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밤 새 손정혜
입력날짜 : 2010. 01.01. 00:00
겨울비는 그쳤으나 천둥이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밤거리에서 비린내가 났다. 어둑한 거리에 술집과 피씨방, 편의점과 모텔이 군데군데 빛을 냈다. 밝은 데 뿐 아니라 어두운 구석에도 사람이 꿈지럭거렸다. 요란한 음악을 뿜어내는 나이트 앞에 이모의 포장마차가 있었다. 자정에 문을 열어 해 뜰 무렵까지만 파는 이모의 칼국수는 인기가 좋았다. 맛은 대단하지 않았으나 쌀쌀한 새벽에는 뜨거운 국물만한 게 없었다. 소주와 칼국수가 같은 가격인 삼천 원으로, 셋이 와서 먹어도 천원이 남았다. 볶은 호박이나 계란 같은 건 들어가지 않았다. 이모는 멸치 육수와 김 가루, 파와 소금만으로 국수를 만들었다. 밤이 깊을수록 이모의 손가락도 허옇게 불어갔다. 삼촌은 나이트 호객 행위를 했다. 긴 양복바지 안에 각반을 차고서 명함을 뿌렸다. 명함은 나방처럼 펄럭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키다리 호객꾼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짓궂지만 멍청하다는 걸 삼촌은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을 피하면서 취객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취객은 절룩거리며 물러났다. 새벽 세시 반, 3차가 끝날 즈음이었다. 밤새 놀 작정인 무리들, 첫차가 다닐 때까지 버티려는 사람들, 그리고 흠뻑 취해 제 이름도 잊어버린 사람만 거리에 남았다. 포장마차에서 싸움이 붙었다. 간이 테이블이 쓰러지고 플라스틱 그릇이 왈그락 쏟아졌다. 손님이 겉절이를 얻으러 잠시 일어난 사이, 주정뱅이가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의자의 원래 주인인 여자가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정뱅이는 못 들은 척 귀를 후볐다. 약이 오른 여자가 길길이 날뛰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정뱅이는 여자가 먹던 칼국수를 벌컥 들이켰다가 뜨거웠던지 도로 뱉어냈다. 아, 씨, 더럽게! 여자가 핸드백을 휘둘러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는 쓰러지며 여자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크리넥스처럼 얇은 공단 치마가 북 뜯어졌다. 여자의 구두굽이 그의 등을 찍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부지런히 여자의 다리를 더듬었다. 손님들은 허리를 둥그렇게 말면서 공간을 넓혀 주었다. 빈자리 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구경꾼이 되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2층 피씨방 창문이 열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뛰쳐나왔다. 모두들 한밤중의 육탄전을 재미나게 바라봤다. 키득거리며 휴대폰으로 여자의 허벅지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다. 이모는 무심하게 칼국수를 날랐다. 구석으로 몰리던 그가 여자를 넘어트리고 위로 올라탔다. 여자의 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주정뱅이가 여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모가 칼을 들고 다가왔다. 식칼에는 썰다만 파 조각이 붙어 있었다. 이모는 엉켜있는 남녀 앞에 서더니 제 팔뚝을 긁었다. 굵은 피가 떨어지자, 놀란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섰다. 이모는 칼끝으로 주정뱅이에게 비킬 것을 명령했다. 살기등등한 이모의 기세에 주정뱅이의 흔들리던 눈동자조차 제자리를 찾았다. “당신, 시끄러우니까 딴 데 가서 놀아. 손님도 가라, 돈 안 받을 테니까. 좀 있으면 날 밝아. 난 시간이 없는 사람이야.” 이모는 팔뚝을 행주로 훔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주정뱅이와 여자는 어물어물 사라지고, 손님들은 의자와 테이블을 주워 자리를 채웠다. 핏자국은 발에 밟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수 줘?” 이모는 까치발을 하고, 삼촌은 허리를 숙인 채로 그릇을 건네받았다. 삼촌이 먹다 남긴 국물은 이모가 후루룩 들이마셨다. 두 사람의 입에서 허연 김이 펄펄 났다. “굳이 피를 볼 일까지는 아니었잖아.” 삼촌이 붉게 얼룩진 행주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방법이 제일 빨라.” 이모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삼촌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언젠가 큰 시비가 붙었을 때, 이모는 국수 삶던 솥을 뒤집어엎었다. 슬리퍼를 신은 이모의 발등이 벌겋게 익었다. 길바닥에 허연 국수가닥이 꿈틀거렸다. 지구대조차 섣불리 이모를 건드리지 못했다. “하여튼, 저 이모 성깔 보통 아냐.” “화끈하기로는 이모가 동네에서 최고지. 자해의 여왕이라니까. 완전 멋져, 내 스타일이야! 이모, 언제 데이트 한번만 해주라, 응?” 웨이터들이 낄낄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이모는 목청 높여 ‘삼촌들, 짬 내서 국수 먹으러 들러’ 하고 소리쳤다. 