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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소재素材의 집 / 유병근
- 수필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가.
1. 수필 속의 궁금증
수필은 소재가 그 속에 감춘 꼬리를 찾아내려는 문학이다. 소재가 감춘 꼬리는 누구도 어떤 것이라고 딱 분질러 못 박을 수는 없다. 즉 이것일까 저것일까 하는 궁금증의 문제다. 하기에 수필 속에는 궁금증이란 것이 있다. 가령 이야기에서 ꡐ그래서 잘 살았더란다ꡑ라고 끝을 내면 그것으로 궁금증은 다하는 셈이다. 즉 궁금증이 없는 깨끗한 결말이다. 수필은 깨끗한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또 다른 꼬리를 남겨 독자가 그 꼬리를 이어서 또 다른 꼬리를 줄줄이 알사탕처럼 달게 한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의 참여로 말미암아 비로소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독자가 참여하기를 권유하는 문학은 아니다. 독자란 수필을 쓴 수필가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참여에 의해 들킨 속내가 물론 그 글의 중심사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중심사상은 글읽기에서 흔히 찾아내려는 알맹이이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면 그 알맹이 속의 핵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그 중심사상을 감쌀 수밖에 없었던 장치는 무엇이며 중심사상은 어떻게 알맹이로서의 구실을 하는가에 생각을 끌어올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따져나가면 한 편의 수필이 심리학이나 논리학 등 다른 영역에 이르기까지 손을 뻗치는 두더지작전 같은 월권행위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수필은 그렇게 따지자는 문학이 아니라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며 상식이다. 그런 형편인데 굳이 중심사상 속의 알맹이니 뭐네 하고 따져나갈 이유는 그다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수필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호기심이 수필을 수필답게 치장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기에 수필은 모두를 말하지 않으면서 모두를 말하는 어떤 점, 애매함을 품에 껴안은 문학이다. 모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독자가 읽어야 하고 독자가 상상해야할 몫까지를 앗아가는 독점행위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몫은 가이사에게로, 독자의 몫은 독자에게로 라는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야기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토마토 농사를 지을 때 토마토 줄기를 받쳐주는 받침대가 수필 속의 이야기다. 그런데 수필의 박스를 이야기만으로 채운다면 그것은 토마토와 받침대의 역할을 잘못 아는 오류가 된다. 이야기는 수필의 본의를 드러내기 위한 유의有意라는 이해에 다가서야 할 것이다. 이 뜻을 망각할 때 수필은 다른 장르에 기식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아픔을 면하지 못할 것은 뻔하다. 수필가는 수필의 아픔을 원하지 않는다.
2. 수필과 체험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가령 이렇게만 뜻매김을 한다면 수필은 과거지향성의 올가미에 허덕이는 문학으로 다루어지기 쉽다. 하기야 수필은 체험이라는 단골메뉴가 따라붙는다. 체험은 어느 한 체험만이 아니다. 여러 체험의 얼개로 그물코처럼 서로 얽혀 체험의 더미를 이룬다.
가령 ‘늪’이라는 체험을 든다면 숲 속의 고즈넉한 늪, 고생지대 같은 여러 식물이 기생하는 이름자 천연기념물 보호지대 같은 늪, 사회생활에서 겪는 엄청나게 힘들었던 삶의 늪, 이런 양상이 쉽게 체험의 바다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늪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면 일종의 소재주의에 지나지 않는 설익은 수필이 될 것이다.
단순한 서술문학이 아닌 언어예술로서의 수필을 지향하자면 체험과 체험 사이에서 새롭게 움트는 체험의 씨앗에 눈을 돌려 그것을 응시하고 사색하는 지혜가 곁들여야 할 것이다. 그 씨앗에 상상력이란 습도와 온도를 가하면 씨앗은 절로 새로운 인식을 힘입은 수필이라는 모양새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수필은 보고 듣고 느낀 대로’라는 단순논법이나 다름없는 뜻매김으로 굳어 버렸다. 그것이 수필을 얕잡아 보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수필은 아무나 붓 가는 대로 쓰는 문학이 되고 말았다. 입담 좋은 글이 좋은 수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수필을 위해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수필이 판을 칠 때 수필은 여느 다른 장르와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하기 좋은 말로 갑이 을의 영역을 침범하고 을이 갑의 영역을 침범하여 서로의 살과 뼈를 조금씩 뜯어먹고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갑은 을에게 뜯어 먹히되 갑은 갑이다. 을인들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이른바 상호교류시대의 양상이라면 양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넘나드는 애매한 경계는 문학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 하지만 갑은 갑으로서, 을은 을로서 홀로 당당해야 참다운 갑이며 을이다.
