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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번이라도 져서는 안 되는, 반드시 모두 이겨야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과의 싸움인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런데 사단과의 싸움에서 한번의 패배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의 심령에 심각한 상처의 흔적을 남겨 놓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선악과를 따먹은 한번의 영적인 싸움의 실패는 온 인류를 죽음과 저주로 몰아넣어 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2)라는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영원히 진멸되어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5:8)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영적인 경각심을 갖고 근신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는 사단의 유혹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마귀의 강력한 유혹과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1)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영원한 승리를 얻기까지는 승리의 행진을 빼앗겨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벌이는 영적인 전쟁은 반드시 모두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사단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기기는 불가능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17:14)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말렉을 물리쳐 주셨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어,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역사적인 교훈을 여호수아를 비롯한 후손들이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출17:15),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The Lord is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출17:16)고 외쳤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아래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기고, 하나님이 떠나시면 진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살고 죽는 것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영적인 싸움에서 영원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 아래 서야만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깃발로 삼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죽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군병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한, 그들을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교만에 빠져 여호와의 깃발을 내리고 자신들의 깃발을 내 세웠을 때, 그들은 여지없이 주변 민족들에게 뜯기고 유린당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들이 뉘우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을 드높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그들과 동행해주셨고, 그때마다 주위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깃발을 앞세울 때마다, 천지를 창조하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로부터 3,500년이 지난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한 민국의 경상 남북도를 합친 것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스라엘은, 아랍의 여러 국가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틈바구니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변 국가들을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깃발의 효력과 권능은 결코 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비웃고 조롱하는 골리앗을 향해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기자 역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a)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도, 기드온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사람의 지혜나, 능력이나, 군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서 어느 편에 서시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승리를 맛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 아래 서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 닛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깃발아래 서 있습니까? 만년설이 뒤덮인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순간순간 생사를 넘나들어야 합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호흡은 턱턱 막히고, 속은 뒤집어 집니다. 강력한 추위로 인해 얼굴은 물론이고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입니다.
거기다 죽음의 골짜기라 불리 우는 "크레바스"가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곳곳에 숨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또 추위와 고산병과 크레바스와 눈사태를 극복하고 정상을 코앞에 둔 지점까지 올라갔어도,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산악등반은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음의 사투 끝에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반드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국기, 곧 깃발을 꽂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죽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 아래에 서야 합니다. 그 깃발을 들어야합니다. 세상 한 가운데 꽂아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단의 궤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닛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깃발아래 서서 승리케 하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삼킬 자를 찾는 사단의 권세를 이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들까지 구원으로 인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높이 드셨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a절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며, 당신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셨는지, 사랑하셨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소중한 보물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신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인 동시에 당신의 소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동네에 오랫동안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맨 듯, 굶어 죽어 가는 더럽고 못생긴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강아지의 목에는 "밥스"라는 이름과 함께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라는 글이 쓰여진 이름표가 걸려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이름표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왕의 강아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 그 사실을 경찰에 알렸고, 강아지는 무사히 왕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다 죽어 가는 볼품없는 강아지에 불과했지만, 왕의 소유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즉각적인 보호조치가 취해져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저와 여러분을 아끼시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이유는, 환난과 시험과 고통과 절망에 처해졌을 때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시는 이유는 당신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할지라도 세상 그 무엇으로도 끊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이유는 당신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회복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소중히 여기시고, 또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모든 염려와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당신의 소유된 소중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나타내셨습니다. 6b-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는, 드러내는, 내세우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셨을 때 ①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실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각종 귀신들이 물러가고, 모든 병든 자들이 고침 받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아나는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놀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내세우는 곳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만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니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님의 깃발을 높이 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또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원문에 의하면 본 절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왜냐하면"(Because)을 뜻하는 접속사 "호티"(hot'ee)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다섯 개의 부정 과거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다"와 "보내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고, 나머지 세 개 곧 "받았다"와 "알았다"와 "믿었다" 등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암시합니다.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품은 채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지식은 계속해서 성장해 갔으며, 결국에는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요16:30)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앎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물론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시간적 순서를 엄격히 규정(規程)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9)라는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알고 믿었다"라고 기록한 경우가 있는 반면, "믿고 알았다"라고 기록한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알았다"와 "믿었다"의 순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순서와 상관없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 절은 제자들이 말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주신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심을 깨달아 알고 믿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이러한 변화가 주어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8a절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것과 받은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해 주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받은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하신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과 진리와 구원과 소망과 기쁨과 승리의 지침인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삶에 녹아진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 통해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라는 사실까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분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을 궁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비결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인생의 영원한 지침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삶에 녹아져서 사람들에게 보여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이 높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고사하고, 자신의 인생조차 제대로 세울 수 없습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생일지라도,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인생들의 마음에는 자신을 비롯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는 허망한 욕망으로 채워질 것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받았다면, 그 말씀이 삶에 녹아져 있습니까?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으십시오. 주어진 말씀을 실천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녹아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깃발을 높이 드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람들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요즈음 중국정부에서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과 방송 삼사에서 고구려에 대한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옛 고구려가 지배했던 영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광활한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세운지 불과 20여 년만에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후 불과 255년만에 고구려가 멸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조시켜주는 상징인 동시에 인생 무상의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역사뿐이겠습니까? 역사상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영원히 세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아래 모인 사람들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야곱은 결국 400명의 군사들과 함께 자신을 향해 오고있는 형 에서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얍복 나루에 앉아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만을 드높였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회개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깃발만을 드높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 "여호와 닛시" 하나님께서는 그의 환도 뼈를 쳐 절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그에게 져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가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리 사기꾼처럼 살아왔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만을 드높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그에게는 친히 져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동행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다리로 자신에게 절하며 다가오고 있는 야곱을 보게된 에서의 마음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슬픔이 복받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함께 온 400명의 군사들이 야곱의 길을 안내하는 호위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깃발만을 드높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야곱을 위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만 영원합니다.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드러내셨을 때,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믿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서는 언제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깃발을 높이 들었던 삶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깃발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져주시는 복된 삶을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람들까지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