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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Taiwan : 폭풍우 속으로, 자유로움과 두려움.
2023년 6월 20일. 1,016
오전 11시. 존경하는 갑짱 윤태근 선장님의 조언대로 엔진 Rpm를 1,500에 놓고 메인 100%, 집 130%를 편다. 날씨가 좋다. 바람은 포트 크로스홀드 5.6노트, 선속은 6.6~7.0 노트를 오르내린다. 조류와 바람 모두 다 잘 맞는다. 이대로 별 코스 변화 없이 동북쪽으로 쭉 올라간다. 하지만 주변에 유정과 Wreck이 많다. 잘 살펴야 한다. 오늘 인터넷 끊어지면 말레이시아 Sim 카드는 끝이다. 마지막까지 알뜰하게 쓰자.
Taiwan Hobihu 마리나. 1,016해리 7일 16시간. 어쩌면 내겐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다시 찬찬히 정독할 절호의 기회다. 코타키나발루만을 벗어나 외해로 나오자마자, 포트 빔리치로 변한 바람에 따라 세일 트림을 조정해 놓고, 나는 책에 코를 박는다. 시설 좋은 수테라마리나에서는 어쩐지 조급하고 불안했는데, 막상 바다에 나오자 편안하다. 이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며칠 만에 맞는 해풍 속에 그리운 것들이 배어나오고 있다.
오후 2시 30분. 임대균 선장의 딸이 판소리 흥보가를 연습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레이더가 울린다. 앞으로 보니 커다란 비구름이 여기저기 레이더에 잡히고 있다. 바람이 바뀌어 집세일이 마구 펄럭인다. 집세일을 60%만 남기고 접는다. 메인세일은 100%로 둔다. 해치들을 모두 닫고 소나기에 대비한다. 비구름이 천천히 2마일 앞으로 다가온다. 바다 공기가 서늘해진다.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후 2시 50분.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불과 몇초 사이다. 제네시스가 구름 아래로 들어가자마자, 폭우와 함께 바람이 35노트! 배는 선속 10.2노트. 엄청나게 힐 각이 세진다. 어서 메인세일을 마저 줄이자. 윈치를 돌려도 메인세일이 줄어들지 않는다. 배를 풍상으로 돌리고 한참 메인세일을 줄이려는데, 갑자기 펑! 하고 메인세일 펄링 시트가 끊어진다. 나는 일단 포트 60으로 침로 변경하여 배를 비구름 바깥쪽으로 뺀다. 바람이 조금 약해졌을 때, 메인세일 시트를 빼고, 예비 시트 로프로 갈아 끼운다. 폭우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파도가 크지 않아서 다행이고, 야간이 아니라 다행이다. 바람은 순식간에 포트에서 스타보드 쪽으로 바뀌었다. 시작부터 고생이 자심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메인세일 시트를 일단 갈아 끼운다. 또, 메인세일 펄링 시트가 끊어져도, 메인세일을 줄이는 방법도 알아냈다. 또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대비책 하나를 배우고 준비한다. 메인세일 40%, 집세일 80%다,
오후 3시 40분. 풍속 14노트, 선속 7.2노트, 약한 빗방울이 계속된다. 비구름 속을 항해 하니 언제 또 돌풍이 올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다. 온몸이 비에 젖었지만 춥지는 않다. 곧 옷을 갈아입고 우비도 입어야 하겠다.
이제 ‘태풍 시즌’이라는 말을 확실히 알겠다. 태풍 시즌이라는 것은 큰 태풍이 온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렇게 돌풍과 폭우를 동반한 작은 태풍 같은 나쁜 날씨가 계속 된다는 의미도 있네. 아침에 출발해서 지금 몇 시간째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다. 레이더 상으로는 앞으로 1해리 더 가면 비구름이 사라진다. 바람은 거의 없고 폭우만 내리고 있다. 선속 6.6 노트. 976해리 남았다. 이제 겨우 40해리 왔구나. 평속 6.7노트다.
오후 4시. 어? 갑자기 바다색이 이상하다. 얕은 물처럼 밝은 색에, 바위가 보이는 것 같다. 수심계를 보니 헛! 7미터다. 뭐지? 나비오닉스를 보니 Saint joseph rack 라고 표기 되어 있다. 여기는 뜬금없이 얕다. 해저의 바위들을 보며 지나간다. 킬이 걸리지는 않겠지? 조마조마하다. 바다 한가운데의 암초지대를 혼자 으스스 하며 지나가고 있다. Saint joseph rack 지대를 벗어나니 곧장 16미터로 수심이 회복된다. 나름 정확한 나비오닉스다.
우현에 유정들이 다수 있다. 가스를 태우는 화염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 방금 전까지 코나키나발루의 천국에 있었는데, 출항 직후부터 엄청 고생한다. 작은 태풍과 암초, 유정지대를 통과하고 있다.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때문인지, 손이 덜덜 떨리고 발가락에 쥐가 난다. 젖은 옷을 갈아입자. 바다에는 여기저기 먹구름이 비를 뿌리고 있다.
오후 5시. 벌써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다. 두터운 구름층 때문이다.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콕핏이 다 젖었다. 어디 앉을 곳이 마땅치 않다. 비는 언제까지 올까? 밤새 이러고 비가 오면 잠시 졸기도 어렵겠지. 나비오닉스가 없다면, 나는 즉시 그야말로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타이완 호비후 마리나 행은 첫날부터 난관이다. 잠깐 레이더를 보니, 동그란 태풍의 눈 같은 곳에 들어서 있다. 곧 또다시 폭풍이 몰아칠 기세다. 전체적으로 배를 점검하자. 또 다른 풍랑의 충격에 대비해야 한다.
오후 7시. 강한 비가 한차례 지나가고, 이슬비 정도로 빗방울은 계속된다. 식사 시간을 놓쳐 라면에 남은 밥을 말아 먹는다. 파도가 세지 않아 이렇게 식사 할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바다에 어둠이 깔리자, 여기저기 배들의 항해등과 유정의 불빛이 보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위험요소들이다. 오늘 저녁은 콕핏이 다 젖어 아마 뜬 눈으로 앉아서 새워야 할 것 같다.
드디어 레이더에 비구름이 뒤로 물러갔다. 레이더 가드 존 설정을 켠다. 정면에 뭔가 나타나면 알람이 울릴 것이다. 한결 마음이 놓인다. 제네시스의 좌우에 고깃배들의 집어등이 밝다. 이들도 야간 조업을 많이 하네. 어느 나라건 어민들은 참 수고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그들 모두 만선의 꿈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한다.