수필이 보다 당당하려면 세상보기에 투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인 릴케는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한 줄의 시를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도시를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랭보의 견자見者 라는 말 또한 다시 경청하고 음미해야 할 것이다. 시인만이 아니다. 수필가 또한 사물을 응시하고 사물의 내부를 꿰뚫는 나름대로의 혜안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체험을 들추는 일이란 지나간 체험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세계를 보려는 눈이다.
수필에서 갖는 과거 체험은 과거인 그 자리에만 고정시켜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유동하면서 새로워진다. 과거와 현재와의 접붙이기는 변형된 체험으로 통하는 길이다.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고 하는 옛말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체험은 새로움을 더 새롭게 하려는 미래지향성을 띤다.
3. 새로운 세계인식
수필은 신변잡사가 주된 소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하기에 입만 열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들춘다. 그런 수필이 그르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수필은 어차피 신변잡사와 맞물린다. 그것이 수필의 운명이기도 하다. 이 운명을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흔히 신변잡사라고 하면 두드러기 반응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따지고 들 것도 없이 어느 장르이든 신변잡사는 문학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즉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굳이 수필만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건 신변잡기란 잘못된 어휘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쓰는 글이 잡기다. 수필이 잡기로 추락되지 않으려면 수필 소재에 대한 보다 깊은 고뇌와 사색과 응시가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수필은 그 서술에서 미처 닦이지 않는 목소리로 나서기도 한다. 엉성하고 깊이가 없는 문장은 수필의 몫인 무드 살리기에 힘이 부친다. 자질구레한 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만큼 독자는 한가하지 않다. 독자의 눈치를 만약 살핀다면 그것은 아첨문학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읽히지 않는 수필은 수필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읽힘의 뜻이 만약 이야기 수필에 있다면 수필을 이야기 중심으로 끌고 가는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거듭 말을 하자면 이야기는 수필보다는 다른 장르의 몫이다. 아무리 이야기를 재미있게 늘어놓아도 그것은 다른 장르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 결과를 빚기 쉽다.
어찌된 현상인지 다른 장르가 수필을 보는 시각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것 같다.수필이라는 말조차 아예 꺼리는 경향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건 물론 필자만의 옹졸한 소견일 수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부분이 간혹 있다. 엄연한 수필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산문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좋게 말하여 수필이라는 장르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볼 수는 있다. 하기에 산문집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글을 내어놓는다. 그걸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필가마저 그걸 받아서 수필집이 아닌 산문집이라며 버젓이 내놓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수필가 스스로가 짊어지고 지켜야 할 엄연한 문학 장르이다. 그런데 그걸 마다하고 산문집이라고 한다면 수필이라는 장르를 수필가 스스로가 따돌리는 셈이 된다.
수필은 무드의 문학이다. 이것은 《수필문학입문》에서 윤오영이 한 말이다. 무드란 분위기다. 그렇다면 수필의 조건은 확보되었다. 즉 무드가 깔려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야기로도 가능하고 사색으로도 가능하다. 새삼 돌아볼 것도 없이 김소운의 〈외투〉, 마해송의 <불 삼대三代>를 이야기 수필로 들 수 있겠다. 윤오영의 <달밤>은 분위기에 끌린 작품으로 감상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를 다시 바꾸어 말하면 서사적인 수필과 서정적인 수필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딱 구분 짓기는 사실 억지스럽다.
서사든 서정이든 어느 부분에서는 서사, 또 어느 부분에서는 서정이 깔려 있어 한 작품의 분위기를 직조하는 것은 틀림없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이다. 즉 어떤 형상을 끌어내느냐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의 차원이다. 새로운 인식이 없는 수필은 평범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식이 내포되어 있을 때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수필로 떳떳할 것이다. 하므로 신변잡사냐 뭐냐 하는 문제는 전혀 귀담아 둘 일이 아니다.
수필과 산문의 다른 점을 인식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수필은 정서적 반응, 산문은 논리적인 점도 거칠게 흘리고 싶어 한다.
4. 수필 그리고 사회참여
수필에서 아쉬운 측면을 들라면 사회 참여를 꼽을 수 있다. 시 혹은 소설은 여러 가지 표현 양식으로 사회의 아픈 곳을 찌르고 그것을 진단한다. 그리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 그러나 수필은 그런 수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촌철살인의 경지가 아쉽다면 어떨까. 그런 탓으로 수필은 흔히 현실 문제를 등한시한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쉽다.