그들이 이모에게 하트를 그려보였다. 이모는 싱거운 것들, 하며 국자로 솥을 퉁 내리쳤다. “이따가 봉고에서 봐. 나 바빠.” 이모가 질펀한 엉덩이를 내보이며 돌아서자, 삼촌도 일터로 갔다. 하늘 가장자리가 희끄무레해졌다. 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삼촌은 쓴 침을 칵 뱉어냈다. 각반에서 내려오면 어지러워 구역질이 일었다. 두통약을 삼키는데 누군가 엉덩이 사이를 푹 쑤셨다. 사래가 들려 콜록거리는 삼촌을 보며 낄낄거리는 건, 웨이터 진구였다. 나는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더라. 진구가 사라진 뒤에도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목에 걸린 약 때문에 입맛이 썼다. 늘씬하게 패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이트를 나섰다. 네온사인이 꺼진 나이트는 죽은 코끼리처럼 조용했다. 아침 일곱 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전철역으로 향했다. 그들은 발그스름한 눈가에 말간 얼굴로 총총걸음을 걸었다. 삼촌은 신문지에 둘둘 만 각반을 끼고서 그들을 바라봤다. 아야! 한 여자가 각반에 부딪혔다. 여자의 덜 마른 머리가 추위에 바삭바삭 얼어있었다. 삼촌이 고개를 까딱했으나, 여자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휴, 썩은 내…. 여자는 투덜거리며 삼촌 곁을 지나쳐갔다. 그녀에게서 샴푸 향기가 났다. 삼촌은 사우나에서 머리를 감고 이를 닦았다. 아무리 씻어도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은 퀭하고 까칠했다. 그래도 이젠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도 될 것 같았다. 비누칠을 하는데, 이모가 칼을 들고 주정뱅이에게 다가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소름이 돋았다. 얼른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동네에는 버려진 땅이 한 조각 있었다.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공터였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이모의 승합차가 서 있었다. 흉물스럽게 낡은 고물차였다. 폐차 비를 아끼려고 누군가 몰래 갖다버린 것 같았다. 삼촌은 자동차 바퀴 밑에 고아 둔 벽돌을 뒤집었다. 얼마 전에 열쇠를 잃어버려 이모 것을 함께 쓰고 있었다. 손잡이에 거미가 줄을 쳐 놔 끈적거렸다. 자동차 트렁크에는 테이블과 의자, 조리도구와 가스통, 포장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삼촌은 그 틈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를 찾아 담뱃불을 붙였다. 진구에게 라이터를 빌려줬다 돌려받지 못했다. 공터에 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햇살에 뒤척이는 먼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저만치서 이모가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은행 들렀다 오느라. 어제는 비가 와서 그래도 수입이 괜찮았어. 네가 소주를 싸게 대줘서, 그것도 많이 남아. 조금 더 애쓰면 올 겨울은 무사히 나겠어.” 두 사람은 차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꿉꿉한 이불솜에서 곰팡내가 났다. 이모의 눈 밑은 어둡고 입가는 부르텄다. 나이보다 열 살은 늙어 보여 오십대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밤에 일하는 여자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회용 밴드를 붙인 이모의 팔뚝에는 덴 자국과 흉터가 무수했다. 눈을 감은 이모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점심에는 미역국 해먹자. 깡통 참치 사왔다. 빌어먹을 소고기는 왜 그렇게 비싼 건지.” “무슨 일 있어?” “오늘, 아버지 생일이야.” 그 말에 삼촌이 윗몸을 일으켰다. “감옥 간 제 아비 생일까지 다 챙기고, 효녀 나셨네. 아예 오봉에 담아서 교도소까지 배달하지 그러니?” 삼촌이 비꼬자, 이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삼촌은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을 발로 차 엎어버렸다. 그리고는 트렁크에서 소주병을 꺼내 들이켰다. 미지근한 소주가 들어가자 오히려 목이 탔다. 뒤에서 이모가 이죽거렸다. “네가 십팔 세 청춘도 아니고, 언제까지 삐죽댈 거냐. 너도 집 나간 네 어미 일이라면 사족 못 쓰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자꾸 잊는 모양인데, 내 아버지일 뿐 아니라 네 작은 아버지이기도 하단다. 핏줄이란 게, 참 더러운 노릇이지?” 삼촌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모를 확 밀쳤다. 이모가 넘어지며 치맛자락이 뒤집어졌다. 이모도 지지 않고 덤벼들었다. 삼촌은 이모의 머리채를 잡고 떼어내려 애썼다. 이모의 마른 발뒤꿈치가 삼촌의 뺨을 거칠게 긁었다. “내가, 씩, 아침부터, 네 애비 얘기 하지 말랬지, 씩씩, 재수 없게.” “남들한테나 아침이지, 우리는 한밤중이다. 