풍속 브로드 리치 10노트, 선속 6.7노트, 메인세일을 50%로 약간 더 펼친다. 956해리 남았다. 60해리 왔다.
오후 8시. 하늘이 잔뜩 흐려 별 없는 칠흑 같은 밤을 항해중이다. 콕핏 쿠션이 젖어 앉을 자리가 없다. 제네시스는 파도에 일렁이며 그저 전진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밤에 되니 바람이 싸늘해진다. 몇 시간 더 있으면 담요가 필요할 텐데, 젖은 바닥에 깔 수도 없고 난감하다. 우중의 타이완 항해는 또 새로운 경험을 준다. 정말로 다양한 항해를 경험중이다. 문득 미국인 선장, 윌리엄 형의 충고가 생각난다. 21년째 지구를 세 바퀴째 돌고 있는 그이지만, 나처럼 태풍 시즌에 남중국해를 지날 이유는 없었겠지. 레이더 세팅과 전방 견시를 한시도 잊지 말자.
오후 9시 35분. 풍속 쿼터런 10.7 노트, 선속 6.6 노트. 바람이 쌀쌀하다. 10시 방향 3마일 지점에 항해등이 보인다. 진행 방향 20해리 좌측에 Wreck 이 두 곳이나 있다. 밤새 주의해야 한다. 오랫동안 책을 읽어서 인지. 목덜미가 뻐근하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게 이질감이 느껴질 때 나이가 실감난다. 오늘 밤은 상당히 쌀쌀하다. 지중해를 벗어난 뒤 처음으로 누비 점퍼를 다시 꺼내 입는다. 겨울옷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6월 21일 (수) 오전 0시 21분. 풍속 Run 10노트, 선속 5.5노트. 역조류가 심한 곳이다. 바람이 다시 미지근해졌다. 겨울 점퍼를 벗는다. 잠깐사이 배 방향이 좌현으로 틀어졌다. 오토 파일럿은 정상 작동중이다. 매뉴얼로 방향을 다시 잡는다. Wreck 부근에서 배 방향이 바뀐거다. Wreck 에 충돌하지 않도록 스타보드 10으로 침로 변경한다. 오토파일럿이 정상 적동중인데 배 방향이 바뀌었다? 뭐지? 계속 나비오닉스를 바라보는 중이다.
오전 2시 9분. 어느새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옅은 구름들 사이로 보이는 별들이다. 레이더에는 우축 4마일 지점에 비구름이다. 쿼터런으로 13노트 바람이다. 배가 좌우로 많이 흔들린다. 바람이 또 차가워졌다. 선속 6.7노트. 첫날이라 그런지 계속 긴장하고 있다. 마음 느긋하게 세일링 해야 하는데,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다. 원래 걱정하는 체질인데다, 어제 메인세일 시트가 터진 것에 놀라 그런가 보다. 윈디 예보로는 이렇게 강한 바람이 없었는데. ‘태백산맥’ 은 2권 째를 읽고 있다. 태풍항해는 아니지만 태풍 시즌항해중이다. 마음을 좀 더 느긋하게 먹자. 모든 것은 내 명철과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오전 4시 9분. 풍속 쿼터런 18노트. 도무지 뜬금없는 강풍이다. 윈디엔 예보되지 않았다. 축범 하기를 잘했다. 게다가 바람이 차갑다. 다시 점퍼를 입었다. 선속 6.8노트. 이제 900해리 남았다. 116해리 왔다. 파도가 커졌다, 배가 많이 흔들린다. 이제 말레이시아 쿠닷 연안을 벗어나 필리핀 팔라완 해역으로 들어간다.
오전 4시 40분. 배가 막 돌아간다. 뭐지? 어느새 오토파일럿이 풀렸다. 스탠바이가 되어 배가 돌고 있다. 수동으로 침로를 12도로 맞춘다. 오토 스위치를 누르자 다시 오토파일럿이 작동한다. 지금 오토파일럿이 고장 나면 진짜 큰일이다. 그런데 왜 오토모드가 풀렸을까? 바람이 강해 침로를 벗어나자 저절로 풀린 것일까? 걱정을 더하게 만든다. 풍속 20노트 크로스홀드, 선속은 6.8노트. 896해리 남았다. 좌현에서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는 번개가 계속 치고 있다. 나모 모르게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전 5시. 바람은 클로즈리치 14~15 노트, 선속 6.6노트. 사방에 여명이 비치자 모든 것이 밤과는 달라진다. 캄캄한 밤보다는 파도도 낮아진 것 같고, 바람도 얌전해 진 것 같다. 어둠속에서 끊임없이 상상속의 장면을 보여주며 협박하던 검은 망상들이 사라진다. 50%로 축범한 메인세일과, 70%로 편 집세일 모두 안정적으로 바람을 받고 있다. 남은 기간 5일 20시간. 26일~27일 필리핀 루손섬과 타이완 사이를 건너게 된다.
오전 6시 15분. 다시 빗방울이 떨어진다. 콕핏의 전자기기들을 선실 입구 커버위로 이동시킨다. 비도 안 맞고 바라보기에도 좋은 위치다. 선실 해치들을 모두 닫는다. 출항 직후 2~3시간 동안 파란 하늘을 보고 지금까지 잿빛구름만을 보고 항해중이다. 스톰 시즌엔 항해 하지 말라는 외국 선장들의 충고가 100% 이해되는 순간이다.
항해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바다가 더 두렵고, 세일링 요트라는 것이 언제든 고장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온다. 나는 노련해 질수록 겁쟁이가 되어 간다. 그러니 겁쟁이가 되어가는 것과 반대로, 항해 중에 더 자유로움을 느낀다. 막상 항구에 들어가면 당장 그날부터 엔진을 점검하고 출항준비를 한다. 애써 밟은 마리나의 육지는 딱 반나절이면 무의미하고 답답해진다. 21년간 세일링 중인 미국선장 윌리엄 형의 입장이 슬그머니 이해가 된다. 윌리엄 형처럼 되고 싶진 않지만 그의 느낌이 공감되기 시작한다.
