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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1) - 2024 .03. 14(목) |
이번 원주 성지이다. 원주의 강원감영, 원동 주교좌 성당, 대안리 공소, 그리고 제천의 순교자 남상교와 성 남종삼 유택지, 용소막 성당, 배론 성지, 이렇게 6곳이다.
3월 중순이라 겨울 지났다고 하지만 꽃샘 추위가 만만하지 않다. 마음으로는 겨울을 벗어버리려고 성급하게 초봄에 입는 캐주얼 상의를 입었는데 출발지 성당에 가는 도중에 후회를 하였다. 겨울의 잔존 세력들이 아직은 엎드려 있는 터라 따뜻한 옷이 생각났다.
이번은 바쁜 중에서도 요셉 형제가 차량 봉사를 하게 되어 한결 이동의 부담은 덜게 되었으나 감사의 짐은 더욱 무거워져 어떻게 갚을지가 걱정이다. 모쪼록 성지순례단의 일원이기에 하느님의 많은 은혜를 받아서 하는 사업이 융성하고 건강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오늘은 만나는 성지는 또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듯이 출발기도도 늘 새롭다.
자비로우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7시 30분 성당 출발. 휴게소에서 한 번을 쉬고 곧장 북쪽으로 달려 제천을 지나 원주 감영에 이르렀다.
강원 감영 - 박해시대 강원지역 천주교 탄압의 지역 거점 |
강원감영(국가 지정 사적 439호)
경상도(慶尙道)가 우도 경주(慶州)와 좌도 상주(尙州)에서 이름을 따왔듯 강원도(江原道) 역시 관동 강릉(江陵)과 관서 원주(原州)에서 이름을 땄다.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에 있는 강원감영(江原監營)은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팔도제(八道制)가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관찰사(종2품)가 업무를 수행했던 정청(政廳)이었다. 당시 관찰사는 강원도 26개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관할했다.
1830년에 편찬된 관동지(關東誌)에 수록된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를 보면 건물로 선화당(宣化堂), 청음당(淸陰堂), 대은당(戴恩堂), 봉래각(蓬萊閣), 영리청(營吏廳), 포정문(布政門 등 41동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컸으나 전란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진입 공간인 포정루(布政樓)와 중삼문, 내삼문,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이 있었으나 강원감영이 원주군청사로 사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문화재청과 원주시는 강원감영도를 근거로 1996년부터 복원·정비사업을 시작하여 2018년에 완료했다. 2005년까지 1단계로 선화당(宣化堂)과 포정루(布政樓)를 보수하고, 내삼문(內三門), 중삼문(中三門), 내아(內衙), 행각(行閣)을 복원했다. 이어 2006년부터 2단계 사업으로 후원시설을 복원했다. 복원된 후원시설은 영주관(瀛洲館), 봉래각(蓬萊閣), 조오대(釣鰲臺), 채약오(採藥塢), 책방(冊房), 방지(方池) 등이다.
여기서도 천주교 박해가
조선시대 관찰사는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쥐고 있기에 강원도 일대의 중죄인들은 지역 최고의 관아인 이곳 감영으로 끌려와 정청인 선화당 앞에서 재판과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대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잡혀 와 심문을 받고 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기록에 남은 강원감영의 대표적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124명의 복자품에 오른 분의 일원으로 김강이(金鋼伊) 시몬, 최해성(崔海成) 요한, 최 비르지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순교자가 이곳에 끌려와 혹독한 옥살이를 하고 치명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것은 강원감영도에도 감옥이 명시되어 있으나 옥터와 참수터로 추정되는 정확한 위치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이미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어 복원이 어려운 상황이다.
요셉 형제의 운전 솜씨가 대단하여 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는 등 시간을 보내고도 10시 반 경에 강원감영에 도착. 주차를 하고 출입구에 이르니 정문인 포정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에는 포장이 씌워져 있었다. 보수 공사 중인 것이다.
강원감영에 남은 건물로 선화당과 함께 원형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 감영 중 진입 공간의 위계를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아쉬워 공사 직전의 사진 한 장을 검색했다.
출입구 게시판에는 감원감영의 시대적 변모 모습과 관내 안내도가 붙어 있고 사무실 옆으로 통행문이 나있다.
옛날식대로라면 포정문(외삼문)→중삼문→내삼문을 통해 선화문에 이른다. 지엄한 감영이라서 세 번이나 확인과정을 거치기 위해 삼문 형식을 갖춘 것이다. 마침 해설사가 자진해서 찾아와 해설을 해주어 퍽 이롭고도 고마웠다.