다른 날도 아니고 생일이라 미역국이나 한 그릇 끓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못할 짓이냐. 매일같이 내 가슴 후벼 파서 네 속은 시원하냐. 너나 나나 네 어미나 내 애비나, 똑같이 불쌍한 인간들끼리 이러지 말자.” 헐떡거리던 삼촌의 숨소리가 시들해졌다. 이모는 삼촌의 약점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안쓰러운 네 어미’ 운운하면 반드시 무너졌다. 이모의 얼굴로 삼촌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삼촌이 이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무릎을 껴안고 흐느꼈다. 이모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차 문을 열었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헝클어진 머리가 푸석하게 날렸다. 이모는 삼촌의 웅크린 등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네 어머니 생일에도 끓여 줄 테니까, 응.” 공터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번졌다. 겉절이와 식은 밥으로 밥상을 차린 후, 이모는 미역국 한 그릇을 덜어 공터 가장자리에 가져다 뒀다.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함께 두었다. “제삿밥도 아니고, 흉물스럽게. 귀신 나오겠다.” 삼촌이 퉁을 주었다. “도둑고양이라도 와서 먹으라고.” 이모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꾸역꾸역 한 그릇씩 비웠다. 덜 풀어져 고무줄 같은 미역을 꽉꽉 씹어 삼켰다. 밤거리에서 풍기던 비린내가 났다. 이모와 삼촌은 차 문을 걸어 잠근 채 바닥에 누웠다. 두 사람은 등을 돌리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바람소리가 차창을 흔들어, 꿈자리가 산란했다. 오후 무렵, 조그만 그림자가 공터에 드리웠다. 마르고 키가 작은 사내아이였다. 깡총한 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라 발가락이 시퍼렜다. 얼굴에는 버짐이 피었고 때 낀 손톱 밑에는 거스러미가 일었다. 녀석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위를 살피더니 봉고 근처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창문 시트지가 벌어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은 추위를 피해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절대 깨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삼촌에게서 훔친 차 열쇠를 꺼냈다. 트렁크를 열어 멸치 한주먹과 찬밥 덩어리, 김과 겉절이를 찾아 먹었다. 빈 참치깡통에 밥을 넣고 비벼 기름 한 방울 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공터 구석에 국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식어빠진 미역국이었다. 녀석은 냉큼 그릇을 들고 꿀떡꿀떡 마셨다. 맛있다. 맛있어. 녀석은 그릇 바닥까지 싹싹 핥았다.
이모가 눈을 뜬 것은 해가 넘어간 뒤였다. 공터에 노을이 얕게 깔렸다. 이모는 고무 대야를 내왔다. 찬물에 손이 닿아도 정신이 맑아지지 않았다. 감기기운이 있는지 몸이 축축 늘어졌다. 낮에 자면 아무리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잠드니 하루가 온통 밤의 연속인 것만 같았다. 이모는 뺨을 두드려 남은 잠을 쫓아냈다. 장사 준비를 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업체에서 재료를 받아오면 편하겠으나 단가가 비쌌다. 그러나 몸뚱이는 공짜였다. 힘주어 밀가루 반죽을 하는데, 은근한 분홍빛이 돌았다. 고춧가루라도 들어갔나 싶어 살펴보니, 팔뚝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모는 옷소매를 내리고 반죽을 주물렀다. 오늘 밤 손님들은 이모의 피가 들어간 국수를 먹게 될 터였다. 옷 위로 번지는 핏자국이 보기 싫었다. 상처 자리가 욱신거리자, 화가 치밀었다. 통각이 없다면 얼마나 살기 편할 것인가. 아프다는 감정은 이모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쁜 짓을 한 느낌, 살아있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더욱 거칠게 일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삼촌은 늦잠에서 깨어났다. 이모의 아버지는 손찌검을 하다가도 ‘아프냐? 아파?’ 하고 물었다. 열한 살짜리 어린 이모는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픈 티를 냈다가는 더 얻어맞을 게 뻔했다. 아버지는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철사 옷걸이 세 개를 겹친 것으로 두들겨 맞아도 울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얇은 철사가 피부에 착착 감겼다. 뼛속까지 통증이 찌르르 전해졌다. 몸에 실뱀 달라붙은 자국이 났다. ‘이젠 네가 얼마나 잘못 했는지 알겠느냐?’ 아이가 맞는데 지쳐 할딱거리면, 아버지는 그제야 철사 옷걸이를 우그러뜨렸다. 