35노트 이상 강풍으로 풍향계 센서가 날아가기도 했고, 어제는 메인세일 펄링 시트가 터져 버렸다. 붐을 마스트와 연결하는 고정 핀이 빠지기도 했고, 연료펌프가 막혀 시동이 안 걸리기도 했다. 스로틀 레버 이상으로 전후진이 되지 않기도 했다. 선박 무전기가 고장 났었고, 마스트 등 전구도 나갔었다. 러더에 밧줄이 끼기도 했다. 오늘 새벽까지 전체 항해 중, 두 번 오토파일럿이 저절로 풀렸다. 화장실 고장은 뭐 그저 불편할 뿐이다. 이런저런 고장들은 언제고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한시도 마음을 놓기 어려운 상황인거다. 싱글핸드 항해라, 바다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모두 혼자 해결해야 한다. 자유로움과 두려움. 싱글핸드 장거리 항해는 이 두 이슈가 공존한다. 지금까지는 어쨌든 해결했지만, 혹시나 해결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이 항해의 기저에 깔려있다.
오전 6시 30분. 갑자기 어선 여러 대가 우현 100미터 지점에 나타난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참치 잡이 어선이다. 예전에 TV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적이 있다. 20~30 미터짜리 모선에 카누처럼 생긴 작은 트리마란을 여러 대 달고 다니는 방식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있다. 손을 흔드니 어부들도 손을 흔들어 준다. 바람과 파도가 강한데, 낙엽 같은 카누를 타고 비를 맞으며 열심히 참치를 낚고 있다. 비구름 때문에 레이더 가드존 알람을 설정하지 못했고, 내가 ‘태백산맥’을 읽느라고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100미터 거리로 스쳐 지나간 거다.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나의 항해는 수많은 행운들이 있었다. 기적 같은 행운들이다. 누가 이렇게 나를 돌보고 있는가? 고개 숙여 감사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용기를 낸다. 용기는 두려움의 눈물을 넘어 솟아오른다. 갑자기 15노트 노고존이 된다. 선속 5.3노트. 윈디 예보에는... 그런 소린 이제 그만하자.
오전 8시 20분. 브로드 리치 12노트, 선속 5.9 노트. 레이더를 보니 비구름이 제네시스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다. 3마일 정도니, 30분 정도면 비구름 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콕핏이 온통 젖어 앉을 곳이 없다. 계속 서 있자니 다리가 뻐근하다. 발판을 가져다 의자 삼아 앉는다. 잠시 후 누릉지를 끓여 아침식사를 한다. 오이와 두반장이 반찬이다. 약한 빗방울이 계속되고 있다. 위성전화가 위성신호를 못 잡고 계속 Searching 중이다. 오늘 오전 통영 비지터 2 이준희 선장님께 일기 정보를 못 받겠네.
오전 10시. 출항 24시간 지났다. 865해리 남았다. 151해리 왔다. 평속 6.3해리다. 엄청나게 빨리 왔네. 폭우 속에서도 바람이 많이 도왔다. 뒷바람 12노트, 선속 6.3 노트. 잔뜩 흐린 필리핀 팔라완 앞바다를 지나고 있다. 태풍 시즌 항해는, 언제 돌풍이 불어올지 몰라 세일을 크게 펼 수 없다. 10노트 바람이 순식간에 35노트 이상의 돌풍으로 변한다. 맘 편히 세일을 80% 이상 폈다가는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된다. 언제든 축범이나 세일을 완전히 접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바람이 순풍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역풍이라면 아예 항해를 미루어야 할 것이다.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이런 날엔 뜨듯한 방에 앉아 아내와 부침개를 먹으며 아이 재롱을 봐야 할 텐데, 지금 팔라완 앞바다에는 아무 것도 없네.
오전 10 45분. 대만의 문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왔다. 너무 반갑다. 좌표를 불러 주고, 이 비가 언제쯤 그칠까 물었다. 오늘 답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선장들은 모두 바람과 파도를 주로 보지 비를 보지는 않는다. 비가 좀 온다고 항해 안할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비도 좀 봐야겠다. 적어도 비가 언제 시작하고 언제 그치는지 정도만 알아도 좋겠다. 최종 정착지가 Hobihu 마리나로 결정이 됐다고 반가운 소식을 알려준다. 나는 이미 나비오닉스에 Hobihu 마리나를 목표로 가고 있다고 말씀 드린다. 그리고, 혹시 Hobihu 마리나에 엔진 전문 엔지니어가 있어, 지금 엔진에 부조가 있는 것을 진단하고, 만약 인젝터 청소가 필요하다면, 하루 이틀 사이에 수리가 가능한지? 미리 알아봐 달라고 한다. 현재 항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니까, 만약 날짜가 많이 필요한 수리라면 한국에 가서 한다고. 당부한다. 바쁘게 통화한 전화는 아쉽게 마무리 되었다. 그래도 문선장님 음성을 들으니 너무 좋다. 기운이 난다.
오후 1시. 비가 그쳤다. 언 듯 언 듯 햇살도 비친다. 그러나 살짝 드러난 푸른 하늘 저 멀리 다시 비구름들이 보인다.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모르는 소강상태. 바다는 파스텔화가 되었다. 집세일을 90%로 좀 더 편다. 풍속 브로드 리치 12노트, 선속 6.3노트. 846해리 남았다. 170해리 왔다.
오후 1시 20분. 디젤유 140리터를 보충했다. Miri에서 350리터 가득 채웠던 기름을 코타키나발루까지 2일간 사용했다. 175리터 정도 남아있었지만, 급유는 가능할 때 미리미리 넣어주어야 한다. 풍랑이 심할 때는 넣고 싶어도 못 넣는다. 급유 중에 통영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왔다. 마침 16~18노트 뒷바람이 불 때다. 이준희 선장님은 윈디를 보고 12노트 정도라고 하셨는데, 18노트라니 놀라신다. 어젠 35노트 이상으로 메인세일 펄링 시트가 터진 것도 알려드린다. 이번 항해엔 윈디가 특히 많이 다르다. 스톰 시즌이라는 것은 스톰이 있는 시즌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스톰 사이에도 날씨가 아주 안 좋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다. 그래서 외국 선장들은 스톰 시즌엔 아예 항해를 안 한다는 것도 알려 드렸다. 6월 26~27일 대만 남단에 접근할 때 일기예보를 특히 잘 보아 달라고 말씀 드린다. 여차하면 필리핀에서 강풍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오후 1시 50분. Miri의 마켓에서 산 빵과 오렌지 쥬스, 오뚜기 스프로 점심을 먹는다. 나쁜 기상으로 난리 중에 잠깐 날이 개어, 기름도 보충하고, 점심식사도 한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838해리 남았다. 파도가 1.5미터 정도로 커져서 롤링이 심하다. 식사를 마치고 빨래를 해서 넌다. 이대로 비가 그만 왔으면 좋겠다.
