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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주변의식, 미싱 링크
박수빈
백조가 되기 전의 미운 오리 새끼들은 얼마나 방황할까? 신두호의 신작시 5편을 읽으면서 “절벽으로 성장하는 (시「지구본」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연상된다. 못생겼다고 구박을 받던 미운 오리. 농가를 뛰쳐나와 숲으로 갔을 때 작은 새들조차 외면하던 미운 오리.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드디어 미운 오리는 눈부신 백조의 모습으로 날아올랐다. 인간 사회에도 많은 미운 오리 새끼들이 존재하고 당연히 시에 반영이 된다.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각이 다르거나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들을 배척한다.
신두호의 신작시는 이러한 주변을 살펴보고 관심을 갖는다. 우리 사회에 숨은 폭력성과 탐욕을 고발하기 위해 밑바닥 인생을 끔찍하고 엽기적으로 표현하는 직설법을 쓰는 대신에, 낯설고 불편한 세계를 애써 객관적으로 사유하며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대항하고 (「벌」), 때로는 자숙하는 심정으로 (「지구본」,「저녁의 기록」), 또 때로는 애도의 심정으로 (「호명」) 견뎌내고 있다. 시 속의 화자들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자신의 길을 되묻고 있다. 그들이 날개를 드러내며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날은 언제일까?
승자 독식의 이 세상에서 시인이 택한 화자들은 삶과 존재에 대한 의문 섞인 물음들로 읽힌다. 젊은 시인 특유의 우울과 번민이 역동적이지 않고 침착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강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인지 시를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계절의 방」은 작품 자체로 의미구조가 흐려서 미운 오리 같다. 무대에서 이내 사라지는 엑스트라를 닮았다. 세상에는 자신이 백조인지 청둥오리인지 모르는 채, 무대에서 퇴장하는 인물이 많다. 공정한 경쟁, 기회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이상적으로 난무한다. 자신이 머물고 싶은 곳에 있지 못하고 원하는 세계로 날아가지 못하는 미운 오리를 짚어내는 것이 바로 시적 세계관이며 미싱 링크를 찾는 역할이 아닐까. 사람들은 백조를 원한다. 그러나 시인은 미운 오리 새끼를 데려오고 보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벌 한 마리 공간 속을 날아다닌다
날개의 소리가 한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히 요란하다
색으로 덮여 갈라진 벽들과
창문들로 인해 세계가 투명해지는 시간
초록빛으로 무장한 자연이 너머에 있다
들어온 곳을 모르는 벌이 창문들에 몸을 날린다
하나하나 뉘우치듯 들이받는다
창문들이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하려고
자기 자신을 그곳에 던진다
그럴 때마다 창문 바깥의 자연은 무성해진다
(중략)
들어온 곳들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한 사람이 지워지지 않는 공포를 가지고 계단을 내려갔다
- 「벌」부분
“벌 한 마리 공간 속을 날아다”닐 때 누구나 “날개의 소리”에 민감해질 것이다. 시인은 이 장면을 포착하면서 “초록빛으로 무장한 자연”과 그 “너머”로 사유를 확장한다. 벌은 “들어온 곳을 모르”므로 좌충우돌 “창문들에 몸을 날”릴 수밖에. 이 광경에서 타자성에 따른 주변의식을 떠올려 본다. 자연과 벌은 각각의 세계다. 공간이동을 하여 들어온 벌은 하나의 세계에 진입하며 다른 세계와 만난 것이고 방황의 다른 이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자기 삶을 말하기'는 ‘타자의 삶을 듣기’와 맥락지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타자의 이야기에 귀를 열 줄 아는가. 여기서 귀를 연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것과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전형적으로 전자는 능동적이고 후자는 수동적일 때 드러나는 태도이니까.