아이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실은 ‘대관절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고민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겁이 났다. 이토록 혹독한 대가를 치르니 엄청나게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죄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아버지만이 그 본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매질할 권리를 가진 거였다. 아이는 아버지보다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이 두려웠다. 아이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도둑질한 것을 감춰주지 않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날 아이는 빈 집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아침 일찍 돈 벌러 간다고 나섰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뛰어 들었다. 카메라와 구식 패물 몇 가지, 신문으로 둘둘 싼 뭉치를 안고 있었다. 못 보던 물건이라 아이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험악한 얼굴로 다그쳤다. ‘누구한테도 나를 봤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려. 나와 평생 헤어지게 될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물건을 쌀독에 숨기고 다락으로 올라갔다. 뒤돌아보며 눈빛으로 다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는 작대기를 주워 흙장난을 시작했지만, 긴장 때문에 손이 후들거렸다. “네 아비 어디 갔어?” 뒤이어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아이의 큰어머니였다. 눈에 핏발이 선채 낫을 쥐고 온 큰어머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지시받은 대로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큰어머니는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눈치 챘다. “죽어도 그 돈은 안 된다, 안 돼. 빚을 갚을 돈이야. 너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아? 그 돈 없으면 큰엄마, 큰아빠 집 뺏겨. 살 데가 없어. 거지 되는 거야. 아빠 어딨어? 아빠 어디에 숨었어?” 늘 수굿하던 큰어머니답지 않은 무서운 기세에 아이는 주눅이 들었다. 아이는 큰어머니가 든 낫을 쳐다보았다. 날에서 푸른 기가 뚝뚝 떨어졌다. 저것으로는 못 자를 게 없을 것 같았다. 큰어머니가 아이를 확 밀쳐냈다. 그러더니 낫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이는 찔끔 오줌을 지렸다. 그러나 날은 아이가 아니라 큰어머니 쪽을 향해 있었다. 네가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 아이는 큰어머니의 마음을 읽었다. 꽉 움켜쥐고 있던 작대기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이가 쌀독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진주목걸이와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신문지 뭉치는 없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다락을 가리켰다. 큰어머니는 아이 곁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낫을 움켜쥔 채였다. 마루로 올라설 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락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물건이 부서지고 사람이 나뒹구는 소리가 났다. 신음소리와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뭔가 깨지고 망가졌다. 아이는 발을 구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으나 점점 심해졌다. 어딘가 꽁꽁 숨고 싶었다. 아이는 쌀독 안으로 기어들어가 뚜껑을 닫았다. 독 안은 어둡고 아늑했다. 아이는 그 뒤에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다. 쌀독 안에서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한밤중이었다. 경찰차 사이렌이 왱왱 울려댔다. 동네 사람들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 기웃거렸다. 뭣 때문인지 여자가 남자를 죽이려고 했대. 하지만 낫을 들었대도 남자 힘을 이길 수야 있나. 그래서 거꾸로 여자가 당한 모양이야. 그런데 둘이 친척이라지? 사람들이 아이에게 무엇을 봤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 나직하게 울먹였다. 누구도 아이에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후 아이는 큰집에 머물렀다. 