오후 3시 30분. 나는 ‘양성주광성’인가보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타이완까지의 항해 이틀째, 세일 요트 선장으로서 이런 경험을 하기가 어디 쉬운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파도는 높지만 뽀송한 뒷바람이 불고 있다. 성급한 이야기지만, Hobihu 마리나에 잘 도착하면 최종 점검을 하고, 한국까지 마지막 항해를 하면 된다. 문선장님이 크루로 함께 가니 더 마음이 든든한 항해다. 타이완에서 점검할 항목을 정리해 본다.
타이완 수리 항목
1. 엔진 점검 및 인젝터 청소
2. Rpm 게이지 둥근 커버 (아크릴) 5mm, 9Cm
3 스로틀 레버 교체
4. 붐 고정 핀, 스텐핀, 분할 핀
5. 화장실 변기 설치.
6. 에어컨 덕트 창문 설치 아크릴 판
오후 7시. 해가지자 바람이 다시 차졌다. 또 겨울 점퍼를 챙겨 입는다. 밤을 지내기 위해 담요도 챙긴다. 선속 6.0~6.3노트. 803해리 남았다. 전방에 두텁게 보이는 구름들 속에 비가 들어 있지 않기를 소망한다. 여기는 팔라완 Culasian 앞 바다다. 제네시스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동중국해의 석양은 이제 8시 방향으로 지고 있다.
6월 22일 (목) 오전 3시 10분. 전방 4마일 지점에 큰 비구름이다. 가드존 알람이 계속 울린다. 일단 알람을 끄고 육안 견시 한다. 2시 방면 먼 바다에 불빛 하나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팔라완 Small rock 까지는 60 마일 이상 거리다. 비구름은 4마일 이상의 크기다. 비미니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텐트 속에서 듣는 빗소리 같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와 함께 낭만의 극치다. 위도 10도 지점인데 상당히 쌀쌀하다.
배의 좌우로 마치 카드 섹션을 하듯이 발광 플랑크톤이 번쩍번쩍한다. 커다란 유리창 사이즈로 덩어리째 빛을 낸다. 신비하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바다 속이 실은 생명체로 가득하다. 플랑크톤 하나도 한 생명, 나도 한 생명이다. 어쩌면 이 우주에는 지구가 유일하게 생명체를 품은 행성이고, 그것도 무한대의 생명체들을 지닌 별인지도.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 해도, 그 숫자는 이미 충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전 7시. 여전히 짙은 구름 속에 해는 보이지 않는다. 2시 방향, 구름의 일부가 밝게 빛날 뿐이다. 사방이 모두 높은 구름이다. 뒤편으로는 구름이 바다에 비를 통해 맞닿아 있다. 앞쪽 멀리도 구름이 바다와 닿아 있다. 부디 큰 비를 만나지 않고 이 구름의 바다를 통과하게 소망한다. 풍속 3.0~4.0노트. 선속 5.6노트. 역조류 구간인가보다. 731해리 남았다. 285해리 왔다. 전 구간 28%.
팔라완 South Rock 앞 구간을 지나고 있다. 위성전화가 왔다. 미래를 위해 수없이 방법을 제시했지만 모조리 거부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올 어려움과 그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주었다. 거부했으니 당연히 어려움에 처했다. 그리고 지금 풍랑 속을 항해하는 내게, 어떻게 하느냐? 고 묻는다. 왜 묻는가? 이미 답을 다해줬지만, 단 한 번도 조언대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움을 주려는 내 손을 여러 번 물었다. 이 풍랑 속에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달리 다른 답도 없다. 내가 말 한대로만 하면 지금이라도 해결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거다. 스스로를 더 어려움에 빠뜨릴 것이고, 결국 모두의 미움을 산 채 쫒겨나 듯 떠나게 될 거다. 모두가 싫어하는 행동, 타인의 합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며, 자신만 옳고 타인은 모두 틀렸다고 하는 사람. 배신이 뭔지도 모르고,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사람. 자신의 불합리한 행동에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그의 앞날에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는 명약관화하다. 가엾다.그래도 그를 위해 기도한다. 내게도 그 방법밖엔 없다.
오전 8시 10분. 우측에 어선 한척이 보인다. 참치 잡이 어선인가 보다. 그래도 경계한다. 동남아시아의 어선은 언제 해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장거리 세일링하는 선장들은 동남아시아나 카리브 해 나라들의 경제 상황도 미리 파악해야 한다. 국가 경제가 어려우면 후진국 어민들은 언제든 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왜 자꾸 접근하는 거지? 바람은 없다. 선속 5.5 노트.
어선은 200미터 앞 까지 다가오다 방향을 바꾼다. 어로 작업에 나서는 중이라고 해도 굳이 왜 이렇게 가까이? 바짝 긴장했다가 풀린다. 그나저나 어선들이 이렇게 조업에 나서는 것을 보면 바다 날씨가 나쁘진 않다는 거네. 한국에서 만나지 못한 장마철을 팔라완 앞바다에서 만나고 있다.
오후 8시 52분. 예상대로, 제네시스가 비구름 밑으로 들어가자, 곧장 풍속 브로드리치 23노트다. 힐각이 높아진다. 시트를 풀어 바람을 뺀다. 이러니 태풍시즌 항해에는 바람 없을 때도 세일을 넓게 펴지 못한다. 언제 돌풍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속 7.3노트. 주변 바다는 즉시 험상궂은 짙푸른 색으로 변하고 백파가 넘실거린다.
마침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온다. 윈디상으로는 7~8노트고, 돌풍도 12노트 정도라고 하신다. 그런데 지금 23노트 강풍이다. 같이 어이없이 웃는다. 태풍시즌 항해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눈다. 윈디는 전체적인 개황만 알려주는 것이고, 실제의 바다는 훨씬 험하다. 이선장님은 오늘 저녁부터 윈디 상에 바람 방향이 마구 바뀐다고 미리 주의를 주신다. 오늘 밤 아마 고생 좀 할 것 같다. 감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는다. 풍속 23노트 강풍 속에서 태연하게 껄껄 거리며 전화를 받으니 나도 조금은 노련(?)해 진 것인가 보다. 드디어 비가 쏟아진다.
오전 11시 10분. 오전 내내 비다. 이번 항해 내내 이럴까? 선속 5.9노트. 708해리 남았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출항한지 49시간. 평속 6.3노트다.