선화당(宣化堂) (국가지정 보물)
선화당은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 곧 집무실이다. 선화(宣化)는 宣上德 化下民(선상덕 화하민)의 준말로 덕을 베풀어 백성을 교화한다라는 의미다. 일반 고을 같으면 동헌(東軒)에 해당된다.
강원감영 선화당은 임진왜란 시 타버린 것을 1667년(현종 8)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의 대형 건물이다. 도리와 처마 등의 목재는 단청(丹靑)으로 꾸며졌다. 용마루에 용두(龍頭),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망와(望瓦)를 설치하였다. 원주 감영의 선화당은 조선 후기 지역 감영의 선화당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고, 비록 중수와 개축이 되었지만 도시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동일한 위치에 모습 그대로 전승되고 있어 가치가 있다. 한때는 일본군 수비대 주둔지, 군청, 도청 등으로 사용된 굴곡을 많이 겪은 건물이다.
우아하게 뻗어 내린 기와의 곡선이 아름답지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단지 천주(天主)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이 건물 앞에서 처참하게 취조와 고문을 당하여 피를 흘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면에는 강원도 출신 최규하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렸고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붙어 있는데 열어젖혀진 문에 가리어 있어 일부 이외에는 전체를 알 수 없다.
돌아와서 요셉 형제가 조사하여 보내온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 글의 출처는 조선 후기 정선군수 오횡묵(吳宖默)의 재임기록인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이라고 한다.
如山之重 如水之淸 (산처럼 무겁고 물처럼 맑게)
如石之堅 如松之貞(돌처럼 굳고 솔처럼 곧게)
如劍之利 如鏡之明(칼처럼 예리하고 거울처럼 밝게)
如絃之直 如秤之平(줄처럼 곧고 저울처럼 공평하게)
진정 공직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선화당 아래 마당에는 측우기가 있는데 이는 농경사회에서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준다.
내아(內衙)
선화당 오른편(동쪽)에는 내아(內衙)가 복원되어 있다. 내아란 조선시대 관찰사 가족의 살림집이다. 지방관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가면 당연히 관사가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관청 동쪽에 집무청인 동헌(東軒)이 있고 서쪽에 내아가 있다. 그래서 내아를 서헌(西軒)이라고도 한다. 강원감영 내아는 서쪽이 아닌 동쪽에 있다. 이는 강원 감영도를 근거로 한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경주 읍성의 내아는 지금 경주문화원의 향토사료관인데 이 건물이 경주 관아에서 제자리에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경주 KTG 자리가 옛 동헌이라고 볼 때 이는 서쪽에 해당된다.
행각(行閣) (사료관)
행각이란 궁궐이나 관아의 정당 앞이나 옆에 보조로 지은 나지막한 건물로 행랑이라고도 한다. 강원감영도를 보면 선화당 왼쪽에 보조건물 3동이 있었는데 북쪽으로부터 행각,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이다. 그 중 행각 하나만 복원되어 지금은 사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 간 원주 감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감영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감영의 변모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횡묵 정선군수가 생생하게 묘사했던 감영의 전경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을 발굴할 당시 출토된 유물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륙 및 기와류와 백자 접시와 토기 향로 등을 비롯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원주에 감영이 설치된 것은 이유가 있다. 첫째 남한강 상류가 원주까지 이르러 수운으로 물류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명이 신속하게 전달되어 감영의 하부 관아에 알리기가 매우 편하다. 둘째는 원주는 강원도에서 인구와 토지 면적이 가장 풍부하다. 이로 인해 사람과 물자가 넉넉하여 국가기관을 뒷받침해 줄 수가 있다.
해설사는 조감도의 물줄기를 가리키며 이 강이 남한강 지류인 섬강(蟾江)이며 이 강이 여주에서 만나서 여강(驪江, 옛 이름은 黑水)이 된다고 한다. 섬강, 흑수 하는 말을 들으니 옛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가르쳤던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첫 머리가 생각난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方面, 관찰사 소임)을 맡기시니
어화 성은(聖恩)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디메오 치악이 여기로다.