큰어머니는 어디 갔냐고 묻자 사촌동생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훌쩍이는 동생의 코가 새빨갰다. 아이는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이 가여워 손을 꼭 붙들었다. 엄마는 곧 돌아오니 걱정 말라고 다독여 주었다. 동생은 밤마다 누나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이는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가족들이 제 자리로 돌아와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큰어머니는 계절이 바뀌고서야 돌아왔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를 반기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표정은 화난 듯 우는 듯 복잡했다. 엄마에게 달라붙는 아들을 떼어놓고, 두 사람은 방문을 걸어 잠갔다. ‘세상 쓸모없는 도둑놈이라도 내 동생이야, 그걸 죽이려고 들어!’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기운이 없었다. 큰어머니 목소리는 바깥까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여자의 비명이 이어졌다. 그 날 다락에서 났던 소리와 비슷해 아이는 몸을 떨었다. 큰아버지가 장롱에 머리를 짓찧으며 울었다. 제 아버지가 울자 동생도 따라 울었다. 그날 밤, 큰어머니는 짐을 꾸렸다. 잠이 깬 아이만이 그 마지막을 목도했다. 아이가 가지 말라고 매달리자, 큰어머니가 입 다물라는 손짓을 보냈다. 큰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대문을 나섰다. 목숨 걸고 지킨 카메라와 진주목걸이도 가져가지 않았다. 지독한 어둠 속에 멀어지는 발소리만 남았다. 큰아버지는 종일 술만 마셔댔다. 아이와 사촌동생은 자주 끼니를 걸렀다. 머리에 이가 끓고, 속옷과 양말마다 구멍이 났다. 간혹 큰아버지는 아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제법 머리가 커진 사촌동생은 때때로 적의를 드러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주먹을 휘두르거나 성질부리는 일이 잦았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작은아버지가 감옥에 간 것이나 제 어미가 사라진 일에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았다. 너 때문이다. 너로 인해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었다는 무언의 압박이 계속됐다. 동생은 양심이 있거든 이 집에서 꺼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는 큰아버지의 냉대와 동생의 구박을 견디며 나이를 먹었다. 스무 살이 되자, 아이는 거리로 나왔다. 돈벌이는 쉽지 않았다. 낮에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는 밤에 일했다. 그러자 이틀이 하루처럼 후딱 지나갔다. 쌀독 속 같이 어두운 밤만이 아이를 편안하게 했다. 아이는 밤에 살아가는 이모가 되었다. “못난 녀석. 가엾은 자식 같으니.” 이모는 잠에 취한 삼촌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모는 수염이 돋아나 거칠어진 삼촌의 뺨을 쓸어내렸다. 집을 나온 후에도 큰집과 연락을 끊지는 않았다. 큰아버지의 생일날마다 전화를 넣었다. 꼴도 보기 싫었을 자신을 거둬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해마다 늙고 망가져 갔다. 동생의 소식을 물으면 착잡한 한숨만 그렁그렁 몰아쉬었다. 그런 호래자식 낳은 적 없다며 발뺌했다. 처음에 이모는 사촌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청년이 되어 나타난 동생은 다른 사람 같았다. 인중을 뭉갠 큰 흉터가 인상을 바꾸어 놓았다. 동생은 무덤덤하게 큰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이제는 어머니와 연락이 닿는다고도 했다. ‘새로 시집을 간 주제에 나만 보면 질질 짠다’ 고 빈정거리는 사촌동생이 영 낯설었다. 동생은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투덜거렸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빈 술병뿐이라는 거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물으니, 아무 계획 없다고 했다. 누나에게 얹혀살든가 뭐…. 동생은 건달처럼 능글능글 웃었다. “밤거리에는 너도 끼어들 자리가 하나쯤 있을 거야. 햇빛 한 조각 못 보지만 마음은 편안하지. 살아남으려면 도깨비같이 살아야 한다는 건 각오해. 그리고 앞으로는 이모라고 해라. 여기서는 모두 나를 그렇게 불러.” 이모는 나이트 웨이터 진구에게 동생의 일자리를 부탁했다. 동생을 본 진구가 체머리를 흔들었다. “인상은 더럽지, 다리는 병신이지…. 아무리 이모 부탁이라도 저런 하자 많은 애는 못 갖다 써요. 나까지 사장한테 욕먹을 일 있나.” 이모는 진구에게 여러 차례 돈을 쥐어주었다. 그럼 내 맘대로 다룰 테니까 뭐라 하면 안 돼, 이모. 진구는 못 이기는 척 동생을 받아주었다. 흉터 때문에 손님 접대는 할 수 없었다. 진한 분장에 각반을 차고 호객 행위를 하게 되었다. 이모는 그때부터 동생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진구 삼촌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삼촌은 오른쪽 다리보다 왼쪽 다리가 짧았다. 