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5. 서안의 신라佛跡 - 종남산
삼국시대 한국 스님들 즐겨찾은 ‘聖地’
|
<서안의 진산 종남산> |
사진설명: “섬서성 서북쪽에 있는, 신강성의 호탄에서 뻗어 내린 진령산맥이 관중에 멈춰섰다”고 해 종남산으로 명명됐다. 중국불교의 4대종파가 이곳에서 발상할 정도로 뛰어난 산이며,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간 많은 유학승들이 공부한 산이다. |
중국 제일의 고도 서안에 들어온 지 이틀째인 2002년 10월5일 토요일. 오전 일찍 함양박물관을 답사한 뒤 우리나라 불교와 관련 있는 유적들을 찾아 나섰다. 다시 서안으로 돌아오다 위수를 가로 지른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위수를 내려보았다. 강물은 말라 바닥이 드러나고, 시불(詩佛) 왕유(王維)가 ‘파란 버들가지’라며 노래했던 버드나무도 강변엔 보이지 않았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고, 모든 것은 변하고 만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당나라 시절 개원문(開遠門).금광문(金光門).연평문(延平門) 등이 있었을 서안 서쪽을 지나 시내로 들어왔다. 곧장 남쪽으로 달렸다. 서안의 진산(鎭山)이자, 신라의 수많은 유학승들이 머물렀던 종남산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종남산 앞에 있는, 구마라집 스님이 머물며 역경(譯經)에 종사했던 초당사(草唐寺)도 보고 싶었다. 가까이 갈수록 종남산의 위용이 돋보였다.
종남산! “섬서성 서북쪽에 있는, 신강성의 호탄에서 뻗어 내린 진령(秦嶺)산맥이 관중(關中)에 멈춰 섰다고 종남산(終南山)”이라 한다. 진령은 일찍이 진(秦)나라의 땅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길이는 통상 800리이다. 종남산을 흔히 중남산.태일산.진령산으로도 부르는데, 종남산은 극히 종교적인 산이다. 신라인들이 경주 남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듯, 당나라 때 장안 사람들도 종남산을 - 종남산을 남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 우러러 보며 살았다. 중국불교의 4대 종파가 이곳에서 발상한 것만 봐도 보통 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종남산은 또한 장안의 상징물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안의 위치를 살펴야 한다. 장안이 자리 잡은 ‘관중(關中)’은 남북으로 긴 분지인데, 사관 (四關) 안에 들어있기에 ‘관중’이라 한다. 북쪽의 소관(蕭關), 서쪽의 대산관(大散關), 동쪽의 함곡관(函谷關), 남쪽의 무관(武關)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것이다. 장안을 금성탕지(金城湯池.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상스님은 종남산 지상사에서 공부
|
사진설명: 종남산 입구에 있는 마을 풍경(감 파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
각설하고, 관중평야의 길이는 300km,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 지형이다. 면적은 21,000㎢. 관중평야 남쪽에 진령(秦靈)산맥이, 북쪽에 북산(北山)산맥이 각각 있으며, 관중평야를 동서로 관통하는 하천이 바로 위수(渭水). 위수는 관중평야를 가로지른 남.북 산맥 모두를 수원(水源)으로 하며, 종남산과 위수 사이에 장안이 있다. 이런 점에서 종남산을 장안의 상징물이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남산은 법문사가 있는 부풍현(扶風縣)에서 장안현(長安縣)까지를 말한다. 위수도 서쪽의 ‘보계협’에서 동쪽의 ‘동관’까지 이어진다.〈서안.낙양 주변 위치도 참조〉. 좁은 의미의 종남산은 장안, 호현, 주지현에 있는 진령(鎭嶺)을 말한다. 장안에서 볼 때 진령은 남쪽을 병풍처럼 막고 있다. 천하제일 명승지로 불려지며, 수많은 고승.신선.은거자를 불러들였다. ‘천하제일 복지’라 불릴 만큼 유명한 불교.도교의 성지이며, 당나라의 종교적.문화적 정신이 머물고 있는 산이다.
종남산이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당나라 시절 해동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들이 이 산에 뿌리내렸다는 점 때문이다. 아주대 변인석 교수는〈장안의 신라사적〉(아세아문화사刊)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종남산에 그 많은 해동 삼국인들이 - 신라 고구려 백제 - 몰려들어 터줏대감처럼 뿌리 내렸다”고 지적했다. 변 교수에 의하면 신라의 지식인들은 종남산 뿐 아니라 국학.국자감에도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김충신, 박충, 이원좌, 이인덕, 김헌정, 김가기, 최치원, 최언위 처럼 당의 관리로 나간 사람도 있다. 유명한 스님으로는 원공스님, 원측스님, 자장스님, 의상스님, 지장스님 등이 우뚝 섰고, 신선으로는 김가기(金可記)가 있다. 군인으로는 흑치상지, 왕사례, 고선지, 왕모중, 이정기 등이 종남산과 장안을 배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
사진설명: 흥교사로 가는 도중 본 두순스님 탑과 청량국사 탑 |
장안을 다녀온 인물 가운데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공부한 의상스님은 해동 화엄종의 초조로 특히 존경받고 있다. 644년(선덕여왕 13)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한 의상스님은 661년(문무왕 1) 해로(海路)로 당(唐)에 진출, 지엄(智儼)스님 문하에서 현수(賢首) 법장과 더불어 화엄을 연구하고 671년 귀국했다. 낙산사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종을 강론했으며, 전국에 10여 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 화엄의 교의를 확립하는 일에 힘썼다.
