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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에 대한 경고
이사야 23:1~18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23장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이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가 연이어 선포한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예언의 마지막 종결 부분입니다.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13장에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시작으로, 블레셋, 모압, 아람, 구스, 애굽, 바벨론 해변광야, 두마 등 아라비아 사막 나라, 환상의 골짜기 도시 예루살렘 성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두로와 시돈의 해양 무역 도시 국가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 예언은 매우 시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로와 시돈의 파괴된 소식을 멀리서 전해 듣게 된 그들의 배들의 당황한 부르짖음으로 시작됩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시돈과 두로는 지금의 이스라엘 위쪽 레바논 지역에 있던 고대 도시입니다. 이 도시 주민은 가나안 족속으로서 대대로 지중해를 마당 삼아 광대한 해상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도시 국가들입니다. 이들은 애굽의 막대한 곡물과 대륙의 각종 농산물과 광물들과 의복과 도시 문명의 수공물들을 지중해를 통하여 저 건너편 지역 깃딤 지역과 다시스 지역에 중개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무역에 종사해왔습니다. 깃딤은 지금의 키프로스, 성경의 구브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혹은 크게는 크레타 섬이나 로마 지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시스는 지중해 건너편 지역인데 두로와 시돈의 시민들이 건너편에 넘어가 건설한 식민 도시 중 하나라고 봅니다. 두로와 시돈이 건설한 유명한 도시 식민지는 지금의 튀니즈 지역에 건설된 카르타고였습니다.
카르타고는 후일 두로가 망한 후에도 강력한 해양 제국을 형성하여 농촌 국가였던 로마 제국과 맞서 여러 차례 맞섰는데 한니발 장군의 대단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에 의하여 정복되어 지중해 제해권을 로마에게 넘겨줌으로써 결국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기 전까지 세상은 바로 이 시돈과 두로와 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들에 의하여 연결된 해양 무역에 의하여 지배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많은 배를 가지고 상권을 독점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보니까 그들에게 속한 배들이 멀리 다시스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상선들이 슬피 부르짖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그들의 고향이요 집과 선박의 정박할 항구가 황무해져서 집이 없고 들어설 항구도 폐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멀리 있는 동안에 조금씩 소문만 들었는데 그들이 다시스에서 깃딤 땅에 와서 확실하게 듣게 된 것입니다. 깃딤은 구브로인데, 그곳에까지 두로와 시돈의 원주민들이 피난와서 직접 그들의 입으로 증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일찍이 이 두로와 시돈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부요하게 되었는가요? 2절과 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시돈과 두로 등 이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 동쪽 해안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인데, 이들은 저 남쪽 농업 국가인 애굽에서 나일 강의 범람으로 기름진 토지에서 수확한 밀들을 큰 물 지중해로 수송하여 운반하여 저 멀리 각처의 항구 등으로 팔아서 많은 돈을 남기는 열국의 시장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 부를 나눠 누려왔던 것이 해변 주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잠잠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던 시장이 다 불타버렸고 수많은 곡식과 상품들로 가득하여 북적대던 시장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니 넋을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그 망해버린 도시 시돈을 향하여 부끄러워하라고 말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시돈과 두로는 강력한 바다의 요새를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두로는 해변에서 떨어진 섬이 있었는데, 여러 이웃 나라의 공격을 피하려고 그 섬을 요새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와 바벨론과 후일에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의 공격을 피하려고 그 요새를 강력하게 만들어서 섬에서 진을 치고 대륙의 군대의 공격을 오랫동안 방어해왔습니다. 꿈쩍 안하고 그 섬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들은 결국 지쳐 돌아가곤 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13년간 포위하여 함락시킬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후일에 알렉산더 대왕도 그 두로 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그 성질이 급한 왕이 7개월을 그 섬까지 잇는 땅을 만들어서 결국 그 성을 함락시켜서 그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을 2천 명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고 산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그 성은 마치 어린 아이들을 낳지 못한 여인과 같고 청년과 처녀들을 길러 보지 못한 여인처럼 탄식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두로의 함락 소식은 이웃 나라에게도 큰 탄식거리가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으리로다”
애굽은 자기들의 곡식을 사가지고 가는 배들이 더 이상 오지 않으니 큰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니 이 일로 낙담하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6절,7절에서는 선지자는 이어서 그 해변 주민들에게 멀리 피난살이 가라고 이민을 가라고 외칩니다.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그들은 이제 무너진 자기들의 성읍을 뒤로 하고 도망하여 바다 저 끝 다시스까지 살아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 뒤를 돌아볼 때 불타 연기나는 그 고향 도시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건설된 희락의 성이었던 곳입니다. 그들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면서 각종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기까지 한 유서깊은 성읍이었습니다. 그러한 도시가 이렇게 슬픔의 도시가 되어 버렸고 유령의 도시처럼 황폐하여 버린 바 되니 그 회한과 슬픔이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서 깊고 희락이 넘치던 활력 넘치던 성읍이 이렇게 돌같이 침묵하며 먼지 구덩이 가운데 쓰러진 돌무더기로 변한 까닭은 무엇이며,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선지자는 8절로부터 9절까지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두로를 선지자는 ‘면류관을 씌우던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식민지를 개척하여 그곳에 수많은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그들의 군왕들을 두로의 왕이 임명하여 그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던 권세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 상인들도 고관하여 그 무역상들도 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망하게 된 까닭은 어찌 된 것입니까? 