발등이 안으로 굽고 무릎이 다 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유를 묻자 삼촌은 ‘싸웠다’고만 했다. 간헐적으로 통증이 찾아왔다. 그런 밤에는 비틀린 발등을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이모는 국수 삶는 솥에 수건을 끓여 찜질해주었다. 그런 삼촌이 각반을 탈 때만큼은 멀쩡하게 걸었다. 각반 위에서 삼촌은 강인하고 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나이트가 문을 닫으면 다시 땅을 디뎠고, 그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맨 얼굴 맨 몸으로 햇빛에 드러나는 게 싫었다. 삼촌도 어느덧 밤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삼촌이 유일하게 큰소리를 치는 대상은 이모뿐이었다. 이모에게만은 어떤 짓이든 다 할 수 있었다. 욕 하고, 침을 뱉고, 함부로 손찌검을 했다. 이모는 무슨 일을 당해도 삼촌을 떠나지 않았다. “시비 거는 새끼 있으면 불러, 쫓아줄 테니까.” 출근 준비를 마친 삼촌이 큰소리를 쳤다. 이모는 대답 대신 국솥을 들어올렸다. 한바탕 대거리 후 전에 없이 다정해지는 사내와는 상대하기 싫었다. 무안해진 삼촌은 볼을 붉히며 공터를 빠져나갔다. 이모는 비뚤배뚤 걸어가는 삼촌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이모는 외발손수레로 부지런히 짐을 날랐다. 포장을 치고 걷는 일은 밤거리 삼촌들이 도와주었다. 취객이나 깡패가 시비를 걸면 말려주는 것도 삼촌들이었다. 이모는 스스로를 지키려 애썼으나 때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삼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도움이 되었다. 대신 이모는 그들에게 국수를 공짜로 주었다. 밤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돕는 방식이었다. 밤의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서로를 이모, 삼촌이라 부르며 어울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모는 마지막으로 설거지물을 담을 고무 대야를 수레에 실었다.
녀석은 이모가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나타났다. 공터에는 텅 빈 승합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모와 삼촌이 차에 머무르는 동안, 녀석은 거리를 배회했다. 그들이 사라지면 차는 녀석의 것이 되었다. 희한한 분장에 각반을 탄 사내의 뒤를 쫓다가, 그가 이모와 함께 승합차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차 열쇠도 손에 넣었다. 녀석에게 잠자리가 생겼다. 자정 무렵부터 새벽까지, 녀석은 차에서 생활했다. 처음에는 언제 들킬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점차 대담해졌다. 해가 뜨기 전에는 그들이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돌려보았다. 경적을 뿡뿡 울리기도 했다. 이 차가 제 거라면 어떨까 상상했다. 을씨년스러운 공터를 박차고 나가 씽씽 달리고 싶었다. 차 안은 어수선했다. 그들은 의자를 떼어내 공간을 넓히고,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지냈다. 여기저기 살림도구들이 굴러다녔다. 이모는 핸들에 젖은 스타킹을 널어 말렸다. 빈 종이컵마다 담배꽁초가 꽉 차 있었다. 젓가락을 담아둔 양푼에 브라와 남자 팬티가 엉켜 있기도 했다. 게으른 남녀가 동거하는 쪽방 같았다. 녀석은 거기 누워 어른 행세를 했다. 브라와 팬티를 나란히 펼쳐놓고 주물럭거리기도 하고, 빈 소주병을 벌컥거리거나 담배 피우는 시늉도 했다. 허기가 지면 빵 쪼가리나 찬밥을 찾아먹었다. 그러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녀석은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었다. 각반을 타고 밤거리를 누비는 꿈이었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 봉고차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여자의 둥그런 가슴에는 레이스 리본이 달려 있었다. 만질 때마다 속이 빈 것처럼 푹푹 꺼졌다. 녀석은 사라지는 가슴을 붙잡으려 자꾸만 파고들었다. 철컥, 열쇠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발각된 후였다. 녀석은 꼭 움켜쥐고 있던 브라를 내팽개쳤다. “얘는 뭐야. 네 애야?” 이모가 물었다. 삼촌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누나 아니야?” “웃기시네. 내가 남자 만나는 거 봤어?” “하지만… 나도 아니야. 내 애를 낳을 정도로 골빈 여자가 있을 리도…. 야, 넌 누구야?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런 거지새끼!” 옥신각신하던 둘은 마침내 녀석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달아날 구멍을 살피던 녀석이 잽싸게 튀어나갔다. 삼촌이 녀석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슬리퍼 한 짝이 맥없이 벗겨졌다. 