의상스님이 남긴 대표적인 저서가〈화엄일승법계도〉(이하 법계도). 의상스님이 중국 화엄종 조사 지엄(智儼)스님에게 수학할 때인 668년에 저술한 것. 화엄의 진리에 대한 책을 지었는데, 스승 지엄이 “양이 너무 많다”고 하자 이를 불에 던졌다. 이상하게도 210자의 글자가 타지 않았다. 이를 이어 만든 것이 바로〈법계도〉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돼 ‘본래부동명위불(本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7언(言) 30구(句) 210자의 게송(偈頌)인〈법계도〉는 법계연기사상의 요체를 간명하게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앙에서 시작해 54번 굴절시킨 후 다시 중앙에서 끝나는 의도된 비대칭(非對稱) 도형으로, 게송 앞에는〈법계도〉제작의 의도를 적고 뒤에는 법계도 의미를 설명한 석문(釋文)이 붙어있다.
|
사진설명: 자은사 대안탑에서 내려다 본 서안 시내. |
〈법계도〉는 흰색 바탕에 검은 색 글씨로 게송을 적고, 붉은 색 선이 게송의 진행방향을 나타낸다. 이는 물질세계인 기세간(器世間), 수행 주체인 중생세간(衆生世間), 깨달음 세계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각각 상징한다. 깨달음 경지에선 본 우주 전체를 드러냈기에〈법계도〉를 ‘해인도(海印圖)’라고도 한다. 법계도 형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것이고, 많은 굴곡을 둔 것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르침의 방편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첫 글자인 ‘법(法)’과 끝 글자인 ‘불(佛)’ 두 글자는 각기 수행방편의 원인과 결과를 상징하며, 두 글자를 중앙에 둔 것은 인과(因果)의 본성이 중도(中道)임을 보인 것이다. 중국 화엄과 달리 ‘수행’을 중시하는 의상스님의 사상이 〈법계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의상스님의 사상을 이은 신라의 화엄학은 주로〈법계도〉에 기초해 수행하며,〈법계도〉사상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지상사는 한창 중창 중”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지만, 올라 가 보지 못해 지금도 안타까움이 남아있다.
해동 삼국인들 장안 발전에 크게 기여
산 밑에 도달하니 종남산은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한 참 동안 쳐다보고 초당사로 달렸다. 서안 시내에서 25km 떨어진 초당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후진 요흥왕 당시 쿠차 출신의 고승 구마라집 스님이 이곳에서 역경에 몰두했다. 입장권을 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경내는 질서정연하게 정비돼 있었다. 산문 안으로 들어가니 대웅전 오른쪽에 ‘구마라집 기념당’이 보였다. 일본 일련종과 공동으로 만든 건물인데, 82년 4월13일 낙성됐다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3년 전 입적한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구마라집 상이 봉안돼 있는데, 일본에서 조성한 듯 중국풍이 아니다.
구마라집 기념당을 돌아가니 8각원당형을 한 구마라집 스님 사리탑이 보였다. “우리나라에 많은 8각원당형 사리탑의 시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 2.9m의 사리탑은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었다. 사찰에 계신 스님께 말씀드려 문을 열고 들어가 참배했다. 쿠차 석굴 앞에 있는 동상, 구마라집 스님이 타고가다 돈황에서 죽은 백마를 기념해 세운 백마탑, 그리고 초당사에서 사리탑을 대하니 왠지 코끝이 찡해온다. 일세(一世)를 풍미한 고승의 유골이 안치된 사리탑이라 그런 것 같다. 시계방향을 세 바퀴 돌고 정면에서 서서 합창한 채 묵념했다. 돌은 8색채 나는 대리석인데, 안내한 스님은 “신강성에서 운반돼 온 것”이라 설명했다.
초당사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서안 시내로 돌아왔다. 길거리를 지나며 다시금 서안의 역사를 생각했다. 기원전 1027년 주(周)나라가 은(殷)을 멸망시키며 도읍으로 정한 곳. 서안은 이후 진(秦).서한.신망.전조.전진.후진.서위.북주.수.당.무주의 수도가 됐다. 후한 헌제, 서진의 민제가 잠시 이곳에 수도를 정했고, 분립정권을 세운 안록산.황소도 제위에 오르며 국도로 삼았다. 당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세운 대순(大順)국 역시 장안을 수도로 정했다.
이렇게 본다면 서안은 1200여 년 동안 중국의 수도로 대륙을 좌지우지했다. 역대 제왕이 장안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장안이 풍부한 자연환경과 굳건한 요새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관중이 천하의 1/3이고, 인구는 3/10, 부는 6/10”이라고 했다. 외침을 막아주는 4대 관문, 풍부한 물산이 어우러져 장안은 천년고도의 꽃을 피울 수 있었으리라. 유명한 시성 두보도 ‘추흥팔수’란 시에서 “관중은 예부터 제왕(帝王)의 고을”이라고 읊었다. 제왕의 고을 장안은 사실 해동에서 건너간 삼국인들에 의해 더욱 발전된 고장이기도 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