오후 12시 30분. 이번 항해는 식사 챙겨먹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힘든 항해다. 카레 파스타를 준비하는데, 롤링이 엄청나다. 나가보니, 풍속 18노트에 선속 7.2 노트. 주방에서 이리저리 쿵쿵 부딪쳐가며 식사 준비를 하고, 비틀비틀 접시를 들고 콕핏으로 나가니 비가 온다. 스프레이 후드 아래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며 간신히 식사한다. 낭만적이라고 하긴 많이 옹색하다. 검푸른 바다, 수심 2,000미터다. 그러나 갑자기 30미터, 20 미터짜리 수중 봉우리가 솟아 있다. Dangerous and Unsurveyed Ground 라고 나비오닉스에 표시 되어 있다. 큰 배들은 이리로 다니면 안 되겠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빗방울 몇 개 떨어지다 멈춘다. 점심 식사를 안전하게 잘 마친다. 696 해리 남았다. 나비오닉스엔 4일 8시간 남았다고 표시된다. 실제론 5일 정도 남았다. 애매하다. 5일이면, 루손 섬 북쪽에서 딱 강풍과 마주치는 것 아닌가?
오후 2시 45분. 원래 만들었던 항로를 따라 운행 중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리하다. 거의 Run 이라 집세일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항로를 포트 10 침로 변경한다. 팔라완 끝에서 침로 변경 할 것을, 마닐라 앞까지 바로 가기로 미리 침로 변경한 거다. 집세일이 바람을 받는다. 폭우 구간 통과중이라 어차피 세일을 크게 못 펴니 바람이라도 좀 더 잘 받게 하자. 풍속 브로드 리치 7~9노트, 선속 5.7~5.9노트다. 685해리 남았다. 331해리 왔다. 총 구간 33%다.
메인세일 붐 연결 부위와 쇼바 부분에 구리스를 쳤다. 삑삑 시끄럽던 소리가 확 줄어 들었다.
오후 4시. 드디어 햇살이다. 앞에 드리운 구름들을 보면 계속 햇살을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며칠 만에 보는 햇살이다. 남중국해의 햇살은 나타나자마자 이글이글 끓는다. 그러나 좋다. 하루 종일 며칠간 비 맞는 것 보다는 훨씬 좋다. 더우면 어떠냐?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항해 하면 된다. 바람은 4~5노트로 신통치 않다. 선속은 5.7~5.8 노트. 파도가 높아 롤링이 심하긴 하지만, 며칠 만에 보는 햇살에 혼자 신나있다.
오후 6시 30분. 일몰이다. 두터운 구름에 가려 붉은 기운만 9시 방향에 비친다. 팔라완의 태양은 북쪽을 향해 가는 배에서는, 2시 방향에서 떠서 9시 방향으로 기운다. 그동안 계속 동쪽으로만 항해한 덕분에, 태양은 늘 전방에서 떠서 후방으로 지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제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잡은 거다. 북동쪽이다. 메인세일을 60%, 집세일을 110% 편다. 선속 5.8~6.0노트다. 남은 거리 663해리.
오후 9시 30분. 별조차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 사방을 구별할 수 없다. 제네시스는 나비오닉스의 점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낮고 단속적인 엔진소리와 배의 흔들림만이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현실을 뒷받침해준다. 팔라완 방면에선 엷은 빛 덩이가 동그랗게 하늘로 비치고 있다. 아마 도시의 불빛일 거다. 몇 시간째 3마일 거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며 신경 쓰이게 하던 어선이, 그 불빛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필리핀 어민들은 자정이 넘어야 집에 돌아가게 될 거다. 그래도 집에 가면 반겨줄 가족과 밤참이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이 먹물 같은 어둠을 밤새도록 뚫고 가도, 또 다른 낯선 바다가 여명 속에 나타날 거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반겨줄 가족과 맛난 식사가 있는 고향집까지 빨라야 20일. 도시의 불빛으로 사라지는 어선이 무한이 부럽다. 영상 통화를 할 적마다 혹시 우시게 될까봐, 일부러 명랑하게 말씀 하시는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딴 생각 말고 무사히만 돌아와라.’ 1만 Km, 장거리 항해에 늙은 모자는 늘 울면서 웃고 있다.
2023년 6월 23일 (금) 오전 5시 40분. 이번 항해의 세 번째 일출이다. 필리핀 Colon 쪽에서 해가 뜬다. 제법 갠 하늘이다. 구름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햇살이 비치면 상당히 더운 하루가 될 거다. 역풍 5~6노트. 집세일을 감는다. 다시 다운 받은 윈디를 살펴본다. 자료에 역풍은 단 하루도 없다. 그런데 지금 역풍이다. 바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현실이다. A.I.가 발달하고 양자 컴퓨팅이 가능하다 해도 바다 날씨는 선장의 판단을 촉구한다. ‘군인에게 스승은 실전밖에 없다’는 말처럼 ‘선장에게 스승은 바다 밖에 없다.’ 선속 4.9~5.3 노트. 역조류까지 있다. 599해리 남았다. 414해리 왔다.
오전 6시 45분. 입맛이 없다. 다시 머리가 시키는 대로 뭐라도 먹어야 한다. 시리얼에 찬 우유다. 수평선에 낮게 뜬 해가 벌써 이글거린다. 상당히 힘든 하루가 될 거다. 그러나 폭우 보다는 백번 낫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망망대해. 벌써 오 개월 째다. 평생 볼 바다 다 보는 것 같다.
오전 9시 15분. 위성전화의 수신 상태를 본다. Turaya S. CHANA Sea 라고 표시된다. 위성통신이 된다는 거다. 이탈리아 스베바마리나에서 전 선주 까를로가 이틀간에 걸쳐 간신히 개통한 위성전화다. 6개월 200분 통화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200분은커녕 총 20분도 안 되는 통화에 ‘잔액부족’이라고 나왔다. 그리고 Turaya 위성전화기를 재 충진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후 받는 전화만 가능했다. 윤태근 선장님이 빌려 주셨던, 이리듐 9550 같은 경우는 SIM 카드만 사서 넣으면 된다고 했다. 다음엔 반드시 이리듐 Go를 준비해야겠다. 그동안 걸려오는 일방적 전화만 받으며, 도 닦는 심정으로 항해를 했다.