여기서 두 공간 즉,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습합되는 과정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선입견이나 편견으로부터 어떠한가. 진정 경계 없이 자유롭고 잘 어울려 섞이는가. 시를 읽으면서 자꾸 질문이 늘어난다. “날개의 소리”에 대해 청자는 이미 고착되었거나 반발하고 변화할 수도 있다. 이렇듯 A라는 존재가 B라는 존재를 자신의 시선으로 규정하고, B는 A가 내린 규정을 받아들이는 갈등들이 아프게 와닿는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타자화 현상을 좀 더 사회적으로 비추어 본다면 이 속에는 상대방의 기존 관념이나 권력이 개입되기 마련이며, 권력이 있는 쪽이 '주체', 권력이 없는 쪽이 '타자'가 될 것이다. 떠도는 타자는 어떠한 개인적 의지나 주장, 자의식이 꺾인 것이다. 궁극에 벌은 맨마지막 행의 “한 사람”으로 전이된다. “자기 자신을 그곳에 던”지고 “들어온 곳들을 만들어내려고”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이 지워지지 않는 공포를 가지고 계단을 내려갔다”는 암울한 철학적 메시지로 귀결되고 있다.
로켓이 솟아오르면 시민들은 생각했다
생각이 영토를 벗어나려 들었다
셀 수 있는 자연수가 바닥을 드러냈기에
그만큼 줄어드는 자연의 범위 안에서
(2연 3연 생략)
내려다 볼 수밖에 없기에
절벽으로 성장하는 몸은 손을 떨어뜨렸다
바위처럼 추락하지만
모래알보다는 가벼운 손을 가지고
차례대로 밤을 이어나갔다
지구에 머무르기로 한 우리들이
푸른빛의 구체를 회전시키면서
행성의 거대한 모래바람을 꿈꾸고 있었다
- 「지구본」부분
위의 시적 사유는 “생각이 영토를 벗어나려 들었다”는 표현에서 감지되듯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천체로 뻗어나간다. 인간이 로켓을 쏘는 행위가 이어질수록 “자연의 범위”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공이 가미된 것이므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화자는 “절벽으로 성장하는 몸”이 되고 그 좌절감은 “손을 떨어뜨렸다” 고 술회한다. 자연에 대한 정의가 고유 주체가 갖는 본연성이라고 일컬을 때 “행성의 거대한 모래바람을 꿈꾸”는 것은 회오리를 불고 오는 불길함의 역설적 표현이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이며 현대인은 물질만능에 순치되고 있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지구에 머무르기로” 하는데 이는 현존에 길들여지는 태도이다. 화자는 적극적으로 자연성을 되찾자는 구호를 외치지 않고 우회적으로 “모래바람”을 통해 위기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다소 나약해 보이고 소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비정한 도시 문명을 의식한 것이며 그 반영이라 하겠다. 이 시는 앞의「벌」에서처럼 자연의 공간이 등장하고 이와 상반되는 공간이 등장한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연과 불안전한 영역이 교직되면서 무미건조한 삶의 테두리와 그에 따른 속성이 대비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인간은 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우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우주 속의 인간은 작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이 존재 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 전 우주가 필요했다. 그만큼 천체 우주는 인문학과 밀접한 영역을 이룬다. 그러므로 위의 시 같은 착상도 성립된다. 이 시는 우주에서 태어나 지구에 갇혀서 100년도 살지 못하다가 우주로 돌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몸이 대부분 탄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폭발이라는 극적 사건을 통해 탄소와 산소가 만들어졌고, 생성된 내부 물질이 우주공간을 떠돌다가 중력의 힘으로 만들어진 행성. 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조차 빛의 속도로 날아가도 까마득한 먼 거리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몸의 구성 내부 물질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이런 의미에서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적 사건의 경이로운 산물이다.
