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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스트레스성 폭식과 성만찬>의 줄거리:
성찬식의 스트레스! 감히 누구도 입밖에 꺼낼 수 없지만 공공연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찬식이 지루하고 스트레스 받게 하는 예식이 아니라 참으로 사악한 스트레스 때문에 성찬식이 제정된 것입니다. 성만찬은 인류의 역사 이래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스트레스성 폭식을 이 지구 위에서 몰아내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어린 계획의 결과입니다.
스트레스성 폭식과 성만찬
(마26:26-30)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스트레스성 폭식과 성만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스트레스성 폭식과 성만찬’
여러분, 가끔 드라마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실연을 당하고 좌절감에 몸부림치다가 집에 들어와서 몇날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서 냉장고 안에 있는 모든 반찬들을 꺼내서 찬밥과 함께 정말 세숫대야 크기 만 한 양푼에다가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쓱쓱 비벼가지고, 밥을 먹는다고 하기에는 너무 미친 듯이 입에 퍼 넣으면서 밥을 마시는 것처럼 먹는 모양을 봅니다.
또 아니면, 포장마차에 가서 그야말로 실신할 정도로 폭음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뭐 이건 꼭 실연당한 여자가 아니라도, 직장에서 잘린 남자라든지 이런 식으로…
이게 다 우리 생활에서 우리 스스로도 경험할 수 있는 스트레스성 폭식입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생리적으로 신체적인 변화상으로는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고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해서 혈중의 당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면 사실은 식욕이 없어지는 거예요, 신체적으로는.
그런데 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뭔가 자꾸 먹게 되느냐?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게 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 하면 심리적으로는 내 내부의 마음이 비어있다는 것이 과도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적나라하게 느껴질 때라는 거예요.
내 마음이 비어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통 때는 내가 잘 모릅니다.
그냥 비어있음에 쫓겨 갈 뿐이지, 비어있음 자체가 전면에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트레스성 폭식이 나타날 때는 사람의 마음이 허한 사실이 전면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허함을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폭식과 폭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먹어도 정말 토할 정도로 밀어 넣어도 마음이 채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폭식과 폭음이 나타날 때 이 스트레스의 ‘탈 억제효과’, 보통 때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부분들이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으면서 그 억제력이 상실되는 탈 억제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그 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아무리 먹어도 신체적으로 채워 넣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폭식, 폭음이 반복되다 보면 습관적으로 체질화 돼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만성적인 스트레스로부터 폭식과 폭음의 습관이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한 스트레스와 성만찬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감추어진 사악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에 대해서 어떤 소원을 갖지 않습니까?
그 소원을 갖는다는 것이 마음으로 폭식을 하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스트레스성 폭식과 똑같은 이치에 의해서 나타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이게 바로 돈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양푼에 찬밥과 김치와 고추장을 버무린 밥을 좋아해서 그렇게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게 폭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을 굉장히 마음에서 갖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과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돈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싶고 엘리트가 되고 싶다는 야심을 갖게 됩니다.
이게 실제로 일류대학이 좋아서도 아니고, 엘리트가 되는 게 대단해서도 아니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우린 지금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마태가 예수님에 관한 글들을 써가고 있는 중에 그 맥락 안에서 이해를 해본다는 거예요 - 그럴 때 성만찬이 스트레스성 폭식과 연관성이 있다 이겁니다.
가룟 유다와 우리가 결별하는 포인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포인트가 뭡니까?
예수님이 전혀 필요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무엇에 대해 필요가 없다고요?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갖고 있는 소원과 비전에 대해서 전혀 쓸모없는 분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 가룟 유다예요.
다른 제자들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해요, 저는 가룟 유다가 가장 샤프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의 비전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요, 이건 아직 가룟 유다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 거죠?
어쨌든 가룟 유다의 결별 포인트가 이러한 세상 삶에 대한 소원을 계속 견지할 때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버리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따라 들어가는 자들, 이들이 참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소원의 맥락에서 성만찬을 보면 소원이란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의 표현이라는 거예요, 스트레스의 표현.
그 소원하는 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원을 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지나가는 외제차가 참 좋아서 그것을 갖고 싶다고 한다면, 외제차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속지 말라는 거죠.
내가 지금 마음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과도한 긴장상태이거나 과도하게 허한 느낌을 갖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차를 갖고 싶어 한다 이겁니다.
자, 성만찬을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가 죽게 될 것이고, 그 몸이 바로 이 떡이다’, 또 잔을 주시면서 ‘죄를 사하기 위해 흘린 나의 피다’고 하면서 주십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이라는 것이 제정된 이유가 출애굽 사건에서 구원을 뜻하는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이제 새 언약이니까 유월절이 끝나는 거예요.