처음 이탈리아에서 출항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국에서의 일들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세계일주나 장거리 항해가 뭔지도 모르고, 120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1월 28일 한국을 떠나, 5개월째다. 아직 20일 이상 남았다. 그것도 태풍이 없다고 전제를 했을 때다. 어찌어찌 6개월 이라는 말인데, 180일이다. 그동안 돈 한 푼 못 벌고, 막대한 항해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출발할 때와 여러 가지 달라졌고, 계획은 매일 수정되었다. 그래도 오늘 현재까지 한국으로 항해중이다. 햇살만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무풍의 남중국해에서 성급히 한국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그려본다.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해진다. 에라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현 위치에서 수빅베이 마리나까지 168해리. 하루가 조금 넘는 거리다. 지금 상태론 수빅베이마리나로 가진 않을 거다. 만약 26~27일 바람이 너무 강해 타이완에 접근하지 못하면,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서 하루 이틀 바람이 잦아 들기를 기다릴 예정이다. 나비오닉스에 따르면, 4~6미터 깊이의 진흙으로 된 좋은 앵커리지고, 해변과 가까우며, 어부들이, 물, 연료 공급에 도움을 주고, 세관과 이미그레이션에 날라다 준다고 한다. 포트 클리어런스도 쉽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입국 하지 않고, 앵커리지에만 잠시 강풍이 지나갈 때까지만 머물 거다.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까지는 268해리다. 이틀 거리다.
오전 10시. 무풍이다. 선속 5.6 노트, 578해리 남았다. 438해리 왔다. 3일간 평속 6.1노트다. 점심에 먹을 감자 부침개를 준비한다. 감자, 양파, 소금, 마늘, 밀가루가 전부다. 가도 가도 같은 풍경인 무풍의 망망대해. 혼자 감자 부침개로 심심 파적 해보자. 제네시스는 필리핀 부수앙가 앞바다에서 작은 점으로 꼬물꼬물 이동 중이다.
오전 10시 25분.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온다. 25일부터 28일 사이에 태풍의 눈 같은 것이 필리핀 우측에 생긴다고 한다. 나는 만약의 경우 강풍이나 태풍이면 필리핀 루손섬의 Baguio 근방인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 머물 생각이라도 말씀드린다. Baguio 바기오는 이준희 선장님의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 이름이라고 하신다. 같이 웃고, 바기오 근방에서 태풍에 관해 더 자주 통화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아무래도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 머물 확률이 커진다. 하루? 이틀? 앵커링 할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란다.
오전 11시 10분. 감자 부침개를 두 장이나 먹어 치웠다. 아무 기대 없이 먹었는데 의외로 상당히 맛났다. 먹는 동안 땀이 비 오듯 한다. 셔츠를 벗고 수건을 둘렀다. 땀을 닦는 것이 견디기 낫다. 햇살이 너무 세서 비미니에서는 고무 쩐내가 난다. 잠깐이라도 햇살을 직접 받으면 피부가 다 타버릴 거다. 프랑스 청년들 Leo Carpentier 일행이 생각난다. 그들은 비미니도, 스프레이 후드도 없이 17개월간 세계일주를 했다. 물론 레이더나 오토파일럿도 없다. 나는 그들에게 ‘너희는 미치거나 용감하거나 둘 중 하나다.’ 라고 했고 그들은 ‘그 사이 어디쯤’ 이라고 했다. 정정한다. 그들은 미친 것이 확실하다.
오후 12시 30분. 혹시나 싶어 그저께 교체한 메인세일 펄링 시트를 시험해 보았다. 줄이 짧다. 줄이 끝까지 들어갔는데 메인세일은 다 접히지 않는다. 풀어도 다 풀리지도 않는다. 메인세일이 다 감기지도 다 풀리지도 않는 어중간한 상태가 된다. 콕핏 창고를 뒤지니 스핀니커 시트가 있다. 아직 새것이다. 이 시트로 메인세일 펄링 시트를 교체한다. 갑판으로 나가자, 아차 싶다. 갑판에 반사되는 햇살이 장난 아니다. 하늘과 갑판 이중으로 지글지글 끓고 있다. 얼른 해치우자고 기존 시트를 풀고 새 시트로 갈아 끼우는 사이, 벌써 어질어질하다. 비틀비틀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다. 시트만 교체하는 간단한 작업인데, 시트 방향이 감이 잡히지 않는다. 두 개의 도르래와 두 개의 클러치, 한 개의 윈치를 통과하는데 감는 방향이 영 헷갈린다. 20분이 지난다. ‘이러다 쓰러지면 곧장 죽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불쑥 올라온다. 열기에 정신을 잃고 바다로 떨어져도 사망, 갑판에 엎어지면 쥐포처럼 말라 죽을 거다.
어찌어찌 작업을 마치고 시험까지 해본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화장실로 굴러 들어가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는 사이 땀이 물보다 더 많이 흐른다.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마신다. 체하지 않도록 여러 번 조금씩 나누어 두 잔을 마신다. 여전히 만취한 사람 같다. 캐빈 실내 온도가 36.9도다. 콕핏에 나와 앉았는데, 여전히 머리가 핑핑 돈다. 콕핏에 쓰러져 눕는다. 20분 정도 안정을 취하니 정신이 돌아온다. 다시는 한 낮에 갑판 작업을 하지 말아야겠다. 결심한다. 남부 필리핀 앞바다 열기는 말 그대로 ‘살인적’ 이다.
오후 1시 20분. 콕핏에 누워 안정을 찾는데, 위성전화가 울린다. 타이완 문선장님이다. 나는 방금 죽을 뻔 했노라고 말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문선장님에게 26~28일까지의 강풍에 대해 묻는다. 18~20노트 미만이라고 한다. 그러면 갈만하다. 일단 필리핀 루손 섬 북쪽, 바기오쯤에서 기상 정보를 확인하고, 기상이 나쁘면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서 바람 잦기를 기다린다고 말씀드린다. 그리고 Hobihu 마리나 관리자를 내일 만나서, 제네시스가 입항하면 엔진을 점검하고, 인젝터 청소 정도의 작업이면 Hobihu에서 작업하기로 마리나 관리자와 이야기하기로 했단다. 그대로 잘 된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 콕핏에 쓰러진다. 좀 더 안정을 취해야겠다. 아이고 죽겠다.
오후 3시 45분.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가, 뭔가에 놀라 깼다. 여전히 무풍이고 레이더엔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베고 누운 담요와 쿠션이 축축하다. 일단 좌현의 햇살이 드는 쪽에 널어 말린다. 변화는 전혀 없다. 끝없는 수평선이고, 뜨거운 햇살이고, 멈춘 바람이다. 선속 5.6~5.9 노트. 544해리 남았다.