타고 남은 너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한 번도 불붙은 적이 없는 것은 네 얼굴이었다//
머리 한가득 연기를 품고//
네가 거닐던 어디에서든 흩날리는 것은 재로 번졌다//
한때 너의 일부였던 표정들이//
마음을 그만 묻으려고 했다
-「호명」전문
“타고 남은 너의 얼굴은 잿빛”에서 이별을 감지한다. “네가 거닐던 어디에서든 흩날리는 것은 재로 번졌다”는 표현에서는 그리움이 일렁일 텐데 감정을 노출하지 않고 주지적으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호명되는 주인공과 시의 화자가 공유하는 공간 사이에는 많은 감정이 흐를 것 같다. 그 동안 어떤 사연들이 점철되었는지 시에는 언급이 없어 정보를 더 제공해주었으면 싶기도 하고, 이미지 안에는 많은 의미가 있을 테니, 떠도는 사슬고리와 같은 의미 역시 유동하며 감상해 본다. 어쩌다 “한 번도 불붙은 적이 없는 것은 네 얼굴이었”을까. 그 동안의 기쁨과 슬픔의 내력은 어떠한지. “마음을 그만 묻으려”는 심정과 마주하는 화자에게는 어떤 감정이 흐를까. 이 시는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멈추어 서서 주위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동안 무심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프로이트는『애도와 멜랑콜리』에서 이 둘을 구분하고 있다. ‘상실’이라는 동일한 사건에서 출발하지만, 애도와 멜랑콜리는 도달하는 지점이 다르다. 애도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서 우울로부터 벗어나지만, 멜랑콜리는 나르시즘적 동일화 속에서 퇴행의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구체적인 대상을 상실하고, 그 대상을 대신할 새로운 대상으로 이행하는 애도는, 고통은 있으나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원칙에 굴복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애도와 달리 우울은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끊임없이 찾아서 떠나는 ‘방황하는 유대인’에 비유되며, 영원한 애도의 상태 속에 존재하는 무기력으로 묘사된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소유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며 방황하는 자의 모습이 숨어 있다. 그리고 우울은 부정적인 의미의 현실도피와 공유하지 않고 명상과 고독과 침잠의 상태도 아우르고 있다. “마음을 그만 묻으려고”하는 점에서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라 내면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함유한다. 제목이 “호명”인 점을 감안하면 잃어버린 이름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불빛에 드러난 너의 창 초면을 무릅쓰고 무어라 불러야할지 몰라 올려다보는 너 길 안의 방 나침반의 바늘처럼 면적에 흔들릴 때 시비 걸듯 불어오는 계절풍 사이로 창고일지 몰라서 손을 데우는 바랜 사진 속에서 당신은 입을 허물고 당시의 바람은 방향을 이끈다 불투명한 창 타원 안의 사각형 안으로 체온이 여윈다 빛의 속성이 사물에서 투명함을 앗아가는지 눈발로 흩어지는 윤곽 계절을 섞으며 제철인 과일들이 유감없이 떨어진다 계단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지하로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 언 손을 녹이기 위해 너는 한 시절을 얼어붙고 이내 초원에 구르는 과일들을 본다 외풍으로 심화된 시간이 창을 건넌다 소리의 초점으로 청력이 마비되면 목가적인 장면으로 소외되고 줄어든 실내는 향방이 묘연해진다 순간으로 흩어졌다 모여드는 빛의 잎들 유통되기 이전의 열매들이 지하를 대신하고 있다 비인칭인 네게는 인공적인 낙원만 캄캄하게 스민다 유리투성이인 장소에서 정처 없이 서성일 때 그을린 초원이 초원으로 그을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람이 구름을 데려가듯이 지난 계절들을 찾아 서늘해진다
-「계절의 방」전문
시는 비논리적인 면을 함유한다. 그러나 시의 상상력이나 표현에 있어서의 시적 허용은 알고 보면 철저히 논리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표현된 것이다. 시에서 비논리적인 부분은 인과관계가 깨진 상태라든가 비약적인 이미지 전개에 의해 일어난다. 이 비인과성은 내적 구조와 질서를 교란시키면서 낯설고 새롭게 하는 효과를 획득한다.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타당한 관계성에 익숙해져 있던 독자는 예상 밖으로 어긋난 질서에 충격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낯설게 하기’는 관습적으로 인식하는 틀을 깨도록 유도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시적 형상화의 혼란에서 오는 비논리성과는 구별하여야 한다. “나침반의 바늘처럼 면적에 흔들릴 때 시비 걸듯 불어오는 계절풍 사이로 창고일지 몰라서 손을 데우는 바랜 사진 속에서 당신은 입을 허물고 당시의 바람은 방향을 이끈다”는 비문이다. 지도를 볼 때도 방위표와 축척, 등고선을 해석할 줄 알아야 지도에 표현된 지역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듯이 시적 기호를 짚어 가면서 이해를 해보려 해도 무엇을 피력하려고 하는 지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사진을 보고 묘사를 하고 있나. 그렇다면 시의 시점은 정지된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라서 시에서는 시간의 경과가 생략되어 있나. 상대성 이론이 공간에 시간을 추가시켰던 것처럼 ‘시간성’을 넣어 독해하려고 해보았지만....... “눈발로 흩어지는 윤곽” 과 갑자기 등장하는 “계절을 섞으며 제철인 과일들이 유감없이 떨어진다” 사이의 소통 부재의 간극을 어떡하나. “길 안의 방”인 “비인칭인 네게는 인공적인 낙원만 캄캄하게 스민다”에서 서늘한 정서가 느껴진다.