모세가 출애굽을 해서 율법을 주면서 구원받은 자들로서의 선민의 삶이 지속될 수 있었는데, 그 대신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새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구약의 구원사건을 대치해버리는 사건이 주님의 성만찬 사건이라는 거예요.
성만찬 사건이 죄 사함과 구원의 사건인데, 왜 죄 사함과 구원의 사건이 하필 성만찬, 먹는 것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느냐 이겁니다.
여러분, 죄가 바로 먹는 것에서 바로 성립하기 때문에 죄 사함과 구원의 사건이 먹는 것으로 표현이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도대체 무엇일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인간이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가를 알아야 돼요.
인간이 왜 만들어졌습니까?
배부름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고파지고 끊임없이 배불러야 되는 그러한 수난 속에서 삶이 유지되는 자가 인간입니다, 인간뿐만 아니에요, 동물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호랑이 한 마리가 태어났다, 그러면 그 호랑이가 자기 평생에 하는 일이 뭡니까?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먹이를 찾는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먹이를 찾는 것인데, 이 육체의 먹이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은 한 가지 더 보태져서 마음의 먹이를 찾아서 마음이 배불러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이 불러져야 비로소 기쁨이 생기고 행복감이 생겨납니다.
살 마음이 생긴다, 없어진다는 말이 뭐냐 하면 무언가 원하는 것으로 마음이 채워진 상태가 살 마음이라는 것인데, 몸이 굶주리면 죽을 몸이 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몸이 채워져야 살 몸이 되는 것처럼 마음이 채워질 때 우리는 ‘살 마음이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좋은 게 없던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서 살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애인이 마음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배부름을 위해 사는 존재로 태어난 것이에요.
내 배를 채운다는 게 나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죄가 어디서 성립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뜻은 하나님 말고 내 배를 채우기에 좋은 것을 내가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좋아, 출세가 좋아, 승진이 좋아,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는 게 좋아!’ 이렇게 좋다고 하는 것, 내 배를 채울만한 것을 하나님 이외에서 찾아내는 것,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거라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밖에 없도록 지어진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결별을 하면서부터 인간에게는 스트레스가 유전적으로 전해져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내가 적응하기 힘들어지면서 긴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만 배를 채울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면서 근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긴장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고, 결코 기쁠 수 없고, 결코 배부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긴장 속에서 사람들은 그 공복을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붙잡은 게 돈, 승진, 명품백이라는 겁니다, 허겁지겁 붙잡고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게 일류대학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모든 소원은 다 하나님이 결여되면서 하나님으로 밖에는 채워질 길이 없는 마음들이 바짝 긴장하면서 그 마음을 채우려고 버둥거릴 때에 마치 실연당한 여인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폭식을 하듯이 돈을 갈망하고 출세를 갈망하고 건강과 장수, 승진을 갈망하고 교회부흥을 갈망하고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목사님들이 교회의 숫자적인 부흥을 갈망하지 않습니까?
과도한 스트레스성 폭식이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채워져야 될 목사님이 하나님이 결렬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스트레스를 교회부흥이라는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스트레스성 폭식이 나타나고 있는 거라는 얘깁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성만찬의 의미가 뭡니까?
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됩니까?
예수님이 누구예요?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분이십니다, 아주 쉬운 거예요.
여러분, 성만찬 예식 자체가 스트레스지요?
주님의 고난, ‘주님이 나 때문에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고 계속해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고 엄숙한 음악이 나가는 동안에 성찬식을 거행하고 참여하는데, 이거 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고 해도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앞에 있는 장로님을 보니까 먹는 것도 제대로 씹지를 못하셔서 겨우겨우 침으로 녹여서 먹느라고 애쓰시는 모습이 보이고, 인상을 쓰면서 기도하고 계시고…
이러니까 이게 스트레스예요 스트레스, 성찬식의 의미를 모르는데…
그 자체가 스트레스예요, 그 사람들을 인도하는 목사님도 스트레스예요, 성찬식 자체가.
주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그 떡과 그 포도주를 왜 먹고 마시냐는 얘깁니다.
의미를 알아야 재미가 있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닌 것들을 마음으로 소원하며 마음의 배를 채우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다 죄악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순간이고 이제부터는 하나님만으로 배부르겠다고 하는 결단의 표현이 바로 성찬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찬식의 의미가 삶에서 표현되어야 성찬식이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성찬식의 의미대로 삶을 평소에 살아야 교회에서 하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눈물이 퐁퐁 빠지도록 은혜가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성찬식의 의미대로 살아갑니까?