녀석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삼촌이 녀석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녀석이 자지러지게 놀라 마른 팔다리를 버르적거렸다. 이모가 삼촌을 저지했다. “끼니때 됐으니 밥이나 먹여 보내자.” 이모가 가스버너에 불을 올렸다. 삼촌이 손을 놓아준 후에도 아이는 달아나지 않았다.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공터에 머물렀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칼국수를 먹었다. 셋이 앉으니 좁은 차 안이 꽉 찼다.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발 화내지 마세요. 소원이 있는데….” “뭐?” “저어, 나도 여기서 살게 해주면 안돼요?” 삼촌이 숟가락을 탕 내려놓았다. 이모가 번쩍 치켜 올린 그의 손을 끌어내렸다. 녀석이 필사적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밤에만. 이모랑 삼촌이 나갔을 때만 여기 있을게요. 나는 찬밥 부스러기를 먹고, 잠도 이불이 아니라 바닥에서만 자요. 그러니까 파리나 쥐만큼도 피해를 입히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녀석이 입가에 묻은 김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이모는 시커멓게 때에 전 옷소매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더러운 품새였다. 아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갈게요. 하지만….” “다신 오지 마, 이 자식아! 이게 어디서 까불어, 혼나볼래!” 삼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반사적으로 몸을 도사렸다. 이모가 팽팽하게 맞선 둘 사이에 끼어들어, 녀석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이는 고집스럽게도 ‘이따 올 거예요’ 하고 다짐을 두었다. 아이가 사라진 후에, 삼촌은 이모에게 화풀이를 했다. “왜 그냥 보냈어! 저런 녀석들은 한 번에 떼어내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고 계속 들러붙는다고.” 이모는 밥상 위 숟가락 세 개를 거두어 들였다. “쟤, 정말 갈 데가 없어보였어.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갈지 몰라. 어차피 여기는 우리 땅도 아니야. 공터에 얹혀사는 거잖아. 이깟 고물 봉고차에 애 하나 더 머무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햇살이 잠들락 말락 하는 삼촌과 이모의 얼굴을 뒤덮었다. 삼촌이 몸을 뒤척이며 웅얼거렸다. “가뜩이나 진구 새끼 때문에 열 받는데…. 짜증나게…. 내가 바지저고리인 줄 아나, 다 나한테 들러붙고 지랄이야….” “진구 삼촌이 왜…?” “또 돈 달라고.” “네가 돈이 어딨니. 삐끼 수당 받으면 네 엄마 갖다 주기 바쁜데.” “시끄러워…. 엄마 남편이 암인지 뭔지 돈이 필요하다잖아. 진구 자식은 누나랑 나랑 눈 맞아서 살림 차리고 사는 줄 알아. 나더러 여자 등쳐먹는 더럽게 운 좋은 새끼래. 누나가 버는 돈 좀 나눠쓰자면서 지분거려. 밤거리 돈은 누나가 다 갈퀴로 긁어간다나.” “나쁜 자식이네…. 먹고 죽으려도 없다고 해라. 내 아비 영치금에, 네 어미 새 남편 병원비 대느라 이모 허리가 휜다고 해.” 둘은 어느새 빨래더미처럼 엉켜 잠이 들었다.
다시 밤이 되었다. 삼촌은 각반에 올라 명함을 날렸다. 이모는 겨드랑이가 땀에 젖어 흥건한 채 칼국수 그릇을 날랐다. ‘여자 기본 무료! 댄스경연대회! 섹시 스트립 쇼! 인기 가수 총집합! 부킹 100% 책임!’ 삼촌이 낭랑하게 소리쳤다. 주말을 앞둔 밤거리는 몰려나온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나이트 앞에 줄이 이어졌다. 키다리 삼촌을 보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손님까지 있었다. 삼촌은 흥에 겨워 전단지를 공중에 흩뿌렸다. “삼촌!” 누군가 빽 소리를 질렀다. 밤에는 듣기 힘든 앳된 목소리였다. 삼촌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이었다. “뭐야, 저 새끼?” 삼촌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부산하게 풀쩍거렸다. 별 일 아니면 쥐어박아줄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급했다. 서두르니 걸음이 자꾸 엇나갔다. 삼촌은 덜그럭거리며 속도를 냈다. 녀석이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큰일 났어요! 이모가 맞고 있어요!” 진구가 이모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모는 공중에 매달려 헐떡거렸다. 밤을 공생하던 ‘삼촌’의 공격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앞치마에서 천 원짜리가 비실비실 빠져나왔다. 시비에 익숙한 손님들은 그릇을 들고 슬금슬금 비켜났다. 사람들은 웨이터와 포장마차 주인의 몸싸움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졸지에 이모와 삼촌이 구경거리가 된 셈이었다. “야, 너 왜 그래? 미쳤어? 이모한테 이러면 어떡해!” 