치악은 바로 감영이 있는 원주다. 위의 내용은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 받자 여주를 거쳐 원주까지 부임 과정을 말해준다. 이듬해 삼월, 그는 민정 시찰을 겸하여 금강산을 위시하여 관동팔경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의 작품이 관동별곡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한 사람은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는 강원 감사의 평균 재임햇수가 1년이 못 미친다는 말이다. 해설사는 재직기간이 길면 관찰사가 지방 토호나 아전들과 결탁하여 민폐를 초래하기에 재직기간이 짧다고 한다. 하지만 재직기간이 1년 미만이라면 업무 파악이나 제대로 했을까? 했다 하더라도 업무 파악을 하자마자 떠나게 되는 꼴이니 이러고서 어찌 선정을 기대하겠는가? 지나친 말이긴 하나 오면 갈 준비만 했는 게 아닐까? 그래도 떠나는 관찰사의 선정비, 공덕비, 영세불망비가 즐비하게 세워졌으니 참 신기하다.
해설사는 관찰사 명단에서 강원도 대신 강춘도(江春道)로 된 연유도 말해 준다. 당시 강원도 영내에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나서 강원도란 이름을 격하시켜 강릉과 춘천에서 이름을 따서 강춘도(江春道)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관직자 앞에 수(守)가 붙은 사람은 직위보다 관직이 낮을 때 붙이며, 직위보다 관직이 높을 때는 행(行)을 붙인다는 친절한 설명도 가한다.
사료관 앞에는 관복을 입고 인끈〔印綬〕을 찬 관찰사 모형상이 서 있다. 인끈이란 병권을 가진 지방 수령이 차는 병부(兵符)를 담은 기다란 끈이다. 그리고 병부(兵符)란 군대를 동원하는 신표로 쓰던 동글납작한 나무패인데 한 면에 ‘發兵’이란 글자를 쓰고 또 다른 한 면에 ‘觀察使’, ‘節度使’ 따위의 글자를 기록하였다. 가운데를 쪼개서 오른쪽은 그 책임자에게 주고 왼쪽은 임금이 가지고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 교서(敎書)와 함께 그 한쪽을 내리면 지방관이 두 쪽을 맞추어 보고 틀림없다고 인정하여 군대를 동원하였다.
사료관을 나오니 바로 남쪽에 감옥의 형태를 한 시설이 있다. 원래 이곳은 공고(工庫)의 자리인데 임시 시설인 감옥을 만들어 두었다. 원래 감옥은 후원 맨 뒤쪽인데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천주교로 볼 때 원 위치는 아니더라도 이곳이 천주교 박해의 장소임을 알려주는 좋은 의도라 하겠다. 감옥 앞에는 조선시대의 옥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안에는 원주감영 순교복자 김강이(시몬), 최 비르짓다, 최해성(요한)의 그림을 넣은 막을 설치하여 순교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 복자 김강이 시몬( ? ∼1815년)
김강이(시몬)는 충청도 서산의 중인(中人) 출신으로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교우촌 고산(高山)에 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그때 찾아온 곳이 강원도 울진이었다.
을해박해가 일어난 1815년 4월에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안드레아)과 함께 울진에서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다가 강원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주도록 요청하여 되찾았다고 한다. 김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들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임금께 사형 집행 장계를 올렸으나 상처가 심하고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가 넘었다.
◆ 복자 최해성 요한(1811∼1839년)
최해성 요한은 1839년에 순교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따라가서 생활하였다. 이후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교우촌 부론면 손곡2리 서지 마을로 이주하였고, 그는 교우촌의 회장을 맡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우선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원주감영에 끌려간 요한은 많은 고문과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 배교의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지킬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 복자 최 비르짓다(1783∼1839년)
최 비르짓다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 때 남편이 교우 황사영을 숨겨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남편은 유배된 후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복자 최해성(요한)은 그녀의 조카이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최 요한의 부친인 오빠에게 의탁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최해성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자 그녀는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관원들은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참아냈다. 굶겨 죽이려고 했으나 그는 4개월을 버티어 내었다. 상부에서 3일 내로 시체를 가져오라고 하자 옥리들은 밤에 옥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 사이 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비르짓다가 순교한 뒤, 그녀에게 감화를 받은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비르짓다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후원(後苑)
강원감영 후원은 감영의 휴식공간으로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후원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의 많은 시인 묵객이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강원감영 후원은 건물 이름으로 볼 때 도교의 삼신산인 영주산, 방장산, 봉래산의 이름을 땄기에 도교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이 점은 무산 12봉을 도입했던 경주의 월지(안압지)와도 같다. 현재 기와 정자인 영주관(瀛洲館), 봉래각(蓬萊閣), 그리고 조오대(釣鰲臺), 초가정자 채약오(採藥塢), 방지(方池), 책방(冊房) 등이 복원되어 있다.
