣고 가는데 진흙탕을 만나는 바람에 바퀴가 빠져 나오지를 않게 된다.
안간힘을 쓰며 빠진 진흙탕속에서 벗어나려 진땀을 빼지만 속수무책.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도와줄 생각은 커녕 웃고 떠들어대며 구경거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나가던 코쟁이 서양 선교사가 팔을 걷어 붙여 도와준다.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선교사의 도움 덕분에 정성들여 지은 곡식을 버리지 않고 내다 팔 수 있었을 것이다.
고마운 나머지 증조부는 그 선교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지금보다도 더 서양인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에 겪은 이 기이한 인연과 상황에 어떨떨...게다가 그 선교사는 증조부에게 예수를 믿으라는 말만하고 가던 길을 가더라는 것.
증조부는 어리둥절함과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게 뭐길래 마치 달마가 동쪽으로 사라지듯이 유유히 사라진 사람.
이름도 알 수 없고 출생지도 알 수 없다.
마치 구원자의 모습을 하고 사라진 그는 누구인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물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로, 참선을 통해 진리를 깨우치는
수도승들의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본 화두의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된 바도 있다.
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278)
(가끔 몰몬교 젊은 선교사들이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지나다가 동네 청년들과 농구시합을 하며
잠시 선교여행의 시름을 내려놓고 즐거워 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명령에 의해서 무작위로 선교지가 정해진다고 하는데, 오지나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선택되면
가족 모두 비탄에 빠져버리고 아들이 혹시 큰 사고나 고통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패닉상태에 빠지기도 한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이란 나라가 선교대상지로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만해도(아마도 구한말쯤 되는 시기일 것)
서양인들에게는 오지나 다름 없는 곳이니 각별한 관심과 인연이 없으면 선뜻 선교지로 찾아오기 힘든 곳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본보기로 아마도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나 인요한 박사의 집안을 상상하면 좋을 듯 싶다.-다큐멘터리 참조
'고요한 아침의 나라' 다큐를 본적이 있는데 한 신부가 한국을 이탈리아와 같은 지형적 특색을 가진 나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증조부는 나의 친할아버지를 비롯한 자식들에게(4남 1녀) 돌아가시기 전 유언을 남기신다.
"나는 야소(예수)가 뭔지 잘 모르지만 너희들은 야소를 믿어야 한다."
*예수를 한자로 야소(耶蘇)라 번역.
종교개종을 당부하는 유언이라고 해야하나?
뒷산에는 불교사원이 있고 그 주지승이 할아버님의 친구분이시다.
먼 친척중 무속인도 있고, 굿판도 종종 벌어진다.
그리고 종손집안이라 제사가 끊이지 않는데 기독교라니...
갈등과 분쟁은 불 보 듯 뻔한 일이다.
그렇게 우리 집안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집안 대대로 지켜온 제사를 파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스스로를 외딴섬으로 만들어 버린 것.
집성촌이란 특수한 공간 안에서 벌어진 종교적 갈등은 만만치 않다.
서울에 집성촌? 아직도 7곳
서울시에 따르면 한 마을에 같은 성받이가 10가구 이상이 몰려 살고 있는 집성촌은 망우1동 양원리(동래 정씨),
방학4동 원당마을(파평 윤씨), 외발산동 광명마을(경주 최씨), 신내1동 능말(경주 임씨), 강일동 벌말(청송 심씨)과
가래여울 마을(남평 문씨), 염곡동 염통골(창녕 조씨)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6051722211#csidx27ff2a946e7fbccbac6b1966c9f4c17
여기 속한 곳 중 하나가 나의 고향마을이다.
비근한 예는...
기독교인으로 돌아가신 윗 어르신 장례식의 절차문제로 집안내 어르신들과의 갈등.
전통장례식을 고집하는 다수의 집안내 어르신들과의 마찰은 장례식 내내 이어진다.
선산에 마련된 식사공간도 분리되고 하다못해 버스대절도 따로따로 한다.
(웃지 못할 일화를 들려준다면...
어느날 갑자기 상을 당하신 집.
우리 조부의 동생분 되시는...
장지로 가기 위해 마련된 45인승 버스 3대.
두 대는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관장하는 동네 일가친척들-단합이 정말 잘 된다.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집성촌의 풍경이다.-이 탑승을 하고 나머지 한대는 교회에서 장례식 전반을 맡기 위해 동행하는 분들이 탑승.