오후 5시 10분. 서쪽으로 지는 해가 구름에 들자 대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바다는 잔파도도 없이 낮은 너울만 일렁인다. 기름 게이지를 보니 절반에서 왔다 갔다 한다. 여러 번 말하지 만 기름은 보충할 수 있을 때 넣는 거다. 150리터를 더 넣는다. 아무래도 기름 게이지 표보다는 좀 더 먹는 것 같다. 새 엔진이 아니니 그럴 수 있다. 타이완에서 인젝터 청소를 잘 하면 좋겠다. 엔진 제원표 대로라면 넉넉하게 하루 65리터(1,600Rpm 일 경우) 가득 넣으면 5일 이상 운항 가능하다. 어쨌든 도중에 한 번 더 넣을 수도 있고 타이완까지 그냥 갈 수도 있는 양이다. 늘 그렇지만 디젤유를 가득 넣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바기오까지 1일 7시간이다. 여기서 직접 Luzon Strait를 건너 타이완으로 갈지,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서 바람을 피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선속 5.5 노트, 533해리 남았다.
오후 6시. 어디서 샀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지부티 바와디 몰인가? 스리랑카 인가? 아님 랑카위? 그 나라 라면이다. 야채 맛 라면에 남은 밥, 김치, 오이 + 두반장. 이렇게 저녁을 먹는다. 먹고 아예 샤워도 한다. 해가 지자 데워진 공기가 식어진다. 찬물도 많이 마시고, 커피도 한 잔한다. 이젠 커피도 하루 두 잔 이상 곤란하다. 가슴이 뛰는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두 잔만 마시자. 몸이 낡아 가는 것을 이런 증세로 깨닫는다.
이번 항해 4번째 석양이다. 문득 아드리아해부터 지나온 마리나들을 돌아본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번 항해는 절대로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도움, 그리고 한국에서 지원을 해주신 수많은 분들의 성과다. 그분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이번 항해에 함께 참여 한 거다. 나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다는 것 외엔 달리 내세울 것 없다. 많은 외국인 선장들을 만났다. 그들과는 지금도 연락 중이다. 아마 평생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거다. 6개월이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인생 최고의 멋진 인연과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번 항해에서 건진 최대 보물이라고 할 것이다.
오후 7시 45분. 문득 별들이 보인다. 여기저기 구름에 가려있지만, 8시 방향의 초승달과 샛별이 제일 먼저 눈에 띤다. 북두칠성은 마스트 등 앞, 바로 머리 위에 거꾸로 걸려 있다. 뒤를 돌아보니 구름에 살짝 가린 남십자성이 보인다. 별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을 보니 나는 북쪽으로 가고 있다. 임대균 선장과 함께 보르네오 섬을 향해 갈 때는 좌현에 북두칠성, 우현에 남십자성이었다. 검은 장막 같은 어둠속, 한 동안 남중국해의 별을 바라본다. 무풍, 선속 5.9 노트. 초승달이 물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제네시스와 함께 바다를 미끄러져 간다.
2023년 6월 24일 (토) 0시 5분. 갑자기 폭우와 함께 맞바람 22노트가 몰아친다. 황당한 일이다. 크로스홀드로 부는 것 같아 집세일을 40% 폈는데, 맞바람이다. 천둥과 벼락도 대단하다. 미리 전자 장비들을 치워 놓기 잘했다. 선속이 4.5~4.8노트로 뚝 떨어진다. 어제 낮만 빼고 이번 항해 내내 비바람이다. 한밤에 혼자 난리 블루스다. 낮에 일사병에 혼이 났어도, 메인세일 펄링 시트를 손보아 두기를 잘했다. 497해리 남았다. 519해리 왔다. 이제 겨우 총 구간 51%. 반 넘은 거다.
오전 3시. 좌현에서 출현한 화물선이 앞을 가로질러 간다. 12시 방향에 움직이지 않는 물체, 아마 조업 중인 어선 같다. 스타보드 10으로 침로 변경하며 비켜 간다.
오전 6시. 바람이 온다. 스타보드 빔 리치 10노트다. 집세일을 110% 편다. 메인세일도 60% 편다. 선속 6.3~6.6노트. 458 해리 남았다. 558해리 왔다. 안개 낀 듯 불투명한 하늘이다. 위도 상으론 마닐라를 지나고 있다. ,화수목금토‘ 일수로는 5일이고, 오늘 오전 10시가 되면, 5일째 항해가 시작이다. 현재 바다는 아주 얌전하다. 쿠션과 담요를 엷은 햇살에 말린다.
오전 6시 30분. 계란 프라이 두 개와 시리얼, 우유로 아침 식사를 한다. 몇 번이나 말 하지만, 장거리 항해 시엔 입맛이 별로 없다. 별로 배고프지 않다. 2~3일 굶으면 당연히 배가 고플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해보진 않았다. ‘식사 시간이네?’ 하고 머리가 시켜서 몸에 식사를 공급한다. 식사를 거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지럽거나 손발이 떨리거나 입이 마르고 쓴맛이 올라온다. 흔히 ‘당 떨어진다.’ 는 상황이 된다. 급박하거나 힘을 써야할 때 어지러우면 큰일이다. 비타민 보충과 입맛을 위해, 오이, 배추, 양상추, 당근 등을 넉넉하게 산다. 대단한 요리를 해먹는 것 아니라 그냥 두반장, 된장이나 마요네즈에 찍어 반찬으로 한다.
오전 7시 30분. 빨래를 해서 넌다. 오늘부터는 우현에 빨랫줄을 걸었다. 오전 햇살도 가리고 태양 볕에 잘 마르게 하기 위해서다. 빨래를 널고 갑판으로 나가 선체를 점검한다. 흔들려서 삐뚤어진 기름통들을 잘 정돈한다. 붐을 지탱하는 붐뱅의 쇽업쇼버(?)에서 삑삑 소리가 난다. 살펴보니 붐뱅 아래쪽의 플라스틱 테두리가 빠져서 알루미늄끼리 마찰하고 있다. 커다란 십자 드라이버와 망치, 강력본드를 가지고 온다. 십자드라이버를 대고 망치로 툭툭 쳐서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마지막 5mm를 남겨두고 강력 접착제를 바른다. 그리고 다시 십자드라이버를 대고 망치로 툭툭 쳐서 마무리. 당연히 삑삑 마찰하는 소리가 사라졌다. 그대로 손에 연장을 들고 갑판에 앉아 바다를 본다. 구름이 많다.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혼자 이런저런 보수 작업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맑은 날엔 오전 10시 이후부터 오후 5시까지는 갑판에 얼씬도 하지 말자, 일사병으로 그대로 쓰러질 거다. 어제 단단히 혼이 났다.