문이 잠겨있어 나지막한 담 너머로 찍은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한다.
이렇게 하여 강원감영을 돌아본 뒤 기념 촬영을 한 후 바로 지척에 있은 원동 주교좌성당을 향했다.
원동 주교좌 성당 - 강원 지역 선교와 민주화 운동의 요람 |
주소는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도로명 주소는 원주시 원일로 27)
설립과 발전
1895년 부엉골 본당의 주임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부엉골의 신학교가 용산으로 옮겨간 뒤 이름만 남은 본당을 남쪽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되면 당시 강원도의 중심 성당이었던 원주 북쪽의 풍수원 성당과 거리가 너무 멀기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이용 신부는 풍수원 본당의 주임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 군청에서 가까운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은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자신이 직접 원주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원주 성당은 풍수원 본당, 부엉골 본당에 이어 강원도 지역의 세 번째 성당으로 탄생하였다. 하지만 부엉골 본당이 장호원으로 옮겨 간 뒤 부엉골 본당은 공소로 격하되었으므로 실제로 원주 성당은 강원도 지역에서 두 번째 성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원주 본당이 오늘날 원동 주교좌 성당이다.
3대 드브레(Emile Devred. 兪世俊) 신부 때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여 주일이면 성당이 좁아 신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열두 채와 그 부지 2,000평을 매입하여 오늘의 성당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4년에는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했다. 그후 5대 주임 조제(Jaugey, 楊) 신부 때인 1913년에 이르러 건평 70평의 벽돌식 고딕 성당을 신축하여 뮈텔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올렸다.
1939년 4월에 춘천 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서울교구에서 춘천교구로 편입된 이 지역과 원동 본당의 사목은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맡게 되었다.
1950년 17대 파리외방선교회 디어리 신부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1913년에 지은 성당과 1934년에 설립된 소화유치원이 전소되었다. 1951년 10월, 잠시 본국에 갔다가 본당에 돌아온 디어리 신부는 어려운 여건임도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려고 교우들과 합심 노력하여 마침내 1954년 9월, 120평의 현재의 시멘트 벽돌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그해 10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주 성당의 이름을 원동 성당으로 개칭하였다.
1965년 3월에 춘천 교구로부터 원주 교구가 분리 · 설정됨에 따라 원동 본당은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고, 그해 6월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첫 교구장으로 지학순 주교가 착좌하였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며 1990년 8월 교육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했고, 1995년 성당과 수녀원 등을 보수하고 이듬해 10월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끌다
당시 원주 교구가 지분을 가졌던 문화방송의 부정부패를 시정 건의했으나 묵살되자 그해 10월 5일 오후 7시 30분. 원동성당에서는 원주 교구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1,500여 명이 모여 역사적인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가 거행되었고 미사를 마친 이들은 곧이어 부정부패 규탄 궐기대회를 열어 국회, 정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선언문, 부정부패 규탄문,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대회를 마친 뒤 지학순 주교를 선두로 1,500여 명의 원주 시민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원주 교구의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이 운동을 이끌었던 지학순 주교는 유신 정부에 직접 맞서서 온 몸으로 저항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구속된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며 결성한 단체가 바로 정의구현 사제단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치열했던 70년대식 민주화 운동과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된다. 나빠진 건상상의 이유도 있지만 그의 돈독한 반공주의 성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학순 주교는 북한 덕원신학교에 다니다가 6 25직전 단신 월남하여 서울 성신신학교에 편입한 이산가족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에 의해 저질러진 북한의 종교 탄압과 인권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소위 좌경화된 친북반미 민주화 세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독재는 반대했지만 북한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유로 진보계열로부터 비난도 들어야 했다. 오늘날 정치성향을 띠고 있는 정의 구현사제단도 결성되던 다시의 초심을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남북이산가족 만남 때 지학순 주교는 북한에 가서 35년 만에 누이동생을 만나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떠날 때 누이동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간다니 돌았구만요. 이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거야요?
이 말을 듣고 지학순 주교는 또 한번 울었을 것이다. 그는 당뇨병을 앓다가 1993년에 선종했으며 묘지는 베론성지 성직자 묘지에 있다.