피를 나눈 육적인 일가친척과 영적인 형제자매들이라고 해야 하나?
말하자면 비기독교인 차량과 기독교인 차량.
먼저 가서 준비할게 많은 관계로 비기독교인 차량이 먼저 출발한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떠나는 기독교인 차량이 출발을 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스톱, 스톱을 외친다.
급히 멈춘 대형버스에 올라탄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술이 덜 깼는지 잠이 덜 깼는지.
가는 내내 울려퍼질 찬송가 소리를 버텨낼 수 있을까?
선출발한 버스에 탔다면 동네 일가친척들과 더불어 술파티를 벌이며, 버스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에 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종교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를 어쩌나?
출발과 동시에 끊이지 않는 찬송가 소리.
망자를 위한 기도시간과 중간중간 공감대를 형성하며 주고받는 이야기들...
내가 옆에서 지켜보니 난감한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지경이다.
전날 상가집에서 술을 많이 드신 탓인지 술냄새도 난다.
지친듯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듯 하다.
그런데 하필 자리가 꽉 차서 버스 뒷문 계단에 쭈구리고 앉아 있다.
좀 아는 분이라 인사도 하고 어색할 것 같아 몇마디 건네보려 하지만
이미 파악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잠시 차창밖을 보다가 이내 계단 모서리에서 잠을 청한다.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덤의 둘레석을 놓는 일을 하신다.
그런데 어쩌다 늦으신 걸까? 시간을 지키지 못한 대가가 좀 그렇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선산에 가까워진다.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
더욱 뜨거워지는 찬송가 소리는 이제 자장가인 듯 고개가 떨어지며 졸고 계시다가...
갑자기 번쩍 눈을 뜨고...
자신이 아는 곡인지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분명, 교회하고는 먼 사람인데...멜로디가 정확하다.
필시 어린시절 다닌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거리와 위치상 근접한 곳이라 귀를 당겨 들어보기로 한다.
그런데 자신만이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 나는 그만 크게 웃을뻔 한 사태가 벌어졌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를....
"요단강 건너가 메루치, 메루치 메루치 요단강 건너가 메루치...."ㅋㅋㅋㅋㅋㅋㅋㅋ
어린 시절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도 아니고 멸치의 사투리식 발음인 메루치...
이 다음 내세에서 다시 만나자는 기약을 담은 찬송가를 담박에 멸치가 건너는 요단강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곤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웃음을 참고 있는지 아는 듯 나를 한 번 힐끗 쳐다 보고 익살스럽게 웃음을 보이고
더 크게 따라 부른다.
"메루치 메루치 요단강 건너가 메루치......"
지금 생각해 보면 장례식 주도권을 기독교도들에게 빼앗긴 작은 분풀이를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술안주에 쓰는 메루치 같은 눔들....?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요단강 건너다...가끔 드라마 대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상대에게 위협과 압력을 가하면서...
"너, 오늘 요단강 건너고 싶구나"
"너, 오늘 요단강 물맛을 보게 해주지."
원곡이라는데...
훨씬 품위 있어 보인다.
하마터면 크게 웃을뻔한 위기상황을 간신히 모면한 후, 도착한 선산.
기독교도 차량이 도착하자마자 이미 식사를 마친 동네 어르신들이 나무 그늘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식당은 분주하고 활기가 넘치지만 곡을 하며 따라가는 유족들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아무리 호상이라고 하지만 돌아가신 분의 자녀들은 얼굴이 모두 초죽음 상태다.
장지에 도착하면 작은 성가대도 하고 담임목사의 집례절차에 따라서 장례식이 진행된다.
한쪽에서는 거나하게 술이 취하신 일가친척들-촌수로 엮여진 관계들로 모두 가문네(집안네) 형 동생, 아저씨와 조카들이다.
그렇게 돌아가신 분과 같은 성을 쓰는 집안내 사람들이다.-이 왁짜지껄 떠들어대며 불만을 하늘로 날리는 듯하다.
주도권을 기독교측에 빼앗긴 분풀이라고 해야하나?
자신들은 전날 와서 정해진 위치-선산에 가 보면 항렬과 가문의 서열에 따라
정해진 무덤위치가 있다.이 동네로 최초로 온 시조 할아버지를 맨 위에 모시고 그 자식들이 그 아래층에 모셔진 형태.
-에 미리 선발대가 떠나서 만들어 놓은 무덤가에서 의식을 치루는 교회무리가 그들에게는 그다지 곱게 보일리 없다.