바람이 어둠을 기록 하고 있다 흩날리는 잎들과 날아가지 않는 새들 틈에서 느리게 생겨나는 바람 저녁은 수많은 통로를 거느리고 밤을 기다린다 기원 모를 불빛들이 어슴푸레한 입구에 머문다 수명을 다한 형광등처럼 저녁은 바람 속에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창문들이 하나둘 개입하고 어른거리던 것은 일시에 제거된다 바람은 아직 끄지 못한 촛불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사소하게나마 우리는 방에 촛불을 켜두었다 단지 밀랍이 녹는 걸 보려했을 뿐인데 불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중략) 까마귀들이 잎처럼 무성한 나무에 검고 푸른 영혼들이 모여들었다 녹는 밀랍을 오래도록 보려고 손으로 불빛을 감쌀 때 온기를 쬐고 있다고 누가 말했다 입술들이 하나둘 푸르게 질리고 초가 굳는 밤 가지를 떠난 새들이 방 안 가득 날아든다 눈에 기록된 불을 찾아 건너오는 바람을 보며 우리는 두 눈을 내어주고 곤히 잠든다
-「저녁의 기록」부분
이 시는 어두웠던 저녁 경험담에 대한 회고이자 기록으로 읽힌다. “바람은 아직 끄지 못한 촛불들을 찾아다”닌다는 표현에서는 점멸의 상태로 유도되는 게 감지된다. 화자는 “방에 촛불을 켜두”고 “밀랍이 녹는 걸” 본다. 이 과정을 존재와의 관계성이 연소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 이미지는 욕망의 표현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욕망이 진행되는 행위는 없지만 시적 전개상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나의 욕망과 상대에 대한 이해가 끊임없이 상충하는 것이다. 시는 욕망의 표출과 소멸 사이의 흔들리는 촛불이 아닐까. 시는 해탈 없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욕망만 표현하면 시가 속되어 지기 쉽고 또 섣불리 해탈을 말하면 시가 허황해진다. 그래서 둘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과 방황이 진정한 시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코드화해 놓은 것을 탈코드화하면서 독자는 열린 해석의 즐거움을 맛보기에 이 시를 수용자 중심으로 감상해 본다. 그러다 보니 시가 규정이 아닌 과정으로 존재한다. ‘이 텍스트는 무엇이다’라고 완료하기 이전의 과정이 더 매력이 있다. “까마귀들이 잎처럼 무성한 나무에 검고 푸른 영혼들이 모여”든다거나 “입술들이 하나둘 푸르게 질리”는 묘사는 어둡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창출한다.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는 바람이 기록하는 어둠이다. 바람은 여러 상태를 무화시켜버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위용으로 지난 일들을 잠식해 버리는 방향으로 재편될 것이다. 이 터닝 포인트는 외롭고 고독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이라면 이 암시성이 시의 숨결로 다가가기에 귀한 교감의 시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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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빈 약력 :
광주 출생, 아주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 졸업,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활동, <열린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평론집 『스프링 시학』, 현재 상명대 강사