원주 감영에서 원동 성당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은 거리였다. 정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고 유치원 건물이 있다. 바로 정면에 성당 첨탑이 보이고 성당 안쪽 입구에는 왼쪽에 미카엘 대천사가 사탄을 밟고 있는 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천국의 열쇄를 들고 있는 상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베드로 상인 것 같다.
성전
965년 원주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성당이 된 원동 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의 장방형 건물로 폭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길며, 외벽 처리를 인조석 물 씻기로 하고 50cm마다 줄눈을 두어서 석조 건물 같은 느낌이 나도록 하였다. 종축은 12구획로 이루어져 있고 각 구획마다 보조기둥이 돌출하여 있으며 그 사이에 반원형 아치의 창이 나 있다.
중앙 종탑 꼭대기에는 돔을 얹어 횡성 성당과 더불어 원주 지방 성당의 상징이 되고 있다. 건물 정면에 天主堂이라고 새겨진 것이 이채롭다.
내부는 열주가 없이 단일한 강당형 공간으로 매우 소박한 느낌이 든다. 궁륭형 천장에 제대 뒤에는 아치형 감실에 십자고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 벽에는 성모님과 성 요셉 부자상이 높이 걸렸다. 천정과 벽이 온통 흰색이며 벽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에 14처가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어느 작가는 이 성당의 분위기를 ‘서민들의 옷차림을 닮은 성당’이라고 평가기도 한다. 그만큼 평범하면서도 평온한 느낌을 준다는 뜻이다.
다시 밖을 나오면 성전 건물 벽 쪽에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는 성 요셉 부자상이 있다. 그리고 사무동과 주교관이 있을 뿐 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는 너무 단촐하다는 느낌이 든다.
성전 언덕을 내려와 주차장이 있는 곳에 소화 유치원이 있다. 벌써 12시가 가까운 시간 다음 행선지인 대안리 공소로 향했다.
대안리 공소 - 100년 풍상을 견딘 목조 한옥 공소 |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659 (도로명 주소 원주시 흥업면 승안동길 216)
대안리(大安里)라는 마을이름은 원래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의 대수리라는 마을과 지형이 ‘되(升)처럼 생겼다’는 되안이라는 마을이 합쳐져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대안리 공소의 건립 연도는 1892년으로 전해오는데 이는 원주 교구에서 풍수원 성당 다음으로 역사가 오랜 성전이다. 이런 산골에 이른 시기에 공소가 설립된 이유는 무엇일까? 박해시대 때는 교우들이 이곳에 가까운 덕가산 산속에 숨어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86년 이후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주어지자 지금의 공소가 있는 마을로 내려와서 교우촌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1886년은 조선과 프랑스가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한 해이다.
이 공소 건물은 1900-1906년 사이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최소한 짧게 잡아도 1910년 이전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 근거는 교구장 뮈텔주교의 일기에 1910년 대안리 공소에 사목 방문하여 공소를 축성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오에 한강 지류(支流)를 건너 맞은편 여인숙에서 점심을 들었다. 거기에 대안리 교우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침에 40리 길을 왔고, 오후에 갈 길은 가까운 30리이다. 10리쯤 남겨 두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조제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 축성해 달라고 했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했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미사를 드리고 35명에게 견진을 주었다. 성당 축성을 축하하기 위해 큰 잔칫상이 차려졌다.”(뮈텔 주교의 1910년 11월 일기 중에서)
그러니까 1910년 11월에 공소 축성식을 했다는 것이다. 주교와 교우들 중 어느 편이 40리를 걸어왔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교우들은 70리 중 30-40리를 걸어 마중을 나왔다는 것이다. 대단한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교우들은 이처럼 사제에 대해 극진했다.
건평 23평 규모의 한옥 형태의 100년이 넘은 이 목조 공소 건물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제140호로 지정되면서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목조 가구식 한옥 성당 건축물로,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라고 그 선정 이유를 밝혔다. 공소 마당에 있는 안내판에도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건물도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풍상을 겪었다. 원래 초가지붕이었으나 1950년대에 초가를 걷어내고 기와를 얹었다. 그러나 나무 기둥에 흙으로 벽을 바른 건물이 견디기에는 기와지붕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1970년대 들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60년경에는 공소를 거의 두 배 가까이 확장했다. 창틀 다섯 개 중에서 입구 쪽 두 개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때 늘어난 것이다. 대안리 공소 건물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막사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처가 되기도 했다.