수필가 역시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부조리에 눈감고 나 몰라라 팔짱을 끼고 느긋할 수는 없다. 입으로만 선비 행세를 하지 말고 부정과 불의에 누구보다 먼저 항거하는 저항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수필작품으로 승화시킬 때 수필은 더욱 환하게 꽃필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수필의 특성이다. 수필을 살리면서 저항하고 격돌하는 내용을 표출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즉 표현의 문제다. 수필가는 그 문제를 뛰어넘는 수법을 익히는 것이 참다운 수필을 하는 자세라고 하겠다. 먼저 뜻을 세워야겠다. 그러면 길이 트일 것이다. 수필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음은 틀림없겠다. 설의식의 ‘헐려 짓는 광화문光化門’을 하나의 보기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수필은 구호가 아니다. 구호를 끌어와서 수필이란 문장 속에 녹여 수필과 하나의 몸이 되게 하는 일이다. 구호는 삭지 않는 현장언어이다. 이렇게 말하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문제가 있다. 수필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원론적인 물음과 부딪친다. 수필은 펄펄 뛰는 현장언어를 수필이라는 용광로 속에 길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핏발 선언어의 촉수에 자칫 수필의 몸을 망가지게 한다. 상처를 염려하는 것은 아니다. 수필을 염려하는 마음일 뿐이다.
수필은 보고문이 아니다. 설명문 또한 아니다. 현학을 일삼는 내용, 달콤한 미사여구로 폼을 잡는 내용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대상에 대한 깊은 정서적인 반응과 인생관으로 점철되는 새로운 세계인식이 둥우리를 치는 문학이다. 그에 대한 애증愛憎으로 쓰다듬는 문학이다. 그 애틋한 마음의 깊은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일종의 마그마다. 그것이 형태로 변한 것이 수필이다. 발길에 걸리는 한갓 풀잎과 작은 돌멩이에게도 주는 눈길이다.
수필에서 가령 사회참여, 현실인식이 희박하다면 이는 수필의 문제가 아닌 수필가의 문제다. 수필을 흔히 일컬어 지성의 문학이라고 한다. 지성은 저항할 곳에 당당하게 저항한다. 불의에 항거할 줄을 안다. 이런 도저한 문학정신을 익히는 마당이 수필이란 장르 아닐까. 그렇게 각성하고 실천하는 곳에 비로소 탄탄한 수필의 길이 트일 것이다.
5. 군말에 대신하여
수필에는 흔히 재미있게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재미가 있어야 읽히는 수필, 재미가 있어야 주목받는 수필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재미는 수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대언어처럼 되었다.
원고청탁을 받을 때도 이따금 ‘재미있게’라는 꼬리표가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딱딱한 수필은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 말꼬리를 감춘 수필도 재미에 값하지 못한다. 이런 우려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 어떻게 써야 재미를 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게 된다.
따질 것도 없이 달마다 산더미처럼 수필집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이 되자면 우선 독자의 마음을 끌어 당겨야 한다. 그것을 재미에 두는 것은 사실이다. 바쁜 세상에 생각하고 어쩌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하다. 재미없는 수필은 수필의 영역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재미라는 말은 다분히 즐거움[樂]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재미는 몸과 함께하는 피상적인 유희로 새길 수도 있다. 수필을 읽은 다음 재미를 갖는 것은 수필의 내면이 아닌 밖에 드러나 부분만 핥는 글읽기일 수도 있다. 그것은 몸에 장치된, 즉 나타난 부분만을 읽고 끝내자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런데 수필 속에는 수필가가 슬쩍 말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수필가는 글 곳에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독자가 찾아 읽을 몫을 남겨둔다. 그 남긴 부분을 찾아 읽는 맛이 글읽기에 값하는 일다. 그것은 재미가 아닌 기쁨[歡] 즉 환희이며 감동이다. 그러한 결로 짜인 마음의 그윽한 울림이다. 하기에 참다운 글읽기는 수필 속에 감추어진 기쁨[감동]을 찾아 느끼는 일이다.
수필 청탁서의 ‘재미있게’라는 꼬리표는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꼬리표가 없어도 수필은 당연히 어떤 기쁨의 샘을 글 속에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꼬리표에 끌려 떨이와 같은 수법으로 수필을 치장한다면 수필은 언제나 값싼 문학으로 따돌릴 것은 뻔하다.
예지와 해학은 수필에서 좋은 몫을 한다. 작품 속에 감춘 예지와 해학을 찾아 읽을 때 수필의 참다운 맛을 아는 글읽기가 될 것임은 틀림없다. 하기 때문에 좋은 독자에 의하면 수필은 올바른 값을 한다고 보겠다. 그 값에 보답하고자 수필가는 소재의 집을 지을 따름이다.
첫댓글 옳고 좋고 공감하는 말씀인데 따라 하기가 어렵군요. 생긴대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