어떤 분은 그 분을 삭이지 못해 왜 우리의 권리를 순순히 저들에게 넘겨야 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신들은 기독교인들 뒤꽁무니만 쫓다가 굳은 일은 다하고 뒤치닥거리만 한다는 불만.
대대로 살아온 마을과 위엄을 갖추고 자리한 선산에서 망자가 단지 기독교인었다는 것과 그래서 장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치룰 수밖에 없다는 것에 한탄스러움마저 느끼는 듯 하다.
그래도 별수 있나?
망자의 집안에서 그렇게 해주기를 당부하고 별 무리없이 장례가 끝나기를 바라니...
어린시절.
동네 친구들이 거의 다 같은 성을 쓴다.
촌수가 깡패다?
버릇없는 놈이 촌수만 높다?
우리집안(소종회)은 가문이 번창한 탓인지 촌수가 낮다.
그래서 내 친구들 중 모두가 아저씨뻘이거나 할아버지 항렬이다.
돌림자로 확인 가능한 촌수.-아버지는 물 수자가 들어가고 내 이름은 나무 목이 들어간다.
하다못해 두 살 어린 동네 동생은 알고보니 증조할아버지뻘이다.
코찔찔이라고 나에게 한 두번 두들겨 맞고 다닌 후배가 사실은 증조할아버지다.
그 집에 가면 주눅이 든다.
촌수의 압박을 견뎌내기가 힘들다.
그리고 친구들 중 하나가 나이를 먹으니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위엄?을 부리기도 한다.
매일 뒤통수 맞고 살던 놈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 자리를 찾겠다는 심산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더 높은 촌수상위자가 있다.
그 친구만 오면 투덜거린다.
내게는 깍듯하게 하라면서 그 친구에게는 얼버무린다.ㅋ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 근본주의 사상(종교적 원리나 신학적 차원보다는 종교를 대하는 차원에서)을
지닌 탓에 집안에서는 술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명절날 선산에 가면 모두 한가지로 통일된 의식(전통방식/유교식)을 치르는데 우리집 만 기독교식으로 차례를 지낸다.
지나가면서 친구들(촌수 높은 죽마고우들)이 희죽희죽 웃는다.
여간 신앙심이 깊지 않으면 좀 창피하다.
차례음식을 먹지 않는(우상의 제물이란 이유로) 관계로 그들과 식사자리에서 어울릴 수도 없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나라지만 다수와 소수라는 지극히 뻔한 구도에서는 늘 일어나는 눈총세례는
피할 길이 없다.
하다 못해 기독교식 장례나 의식이 보기 싫은 가문네 어르신 중 극단적 성향을 보이는 분은
아예 우리 계열 소종회 묘지 이전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가문의 자손이냐?
선택하라!
여담- 아브라함 돋대? 당구장 용어다.
하나 남았는데 마무리를 짓지 못해 자꾸 늘어나 다시 본래상태로 돌아갈 기세...^^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한국에도 있었다.
아니 육신의 자손은 이제 의미가 없다.
영적인
지하드 ㅡ성전
시온주의
인샬라 ㅡ신의 뜻대로
לחיים!
Leĥaim!
건배! 위하여!
프랑스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사미에게 건네는 비행기 동승자 누나가 음료수잔을 들며...건배...
요즘 읽는 소설책이다.
다 읽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린 소년이 유대인란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과정을 그려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전쟁.
셈자손과 함 야벳 자손들간의 깊은 역사전쟁.
공원에서의 전도.
목이 쉰 여성분이 전도를 한다.
(전도를 받으면 기분이 묘하다.
내가 교회를 다닐 때 제일 싫은게 전도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시키니 하는 수 없지만.
꼭 외판원이 된 느낌이다. 종교 외판원.)
좀 듣고서 알았다고 하는데 가시지를 않길래 좀 짜증을 냈더니,
마귀 취급을 하 듯 소리를 더욱 높여 안수/안찰기도라도 할 태세다.
드라마 ((구해줘))는 이런 측면에서 볼 만하다.
그분이 얼마나 내공이 있는 분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
토굴기도부터 시작해서 축귀하는 현장까지 두루 섭렵한 사람이다.
좀 괴상한 이야기를 하자면...
여기 부분은 좀 조심해서 보기를 바람.
거북한 사람은 건너 뛰기-스킵(패스)하기-를...