1986년에도 대대적 보수가 있었다. 창틀을 전부 알루미늄으로 교체하고, 내부 흙벽에는 합판을 덧댔다. 그리고 비를 피해 신발 벗을 공간이라도 있어야겠기에 입구에 현관을 따로 만들었다. 2009년 9월 9일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흥업 성당이 분리 · 신설되면서 대안리 공소는 흥업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2010년 11월 12일 대안리 공소는 뮈텔 주교의 공소 축복 100주년을 맞아 원주 교구장 김지석 주교와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축하식을 거행하고, 공소 맞은편에 새로 건립한 교육관에 대한 축복식도 함께 가졌다. 공소 교우는 물론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될 교육관은 연면적 132.7㎡로, 1층에 화장실과 창고, 2층에 교육실, 주방 등을 갖췄다.
2012년에는 대안리 공소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수리에 들어가기 위한 원주시의 지원이 결정되었고, 이듬해 원형을 유지한 상태로 전반적인 보수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2016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안리 공소 건물은 이처럼 그동안 숱한 풍파를 겪었으며, 사람이 아프면 수술을 받듯 수차 개보수 공사를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보수보다는 임시 처방식의 보수에 불과해 여전히 헤진 지붕에서 비가 새고, 나무 기둥도 많이 썩어 안전을 위해서도 원형을 유지한 철저한 보수작업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한다.
12시가 훨씬 지나 대안리 공소에 도착. 성당 경내에는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 큰 느티나무가 앙상한 가지로 꽃샘추위에 떨고 있다. 마당에는 한복에 비녀를 지른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서 계시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성당 앞에는 종탑이 이웃한 나무와 키 내기를 하고 있다. 성당과 함께 100년을 내려온 종탑이다.
성전 내부는 마룻바닥인데 원래는 그냥 않았겠지만 지금은 장의자 10개를 두 줄로 놓아 고령자 교우를 배려하고 있다. 굵다란 목재 보와 서까래에 아직도 송향이 풍기는 것 같다. 제대 후면 벽에 십자고상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제대는 전통 가구 반닫이에 테이블보를 씌운 것 같고, 주변에 돌 형구를 닮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
앞쪽 보 정면에는 敬天愛人(경천애인)이라는 전서체 한문 구절이 걸려 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을 예수님께서 가장 압축하여 나타낸 것이 하느님 공경과 이웃 사랑, 두 계명이다. 이것이 바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왕조시대의 경천애민(敬天愛民) 사상과 다름이 없다. 이처럼 모든 종교의 근본 사상은 같다.
벽에는 전통 창호가 문고리와 함께 닫혀 있고 그 위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성당 뒤쪽 책상 위에는 여러 홍보물이 있는데 그 위에 찾아가지 않은 판공성사표가 많이 남아있다. 이를 보면 공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대 뒤편에는 제대와 연결된 사제 방이 따로 있다. 과거 1년에 두 번 판공성사를 주러 오는 사제가 묵는 곳이었다. 지금은 한 달에 두 번 흥업 본당 신부가 미사를 드리러 오는데, 예전처럼 자고 갈 일은 없어 제의실 역할만 하고 있다.
전통은 오래된 집과 큰 나무만 있다고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만 자랑거리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그래도 고령의 교우들이 어려운 시대를 내려오면서 성당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제 집일처럼 했으며 가족보다도 더 굳은 결속력과 우애가 진정 이 공소를 유지 해온 힘이고 전통이 아닌가 한다.
나오는 길에 큼직하게 지었으나 텅 빈 교육관울 보면서 이 오늘날 젊은이들이 떠난 성당 문제가 시대적 과제로 다가온다.
젊은이들이 사라지는 문제 속에서도 최근 대안리 공소는 무농약,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공소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 본당과 교류가 활발할 뿐 아니라 농민주일 행사 등을 통해 외지 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무튼 고령 교우들이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많이 찾아오는 성지가 되었으면 한다.
오전 일과를 끝내고 점심을 원주를 떠나기 전에 원주 전통시장을 찾아 먹거리 식당가에 가서 생선구이 돌솥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포장 메밀전병을 구입하여 차에 올랐다. 이제 원주를 떠나 제천으로 간다.
