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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13> 서장 (書狀)
부추밀에 대한 답서(2)
참선 공부란 근본을 확철히 파악하여 분명한 지혜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일시적으로 좋게 느껴지는 정서적인 만족감이 아니다.
대개 처음 선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번다한 일상을 떠나서 고요한 산사나 선방에 앉아 정진하다보면, 일순 잡념이 없어지고 고요히 가라앉은 행복한 느낌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번잡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느낌의 기억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경계에 끄달리는 것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마치 돌을 가지고 풀을 눌러 놓은 동안에는 풀이 나오지 못하다가 돌을 치우면 풀이 다시 솟아나는 것과 같다.
선공부의 올바른 결실이란, 요컨대 만 가지 경계의 일미청정(一味淸淨)한 본성을 보아서 한번 크게 쉬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 때에야 비로소 번잡한 곳에 있으나 고요한 곳에 있으나 한결같이 담담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특정한 느낌이나 견해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털끝 만큼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긴 강을 저어서 곧장 우유를 만들고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으로 만들며, 때에 따라 놓고 붙잡고 죽이고 살림에 자유로와서, 스스로와 남을 이롭게 함에 베푸는 일마다 옳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견성을 하여 바른 안목을 가지는 것은 무엇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세계와 나는 지금 존재하는 이대로가 전부이다. 이대로의 세계, 이대로의 나는 그대로 완전하여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세간의 일일뿐이고, 깨달음의 진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진리의 안목을 통하여 보면, 무엇이 가치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하나 하나가 모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강물과 우유가 아무 차이가 없고, 흙덩이와 황금이 꼭 같다.
그러므로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취하고 버리고 죽이고 살림에 자유자재할 수가 있으며, 모두가 완전한 진리이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옳지 아니함이 없다. 물론 진리라는 생각도 없고 옳고 그르다는 생각도 없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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