그들이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부요함 때문에 자만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지상의 힘을 상징하는 세계 제국이었다면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무역의 해상 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권세를 인하여 그들이 교만하여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섬기던 신 바로와 아스다롯을 섬기면서 안하 무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랑을 꺾어버림으로써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만듦으로써 재물 신을 섬기던 그들의 우상이 헛된 것을 알게 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이제 두로의 멸망으로 인하여 저 먼 식민도시들에는 해방과 자유를 선언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딸 다시스여 나일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두로와 시돈이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정복된 후에 저 멀리 있던 땅들은 그들의 조공을 바치려고 고생하며 광물을 바치려고 광산을 파는 등의 노역이 그치고 자유롭게 무역하면서 지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두로와 시돈은 그들의 무역 독점권을 통하여 많은 항구들에게 많은 속박을 하고 부담을 주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상 권력을 악용한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두로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들의 부와 이익을 위하여 작은 자들을 괴롭히는 악덕 권력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라는 영화는 1997년의 아엠에프 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가 넘어간 상황을 파헤친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그 영화는 직접 보지 않았지만, 이미 경제역사가들에 의하여 속속들이 밝혀진 것은 우리나라가 아엠에프로 넘어가게 된 것은 유동성이 부족해서만은 아니고 유동성이 부족한 상황을 얼마든지 일본을 통하여 채워놓을 수 있었으나 미국의 재무성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고 끈질기게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를 고의로 부도내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자본 시장을 강제로 개방하게 만들어 자기들의 이익을 더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행한 우방 동맹국인 미국의 얼마전에 자행한 끔찍한 비행입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더 얻기 위하여 동맹조차도 강력하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일들을 우리는 잊지 말고 또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속박이 없도록 두로와 시돈을 망하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정상적인 이익을 얻는 개인, 회사, 국가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무질서와 악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서 흔드심으로써 열방을 심판하고 흔들어버리신 것입니다. 11절로부터 12절까지 읽겠습니다.
“..”
그 많은 부가 악한 욕심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얻었기에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채 구브로로 피신을 가지만 거기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그 두로가 그렇게 될 것을 믿지 못하고 그러한 예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예를 들어서 확증합니다. 13~14절을 읽겠습니다.
산헤립이 무르닥발라단이 이끈 갈대아 바벨론의 반란을 평정하고 바벨론을 황폐하게 한 일이 선지자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 일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스의 배들에게 슬피 울라고 그들의 견고한 성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바베론 느부갓네살과 알렉산더 대왕 때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두로는 황폐해졌고 화려했던 해상 제해권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로에게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로부터 16절까지 읽겠습니다.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는 것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침공 이래로 두로와 시돈이 완전히 원양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황무한 상태를 유지할 것을 가리킵니다. 그 기간 동안 한번씩 그 옛 영화를 회상하는 기억과 추억의 노래만이 그 두로의 옛 영화를 기억할 따름이 될 것입니다. 조선조 한 시인이었던 길재가 고려 왕조의 옛 궁터인 개성을 방문하여 그 허무함을 노래한 시조가 있었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서니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렇게 아스라한 옛 영화가 되어갈 그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두로를 돌아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17절과 18절의 내용입니다.
“칠십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다시 두로를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해양 무역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열방과 활발히 무역을 벌여 이득을 많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이제 그들이 남은 이득이 단지 그들 자신만을 위하여 간직하거나 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하여 필요한 풍족한 자원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 백성을 섬기는 데 그 물질을 드리게 하신다는 비전과 상통합니다.
이사야 6:1~9 말씀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주시고자 하시면 주의 백성들에게 몰아주십니다. 열방의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모아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31~33 말씀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열방을 의지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 안에 굳게 섭시다. 이것이 열방 심판의 지속적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하고자 하시는 자를 부하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는 자를 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중심 다해 섬깁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시다. 그리할진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주실 것입ㄴ이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다우면, 하나님은 세상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성도들을 섬기도록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이 추구하는 삶, 두로와 같이 물질만을 최상으로 삼는 창기의 삶을 추구할 때 그것들을 빼앗아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최고의 자리에 놓고 그를 섬깁시다. 그리할진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