성 남종삼 · 순교자 남상교 유택지(遺宅址) - 부자의 길과 신앙의 길 |
순교자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1784-1866)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문숙(文叔), 호는 우촌(雨村) 충주 출신. 일찍이 연안 이씨(1779∼1827)와 혼인하였으나, 48세에 혼자가 되는 불운을 맞는다. 늦은 나이인 55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현풍현감(玄風縣監), 충주목사를 거쳐 1865년(고종 2)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제수 받았다.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하였다.
자식이 없어 동생 탄교(坦敎)의 아들 종삼(鍾三)을 입양하여 입교시켰고, 천주교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종삼은 새남터에서, 남상교는 공주 진영(鎭營)의 옥에서 83세로 순교했다.
남상교는 순교한 천주교 신자일 뿐 아니라 선정 관리로서도 칭송을 받았다. 현풍현감 재직시에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휼한 덕을 기려 청덕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현풍 사무소에 있다가 1974년 5월 27일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절두산 성지 참조)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1817∼1866)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齋).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백부 남상교(南尙敎)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제천 묘재에 거주하며 남인계의 농학자로 충주목사를 지낸 양부 남상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承旨)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또한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이었다. 입교 후에는 베르뇌(Berneux)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관여했고,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종 말에 이르러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점차 미묘해져 가는 가운데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에 부심했다. 남종삼은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당초 관심을 가졌던 대원군과 주교 베르뇌 · 다블뤼와의 만남이 지연되면서 대원군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종삼도 3월 1일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된 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묘재 순교사적지
당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벼슬에 물러나 은거했던 곳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326-1 (제천시 봉양읍 제원로10길 15-7). 속칭 묘재 마을이다. 여기서 산 하나를 넘으면 배론이다. 그는 병인 박해시 공주 진영의 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그리고 아들 남종삼 요한도 자주 찾아서 아버지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아들이 찾아오면 아버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르침을 베풀고 신심을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철종 때에는 승지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패한 많은 관리 중에서 돋보이는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생활을 통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당당히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함께 묘재에 정착했다. 관직이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아들 남종삼 요한은 방아책(防俄策)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부친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 하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바로 고개 너머 있는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최후의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갔다. 의금부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남종삼은 참수형이 결정되어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1968년 10월 6일 시복식을 앞두고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도 모두 체포되어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하고(전주교구 초록바위 참조),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고, 함께 경상도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南揆熙)와 두 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가족 또한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었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와 성 남종삼 요한의 유택(遺宅)이 있는 마을 묘재에는 1920년대부터 신자들이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묘재라는 마을이름은 ‘묘’(뫼,山)와 ‘재’가 합성된 말인데 ‘산을 넘는 고개’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山尺’인데 ‘山’은 소리를 따고 ‘尺’은 뜻을 따서 나타낸 것으로 이는 이두식 표기이다.
1938년에 목조 공소 건물을 신축하였다. 유택 앞에 있는 옛 공소 건물은 1955년 9월 신축했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학산 공소는 1989년에 신축한 것이다. 또한 순교자의 후손과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87년 유택을 보수하고 뒷산에 십가가의 길 14처를 조성했으며, 1999년 5월 6일 유택 뒤편에 성모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2013년 10월 7일에는 공소 바로 옆에 단층 규모의 교육관을 신축해 축복식을 갖고 신자들의 교육과 회합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2014년에는 유택을 해체해 전면 보수하면서 마당에 있던 남종삼 성인 흉상과 유적지 안내비를 유택 밖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원주를 떠나 약 오후 3시 40분 경 묘재 마을에 도착했다. 안내판을 보면 이곳 유택 뒷산에 십자가의 길이 있고 인근에 학산 공소가 있다.
안내판으로 볼 때 학산공소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나 사진 자료로 대신하기로 하 발길을 돌려 용소막 성당으로 향했다.
학산공소
알뜰히도 가난한 사람되어 (묘재에서)
산 너머 배론의 향기 넘어오는 곳
그리움의 강 길게 펼치던 이의
마을은 비장히도 고요합니다.
세상 것 다 뿌리치고
알뜰히도 가난한 사람 되어
멀리 서소문밖 광장에서
순간 통해 영원 밝히던 빛
이곳 소나무 숲에도 우거져 있습니다.
땅과 하늘 잇는 운하, 사랑에서는
용서의 계절 무르익고
숲 속의 작은 새들은 영원의 틈 쪼며
비밀의 문 날고 있습니다.
운하를 흐르는 햇살이
나의 목덜미에 조금씩 쌓여
세상은 이윽고 투명한 눈물이 됩니다. (김영수)
오후 4시 용소막 성당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