*요즘은 외래어 남용시대라고 하야 하나?
과거에는 영어단어를 쓰면 있는 척한다고 한 소리를 듣거나 핀잔을 들었는데,
요즘은 범람 수준인 듯 하다.
사실과 팩트...
'사실' 이란 한자어 조합은 이미 이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따지고 보면 그것도 외래어였던 것?
또 실체로의 접근에 한계가 있는건지 아니면 '팩트'라는 어감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 팍 꽂혀서...
팩폭^^
이런 급식체로 말을 해야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일체감이나 공감대와 같은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언어의 여러 기능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야마도네' ...야마가 산이란 일본어이고 돈다는 말은 산이 빙빙 돈다고 해야 하나?
열받는다는 뜻.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같은 시대의 젊은이란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이런 프로에 가야 간혹 들을 수 있는 지나간 유행어들...
여기부터 주의 요망.
집안에 어느날 한 부인이 다수의 교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시간은 밤 11시 정도에서 새벽 2시...
나는 방에서 있고 밖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무서워 밖으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엑소시즘, 즉 구마의식 중이다.
늘 교회에 오면 잠을 자는 한 여인.
그녀는 보통 하루에 알약 20알을 거르지 않고 먹는다.
온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해서 그 안에 있는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의식을 한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집에서?
당시 나는 중학교 2학년...
나를 부르는 어머니와 목사님 그리고 신도들...
산교육장이라는 이유다.
마지못해 나간 현장은 그야말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다.
눈을 꼭 감고 앞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이 분.
갑자기 어린아이 목소리를 낸다.
사탕을 달라고....ㅋㅋㅋㅋ
지금은 웃지만 당시에는 공포영화 수준이다.
나는 심약한자라 지금도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십자가 목걸이를 강제로 걸어주니 괴성을 지른다.
믿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리고 움켜쥔 배에는 구렁이 같은 것이 꿈틀댄다고 설명하시는 목사님.
모두가 그 말에 물러가라는 소리를 지르며 열을 낸다.
마침내 여인은 실신하고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다음날부터 약을 먹지 않는다.
교회에 와서 자지도 않는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외삼촌을 찾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여인이 어린아이 목소리를 내면서 찾은 외삼촌.
정신이 돌아온 그여인의 설명.
자신이 외삼촌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6.25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6.25....
(참전용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 무덤가에 가서 매일 울었다는 전언.
사실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영향으로 그 여인의 깊은 곳에서 어린시절 자아가 자리잡고 자라난 성인의 한 인격을 형성해서
무의식중에서 잔존해 있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한 인간의 마음에 악으로 작용하는 어두운 그늘이 선으로 나아가는(성장하는) 것을 막아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마치 몸이 아픈 것처럼 작용해서 옭아매진 상태....?
그러니 축귀라는 행위를 통해 썩은 부위를 도려내야 한다.
과거에는 모두 후자로 해석하고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런식의 경험을 한 나에게 지나가는 중년부인이 전도를 한다.
그것도 새벽기도를 좀 한 듯 한 여성분.
그래서 목이 늘 쉰 상태인.
이 외에도 할 얘기가 많으나 그만두기로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 말을 맺자면,
그렇게 기독교로 인해 고립된 상태에 빠진 우리집은 아직도 선산에 가서 예전처럼 그렇게
기독교식으로 차례를 지낸다.
지금은 세상이 좀 변해서 뜨문뜨문 우리처럼 기독교식으로 지내는 집이 있다.
그리고 어떤분은 자신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데 아들들이 나간다고 반가워해주기도 한다.
많이 변한 듯 하다.
사정상 나는 선산에 가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참 별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신 또 나는 지금 그 두 입장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전통수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도 좋아보이지 않고,
또 그에 녹아들지 못하고 거부반응만을 일으키는 이종문화도 부담스럽다.
사실 그래서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것이고 다툼이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리라.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비단 종교적 이견때문만이겠냐마는,
아무튼 나의 어린시절 자라온 환경은 그랬다.
이 두 상이한 세계에서의 어색한 동거로 인해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친구들인데 친구가 아니고(촌수 문제) 선산으로 조상들을 뵈러 가야 하는데 방식의 차이(종교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고.
집성촌이란 고지식하고 하나의 관습과 태도를 견지하도록 하는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물질 같은
외래문화 수용인으로 눈총을 받아야 하는 어정쩡한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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