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4:7-15절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는 것은
지난주에 이어서 갑니다.
아주 오래전에 삼각산에 있는 감람산 기도원엘 갔었습니다. 기도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내려 오는데 권사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방언으로 기도를 아주 열렬히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산으로 들어가는 곳에 철조망이 없어 자유로이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곳에는 절도 있었고 그 위로 올라가면 기도원이었는데 많은 성도들이 기도원에서 집회를 마치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때 손을 흔들어가며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중들이 보고 자기들의 용어로 접신되었다고 하면서 웃고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소리는 알아 들을 수 없고 손을 흔들며 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 듯 했습니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이 은사이고 그중에서 방언의 관한 부분입니다. 어느때는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못 받았다고 해서 방언 받을려고 애쓰고 힘써서 기도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집회를 갔더니 그곳에 강사 목사님이 아기들도 엄마가 하는 말소리를 듣고 따라하면서 배우듯이 방언도 그렇다고 하면서 할렐루야를 빨리 해보라고 연습을 시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방언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서 연습해서 얻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주에 그냥 지나친 듯 하여 다시 7-8절을 봅니다.
7,8절을 보면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나팔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공동번역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소리를 할 때 듣는 사람도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때 피차간의 이방인, 외국인, 야만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방언이 통변이 되면 그것이 바로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 "허공에다 말함" - 은, 말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옆에 사람에게 말할 때 못 알아 듣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이어서 10절을 보면 세상에 소리가 많은데 여기 "소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포네’인데 이는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방언들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중에 뜻 없는 소리는 없다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나라들의 언어들을 의미하고 그 소리는 다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방언도 분명한 의미는 있을 것이지만 알아 들을수 없는 방언은 공적인 예배에서 특히 대표기도에서는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공동번역은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이 됩니다”
두 번역본의 의미는 말을 할 때 알아듣지 못한다면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외국인’ 헬‘바르바로스’는 ‘토인, 야만, 야인’이란 의미로 당시에 쓰이던 용어입니다. 지금 개정개역 성경에서 외국인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말이 주는 의미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에게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외국인은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것에서만 있지 않고, 한 피를 받고 같은 말을 사용해도 외국인관계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일치성을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창11장에서 바벨탑을 쌓게 된 것도 언어가 하나이고 서로에게 의사가 소통이 되고 하나로서 움직일수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이서서 바울은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했습니다. ‘영’‘프뉴마톤’ 많이 들어본 단어이죠? ‘프뉴마’의 복수입니다. 아마도 ‘프뉴마톤’은 은사일 듯 합니다. 왜냐하면 프뉴마는 ‘성령’을 의미하는데 복수이니 성령은 한 분인데 불가하고, 여러 영들이라 하면 천사를 말하는것일까요? 능력일까요?
요일4:1,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운데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각 사람들에게 역사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엡4:4-7절“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아멘.
이 모든 은사는 고전12:7절에서처럼 은사는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고 또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12절에서 ‘사모한다’는 원어는 ‘젤로타이’는 사냥꾼이 사냥감을 향해 집요하게 쫓아가는 행동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은사를 받을 때 우리 개인의 자세인데 그 은사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사유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은사의 우월성을 가지고 경쟁도 하고 시기 질투도 한다는 것입니다.(고전1장)
그런데 바울은 12절에서 개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필요한대로 각인에게 주신 은혜인데 그 은사를 가지고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면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입니다. 지난주에 전도를 나갔습니다. 작년부터 그냥 가게에 들어가서 우리교회 전도 용품이라고 말하고 놓고 나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들어 와서 쉬었다가라고, 커피한잔 마시라고 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이 하는 말이 자기 엄마는 권사님이고 92세이며 자기들도 전에는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은 안 나간다고, 왜? 물었더니 남편이 병이 들어서 기도원엘 올라가서 거기서 먹고 자면서 병 고쳐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원에서 권사님들한테서 상처를 받고 집에 와서는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지금은 안 나간다고, 정말 천국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내 마음에 양심에 떳떳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천국은 꼭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수 있습니다. 글쎄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그때 다시 갈려나 . . .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믿는 한 영혼을 실족시키면 차라리 연자 맷돌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절) 다시 말하면 빠져 죽는 것이 낫다, 그런 말이 아닐까요? 이런 영혼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14절의 방언의 약점을 말씀하고 있는데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3절에서 방언을 하면 통역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럼에도 방언은 성령께서 나의 영을 움직여 기도하는 것이므로 방언으로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영으로 하다보니 통역이 안될 때 나의 인격이나 생각에 마음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누스’는 ‘이성, 인식의 능력이 있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언기도는 나의 신앙생활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누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은 기도를 드렸지만 나의 이성으로는 주님과의 소통이 안되고 오직 나의 필요만 일방적으로 쏘아 올리는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에서 기도 많이 하고 내려오는 성도들이 버스 전거장에서 줄을 서지 않고 새치기를 한다던지, 어디 가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기 아는 사람을 위해 가방을 미리 가져다 놓고 자리를 잡아 놓는다던지 이것은 다 이기심에서 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눅22장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땀 바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쓰고 힘써서 기도하셨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마26:39-42절을 보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하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지 않고 기도하는 자를 바꾼다’했습니다.
그런데 통변이 없는 방언 기도는 생각도 인격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깊은 교제를 분명히 했는데 나의 이성에는 그 파장이 없기 때문에 삶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딛3:14절에 말씀하시기를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아멘.
15절입니다.“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방언으로 하는 찬송을 ‘트윌라’로서 우리는 통변을 안하면 그의미는 전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건덕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내 마음대로 할 자유는 교회 안에서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마치려 합니다.
혼자서 성령의 이끌림으로 깊은 방언기도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일때에는 알아들을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을 위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모하는 것도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복이 있는자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