호프집 종업원이 진구의 허리를 끌어안고 억지로 떼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진구는 악착같이 이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삼촌이 다가오자, 녀석이 숨 가쁘게 일러바쳤다. “저 삼촌이 이모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이모가 웃기지 말라고 무시하니까, 갑자기 주먹으로 팼어요. 내가 봤어요. 완전 나쁜 새끼에요.” 진구의 커다란 손이 이모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맞은 건 이모인데, 삼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삼촌은 달리기 시작했다. 각반에서 두둑 뚝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발목이 휘청하고 꺾였다. 삼촌은 높은 데서 떨어지듯 휘청이며 넘어졌다. 부러진 각반이 저만치 굴러갔다. 녀석이 쪼르르 달려가 그것을 주웠다. 삼촌은 나머지 각반으로 진구의 다리를 걸었다. 난데없이 뒤에서 발목을 잡힌 진구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로소 놓여난 이모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산발이 된 머리를 매만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아오, 이 지겨운 새끼. 너 오늘 죽을 줄 알아. 진구가 삼촌을 찍어 누르고 단숨에 올라탔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이 얼굴에 쏟아졌다. 밤하늘이 번쩍거렸다. 한쪽 각반을 벗지 못한 삼촌은 무기력한 존재였다. 눈을 꾹 감고 주먹질을 고스란히 감당했다. “비켜, 삼촌한테서 떨어져!” 진구 뒤통수에서 ‘깡’ 소리가 났다. 이모와 녀석이 합세해 부러진 각반으로 진구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진구의 눈이 허옇게 뒤집히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이트에서는 음악이 쿵짝쿵짝 울렸으나 거리는 조용했다. 진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거 아냐? 엄마야, 난 몰라…. 어떡해… 무서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뭐해요? 도망쳐야지. 저 여자가 방금 경찰한테 전화했어요. 지구대 아저씨들이 금방 올 거예요. 어서 가요, 빨리!” 녀석이 이모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에 뭔가 차가운 것이 만져졌다. 펼쳐보니 차 열쇠가 쥐여져 있었다. 어두운 쌀독에서 기어 나온 것처럼 머릿속이 쨍 하고 밝아졌다. 이모는 삼촌에게서 각반을 벗겨냈다. 두 사람이 삼촌을 부축했다. 삼촌은 좀처럼 제대로 서지 못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웨이터 하나가 삼촌을 붙잡았다. 그냥 가면 어떡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삼촌은 짓이겨진 눈을 껌뻑거렸다. 이모가 삼촌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각반으로 제 얼굴을 후려쳤다. 코피가 폭죽처럼 터졌다. 웨이터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람들이 서서히 길을 터주었다. 세 사람은 함께 공터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승합차는 쿨럭쿨럭 기침하며 멈칫거렸다. 녀석이 백미러를 쳐다보며 안달을 냈다. 손이 저릴 때까지 열쇠를 돌린 후에야 시동이 걸렸다. 녀석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모는 단호하게 핸들을 틀었다. 공터에 흙바람을 일으키며 봉고차가 달려 나갔다. 녀석이 엉덩이를 깡충거리며 기뻐했다. 날이 밝고 있었다. 투명한 햇살 아래 승합차의 더러움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삼촌이 어이없다는 듯 이모를 쳐다봤다. 이모는 그제야 자기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두드리니 손바닥이 시커메졌다. 이모는 라디오를 틀었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모는 박자에 맞춰 발을 까딱거렸다.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김밥이라도 사먹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소풍이라도 가는 양 기분이 들떴다. “너는 왜 웃냐?” 삼촌이 녀석에게 물었다. “사실은 진구 삼촌이 우리 형이거든요. 맨날 두드려 패고 앵벌이나 시키는 형 따위, 죽어버리면 어때. 도망치고 싶어서 기회만 노렸는데, 자알 됐다. 아, 속 시원해. 콱 죽은 거라면 좋겠는데. 죽었을까요? 아니면 괜찮을까요.” 녀석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국도를 빠져나온 승합차가 뻥 뚫린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삼촌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모는 앞만 보고 달렸다. 노랫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사방이 환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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