말씀드렸듯이 소원이 생기면 그것이 어떤 소원이든, 아주 사소한 것이든 원대한 비전이든 간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비전을 이루어봐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로 배부른 것만큼 배부를 수도 없고, 이 세상의 삶에서의 비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성 폭식이라는 얘깁니다, 이걸 인정하는 거예요.
이걸 인정하면서 살다가 성찬식에 참여하면 눈물이 퐁퐁 나올 거예요, 주님의 은혜 앞에서.
그러니까 원대한 비전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소원이 생길 때라도 ‘아, 이 소원은 하나님을 먹지 못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배부르지 못해서 나타나는 스트레스성 폭식의 일환이다’이렇게 생각을 하라는 것이 성찬식의 의미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여간 이 세상에서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자마자 이 세상 삶에 대해서 그토록 간절하게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나라의 독립을 갈망했고, 나라가 독립할 때 예수님이 왕에 오르면 자기가 높은 자리를 얻겠다고 하는 강한 비전의 사나이였던 베드로가 그 모든 세상에 대한 비전을 깡그리 잊어버렸듯이 하나님으로 배부른 자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성 폭식의 증상이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한 성인들에게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강원도 화전민 마을에 사는 할머니에게도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성만찬을 통한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생각합니다, ‘아, 내 마음이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라고 믿는 것이 성만찬을 받아들이는 태도고 바른 마음가짐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성만찬을 받아들인 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마음에 ‘아, 요거 이뤄졌으면 좋겠다’ 싶을 때 깜짝 놀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하늘아버지로 채워져 있지 않구나! 하늘아버지로 채워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그 스트레스로 인해 내가 자꾸 이 세상의 무엇인가를 먹으려고 하고 있구나, 스트레스성 폭식이 마음에 나타나고 있구나!’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깨우쳐 주고 자각하고 인정하는 것, 이게 바로 성만찬의 의미대로 삶을 사는 거라는 거예요.
어떡하면 하나님을 먹습니까?
바로 주님의 십자가사건이에요.
성만찬에서 살과 피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 십자가에서 연합해서 같이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죽는다는 것이 무엇에 대해 죽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갖게 되는 크고 작은 사소한 모든 소원에 대해 죽는 거라는 거예요.
어떻게 죽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자동차 사고 싶은 마음, ‘아, 이 자동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걸 알고 그 소원에 대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지’, 이게 바로 성만찬 정신이라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교회가 부흥했으면 좋겠다, 예배당을 지으면 좋겠다, 이 모든 소원이 생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가 죽은 자다, 이런 소원은 하나님아버지로 배부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성 폭식의 일환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내 소원에 대해 죽고, 소원을 바꾸는 겁니다.
굶주림으로 인해서 채우고 싶은 그 좋은 음식을 주님의 살과 피로 바꾸는 거예요.
주님의 살과 피로 바꾸고 그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하나님의 영으로 내 마음을 채우자 이겁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소원에 대해서 죽은 자에게 하늘의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면서 배부름을 허락하고, 거기서 기쁨과 행복을 주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여러분, 성령이 충만해졌을 때 나타나는 역사는 성령의 일이니까 기억하지도 마세요!
바라지도 말고, 그걸 비전으로 꿈꾸지도 말고 그리지도 마세요!
목사님이 교회부흥에 대해서 굶주려 하시는 것은 스트레스성 폭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도대체 목사님을 볼 때 교회부흥을 원하는 분인 것 같지 않아요, 다른 목사님과는 다르게.
그럴 때 그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 있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소원으로 세상의 삶은 이끌어져 가는 것이지, 우리의 소원으로 이끌려가는 게 아니에요.
성만찬, 무슨 뜻으로 제정이 된 겁니까?
하나님으로 배불러야 된다.
그런데 그것이 죄를 씻어준다는데 무슨 죄가 있는데 먹어야 씻어진다는 겁니까?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소원하면서 그것을 얻으려 한 것, 그것이 바로 스트레스성 폭식이고 스트레스가 바로 하나님을 등져버리고 선악과,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내 마음대로 정해놓고 그것으로 배불러 보겠다고 소원하며 산 것, 이 죄를 씻으려면 하나님을 먹어야 배부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성 폭식이 곧 죄요, 그것이 성만찬과 연결이 되어 죄사함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가룟 유다와의 결별 포인트가 소원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내 소원이 죽고 이제 하나님을 내 소원으로만 삼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스트레스성 폭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