오전 8시. 필리핀 루손섬 바기오(Baguio) 까지는 14시간 남았다. 오늘 자정 도착이다. 오늘 자정까지는, 곧장 Luzon Strait를 건너 타이완으로 갈지,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서 하루 이틀 바람을 피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오늘 중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과 타이완 문선장님의 일기 예보를 분석해서 결정한다. 윤태근 선장님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늘 명쾌하게 판단하는 윤태근 선장님의 능력이 무척 부럽다. 일단 바기오(Baguio)에 바짝 접근해서 로밍 인터넷을 켜고 일기정보과 전화 연락을 해보자.
지난 2020년 겨울, 루손 섬 앞바다. 44노트 강풍과 오토파일럿 고장으로 한밤중에 엄청 고생했었다. 당시엔 다른 선장님의 45피트 선오딧세이였다. 그때도 임대균 선장과 동행했고, 크룩스를 기준으로 수동 항해했다. 지금은 내 배를 가지고 같은 바다를 역방향 항해한다. 김선장 출세했다. 풍속 빔리치 9~10노트, 선속 6.9 노트. 448 해리 남았다. 568해리 왔다. 총 구간 56%.
오전 8시 45분. 레이더 가드존 알람이 울린다. 확인하니 3대의 배가 제네시스 주변을 운항중이다. 그중 가까운 배 하나만이 좌현에 보인다. 마닐라로 입출항 하는 상선들 인가보다. 제네시스는 이제 Subic 만과 같은 위도에 있는, Santa Rita 앞 바다로 진입중이다. 수심 3,000 미터 바다에서 4,000미터 바다로 이동 중이다. 곧 5,000미터 수심도 나타난다. 루손섬 바기오(Baguio) 로 인터넷이 되는데 까지 접근하기 위해 스타보드 10, 침로 변경한다.
오전 9시 10분.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다. 월요일 26일 쯤, 돌풍기준으로 22~28노트 동풍이 분다고 하신다. 빔리치다. 일반 바람은 12~16노트. 태풍은 아니다. 다만 바람이 상당히 강해 고생을 할 것 같다. 현재 판단으로는 다이렉트로 루손 해협을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핸드폰의 SIM카드를 한국 것으로 바꾼다. 필리핀 연안에 가면 로밍통신으로 일기예보를 잘 들여다봐야지.
오전 10시 10분. 크로스 홀드 4~6노트. 선속 5,8노트. 435해리 남았다. 581해리 왔다. 4일간 평속 6.05노트다. 이제부터 5일째 항해에 들어선다. 옆은 구름에 태양이 살짝 가려져 있지만, 더위가 목덜미에 머물러 있다. 움직임을 최소화 하자.
오후 1시. 이제 2일 23시간 남았다. 지금이 토요일이니, 일, 월, 화 이렇게 된다. 그런데 딱 화요일이 가장 강한 바람이다. 어떻게 할까?
내일 오전 중,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 도착, 하루를 보낸다. 월요일 출발, 화요일에 루손섬 북쪽까지 항해, 수요일에 도착. 이렇게 되면 화요일 가장 강한 풍랑을 비켜가게 된다. 일단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에 가는 것으로 결심한다. 가서 인터넷을 열어 일기예보를 먼저 보고 다음 판단을 해야겠다. 대략 늦어도 목요일(29일) 도착을 목표로 하면 되겠네.
오후 3시 15분. 콕핏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앉아만 있는데도 땀이 비 오듯 한다. 25년 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섭씨 52도의 날씨에 밖에 나간 적이 있다. 쇼핑몰에 있었는데, 기도 시간이 되자 손님을 모두 내보낸 거다. 당시 땀은 나지 않고 팔에 하얗게 소금이 끼었다. 땀이 바로 증발해서 소금만 남았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운 것 같다. 땀이 샘처럼 솟고, 온몸이 끈끈하다. 방금 손을 닦아도 5분이 못가 끈끈하다. 필리핀 겨울 항해 때도 더웠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다. 콕핏 실내 온도는 36.5도다. 뒷바람 3~4노트, 선속 6.0~6.3노트 407해리 남았다. 609해리 왔다. 전 구간 60%. 육지와의 거리 35해리. 인터넷은 되지 않는다.
오후 5시 30분, Santa Cruz 앞을 지나고 있다. 갑자기 상선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Santa Cruz가 제법 활발한 항구인가? 하늘은 다시 잔뜩 흐리고 전방엔 비구름들이 가득하다. Santa Cruz 와 29해리 떨어져있다. 선속 5.8 노트, 남은 거리 396해리.
오후 7시 10분. 통영 비지터스 2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왔다. 27일(화) 돌풍이 30노트가 넘을 것 같다고 하신다. 28일(수)도 바람이 강하다고 하신다. 기상이 그동안 바뀌었나보다. 그럼 계획대로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로 가야겠다. 거기서 일기예보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난 다음, 타이완 항해를 계속해야 하겠다. 통화하는 사이 제네시스 옆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지난다. 방카 들이다. 필리핀 어부들이 타는 카누같이 작은 어선. 방카들의 불빛이 바다에 깔리기 시작한다. 2020년 겨울에도 이랬다. 레이더에도 나타나지 않는 작은 어선들이니 견시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Santa Cruz 쪽에서 번개가 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방카가 더 많이 늘어난다.
오후 9시 20분, 15노트 맞바람이다. 맞바람 강풍이라니. 윈디하고는 전혀 안 맞다. San Fernando City의 앵커리지까지 12시간가량. 내일 오전 9시 쯤 앵커리지 도착이다. 일기예보를 충분히 검토하고 움직이자. 안전이 최고다. 뭐든 무리할 이유가 없다. 375 해리 남았다. 방카를 조심하자.
맞바람 16노트. 펀칭이 시작된다. 2020년 겨울 항해 같다. 육지 까지 거리 12헤리. 아직 인터넷은 안 된다. 방카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조업 중이다. 주의!
오후 10시 35분. 바다가 완전 시장 통이다. 거대한 상선이 300미터 앞을 가로지르고 그 사이로 방카들이 피해 다닌다. 사방이 배니 정신이 없다. 인터넷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너무 느려 아무 작업도 못한다. 윈디를 제일 먼저 봐야 하는데. 월화수 루손 해협 바람을 반드시 봐야 한다.
오후 11시. 잠깐 윈디를 보는 동안, 우측 10미터 지점에 녹색불이다. 방카 한 대가 슥 지나간다. 짬짝 놀랐다. 방카는 그 와중에도 서치로 바다 속을 비치며 조업 중이다. 큰일 나겠다.
일단 윈디를 보니 루손 해협을 못 지나갈 정도의 바람이나 태풍은 아니다. 필리핀 들르지 않고, 곧장 타이완 Hobihu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